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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30
전두환 “간첩을 잡아 버마 사건을 시인하게 하라”
강진욱  | 등록:2022-05-31 14:29:22 | 최종:2022-05-31 15:22: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연재]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30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30. 전두환 “간첩을 잡아 버마 사건을 시인하게 하라”

전두환네와 미국은 “서울에서 왔다”는 강민철에게 “너, 어떻게든 살아야 할 것 아니냐”는 말로 달래 결국 “북한에서 왔다”고 말을 바꾸도록 만들었지만(앞글 29편),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플랜 B’가 있었다. 악에 받친 강민철이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조작질에 나섰다. 간첩을 생포해(?) “아웅 산 묘소 테러는 이북이 한 거 맞소”라는 자백을(?) 받기로 한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그 ‘간첩’이 이북 공작원이라고 치면, 대체 일개 공작원이 어떻게 아웅 산 묘소 테러와 같은 엄청난 사건의 배후를 자인할 것이며, 그가 그렇게 자인하리라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간첩 체포 작전’이라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이 터무니없는 작전을 지시한 이는 대통령 전두환이었다.

( 라종일 책『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157쪽)

버마 정부가 10월 17일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코리언이 범인”이라고 발표하자, 전두환네는 안기부 대공수사국 국장(성용욱)과 과장(한철흠)을 버마에 급파하면서, 동시에 ‘아웅 산 묘소 범행 시인 용 간첩(?)’을 생포하는 쇼를 벌인 것이다. 이 쇼는 지금까지도 대단한 전과(戰果)인양 회자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게 엉터리로 쓰인다는 말을 또 할 수밖에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사건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사건은 1983년 12월 3일 밤 10시 40분경 부산 다대포 해안에 무장간첩선이 침투해 간첩 2인은 생포되고, 간첩선은 격침된 사건 ... 대간첩대책본부는 ... 무장 간첩 전충남(당시 26·안내조장).이상규(당시 22·안내조원) 2인을 해안 경계 근무 중이던 육군 53사단 소속 해안 초병들이 교전 끝에 생포했다고 ... 또 도주하던 무장간첩선 1척은 밤 11시경 부산 영도 남방 9km 해상에서 고속정으로 들이받아 격침시켰다고 밝혔다. [강조]당시 간첩들이 소지한 장비는 아웅산 테러 사건의 범인들이 소지했던 것과 동일[강조]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

안 그래도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으로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이북이 아웅 산 묘소 테러범들이 갖고 있던 것과 똑같은 무기를 들려 남쪽으로 보낸다? 사건은 아웅 산 묘소 사건 발생 두 달이 조금 못 되는 12월 3일 토요일 밤 11시 경 벌어졌다. 대간첩대책본부는 다음날인 12월 4일 새벽 5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고, 신문들은 월요일인 12월 5일부터 이를 대서특필했다.

4일 새벽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대간첩대책본부장은 아웅 산 묘소 테러 현장에서 부상을 당해 필리핀 미군 부대 병원에 실려갔던 이기백 합참의장이었다. 그는 “이번 북괴 간첩의 침투 목적을 민심 교란, 국가 주요 시설 파괴 등 사회 혼란을 획책하려는데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천인공노할 버마 암살 만행이 전 인류의 뇌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추호도 반성의 여지없이 또 다시 이러한 도발 행위를 자행한 것은 그들이 국제여론과 외교 면에서 궁지에 몰린 나머지 자포자기적 상태에서 최후 발악적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이는 그들의 대남 도발 야욕이 아직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라고 떠벌렸다(<매일경제신문> 1983.12.5).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을 저지른 이북이 곧바로 무장대를 남파해 남한 시설을 파괴하고 혼란을 획책한다? 3류 만화같은 이야기다. 이북 지도부를 ‘미치광이 집단’으로 매도하다 스스로 미쳐버린 광자들의 헛소리다. 이런 광기는 지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지만, 전두환이 집권하던 1980년대 그 광기는 극에 달했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막말이 통하는 시대였다.

꼬리가 길면 밟히듯 저들은 자충수를 뒀다. 대간첩대책본부는 12월 9일 또 기자회견을 열고 ‘생포자 2인의 놀라운 증언’을 전했다. 북측이 “버마 암살 폭발 사건을 자신들의 소행으로 인정하면서 실패 원인에 대한 비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 ‘간첩을 잡아 자백을 받으라’는 대통령 전두환의 명령이 완수되는 순간이었다.

[북괴는 버마 암살 폭발 사건을 자기들의 소행으로 인정하면서 실패 원인에 대한 비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생포 간첩들은 진술했다. ... 지난 11월 중순 원산 앞바다에 있는 황토섬 간첩 해상 안내 연락소 훈련장에서 교육 때 지도원 서예화(45)가 “버마 랭군 아웅산 묘소 폭파 때 우리 공작원 2명이 잡혔다”면서 “아웅 산 묘소는 뒷산에 수림이 많고 전망이 좋아 저격 장소로 최적지인데도 폭파에 실패한 것은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나팔 소리만 듣고 폭파하는 등 침착하지 못한 행동 때문이었다”고 호되게 비판했다는 것 ... 지도원 서가 “폭파범들이 검거 후 처음에는 교육받은 대로 서울에서 왔다고 진술했다가 버마 당국이 서울에 조회한 결과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니 이북에서 왔다고 번복 진술, 배신했다”며 폭파 후 복귀하는 계획이 허술했고 위장 진술 방법이 서툴렀을 뿐 아니라 혁명성 없이 자폭하지 못하고 체포됐다고 극렬하게 비판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매일경제신문> 1983.12.9)

‘다대포 생포자’ 2인은 ‘이 말을 하기 위해 붙잡힌 자들’이었다. ‘이북의 시인’을 조작하려니 이북의 공작 지도원이 공작원에게 공작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나불댔다는 비현실적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폭’ 운운도 헛소리다. 이는 남쪽 주민들을 포섭할 - ‘친북인사’로 만들 - 목적으로 남파되는 공작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반대로, 인민군(북한군)을 죽이거나 납치하고, 시설을 파괴할 목적으로 ‘살인병기로 사육되는’ 북파공작원들은 ‘자폭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또 듣는다고 증언한다(*북파공작원들은 스스로를 ‘돼지’라고 부르기도 하며, 어떤 이는 <돼지>라는 제목의 책을 내 자신들이 당한 일들을 증언했다.)

다대포 작전의 내막은 먼 훗날에야 드러난다. 이런 일을 벌인 자들은 그 내막이 영원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2003년 9월 25일 자 <중앙일보>는 「83년 다대포 간첩, 북파공작원들이 잡았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대포 작전에 투입됐던 북파공작원 정덕근(鄭德根, 42)씨 인터뷰를 게재했다. 정 씨는 당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다대포 작전의 내막을 밝히기 위해 증인으로 섭외한 이였다. 정 씨는 “‘설악개발단’으로 불린 대북 공작 특수부대원 33명이 그해 11월 초부터 강원도 고성의 한 해변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며 “밤마다 모래사장 등에 은거지를 구축하고 매복해 있다가 적을 가장한 대항군이 나타나면 숨을 죽이고 최대한 접근한 뒤 순식간에 덮쳐 생포하는 훈련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20년 전인 사건 직후 이기백의 대간첩대책본부가 밝힌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다대포공작에 관여한 이들의 증언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고, 어떤 이는 상부로부터 “상품(생포 할 사람)에 손상을 입히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세상에 이런 간첩 체포 작전은 없다.

(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에> 2022.4.6 방영)

[(다대포 작전 하루 전날인) 12월 2일 대원 33명과 지휘관 세 명은 관광버스를 타고 아홉 시간 걸려 ○○공사로 불렸던 정보사령부 부산지사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해안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생포하라’는 작전명령이 전달됐다. 다음날인 12월 3일 저녁 8시 이들은 다대포 해안에 도착해 5~6명씩 7개 조를 짜 모래사장과 어선 밑, 그리고 ‘간첩의 접선 장소’라고 들은 공중화장실 부근에 매복했다. 장비는 박달나무 몽둥이.대검.수갑.포승.입재갈이 전부였다. 생포하기 위해 총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후 10시30분쯤 시커먼 물체 둘이 나타났다. 암흑 속에서 매복한 대원들과 신호줄(실)을 이용해 연락을 취했다. 그때 둘 중 한 명(전충남)이 인기척을 느낀 듯 벨기에제 무성권총을 들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화장실 안에 숨어 있던 한 대원이 몽둥이로 손을 내리쳐 제압했다.] (「83년 다대포 간첩, 북파공작원들이 잡았다」<중앙일보> 2003.9.25)

간첩이(?) 올 것을 미리 알고 그를 ‘생포하는 훈련’을 약 한 달 동안 했다는 말이고, 실제로 그 간첩(?)은 체포조가 예상한 지점으로 상륙해 이들이 기다리고 있던 공중화장실 안으로 들어와 잡혔다는 이야기다.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 따로 없다. 대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라종일 씨는 “남한에 전향해 국가안전기획부의 관리를 받고 있던 간첩 한 사람이 북한에 타전을 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157쪽). 남한에서 주민증 교체 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급히 올라가야 한다고 거짓 무전을 쳤다는 말이다.

그런데 라 씨가 말하는 ‘전향 간첩’은 ‘1960년대에 귀순한 간첩’이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가 숨긴 이 사실은 우연히 2007년에야, 북파공작원 출신자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 <월간조선> 2007년 6월호)

그러면 이북은 20년 전 남쪽에 내려갔다 종적이 묘연해 진 이의 무전을 믿고 공작원을 내려보냈다는 말인가? 백보를 양보해, 그런 사람이 있었고 북측이 남측에 속아 공작원을 내려보냈다고 치면, ‘체포조’와 ‘체포당하는 조’의 훈련 시기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까? 다대포작전에 참여한 북파공작원들은 “11월 초부터 약 한 달 간(12월 2일 부산 다대포 이동)” ‘간첩 생포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대간첩대책본부는 ‘체포당하는 조’였던 전충남.이상규로부터 “지난 11월 중순 원산 앞바다에 있는 황토섬 간첩 해상 안내 연락소 훈련장에서 교육[받을] 때”와 “10월 하순 원산 간첩 해상 안내 연락소 훈련장” 이야기를 전했다(<매일경제신문> 1983.12.9).

체포조와 체포당하는 조가 같은 시기에 훈련을 받았고, 체포당하는 조는 체포조가 기다리는 곳(공중화장실)까지 와서 붙잡힌다는 각본은 체포조와 체포당하는 조가 한 팀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더 놀라운 것은 문제의 다대포 작전은 1981년 8월 12일 시작된 일명 ‘812 계획’을 마감하는 작전이었고, 812 계획을 비밀리에 입안한 성용욱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 다대포 공작에도 관여했다는 사실이다(6편). 성용욱 국장은 또 강민철에게 “너 어떻게든 살아야 할 것 아니냐”는 말로 그의 진술을 번복하게 만든 이다(29편). 그렇다면 △812 계획과 △버마 아웅 산 묘소 폭파 △다대포 작전이 하나의 거대한 공작으로 연결되며 각각은 이 공작의 단계별 작전이었다는 말이다.

대통령 전두환이 “간첩을 생포해 자백을 받으라”고 작전을 명령했고, 그 작전에서 붙잡았다는 자들이 전두환의 명령에 매우 충실한 답을 내놓았다는 말은 체포조나 체포당하는 조 모두 하나의 조직에서 꾸민 역할극의 배우였다는 말이다. 이 수상한 작전이 조작임은 그 조작질에 참여한 배우들의 오버액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수상한 생포자 2인’이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뿐 아니라 사건 직전에 있었던 ‘대구 미 문화원 폭파 사건’까지 이북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과유불급이고 자가당착이었다.

[대간첩대책본부에 따르면 생포 간첩 2명은 모두 지난 10월 하순 원산 간첩 해상 안내 연락소 훈련장에서 훈련 중 무전장 박창식(27)이 “9월 22일 밤 전파 감청소에서 대구 미 문화원 폭파 성공이라는 무전 보고를 감청했으며, 나도 폭파 성공이라는 전파를 직접 잡았다”고 말하면서 “우리 공작원이 성공했다”고 자랑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무전장 박은 암호 조립 및 해독에 관한 책임 전문가이다.] (<매일경제신문> 1983.12.9) 

( 조선일보 1983.12.9)

12월 14일 오후 육군회관에서 대간첩대책본부 주관으로, 박종식(朴鍾植) 국방부 대변인의 사회로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된 회견에서 이들 2인은 또 손짓까지 해 가며 “대구 미 문화원을 폭파한 북괴 공작원들은 북괴로 돌아가 국기훈장 1급을 타고 원산 특별초대소에서 휴식 중”이라며, 자신들도 대남사업부가 있는 중앙당 3호 청사에서 김정일의 친필 과업 지시를 받고 남파됐다고 떠벌렸다(<경향신문> 1983.12.14).

( 경향신문 1983.12.14)

‘대구 미 문화원 폭파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보자. 이 사건은 ‘미국 문화원 폭파 사건’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문화원 현관문 밖에서 의자 위에 놓인 클레이모아와 유사한 폭발물 2개 중 1개를 터뜨려 영남고교 1년 허병철(19) 군만 살해한 사건이다. 허 군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1983년 9월 22일 밤에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천 가방 두 개 중 한 개를 들고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다 한다. 허 군이 경찰관 1명과 함께 다시 현장으로 가던 중 누군가 그가 들고 있는 천가방 속 폭발물에 시한폭파 장치를 작동시켜 허 군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경찰관은 부상했다.

전두환네는 이를 ‘이북의 대남.대미 테러’라고 떠벌리면서 대한민국 대표 고문기술자 이근안까지 대구로 내려보내 ‘간첩’을 만들어내려 했다. 그런데 어린 고교생 1명만 살해해 놓고 ‘이북의 대남.대미 테러’라고 조작하기가 여의치 않자, 다대포 생포자 2인을 앞세워 ‘이북의 소행’으로 규정하려 한 것이다. 과유불급에 자가당착이었다. ‘가카의 명령’으로 시작된 다대포 작전은 이것저것 다 이북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기 위한 조작질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끔찍한 버마 사건을 마무리하는 작업이 하나 더 있었다. 다대포 작전을 통해 버마 사건과 대구 사건까지 이북의 소행으로 정리해 버린 직후 미 대통령 레이건이 내한해 전두환의 치적을 한껏 추어올렸던 것. 레이건의 방한은 흡사 ‘1983 버마 사건’의 대미를 장식하는 환상곡이었고, 조선의 해방 이후 미국과 그 꼭두각시 정권들의 농간으로 고착화돼 온 남북분단체제를 완성하는 대서사와도 같았다. 

( 동아일보 1983.11.14-1)

( 동아일보 1983.11.14-2)

이땅의 분단체제가 성립된 뒤 숱한 국가 조작 사건들이 있었고, 이런 사건들로 인해 점차 심화돼 온 남녘 주민의 대북 적대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사건이 바로 ‘1983 버마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땅의 분단체제를 지탱하는 미국의 최고 권력자가 이 사건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서사를 연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또 자연스럽다.

그러면 미국과 전두환네가 최소 2년 여 동안 준비하고 기획한 ‘1983 버마 사건’과 ‘레이건의 방한 쇼’는 동시에 병행된 공작이었을 것이다. 레이건의 방한이 공식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이 이북을 겨냥한 모종의 공작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직후였다. 전두환은 1983년 1월 21일 “(북측) 내부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과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 간의 국력 격차에 초조한 나머지 금년에는 1.21 사건과 삼척.울진 무장공비 침투 사건보다 더 악랄하고 과격한 도발을 감행할 우려도 없지 않다”고 떠벌렸고(앞글 18편 참조), - ‘1.21 사건과 울진.삼척 사건보다 더 악랄한 도발’은 바로 아웅산 공작이었다 -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레이건의 방한이 공식 거론됐다.

( 경향신문 1983.2.17 /
외교소식통을 인용한 레이건 방한 보도를 백악관은 일단 부인했던 모양이다.)

이어 전두환과 레이건이 ‘이북의 비대칭 도발’ 운운하는 수상한 친서를 교환하던 4월에 또 레이건의 방한이 거론됐다.

( 동아일보 1983.4.15)

일주일 뒤인 4월 22일 국방장관 윤성민은 국회 국방위에서, 북측이 남한 및 미군 군복과 잠수복 및 고무보트 등 침투 장비들을 사들이고 있다며, 북측이 곧 남침할 것이라는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전두환이 말한 ‘1.21, 울진.삼척 사건보다 더 악랄한 사건’ 즉, ‘게릴라의 대량 남침’이 당장 현실화될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

( 조선일보 1983.4.23)

이때까지만 해도 레이건은 9월에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일정이 11월로 미뤄진다. 버마 국가정보국장이 숙청돼 버마 정보 및 치안 체계가 마비되고, 이 틈을 타 전두환의 버마 행각 일정이 짜이는 등 ‘버마 공작’의 중요한 전기가 되는 1983년 5월의 일이었다.

( 조선일보 1983.5.17 / 버마 정보국장 틴 우 중장이 숙청된 날이 바로 5월 17일이다.)

이즈음 전두환네는 이북의 대남 공격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전두환은 5월 11일 밤부터 12일 새벽까지 ‘멸공 83’ 훈련을 순시하는 자리에서 “앞으로 적은 비정규전인지 전면전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강된 대규모 병력을 침투시킬 것이 예상된다”고 떠벌렸다. 거의 제2 한국전쟁 분위기였다. 이쯤 되면 어떻게든 ‘이북의 대남 테러’가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이처럼 레이건패와 전두환패가 한 통 속에서 노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레이건의 방한 일정이 확정된다. 그의 방한 확정 발표는 버마 공작을 통해 이땅의 분단체제를 더 공고히 하는 작전이 완비됐다는 신호와도 같았다.

 [【워싱턴=연합】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28일 레이건 미 대통령의 한국.일본.인도네시아 순방에 관해 일제히 보도 ... 워싱턴포스트는 특히 레이건 대통령이 약 4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상징적인 중요성이 크다고 말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이번 방한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철회키로 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결정을 재확인할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 1983.6.29)

( 경향신문 1983.6.28)

 

( 매일경제신문 1983.7.5)

이때 전두환네가 고건(전 농림부 장관)과 서석준(전 상공부장관) 등 ‘전직’들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후보 물망에 올려 저울질 하는 등 누구누구를 버마 아웅 산 묘소에 세울 것인지를 정할 때다. 서석준을 부총리로 낙점하는 ‘7.6 개각’과 이기욱을 재무차관으로 들이는 7.13 차관 인사가 그것이었다(앞글 23.24편 참조). 이로써 레이건패와 전두환패 양측이 공모한 버마 공작 실행 계획이 완료됐을 것이다. 7월 28일에는 레이건의 방한과 관련해 17명의 선발대가 먼저 내한했고, 이들이 돌아간 직후 전두환네의 서남아 대양주 순방 일정이 확정, 발표된다.

( 조선일보 1983.7.22)

( 경향신문 1983.7.28)

( 경향신문 1983.8.5)

9월에 또 40명 규모의 선발대가 오고, 작전 개시 사흘 전에는 미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내한하며 모든 상황을 최종 점검했을 것이다.

( 동아일보 1983.9.)

( 매일경제신문 1983.10.6)

앞에서 봤듯이 이때는 로이터통신이 동건애국호의 버마 기항 사실을 보도하고(10월 5일), 곧바로 스리랑카 주재 한국대사관도 이 사실을 서울 본부에 긴급 타전하며, 서울 본부는 곧바로 버마 주재 한국대사관에 이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낼 때다. 그런데 이 배의 버마 입항 사실은 국내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버마 측에서도 이에 관한 보고가 누락됐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들이 미국 대통령 비서실장의 내한과 무관했을까? 또 그가 서울에 온 바로 다음날 전두환을 따라 버마에 가 아웅 산 묘소에 도열할 사람들의 명단(‘살생부’)가 확정 발표된 것도 우연일까?

( 수행원 명단 확정 발표)

9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미국 <뉴스위크> 글은 이즈음 ‘버마 공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서사의 극본이 완성됐음을 시사했다.

[【뉴욕=연합】레이건 미 대통령은 오는 11월 한국 방문 중 역대 그 어느 대통령보다 더 최전선 지역에 접근, 상황을 시찰할 것이라고 ...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지 최신호 ... 레이건 대통령이 헬기로 비무장지대(DMZ)에서 10분 거리인 ‘리버티 빌리지’를 방문 ... 또한 자동차를 이용, DMZ 내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콜리어’ 감시초소(GP)까지 시찰 ... 하게 될 것이라고 ... 이같은 전례 없는 전선 시찰은 주한미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자유한국’에 대한 자신의 공약을 재확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레이건, 11월 방한 때 최전방도 시찰 강행」<동아일보> 1983.9.26)

( 동아일보 1983.9.26)

이렇게 레이건패와 전두환패가 복심상조(腹心相照) 하는 가운데 아웅 산 묘소 테러가 일어나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한반도 분단체제를 더 곪게 만든 것이고, 레이건의 방한은 그 자축연이었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 나흘 뒤 미국이 레이건 방한 계획에 아무런 변동이 없음을 확인한 것부터가 요상한 일이었다.

한-미 두 짝패가 꿍짝을 맞추며 ‘이북의 대남 도발’을 연호하는 가운데, ‘이북이 이남 대통령을 살해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면, 미국은 즉각 레이건의 방한 계획을 취소하고 ‘이북의 대남 도발 대책’을 세웠어야 마땅하다. 버마에서 전두환을 죽이려했다면, 한국에 오는 레이건을 죽이려 하지 않겠나. 이렇게 의심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즉시 항공모함을 두 대쯤 동해에 띄우고 오키나와 주둔 전폭기 수백 대에 전투대기 명령을 내리면서 난리법석을 떨지 않았을까. 헌데 태연자약 ‘레이건 방한 일정 불변’을 선언한 것은 이 사건이 이북의 공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1983.10.13 / 이 사건이 북측의 도발이었어도 미국 하원이 “한반도에 전쟁을 없을 것”이라고 호언할 수 있었을까?)

레이건의 방한은 전두환네와 레이건패가 꾸민 아웅 산 묘소 테러 공작과 이 공작을 통해 남북 적대감을 드높임으로써 남북 분단체제를 심화하고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그랜드 플랜의 일환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전두환패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성취했는지 보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굳건히 다짐으로써 한국의 불안을 무마하고, 차제에 한·미·일 삼각 방위체제를 강화해 동북아시아에서 신냉전 구도를 확립하려 했다.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에서 공산 진영과 맞서는 자유 진영 국가로 한 배를 탄 셈이었으나, 영토와 역사 문제 등으로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10월28일 한국 정부가 한·미·일 군사 안보 체제를 새롭게 추진한다고 발표했고, 일본도 공직자들의 북한 방문을 불허하고 제3국에서의 외교 접촉을 중지하는 등 어느 때보다 강경한 대북 조처로 화답했다. 또한 미국은 해외 전략상 한반도를 2급에서 1급 중요 지역으로 격상시켰다. 2급은 재래식 전력에 의해 방어해야 하는 지역이며, 1급은 핵무기를 사용해서라도 방어할 지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11월 12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함으로써 박정희-카터 사이에서 한껏 냉랭해졌던 한-미 관계가 어느 때보다 돈독해졌음을 과시했다. 국내적으로도 아웅산 사건은 정권에 ‘전화위복’으로 작용한 셈이었다. 1983년은 1980년 신군부 집권 이후 억눌렸던 정치의식이 정권 전복 직전까지 달아오른 시기였다. 1982년 ‘장영자 사건’으로 초대형 권력형 비리 의혹이 불거지고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으며, 1983년 초에는 김영삼의 민주화 요구 단식투쟁이 20일 동안 진행되는 등 사회 분위기가 갈수록 심상치 않았다. 여기에 1983년 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의 공격으로 격추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다시 얼마 뒤 아웅 산 사건이 일어났다. ‘공산 괴뢰집단의 국가 전복 음모’가 현실적으로 와 닿는 분위기에서 독재의 불편함이 잠시나마 잊히고, 다시 한 번 ‘반공으로 총화단결’하는 분위기가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겨레21> 제809호, 2010.5.6)

<한겨레21>은 위 글에「1910~2010년 가상역사 ‘만약에’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미국과 전두환네가 벌인 버마작전은 대성공」이 더 적절해 보인다. ‘버마 작전’이 전두환네와 미국에게는 일대 성공이었음은 저들의 언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두환의 복심이었던 당시 장세동 경호실장의 수상한 독백이 그것이다.

( 장세동『일해재단』89쪽)

(사진23 : 장세동『일해재단』94쪽)

자국민이 끔찍하게 살상당하는 사건을 두고 ‘역사(役事)’니 섭리(攝理) 운운할 수는 없다. 그 ‘역사’ ‘섭리’는 어떤 초월적 힘이 작용했을 것으로 믿어지는 사건 또는 현상을 일컫는다. 제 나라 국민들을 살상하는 희대의 가공할 테러를 ‘신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그 끔찍한 사건의 기획자들일 것이다. ‘역사’니 ‘섭리’니 하는 말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는 끔찍한 일에 면죄부를 주면서 남이 못 하는 일을 해 냈다는 공치사를 하고 싶은 것이다.

저들은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을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 걸고 음모를 꾸몄을 것이고, 그에 따른 몇몇의 희생을 ‘고귀한 순국’으로 포장하려 했다. 전두환의 10월 20일 ‘특별 담화’가 그것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 국민의 단합과 우리 군의 안보 역량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가를 분명히 입증해 준 사례 ... 국민 여러분의 의지가 이처럼 단단하고 여러분에 앞장설 본인의 결의 또한 어느 때보다 굳건한 이상 우리 앞에는 아무런 주저와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군사적인 대응은 물론 정치와 외교, 사회, 그리고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국가 목표를 향한 전진의 발걸음을 조금도 멈추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전화위복의 굳은 의지로 한층 더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할 것 ... 통일과 번영을 위한 선진조국 창조의 과업을 구현하는데 신명을 바쳐나갈 것을 국민 앞에 거듭 선서하며, 이 길만이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고귀한 순국 정신을 구현하는 길 ... ] (<조선일보> 1983.10.21)

‘아무리 그렇다고 우리의 아까운 인재들을 우리가 왜?’라고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저들’은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는 이들이다. 또 ‘저들에게 필요한 인재’는 얼마든지 있었다.

[한국의 각료 4명을 비롯한 ... 한국의 국내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 사건처럼 엄청난 손실을 가져온 것은 없는 것 같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 폭발 테러로 인해 2명의 최고위 경제 참모를 ... 비범한 능력과 경험을 가진 외무장관까지 잃었다. 하지만 전 대통령은 이번 손실이 심대한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대처 못 할 정도의 사태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다행하게도 그에게는 행정 능력이 우수한 방대한 인재군이 있어 ... 인재를 뽑아 쓸 수 있기 때문 ... 이같은 폭발 만행은 필연적으로 한국 정부의 집합적 정신을 고양시킬 것이 분명하다.] (「외교.경제 엘리트 손실 막심 - ‘인재군’ 확보돼 대처 능력은 충분」<조선일보> 1983.10.21

( 동아일보 1983.10.21)

P.S.
아웅 산 묘소 테러를 조작하기 약 20일 전 일어난 대구 미 문화원 사건(1983.9.22)은 아웅 산 묘소 테러의 전초전이자 일종의 오픈 게임이었다. 이런저런 ‘간첩 침투 사건’을 조작하며 ‘이북의 대남 테러’를 기정사실화하는 여론을 조작하다 마침내 대구 미 문화원 사건을 만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구 지역 대학가 운동권을 비롯해 수많은 진보.혁신계 인사들이 줄줄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고초를 겪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63946).
대구 미 문화원 사건과 아웅산 묘소 사건(1983.10.9),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밖 쓰레기통 속 클레이모아 폭파 사건(1986.9.14), KAL 858 폭파 테러(일명 김현희 사건, 1987.11.29)은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4대 국가조작테러 사건이다. 김포공항 사건에 대해서는 필자 글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4581
<시사IN> 글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080 참조)
(31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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