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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한-미의 버마 공작의 시원
강진욱  | 등록:2021-07-09 16:08:28 | 최종:2021-07-12 11:16:0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13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13. 한-미의 버마 공작의 시원

미국과 한통속인 남한 군사독재정권이 미국이 적대시하는 이북(북한)과 외교 경쟁을 벌이는 것은 불가피했다. 특히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제3세계에 속하는 29개국이 비동맹 블록을 만들어 미국에 대항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들을 상대로 한 남북 외교전은 서서히 더럽고 치사한 외교 공작으로 변질됐다. 최병효 전 대사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 최병효 책 55쪽 1)

( 최병효 책 55쪽 2)

최 전 대사는 ‘비동맹 허수아비와의 싸움’이라는 소제목 아래 위와같이 썼다. 전두환이 별 이득도 없는 비동맹 외교에 꽂혀 버마행을 강행했다는 논지다. 2% 부족하다. 남북 간 비동맹 외교전을 ‘헛것’으로만 보니 그 비동맹 외교전이 ‘1983 버마 공작’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을 못한다. 풍부한 경험이 역사적 통찰로 이어지지 못하니 안타깝다.

최 전 대사는 자신이 보고 들은 남북 비동맹 외교전이 미국의 세계전략 및 남북 분단관리 전략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다. 남은 미국의 품 속에서, 북은 미국과 대척점에서 치열하게 외교전을 벌이다 어느 시점부턴가 버마를 사이에 놓고 각축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각축전은 어느 시점부턴가 끔찍한 음모와 공작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간파해 내지 못한다.

버마를 둘러싼 남북한 간 외교전이 본격화된 시점은 아마도 1970년대 초일 것이다. 박정희가 3선 개헌(1969.10)을 시작으로 유신 쿠데타(1972.10)를 조작해 ‘종신통령’의 행로에 들어서고, 버마의 네 윈이 박정희처럼 ‘사이비 민정 이양’ 방식으로 대통령이 되는(1974.3) 시기다. 네 윈의 ‘사이비 민정 이양’도 박정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3년여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였고 그 시작은 1971년 ‘버마판 6.29 선언’이었다.

[【랭군=AP.동화】네 윈 장군이 이끌어 온 버마 혁명정부는 9년 간의 군정을 끝내고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한 후 정권을 민선 국회에 이양할 것이라고 버마 사회주의계획당의 사무총장인 산 유 준장이 29일 발표 ... 기획상[장관]이기도 한 산 유 장군은 버마를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키 위한 청사진이 이날 사회주의계획당 제1차 전당대회에 제출됐다고 ... 그 골자는 새로운 헌법 기초를 포함한 사회주의 계획과 대외 정책으로 중립정책을 취한다는 것 ... ] (「네 윈 장군 발표, 버마 민정 복귀 계획」<경향신문> 1971.6.30 / 1987년 노태우의 6.29는 박정희와 네 윈의 ‘민정 이양’ 방식과 비슷한,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 연장되는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후 네 윈을 양복쟁이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개헌 공작이 한창 진행 중일 때인 1973년 박정희 정권은 4월과 8월 두 차례나 버마에 특사를 보냈다.

[【랭군=UPI.동양】한국의 외교 담당 대통령 특별보좌관인 최규하 씨를 대표로 한 친선사절단 3명이 24일 밤 3일 간의 방문을 위해 이곳에 도착 ... 방문 기간에 최규하 씨는 버마 부수상 산응[산 유] 장군을 비롯한 고위 지도자들을 만나 양국의 유대 강화를 포함한 상호관심사를 협의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1973.4.25)

[【랭군=로이터.합동】신상철(申尙撤) 대통령 특사는 동남아 3개국 순방 중 마지막 방문지인 버마를 3일 간 방문한 후 29일 귀국길에 ... 신 특사는 랭군 방문 중 버마 지도자들과 회담을 갖고 한국 정부의 남북한 통일정책을 설명하는 한편, 네 윈 버마 수상에게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도 전달했다.] (<조선일보> 1973.8.30)

신상철은 공군 소장 출신으로 1962년 10월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있다 주월대사로 임명된 뒤 8년 2개월 재임하면서 미국의 베트남 침략과 한국군 파병 전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 후 체신부장관이 돼 특사로 버마에 온 것이다. 그가 전달한 친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십중팔구 박정희의 민정 이양(1963) 노하우가 아니었을까. 이듬해인 1974년 네 윈이 그 민정 이양 방식을 따라 대통령이 되면서 한국과 버마의 관계가 더 친밀해진다.

[【랭군=AFP.동양】버마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네 윈 장군은 2일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지 12년 만에 군정을 민정으로 이양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날 개원된 450명의 인민의회에서 새 버마 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대통령으로 선출 ... “오늘부터 군사혁명평의회가 해산되고 나라의 주인공인 인민을 대표하는 인민의회에 국권을 반환한다”고 선언 ...] (「버마 12년 만에 민정 이양 - 군사평의회 해산, 네 윈 대통령 취임」<동아일보> 1974.3.4)

넉 달 뒤인 1974년 6월 말에는 5년여 뒤 박정희와 운명을 같이할 차지철(車智澈)이 친선사절단을 이끌고 버마를 방문한다.

[【랭군=로이터.합동】박정희 대통령 특사인 차지철 의원이 51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4일 간 버마를 친선 방문키 위해 29일 밤 랭군에 도착 ... 2일에는 네 윈 버마 대통령과 산 유 국가평의회 사무총장, 세인 윈 수상 및 기타 각료를 방문한다.] (「차지철 의원 버마 도착」<매일경제신문> 1974.7.1)

[【랭군=주돈식 특파원】한국과 버마는 연내에 각료급 통상.경제 회담을 갖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차지철 대통령 특사를 단장으로 하는 서남아 의원사절단은 2일 네 윈 대통령, 세인 윈 수상, 루인 부수상과 만나 이같이 의견을 모았다. 약 1시간 10분 간 계속된 네 윈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차 특사는 중단 상태에 있는 남북대화를 재개하려는 우리의 노력과 동해안 경비정 피격 등 북한의 도발을 설명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버마가 유엔에서 우리의 평화 노력을 지지해 주도록 요청했다. 네 윈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이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경비정 격침 사건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한국-버마, 연내 각료급 회담」<조선일보> 1974.7.3)

( 매일경제신문 1974.7.4 차지철-네윈 회담)

이렇게 박정희 정권과 네 윈 정권 사이에 끈끈한 유대 관계가 형성된 이듬해인 1975년 버마를 둘러싼 남북 간 외교전은 더 가열된다. 그 해 2월 이북(북한)이 비동맹 가입 신청을 내고 한 달 뒤인 이 해 3월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비동맹 17개국 조정위원회가 이북의 가입안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석 달 뒤인 이 해 5월 버마가 남북한과 동시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이즈음 버마를 둘러싼 남북 간 외교전이 절정에 달했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절정은 남북 간 대결의 비등점이었고 파국(1983 버마 자작테러)으로의 출발이었다(1979년 11월 버마가 비동맹 탈퇴를 선언한 것은 그 파국의 길목이었다). 이후 미국과 박정희 정권의 대(對)버마 외교 공세는 더 맹렬해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고 그로 인해 특히 동남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이 급속 쇠퇴하고 있었다. 반면에, 버마를 사이에 두고 남한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동시에 월남에 전투기와 조종사를 보내 미국에 맞섰던 북한의 국제사회 내 발언권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월남 주재 자국 대사관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마지막으로 베트남을 떠나는 ‘사이공 함락’(1975.4.30) 한 해 전 미국을 향해 처음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한 것은 그 자신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 조선일보 1974.3.26 / 북측의 평화협정 제의에 미국은 “검토한 바 없다”했고 남한은 “적화통일 야욕”이라고 폄훼했다. 한반도 평화정착과 관련해 항상 건설적인 제의를 먼저 하는 쪽은 이북(북한)이었고, 미국과 남한은 늘 거짓 선전을 일삼으며 북측의 선의에 어깃장을 놓았다. 김대중 정부 출범 전까지 남북미 3자의 행동 패턴은 늘 그러했다.)

이북의 비동맹 가입은 시간 문제였다. 1975년 8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 외상회의가 이북의 비동맹 가입을 승인할 때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가 또 버마에 가야만 했던 이유다.

( 조선일보 1975.8.19 / “박 대통령 특사로 3일 간 예정으로 버마를 친선 방문 중인 정소영(鄭韶永) 농수산부장관인 네윈 버마 대통령을 관저로 예방, 악수를 나누고 있다.【랭군=AP】)

미국과 박정희 정권의 비동맹 외교에 목을 맨 것은 해마다 유엔총회에서 다뤄지는 ‘한국 문제’ 때문이었다. 이북과 이북을 지지하는 공산 진영 및 비동맹 국가들은 이 해 11월 열리는 30차 유엔총회를 앞두고 주한미군 철수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반도 평화원칙 결의안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한반도 평화원칙이란 비동맹 17개국 조정회의가 3월 아바나에 모여 논의한 것으로 △주한미군 철수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반대 △평화협정 체결 촉구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 해 전인 1974년 11월 말 제29차 유엔총회에서 가까스로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공산 측 안의 통과를 막았지만 미국과 한국이 뒤를 봐 주던 사이공 정권이 무너지고 미국이 패퇴한(1975.4.30) 뒤의 국제정세는 전과 판이했다.

( 동아일보 1974.12.1)

최강국 미국이 한국군 연인원 32만 병력을 끌어들이고도 베트남전에서 패퇴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 충격파가 실로 컸다. 동남아 지역의 미국의 교두보나 다름없었던 태국에서의 반미 시위가 그 충격을 상징했다(2020년대에도 태국은 미국의 동남아 전략 거점이다). 캄보디아가 미국 상선 ‘마야구에즈’호를 납치하자 미 해병대 1천100명이 태국 내 ‘우타파오’ 미군 기지에 투입되고 미 공군기가 캄보디아 군함 3척을 격침시키자 태국 대학생들이 이를 ‘해적 행위’라고 비난하며 시위를 벌였던 것.

[종래 친미반공을 기본 외교정책으로 삼아 왔고 미군기지까지 제공, [강조]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보루 역할을 해 왔던 태국이 이렇게까지 나오게 된 배경은 말할 것도 없이 동남아 정세의 일변[강조]에 있다. ... 동남아에서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전후 20여 년 동안은 미국을 등에 업고 소.중공 세력의 진출을 막았고 국내에서도 공산 세력의 발호를 억제 ... 그러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형세가 점차 붉게 물들어가고 ... 또한 미-중공 화해가 준 영향이 컸다. 더욱이 월남.크레르의 적화 이후 북부 변경 지방에 공산 게릴라들이 더욱 기세를 올리고 ... 지정학적으로 중공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어 ... [강조]1천5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원조액과 5만5천의 인명을 희생시키면서가지 월남의 적화를 막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미국이 공약을 저버린데 더욱 큰 쇼크[강조]를 받은 것 ... ‘향후 1년 내에 전 미군의 철수와 군사적 자립’을 대내외 공약으로 내걸고 지난 3월 출범한 쿠크리트 프라모즈 수상 정부는 지난 5일 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중 7천 500명은 6월까지 철수시키기로 미국과 합의 ... 이러한 방향에서 [강조]타이[태국]은 북괴와의 외교관계를 수립[강조]했고, 이번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월맹.월남.캄보디아를 가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강조]태국은 ‘탈미국’ 정책을 발전시켜 미국에 의존하기 보다는 중공과 소련에 접근하여 중립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자립의 터전을 확보하려 하고[강조] 있다.] (「미묘해진 미-태국 관계」<동아일보> 1975.5.15)

( 동아일보 1975.5.15)

특히 버마는 29차 총회 때 유엔사 해체 및 주한미군 철수 결의안에 반대표가 아닌 기권표를 던진 터여서 미국과 박정희 정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마가 30차 유엔총회에서 공산권의 이 결의안에 찬성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을 것이다. 리마 비동맹 외상회의가 북한의 비동맹 가입 문제와 ‘한반도 평화원칙 결의안’을 토의하기 일주일 전 농림수산부 장관 정소영이 버마를 방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강조]남의 일로 보았던 비동맹회의가 갑자기 남북외교의 주전장으로 부상[강조]하기 시작했다. 오는 25일부터 5일 간 페루의 리마에서 열리는 비동맹 외상회의는 북괴의 단독 가입 기도로 뜨거운 대결이 예고되고 ... [강조]이번 비동맹 외상회담의 결과는 곧이어 열리게 될 30차 유엔총회의 향방을 가늠하여 ‘한국문제’ 토의 결과에 막대한 영향을 줄 것[강조] ... 유엔 전초전의 성격이 짙은 ... 남북 간의 리마 결전이 예고된 것은 지난 2월 북괴가 비동맹회의에 가입 신청을 냄으로써 비롯됐다. 북괴의 단독 가입 신청은 국제사회에서 수의 힘을 갖고 있는 비동맹 그룹을 발판으로 남북 외교경쟁에서 우리를 앞질러 보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 ... [강조]북괴의 단독 가입이 실현되고 소위 평화원칙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면 그것은 바로 30차 유엔총회에서의 대세를 형성할[강조] 뿐 아니라 비동맹회의가 북괴의 독점물이 되다시피 해서 앞으로 유엔 안팎에서 사사건건 한국 고립화 작용을 가중시킬 것 ... ] (「유엔 전초전 비동맹회의 - 남북외교의 주전장으로 변한 ‘리마’」<동아일보> 1975.8.18)

( 동아일보 1975.8.18)

그러나 결국 리마 회의는 이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북(북한) 및 월맹(북베트남)의 비동맹 가입을 승인했다. 또 두 달 뒤 열린 제30차 유엔총회에서 버마는 미국과 박정희 정권이 우려했던대로 주한미군 철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반도 평화원칙 결의안(제3390 B호)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국과 서방국들의 단결로 유엔사 존속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서방측 안(제3390 A호)도 통과됐다. 공산 측 안과 서방측 안이 모두 통과된 것은 일대 이변이었다.

( 경향신문 1975.10.31)

한반도 평화원칙 결의안(제3390 B호)의 내용은 이랬다.

[총회는,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30년이 경과하였고, 한국에 정전이 성립된 지 22년이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통일이 이룩되지 못하였음을 주목하고, 유엔 헌장에 따라 각국은 민족평등 및 민족자결 원칙을 존중하고 타국의 국내 관할 사항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각국의 의무를 상기하며, 한민족이 자주, 평화통일 및 민족적 대단결의 3개 원칙에 입각하여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 내에 한국의 자주, 평화통일을 이룩하도록 권장하고, 이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 헌장의 제 원칙에 부합한다고 간주하고, 1972. 7. 4. 자 공동성명의 정신과 이 공동성명을 환영한 1973. 11. 28. 자 제28차 총회 결정에 따라 남북한이 국가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그들의 대화를 증진시킬 것을 희망하며, 한국에서 현재의 정전상태가 그대로 지속하는 한 지속적인 평화는 기대될 수 없다고 간주하고, 한국에서 지속적인 평화를 보장하고 한국의 자주,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한국의 국내문제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종식시키고 이 지역의 긴장을 제거하며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결정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간주하면서 ① 유엔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유엔기치 아래 남한에 주둔하는 모든 외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간주한다. ② 정전협정의 실제적 당사자들에게 유엔군 사령부의 해체 및 유엔기치 아래 남한에 주둔하는 모든 외군의 철수와 관련하여 한국에서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유지,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로서 한국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치하도록 촉구한다. ③ 남북한에 대하여 남북 공동성명의 제 원칙을 준수할 것과 군비증강 중지, 쌍방 병력의 동일 수준으로의 대폭 감축, 군사 충돌 방지 및 타방에 대한 무력 불사용 보장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할 것, 이로서 국가의 자주,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한국에서의 군사적 대결을 배제하고 항구적 평화를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결의안을 저지하려는 목적 외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가 수시로 버마에 간 또 다른 이유는 수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북(북한)을 포함한 여러 비동맹 회원국들은 버마의 남북한 동시 수교에 부정적이었을 것이고, 수교의 마지막 순서인 대사의 신임장 제정을 막으려 했을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 침략전에 가세한 남한과 미국에 맞서 싸운 북한이, 비동맹 깃발을 치켜든 버마와 동시에 수교한다는 것은 비동맹권 입장에서는 참으로 괴이쩍은 일이 아니었을까. 미국이나 박정희 정권 역시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동맹 진영의 세가 날로 커가는 상황에서 자칫 손을 놓고 있다가는 한국-버마 수교가 무산될 수도 있었다. 결국 유엔총회가 열릴 때인 1975년 10월 장예준(張禮準) 상공부 장관이 제2차 통상장관 회담 차 버마를 방문하고서야 양국 초대 대사들이 상대국 최고지도자에게 각각 신임장을 제정할 수 있었다.

( 조선일보 1975.10.31 / 버마대사(일본에 주재, 주일.주한대사 겸임) 박정희 대통령에게 신임장 제정.)

이처럼 박정희 정권과 미국은 버마를 포함한 비동맹 진영을 상대로 하루하루 피를 말리는 외교전을 벌이면서도 좀처럼 승기를 잡기 못해 내심 불안했다. 1974년 제29차 유엔총회에서 부결됐던 주한미군 철수 등 공산측 결의안이 1975년 30차 총회에서 통과됐다면, 1976년 제31차 총회에서는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30차 총회에서 가결된 유엔군사령부 존치 결의안마저 자칫 부결되지 않을까. 미국과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우려했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계속 위축되고 비동맹권 특히 이북(북한)의 발언권이 점점 커지는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76년. 지구적 범위에서 비동맹 정상회의와 유엔총회를 겨냥한 남북 간 외교전이 가열되는 가운데, 버마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국지적 외교전도 계속됐다. 한 해 전 버마와 수교한 이북(북한)도 버마와의 관계 증진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북의 부수상 겸 외상 허담(許談)이 3월 29일부터 나흘 간 버마를 방문했고, 두 달 뒤에는 버마 통상사절단이 남한을 방문했다. 1975년 10월 버마에 갔던 장예준 상공부 장관의 초청이었다.

[버마의 제1공업성장관 틴 쉐 씨가 이끄는 7명의 버마 산업시찰단이 ... 31일 내한 ... 6월 6일까지 체한 ... 1천만 달러어치의 한국산 기계류 연불수입, 120t 바지선 4척 등 소형선박 65척에 대한 수입 문제 등을 협의할 예정이다.] (「버마 산업시찰단 7명 31일 내한」<경향신문> 1976.5.29)

(사진 좌 : 매일경제신문 1976.6.2 / 사진 우 : 조선일보 1976.6.2. 버마 조선사진 설명 “장예준 상공부장관(우)이 1일 내한한 틴 쉐 버마 제1공업성장관을 영접하고 있다.”)

1천만 달러어치의 한국산 기계류 연불수입 어쩌고 한 것은 1천만 달러어치의 기계를 일단 외상으로 가져가게 한다는 말이다. 버마가 갑자기 한국산 기계류와 선박 수 십 척을 사러 왔다면 그것은 북한과도 가까운 버마를 남한 편으로 만들려는 경제외교 공작의 결과인 것이다. 버마 통상사절단의 한국에 대한 인상을 전하는 글에서도 그런 의도가 읽힌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버마 통상사절단은 포항.울산 등지의 산업시설과 농촌지대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한국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게 도대체 의심스럽다. 일부러 좋은 데만 보여주는 게 아니냐”며 ... 얼마 전 북괴를  3주 동안 방문한 일이 있는 한 사절단은 현대조선 종업원 식당에서 두부조림 등의 반찬을 보고 “우리가 왔기 때문에 일부러 좋은 반찬을 주는 게 아니냐”고 물었고, 시골길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이 손을 흔들자 “강제 교육시킨 게 아니냐”며 의심하더라고 ...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알고 난 다음에서야 “평양에서는 감시 속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보여주는 곳만 보았는데 한국은 자유롭고 경제발전이 눈부셔 정말 반했다”고 실토하더라고.] (<경향신문> 1976.6.15)

버마를 내 편으로 만들고 버마와 북한 사이를 갈라놓고 싶어하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아니 이미 버마를 내 편으로 만들었다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7월 들어서는 비동맹 외교 전선에 긴장감이 일기 시작한다.

( 경향신문 1976.7.19)

[정부는 오는 8월 스리랑카에서 열리는 비동맹 정상회의와 오는 9월 제31차 유엔 총회를 앞두고 강력하고도 집중적인 외교 공세를 전개할 방침 ... 정부는 최근 격화되는 북괴의 외교 공세에 대비, 지금까지의 간접적인 대응 전략을 지양하고 비동맹권 국가들에 대한 쌍무외교 강화를 위한 사절단 파견과 유엔에서의 필요적절한 결의안 제출 등 적극 외교를 벌이기로 ...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북괴의 외교 공세가 날로 심해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 우리로서도 강력한 외교를 전개할 수밖에 없다 ... 올 가을 유엔총회 분위기는 점칠 수 없지만 북괴를 상대로 한 어떠한 가상 전략에 대해서도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 (「스리랑카 회의 대비 비동맹국과 쌍무외교 강화」<경향신문> 1976.7.19)

그런데 이런 ‘외교 강화’는 정상적인 외교적 경쟁 이상을 의미했다. 이즈음부터 한.미 양측은 ‘북괴의 남침’ 운운하며 대북 적대감을 고조시키려기 시작했다. 6월 29일에는 전남 영광군 OO지구에서 김성주 치안본부장, 고건(高建) 전남도지사, 국회 내무위원, 군 지휘관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악어 2호 작전’이라는 대간첩작전 시범훈련이 실시됐다. 지역 전투경찰 중대와 예비군, 민방위대, 해경 경비정 여러 척이 동원된 이 작전은 “육.해.공의 입체적인 합동작전으로 실전을 방불케” 했다(<조선일보> 1976.6.30).

또 일본가 가 있던 김성진(金聖鎭) 문공부 장관이 7월 3일 일본 도쿄의 프레스센터에서  ‘한반도 위기의 본질과 평화의 전망’이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북괴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지주인 김일성 신격화와 군주주의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며 “이러한 내부 붕괴의 돌파구로 제한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떠벌렸다(「북괴, 제한전 도발 가능성 ... 내부 체제 붕괴 은폐 위해」<동아일보> 1976.7.5)

지금도 심심할 때면 한 번씩 들고 나오는 헛된 ‘북한 붕괴론’이다. 1976년 여름에 이북 체제가 곧 무너질 듯한 징후가 있기나 했을까. 남북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통일할 것을 약조한 7.4 공동성명 4주년에 즈음해 이런 얼토당토않은 악선전을 일삼으며 대북 적대감을 부풀린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미국도 대북 적대감을 고조시키는데 열심이었다. 7월 21일에는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이 미군사령부를 찾아 온 국회 국방위 여야 의원 10명과 만난 자리에서 “어떤 북괴의 도발에도 응징을 가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경향신문> 1976.7.22). 또 이날 이들 여야 의원들을 만난 한.미 통합 제1군단장 존 H.쿠쉬먼 중장은 일주일 뒤인 7월 29일 기자회견을 열고 “북괴가 남침을 감행할 경우 전방 방위 개념에 기초하여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초전박살할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공언했다(<경향신문> 1976.7.30).

( 경향신문 1976.7.30)

이처럼 미국과 박정희 정권이 이유 없이 대북 적대감을 끌어올리는 언사를 남발하는 가운데 중동부 전선에서 수상한 총격 사건이 벌어진다. 8월 5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 제378차 본회의에서 미군 수석대표 프러든 제독은 “북측이 이날(8월 5일) 오전 9시 45분부터 10분 간 2회에 걸쳐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 초소에서 아군 초소로 기관총 2발과 82mm 무반동총 8발을 발사했으며 유엔군도 이에 대해 정당방어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동아일보> 1976.8.5).

그런데 이날 군사정전위 회의 개최를 요구한 북측의 주장은 달랐다. 북측은 미군 측이 57mm 기관포로 사격을 해 왔으며, 프러든이 말하는 총격 사건은 미군 측이 조작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사건의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당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필요한 쪽은 미국과 남한이었다. 북측은 굳이 이런 사건을 일으켜 긴장을 조성할 이유가 없었다.  

1975년 4월 30일 ‘하노이 함락’(미국의 베트남전 패퇴) 이후 미국의 위상이 급전직하로 추락하는 가운데 이북(북한)은 비동맹권과 유엔을 무대로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 등을 요구하며 외교적 총공세를 펴기 시작했고, 1976년 미국 대선의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언한 것이다. 카터의 미군 철수 주장은 미 군산복합체의 입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놀라운 주장이었다.

미국의 주류 지배 세력은 군산복합체 최대 이익이 걸린 남북 분단체제가 곧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이럴 때 남북이 대치하는 38선에서 군사적 충돌이 우려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중동부전선에서 의문의 총격 사건이 일어난 시점도 매우 절묘했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릴 비동맹정상회의를 나을 앞둔 8월 5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외교적 승기를 잡은 이북과 이북을 지원하는 중국이나 소련 및 비동맹 진영에서는 이번에야말로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킬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이런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 때, 바로 그 ‘외교적 성과 노리고 북측이 총격 사건을 도발했다’는 선전전은 어느 쪽이 총격 사건을 도발했는지를 웅변한다.
 
[【유엔본부=동양】5일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북괴 측의 도발 총격은 내주 시작되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의 비동맹 정상회의에 초점을 맞춘 북괴의 외교적 책략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 몇몇 유엔 옵저버들[은]... 최근 비동맹국들의 냉랭한 태도에 조급해진 북괴는 ‘한국문제’에 관심 있는 나라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이같은 사고를 도발한 것으로 믿어진다고 해석, 북괴가 대남 도발을 정치.외교 선전 형태로 이용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북괴가 그들에게 불리한 현 국제조류를 돌리기 위한 절망적 시도로 비무장지대에서 또 다른 군사 도발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유엔 옵저버, 북괴 총격 사건에 “비동맹 초점 맞춘 외교전략”」<경향신문> 1976.8.6)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는 하나같이 비동맹 정상회의를 앞둔 남북 외교 정세를 뒤집고 비틀었다. “(북한이) 비동맹국들의 냉랭한 태도에 조급해진 [나머지] ‘한국문제’에 관심 있는 나라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이같은 사고를 도발한 것으로 믿어진다.” 본말전도의 전형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1974년과 1975년, 제29.30차 유엔총회의 여세로 보면 1976년 제31차 유엔총회에서 주한미군 철수안이 가결될 개연성이 매우 높았다. 1975년 4월 30일 ‘하노이 줄행랑’ 이후 미국의 위신은 날로 추락하고 있었고 북측의 외교적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으며 미국 대통령 후보인 카터마저 주한미군 철수를 공언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처지를 그런대로 비슷하게 전한 글도 없지는 않았다.

[정부는 오는 9일 스리랑카에서 열리는 비동맹 정상회의가 임박함에 따라 이 회의의 토의 결과가 올가을 31차 유엔총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 우방 및 중립 비동맹 회원국과의 막후 교섭을 통해 북괴 편형적인 입장의 지양을 촉구하기 위해 다각적인 외교 교섭을 벌이고 ... 이번 비동맹회의 이후에 북괴가 최대의 정치선전 공세를 벌일 것에 대비 ... 대응하는 전략을 우방 측과 숙의하는 한편 비동맹회의를 전후하여 케냐 외상 등을 초청, 올 가을 유엔총회의 남북 대결에 적극 대처키로 ...] (「비동맹회의 북괴 편향 배제 ... 정부, 다각외교 교섭」<경향신문> 1976.8.6)

미국과 박정희 정권이 비동맹 정상회의와 유엔총회를 앞두고 자신들의 불리한 처지를 만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거의 대부분 대북 심리전 조직인 중앙정보부 북한국에서 작성하고 중정 산하 통신사인 <내외통신>이 각 언론사에 뿌린 자료였다.

[그들의 총격 도발 사건에 이은 무력 도발 강화의 뜻을 짙게 하는 한편 며칠 안으로 다가온 스리랑카 비동맹정상회의와 가을의 유엔총회를 겨냥, 국제여론을 한국 측에 불리한 방향으로 오도해 보려는 조직적인 선전극으로 보인다.【내외통신】] (「북괴, 비동맹회의 겨냥 “전쟁 임박” 성명」<경향신문> 1976.8.7)

의문의 비무장지대 총격 사건이 일어난 8월 5일 밤 북측 방송들이 정규 프로를 중단하고 임시보도 형식으로 ‘정부 성명’과 ‘비망록’을 발표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북측은 정부 성명과 비망록을 통해 “적들은 이미 전쟁 준비를 완료, 직접 전쟁 도화선에 불을 지르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에 따라 그들의 모든 군부대들에 24시간 임전태세 완비 명령이 내려지는 한편 남한 전역에 전시체제가 선포되고 군사.전시동원 훈련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북괴, 비동맹회의 겨냥 “전쟁 임박” 성명」<경향신문> 1976.8.7).

주한미군이나 박정희 정권은 북측의 이런 주장을 ‘선전 공세’라고 일축했지만, 이는 주한미군이 모종의 대북 공작을 꾸미고 있었고 그 정황을 북측이 우려했다는 증좌일 수 있다. 의문의 총격사건에 이어 38선 비무장지대에서의 불안과 긴장은 계속 높아졌고, 판문점에서 비무장상태로 대치중이던 미군과 인민군(북한군) 사이의 신경전도 가열됐다.

 [【뉴욕=동양】뉴욕타임스지는 16일 ‘한국 비무장지대 23년’이란 제하의 판문점발 4단 기사에서 비무장지대의 긴장 사태를 소상히 보도했다. 타임스지는 53년 휴전협정 조인 이래 북괴의 수많은 협정 위반 사실을 주목하면서 한국군과 북괴군은 비무장지대 양쪽에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DMZ 긴장” - NYT지 주장」<경향신문> 1976.8.17)

<뉴욕타임스>가 ‘판문점의 긴장’을 기사화한 날은 북측과 북측을 지지하는 소련 및 중국이 유엔 총회에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한 날이었다.

( 동아일보 1976.8.17)

별 일이 없다면 미군철수안을 분명 가결됐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타임스> 보도 이틀 뒤 북측이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비동맹 진영과 유엔 총회에서의 주한미군 철수론을 일거에 파탄시키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이름하여 ‘8.18 도끼 만행 사건’.

( 경향신문 1976.8.19)

( 동아일보 1976.8.19)

비동맹 정상회의 개막(8월 16일) 사흘 째, 이 회의가 나흘 간의 일정을 마치고 정치선언을 채택하기 하루 전, 북측의 외교적 총공세와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론을 동시에 무력화시킬 비장의 한 수가 나온 것이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8월 22일 자 사설에서 “한반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8.18 판문점 사건이 비동맹 수뇌회의 폐막을 이틀 앞두고 일어난 사실은 시기적으로 우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북한의 계획된 도발”이라는 선전전에 열을 올렸다.

[【워싱턴=이강걸 특파원】미국 백악관과 국무성은 18일 하오 판문점에서 발생한 북괴에 의한 2명의 미군 장교 살해 사건을 중시, “이번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북괴 측에 있다”고 말하고 ... 브라운 국무성 대변인은 성명 발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 북괴의 의도를 ①스리랑카에서 열리고 있는 비동맹회의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주목과 관심을 끌려는 의도 ②북괴가 유엔에 제출한 한국문제 결의안에 대한 관심을 끌려는 의도와 함께 ③한반도에서 한국과 미국이 전쟁을 도발할 위험성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북괴 측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악관.국무성 강경 성명 “모든 책임 북괴가 져야 ... 유엔.비동맹서 관심 끌기 위한 책략”」<경향신문> 1976.8.19)

( 동아일보 1976.8.19)

미국의 선전전 역시 본말을 전도한 왜곡이었다. 미국은 북측이 비동맹 정상회의와 유엔 총회에서 ‘한국문제’(주한미군 철수 및 평화협정 체결 등)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이 사건을 저질렀다고 떠들었지만, 이 사건은 절대적으로 이북에게는 불리하고 미국에게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한 제로-섬. 이처럼 빤한 사실을 왜곡하고 역설(逆說)하는 쪽이 사건의 배후 아니겠나.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8월 24일자에서 “이번 사건으로 북괴와 비동맹국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미국의 대한 지원이 한층 강화되었다”고 보도했다(「“비동맹 관계도 악화” ... 일지, 북괴 도발 분석」<경향신문> 1976.8.25). 위 백악관과 국무성의 논평은 이 사건의 그네들의 자작극이라는 반증이다. 영국 신문의 속보이는 악의적 논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런던=로이터.합동】런던의 ‘더 타임스’는 21일 ... 사설에서 “북괴의 김일성은 이 폭력 사건으로 미군이 아직 주둔 중인 한반도에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콜롬보 비동맹회의에 영향을 미치길 바랬는가. 혹은 카터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에 승리하여 내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방침임에 유의하여 이 사건이 그런 조치를 촉진시킬 것으로 생각했는가. 이 두 경우에 있어 다같이 김일성은 오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더타임즈 “북괴서 책임져야”」<동아일보> 1976.8.21)

판문점 사건은 미국과 박정희 정권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7.8월 집중적으로 휴전선의 긴장의 파고를 높이는 언동을 일삼다 8월 9일부터 11일 간 진행된 제5차 비동맹회의(정상회의는 8.16∼19일) 및 9월 열릴 31차 유엔총회를 정조준한 것이 분명했다. 또한 이즈음 막바지 국면에 접어든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가 내 건 주한미군 철수 공약에 쐐기를 박으려는 저의도 농후했다.

[【뉴욕=UPI.동양】뉴욕타임스지는 19일 ‘도끼외교’란 제하의 사설에서 ... “김일성 집단은 이같은 야수적 행위로 최근 미국에서 거론된 주한미지상군 4만2천명의 점진적 철수론에 대한 지지를 강화시키려고 바랄지 모르나 그 효과는 정반대가 될 것이다 ... 또한 이러한 만행은 미국의 극단적 보복을 유발시켜 스리랑카에서 열리고 있는 비동맹회의에서 북한에 동정을 사고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그들의 주장이 관철되도록 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과 비동맹국들은 이러한 비인간적인 만행에 말려들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 ”] (「‘도끼외교’에 심각한 우려 - “비동맹회의서 지원 못 받아”(NYT)」<조선일보> 1976.8.20)

( 조선일보 1976.8.20)

“미국의 극단적 보복을 유발시켜 스리랑카에서 열리고 있는 비동맹회의에서 북한에 동정을 산다.” 주객전도. 미국의 보복을 유발해 비동맹 국가들의 동정표를 얻기 위해 미군을 죽였다는, 기묘한 할리우드 극본이라 할 만하다. 미국은 판문점 사건 이후의 여론전까지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음에 틀림없다.

당초 비동맹정상회의에는 이북의 김일성 주석이 직접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판문점 사건으로 인해 김 주석의 스리랑카 입국이 갑자기 취소되고 출석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정경모 『찟져진 산하』11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비동맹회의 정치선언과 폐막 성명에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외군(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의 당위성 등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마땅히 이행되어야 할 내용들이 모두 포함됐다.

[외무부는 20일 하오 비동맹 정상회의 폐막에 대해 “대한민국의 주권을 공공연히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비동맹회의의 정치선언 중 관계 구절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논평 ... “국가안보에 관하여 다른 주권국가[미국]와 쌍무적인 협약을 체결할 모든 권리 ... 이는 침략자 북괴에 대항하여 방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라고 주장하고, “지난 18일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 사건은 북괴가 부단한 도발과 휴전협정 위반으로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조 ... ] (「외무부, “대한민국 주권 침해하는 정치선언 거부”」<경향신문> 1976.8.21)

미국은 비동맹회의 결의안에 미국이 한반도에서 침략 행위를 계속하여 전쟁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는 북한의 주장이 포함된데 대해 몹시 못마땅해 했다.

[【워싱턴=이웅희 특파원】미 국무성은 25일 한반도 문제에 전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지지한 콜롬보 비동맹회의의 결정을 맹렬히 비난 ... 펀세드 국무성 대변인은 미리 준비한 성명을 낭옥, “한반도 문제에 극히 일방적인 표현으로 시종한 비동맹회의의 선언 및 별도의 한반도 문제에 관한 결의를 지지하는 여하한 나라도 이 문제에 관해 중립국이라고 고려될 수 없다고 미국은 확신한다”고 ... ]  (「미 국무성, 북괴 입장 지지 비난 - “비동맹, 한반도에 편파적”」<동아일보> 1976.8.26)

그래서였을 것이다. 미국은 유엔 총회에서 북측을 ‘살인마 집단’으로 몰아세우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동경=합동】일본 외무성은 지난 20일 폐막된 콜롬보 비동맹 수뇌회의의 경과로 보아 오는 9월의 제31차 유엔총회에서의 한국 지지 결의안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게 될 것이 확실한 반면, 북괴 지지 결의안은 소수 지지로 끝날 것이 틀림없다는 ... 23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특히 이 [비동맹]수뇌회의 정치위원회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수정안을 제출한 아프리카 제국의 10여 개 국가들이 올 가을 유엔총회에서 한국 지지 결의안에 찬동할 것이 예상된다고 외무성 소식통들을 인용, 보도 ... 했다.] (「유엔 총회 한국 지지 압도적 - 아프리카 10여국 서방안에 찬성 예상」<조선일보> 1976.8.24)

결과는 미국의 낙관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국제여론은 반북으로 돌아섰다. 이미 전 세계 미디어들이 인민군들에 둘러싸인 미군 둘이 쓰러지는 장면을 연일 방영하고 있었고, 미국은  유엔 회의에서도 그 비디오를 돌렸다. 미국에 대한 동정론이 크게 일었음은 당연지사. 사건의 전후 맥락이 무엇이든 북측은 인민군(북한군)이 미군들을 살해했다는 비난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서방 측 결의안이 21일 유엔에 제출됨으로써 유엔에서의 남북대결이 긴급한 현실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정부는 당초 유엔에서의 대결은 현실적인 이익이 없다는 전제 하에 한국문제 토의 지양을 모색했었다. 그러나 공산측이 그들의 결의안을 전격적으로 선[先]제출함에 따라 ... 서방안은 종래와는 달리 남북대화와 휴전 당사자회의 개최 촉구를 주제로 비교적 간략하게 작성 ... 공산측 결의안은 적화무력 통일의 여건 조성을 목적으로 한 전쟁 지향적인 것 ... 휴전협정 위반 행위를 상습적으로 자행해 온 그들이 북침 위협 운운하고 생떼를 쓴 것은 판문점 사건 이래 국제사회에서 더욱 설득력을 상실 ... [강조]작년에 유엔 사상 최초로 남북한 측 결의안이 다 같이 통과되는 등 서방 측에 유리하지 못한 분위기[강조]가 조성 ... 올해도 양측 안이 동시에 통과될 수밖에 없는 상황 ... 그러나 [강조]지난해에는 서방안을 주도한 미국이 월남 등지에서 참패를 당함으로써 공산 측에 유리한 역작용을 파생시켰으나 올 유엔총회에서의 분위기는 작년과는 결코 같지 않으리라는[강조] 것이 많은 외교 업저버들의 견해 ... 특히 유엔의 구성 멤버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동맹 국가들이 [강조]작년과는 달리 북괴 측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 북괴가 저지른 판문점에서의 만행이[강조] ... 많은 국가들로부터 결코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수 없을 것으로 보여 ... 했다.] (「비동맹, 북괴에 회의 ... 판문점 만행 서방 승리에 일조」<경향신문> 1976.8.21)

( 경향신문 1976.8.21)

유엔 외교는 미국의 완승이었다. 또 미국의 완승에는 박정희 정권의 총력외교도 한 몫 했다.

[윤하정(尹河珽) 외무부차관은 “북괴 만행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세계로부터 지탄의 표적이 됨으로써 유엔 등을 의식한 앞으로의 외교에 서광이 비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함으로써 판문점 사건이 우리 외교에 플러스적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윤 차관은 “우리는 이번 사태를 유엔 회원국들에 주지시키기 위해 유엔 사무국에 스틸웰 사령관의 대북괴 항의문과 그 배경 설명이 담긴 문서를 제출했다”고 밝히고 “전세계에 있는 해외 주재 공관을 통해 북괴 측의 비인도적인 도발 행위를 주지시키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소련과 중공이 이번 판문점 사건을 논평 없이 보도한 것은 그들조차도 이번 사태에 한해서만은 북괴를 일방적으로 두둔할 수 없는 입장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 ... [강조]“북괴의 곤경은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강조]이라고 말했다. 외무부는 이상훈(李相薰) 미주국 심의관을 반장으로 공보과장, 북미2과장, 정보2과장 등으로 구성한 특별작업반까지 편성, 한.미 협조 관계는 물론 세계 각국에 북괴 만행을 규탄하고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는 홍보 활동에 만전을 기하고 ... 한 관계자는 ... “정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유엔과 비동맹권에 있어서 외교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 ... 이번 판문점 사건이 올 유엔 총회 등 북괴를 의식한 한국 외교의 앞날에 결코 불이익을 초래하지 않을 것으로 외교 전문가들은 보고 ... 단기적인 외교 성과를 노리기보다는 장기적으로 북괴의 공세를 국제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봉쇄할 수 있는 제동 장치가 요구된다 ... ] (「국제고립 자청 ... 유엔.비동맹서 북괴 허 찌르는 정부의 다각 반격」<경향신문> 1976.8.24)

( 경향신문 1976.8.24)

‘판문점 사건’을 기화로 비동맹 진영과 유엔에서의 북한의 외교전선을 무너뜨린 남한은 축하 분위기였다.

( 동아일보 1976.8.25 )

결국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하는 공산측 결의안은 철회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좌 : 경향신문 1976.9.21 / 사진 우 : 동아일보 1976.9.22)

박정희 정권은 8.18 사건은 ‘굴러온 떡’에 비유했다. 이 사건을 기획한 것은 주한미군사령부와 미 국무부 작전국이니 박 정권 입장에서는 ‘굴러온 떡’일 수도 있겠다.

[외무부는 북괴의 돌연한 공산 안 철회가 몰고 온 유엔에서의 ‘남북 휴전’ 사태 속에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주말을 맞았다 ... 북괴의 가장 명백한 패배로 기록되는 이번 사태를 놓고 일부에서는 ‘굴러들어 온 떡’이라고 표현하기도 ... 북괴가 백기를 내 걸게 된 ... 북괴는 이번 ‘유엔 전투’의 교두보를 지난 8월의 스리랑카 비동맹정상회의에 설치하려 ... 김일성은 이 회의에 자신이 직접 참석, 사상 최대의 쇼를 벌인 뒤 여세를 곧바로 유엔으로 몰고 가려 했던 것 ... 인지 적화[미국의 베트남전 패퇴] 이후 ‘붉은 혁명의 국제적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성숙했고, 스리랑카 회의와 유엔 총회는 궁극적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촉진시킬 세계 여론 조성의 가장 좋은 무대인 것이다. 김일성이 스리랑카에 간다는 것은 집권 30년 만에 최초로 비공산 세계에 나가는 본격적 ‘해외 나들이’며 따라서 그것은 성대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북괴는 연초부터 비동맹 제3세계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대대적 선전활동을 ... 스리랑카 측에 지난 70년 폐쇄된 주 스리랑카대사관을 부활시켜 달라고 요구 ... 이같은 ‘잔치 계획’은 하나하나 빗나가 ... 김일성은 정상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8월 15일 불참으로 태도를 바꿨고 ... 사흘 뒤 8.18 판문점 사건이 ... 북괴의 결정적 ‘자살골’ ... 비동맹회의를 제대로 이용 못하게 되자 공산 안을 선 제출했고, 주한미군의 존재와 이에 따른 북침설을 증명하려고 8.18 사건을 저질렀으나 결과는 ‘도끼로 사람을 죽인다’는 잔인성만 노출 ...] (<조선일보> 1976.9.26)

( 조선일보 1976.9.26)

판문점 사건은 이처럼 비동맹정상회의와 유엔총회에서 주한미군 철수 및 평화협정 체결 등을 담은 한반도 평화정착 제안을 철회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미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론을 폐기시켰다. 선거 석 달 전 일어난 판문점 사건이 비동맹정상회의와 유엔총회를 거치며 공론화되면서 미국과 한국 내에서 이북에 대한 공포 심리가 극대화됐기 때문이다.

판문점 사건은 이처럼 비동맹 진영과 유엔 무대에서의 이북의 외교적 공세를 무력화하고 미국의 베트남전 패퇴 이후 비등했던 주한미군 철수론을 파탄시킨 다목적 카드였다. 이처럼 판문점 사건을 활용해 비동맹 및 유엔 외교 전선에서의 승기를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1976년 9월 고승재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위원을 단장으로 한 경제조사단을 버마에 보냈고, 다시 한 달 뒤인 1976년 10월에는 버마 외무장관이 방한했다.

[버마의 우라 폰 외상이 박동진 외무장관 초청으로 25일 오전 내한 ... 박 장관은 이날 오후 우라 폰 외상과 회담을 갖고 양국의 경협 증진 등 관심사에 대해 협의했다. 우라폰 외상은 나흘 동안 머물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최규하 국무총리를 예방하는 한편 산업시찰을 할 예정이다.] (「버마 외상 내한」<조선일보> 1976.10.26)

( 조선일보 1976.10.27 / 박정희 대통령은 26일 하오 청와대에서 방한 중인 우라 폰 버마 외상의 예방을 받고 환담했다. 이 자리에는 박동진 외무장관, 안진생 주버마대사, 르윈 주한 버마대사 등이 배석했다.)

박 정권은 버마 외상을 불러 한-버마 공동성명을 발표하려 했던 모양이나 이 야무진 계획은 버마 측의 거부로 무산됐다.

[우라 폰 버마 외상은 4일간의 공식 방한 일정을 마치고 상례적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지 않고 떠났다고.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고 있는 버마는 대북괴 관계를 의식했음인지 우라폰 외상은 “공동성명 발표만은 곤란하다”고 사정했다는 것. 그는 특히 지난해 평양을 방문한 바 있어 공동성명 발표를 더욱 꺼렸던 것 같다고 ... ] (「버마 외상, 공동성명 없이 떠나」<경향신문> 1976.10.28)

판문점 사건으로 비동맹정상회의에 이어 유엔총회에서 일단 북한의 승기를 꺾긴 했지만 남북한 동시수교국인 버마는 아직 남한 편에 설 의향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듬해인 1977년부터 버마를 둘러싼 남(한국)-미(국)과 북(조선) 사이의 치열한 외교전이 재연되는 것은 불가피해 보였다. 또 1979년에는 6차 비동맹정상회의가 열린다. 1976년 판문점 사건으로 대북 외교전에서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이번에는 버마를 활용한 모종의 공작을 준비하지 않을까.

P.S,

판문점 사건이 일어나기 석 달 전인 1976년 5월 새로 임명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정무차관보가 있었다. 1968년부터 1971년 7월 22일까지 버마 대사를 지냈던 아더 허멜(Arthur W. Hummel, 부임은 7월). 그가 버마 대사에서 물러날 때는 네 윈의 ‘민정 이양’(군복 대신 양복으로 갈아입고 민간 정부 지도자 행세를 하는) 공작이 막 시작될 때였다. 이후 그가 1975년 에티오피아 대사로 임명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비공개다.

( 허멜 차관보)

(조선일보 1976.7.14 /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일본군에 잡혔다가 44년 탈출한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국 게릴라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50년 국무성에 들어가 본격적인 외교관 생활을 시작 ... ”)

혹시 그는 버마 대사에서 물러난 뒤 1974년 마무리되는 네 윈의 대통령 만들기 작업을 막후에서 지휘하지 않았을까. 그런 뒤 슬그머니 에티오피아 주재 대사로 나갔다 다시 정치공작 전문 직책인 미 국무부 정무차관보로 들어앉은 것이 아닐까. 중국에서 태어나 ‘항안석’(恒安石)이라는 중국 이름까지 갖고 있는 ‘중국통’ 허멜은 미국의 대 아시아 정치공작에 최적임이었다.

미국은 이런 이들을 기용해 세계를 주무른다. 판문점 사건 당시 허멜은 자신이 ‘국무부 작전센터’(State Department Operations Center)에 있었다고 훗날 미 의회 도서관 측이 마련한 외교관 구술 인터뷰(1994.4.13, 인터뷰어 찰스 케네디, Charles Stuart Kennedy)에서 밝힌다.

그의 파트너가 바로 필립 하비브(Philip C. Habib). 허멜이 버마 대사일 때 하비브가 주한 대사를 지냈다. 하비브의 재임 기간은 1971년 10월∼1974년 8월로,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준비할 때부터 김대중 납치(1973.8.8)와 문세광 사건(1975.8.15) 등 박정희의 정권 연장을 위한 더러운 공작이 한창일 때였다. 지금도 주한미국대사관저(중구 정동)를 ‘하비브 하우스’라고 부르는 것은 미국의 대남공작에 대한 하비브의 숨은 공로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1973년 11월 16일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내한해 박 대통령을 만날 때 하비브 주한대사와 허멜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서리가 배석했었다. 하비브는 육영수 사건 직후 미 국무차관보로 승진한데 이어 1976년 5월 정무담당 국무차관이 될 때, 허멜은 그의 바로 밑인 정무담당 차관보로 일하고 있었다.

판문점 사건 발생 약 2주 뒤인 1976년 9월 1일 허멜이 하원 외교위 국제정치.군사소위원회에 출석했다. 여기서 그가 한 말에는 판문점 도끼 사건에는 민주당 대선 후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공언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여기서 그가 한 말은 판문점 도끼 사건이 주한미군 철수론을 무력화시킬 목적을 띠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워싱턴=이웅희 특파원】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주요한 이해관계로 그리고 한국과의 방위조약으로 한국 안보에 깊이 개입 ... 북한에 의한 여하한 재침략도 계속 억제하고 ... 현재 한국군, 미군과 북한과의 사이에 대체적인 군사력상 균형이 유지되고 있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이 균형을 깨자는 것이 북한의 변함없는 목표였다. 8.18 사건 직전 북한은 그들이 계속해 온 운동[캠페인]을 괄목할 만큼 강화했다. 8월 5일 그들은 강경한 성명을 발표, 미국과 한국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곧 전쟁을 걸어올 것이라고 하는 ... 이 성명을 또 콜롬보에서 회동 중인 비동맹국을 상대로 반미 노력을 절정화시키려는 것 ... 8.18 사건은 ... 미국이 한국에 주둔해 있기 때문에 긴장은 높을 수밖에 없다는 북한의 선전 공세를 뒷받침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 우리는 북한이 그들의 선전 노력에 널리 활용할 사건을 물색 중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 많은 비동맹국들은 결의안과 선언안이 북한의 일방적 주장을 포함했다는 사실을 인정, 처음으로 구체적인 유보의 뜻을 밝혔다. ... 그 수는 20 내지 25개국에 달할 것 ... 우리는 8.18 사건이 주한미군 병력 수준을 결정하는데 있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지 않는다 ... 하비브 차관은 ... 주한미군을 크게 감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 1976.9.2)

<동아일보>를 포함해 여러 한국 신문사 워싱턴 특파원들이 쏙 빼놓고 전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정경모 책『찢겨진 산하』118쪽 / 정경모 선생은 국내 신문들이 누락한 허멜의 증언을 <워싱턴포스트> 1976년 9월 2일 자에서 인용했다.)

(14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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