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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1983 버마 공작’… 1981년 8월 시작됐다
강진욱  | 등록:2021-04-27 08:52:59 | 최종:2021-04-27 08:58: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6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6. ‘1983 버마 공작’... 1981년 8월 시작됐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1983 버마 사건’은 피해국이나 가해국의 정부 조직이 비정상적으로 작동되는 상황 즉, 양측에서 어떤 비선 조직이 동.시.에. 은.밀.하.게. 공작을 준비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한쪽(버마)은 ‘멍석을 펴 주고’(외국 국가원수가 국빈방문하는 국부(國父)의 묘소에 누군가 몰래 폭탄을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정보 및 치안 권력을 스스로 무력화하고), 다른 한 쪽은 그렇게 펼쳐진 멍석 위에서 한 판 벌이는 ‘공수(攻守) 협잡 구도’가 명확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건이 이북의 소행이라면 버마와 이북에서 - 동시에 -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사건 직후에는 그 내막이 밝혀지지 않았을지라도 사건이 일어난 지 38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북이 그런 가공할 사건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버마 지도부와 공모한 정황이 나왔어야 한다. 또 이북이 그런 가공할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을 남한의 안기부와 미국 CIA 또는 각 나라 정보기관은 뭘 했는지 또는 뭘 봤는지가 나왔어야 한다(실제로 남한과 미국은 당시 이북과 버마 간 교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38년이 지나는 동안 장.차관과 대사(라종일, 송영식, 최병효, 신봉길), 총리(노신영) 또는 안기부장(장세동)을 지낸 이들이 이 사건을 이북의 소행으로 주장하는 책을 내고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주장을 열심히 퍼뜨렸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당한 논거는 단 한 개도 제시되지 않았다. 하나같이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가 낸 결론을 재탕 삼탕할 뿐이다. 당시 증거랍시고 제시됐던 것들은 모두 조작 정황이 농후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 엉성한 엉터리 주장을 38년 동안 우려먹는 과정에서 간간이 새로운 팩트가 튀어나와 그 허접한 주장의 밑뿌리를 하나 둘 씩 흔들기 시작했다. 두터운 거짓의 마각(魔殼) 속에 유폐됐된 진실이 마침내 그 마각을 비집고 나온 것이다.

사건 당시 남한과 미국 정보당국이 이북과 버마 간 관계와 교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북한이 버마에서 폭탄 테러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미국과 남한은 까맣게 몰랐다, 그래서 당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이라는 범인(강민철)의 자백 “나, 북에서 왔소”도 ‘번복된 자백’임이 뒤늦게 밝혀졌다. “서울에서 왔고 영등포에 어머니와 살고 있다”는 그의 자백에 버마 수사당국이 “코리언이 범인(남 또는 북)”이라고 발표하자(1983.10.17), 바로 다음날 안기부 대공수사국 국장(성용욱)과 과장(한철흠)이 버마로 급히 날아가 범인을 설득한 뒤에 나온 자백이었던 것. 본고 주제인 ‘1981년 8월의 공작’ 정황도 그렇게 난데없이 튀어나온 팩트와 팩트들을 결합하고, 그렇게 점차 구체화된 새로운 팩트들을 여러 정황에 비춰 재해석해 추출해 낸 결과물이다.

1981년 8월이 되자 갑자기 버마의 절대권력자 네 윈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 의장(대통령)이 갑자기 물러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바로 이 때 남한에서는 육사 12기들을 중심으로 수상한 대북공작이 시작됐던 것이다. ‘1983 버마’ 사건을 조작하는데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버마와 한국에서 동시에 마련됐다는 말이다. 먼저 네 윈의 수상한 대통령 양위(讓位) 계획 발표.

[【랭군.로이터=연합】네 윈 버마 대통령은 8일 원활한 권력 이양의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 오는 10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금년 71세의 네 윈 대통령은 이날 버마의 유일한 정당인 집권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의 4차 당대회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자신은 이제 고령과 건강 때문에 더 이상 대통령직을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면서, 원활한 정권 이양의 전통을 확립하기 위해 대통령직 사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버마 네 윈 대통령 10월 사임 의사」<조선일보> 1981.8.9)

( 조선일보 1981.8.11)

그러나 네 윈이 실제로 권력을 내 놓은 아니었다. 그는 “국내 정치에 대한 지도와 충고를 계속하기 위해 BSPP 당수직만은 그대로 갖고 있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동아일보> 1981.8.10). 그는 사임 계획 발표 석 달 만에 자신의 측근인 산 유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기는 했다.

( 매일경제신문 1981.11.10)

그러나 이후에도 그는 버마 최고 통수권자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려면 왜 양위를 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버마에서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설득력 있는 해설을 내 놓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수수께끼가 공수 협잡으로 이뤄진 ‘1983 버마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충분조건 즉, ‘멍석깔기’였다고 본다. (*버마 측의 ‘멍석 깔기’는 ‘1983 버마 사건’이 실행에 옮겨지기 넉 달여 전인 1983년 5월 버마 치안 책임자인 군정보국(MIS) 국장이 갑자기 숙청되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논할 것이다.)   

버마에서의 ‘멍석 깔기’ 작업과 동시에 남한에서는 그 멍석에서 한 판 놀아줄 ‘선수들’(특수공작원들)을 양성하는 공작이 시작됐다. 육사 12기들이 중심이 돼 대북 특수공작을 획책하고 비밀리에 특수공작원을 대거 양성하기 위한 ‘812 계획’에 착수했던 것. 이 ‘812 계획’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이 계획과 무관해 보이는 증언들이 중구난방 튀어나왔다. 증언자들은 모두 북파공작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말이 812계획의 실체를 밝혀줄 실마리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들을 폐품처럼 쓰다 버린 국가를(?) 원망하면서 합당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요구했을 뿐이다.

이들은 버마 사건 발생 약 두 달 만인 1983년 12월 3일 벌어진 ‘부산 다대포 간첩(?) 체포 작전’에 자신들이 동원됐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1981년 8월 시작된 812 계획이 바로 다대포 작전의 모태였으며, 다대포 작전을 끝으로 812 북파공작이 종결(완결)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훗날 밝혀진다. 이 다대포 작전은 버마 사건을 을 이북에 뒤집어씌우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정부 초기 국정원 차장을 지낸 라종일 씨는『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서 이 작전이 “간첩을 잡아 아웅 산 테러가 북한의 소행이라는 자백을 받으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명령으로 시작됐다”고 밝힌 것이다.

( 라종일 책『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157쪽)

이쯤 되면 ‘1983 버마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이 사건이 일어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 즉, 피해 측과 가해 측의 공수협잡이 버마와 남한 양측에서 동시에 벌어졌고(네 윈의 양위와 ‘812 계획’), 812 계획은 버마 사건을 ‘완성’하는 다대포 작전으로 종료됐다면, 네 윈의 양위와 ‘812 계획’ 및 ‘1983 버마 사건’은 한 축으로 꿰어지는 사건들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했으니 이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되는 과정 즉, 북파공작원들의 사사로운 증언들이 어떻게 우리 역사 이면에 숨겨져 있던 비밀의 문을 여는지 보자. “간첩을 잡아 ‘1983 버마 사건’에 보복했다”는 부산 다대포 간첩(?) 체포 작전에 대한 이야기.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수상한 작전이 벌어진 지 닷새 만인 12월 8일, 아웅 산 묘소 테러에서 살아 돌아온 이기백 대간첩대책본부장(합참의장.육군 대장)이 “간첩선을 타고 내려와 부산 다대포 해안으로 침투해 온 간첩을 잡았는데 그 간첩이 아웅 산 묘소 테러(1983.10.9) 및 대구 미 문화원 폭파사건(1983.9.22)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증언(?)했다”고 떠벌렸다.

당시에는 모두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랬는데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이 작전에 참여했던 북파공작원들이 “다대포 간첩(?)을 체포한 것은 군인들이 아니라 우리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기백의 수상쩍은 기자회견 이후 20년 만인 2003년 9월에, 그것도 국정감사장에서 나온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2003년 9월 25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의 엄호성(嚴虎聲) 의원은 “다대포 사건에서 무장공비를(?) 생포한 것은 육군 초병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HID특수요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정보기관은 ... [1983년] 11월 3일 3개의 공작대에서 11명씩을 차출해 한 달 간 특수훈련을 시켜 작전에 투입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부는 각본을 미리 짠 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사실을 왜곡, 발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한겨레신문 2003.9.25)

국감에는 당시 이 작전에 투입됐던 정덕근(42.鄭德根) 씨가 출석해 “설악개발단으로 불린 대북 공작 특수부대원들이 한 달 간 강원도 해변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뒤 12월 2일 부산으로 이동, 3일 다대포 해안에 도착했다”며 “총도 없이 공비들을 생포했고 포상도 받았다”고 증언했다(「엄호성 의원 “‘83년 다대포 간첩, 초병이 생포’는 조작”」<한겨레신문> 2003.9.25).

( 중앙일보 2003.9.25)

이후 북파공작원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숨겨왔던 이야기를 여러 경로를 통해 발설했다. 그렇게 7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인 2010년 4월 이들의 이야기가 <주간조선>과 <월간조선> 등에 실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놔뒀다가는 자칫 ‘1983 버마 사건’이 남한의 북파공작이었다는 증언이 나올 판이었다. 그래서 사건의 흐름을 차단하려 했을 것이다.

<주간조선> 글은 “버마 ‘아웅산 테러’ 직후였던 지난 1983년 10월, 정부가 북한 테러에 대한 응징을 위해 세웠던 이른바 ‘벌초계획’의 구체적 내용이 27년 만에 처음으로 드러났다”로 시작된다.

[작전계획에 참여했던 당시 특수부대의 한 관계자는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특수부대를 평양으로 파견, 주석궁을 폭파하고” ... 이 계획은 1979년 ‘12·12 사태’를 일으켰던 육사 12기 출신 군지휘관들이 주도한 것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됐지만 전 전 대통령이 “북한과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며 부정적 입장을 표명, 폐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는 “계획과 관련된 모든 문서는 손으로 일일이 작성됐으며, 복사도 허용되지 않았다”면서 “타자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며,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도 손으로 직접 쓴 문서를 들고 가 보고한 뒤 문건을 소각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아웅산 테러 직후 우리 군부가 이에 대응하는 응징계획을 마련했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이와 관련된 구체적 증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이 작전계획엔 아무런 공식적인 이름이나 작전번호가 붙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작전계획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벌초계획’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전해졌다.](<주간조선> 통권 2100호, 2010.4.12 / 인터넷 게재 2010.4.7)

글머리만 보면 ‘벌초계획’이라는 작전이 1983 버마 사건 이후, 이 사건에 대한 보복 목적으로 수립된 것처럼 보인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 거짓말을 너무 실감나게 하려다 보니 그만 엄청난 사실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육사 12기들이, 문건을 수기로 작성한 뒤 보고 즉시 폐기하는 방식으로 매우 은밀하게 ‘벌초계획’을 기획했다는 사실!

( 주간조선)

( 주간조선)

이 글을 쓴 기자나 <주간조선> 편집진 또는 이들 언론사에 자료를 제공한 국정원 모두 ‘육사 12기들이 벌초계획을 주도했다’는 말이 지닌 폭발력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정원이나 <주간조선> 측은 육사 12기들이 전두환 정권에 대한 충성심 또는 애국심(?)으로 북한에 대한 보복 작전을 기획했다는 이야기를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 ‘벌초계획’이 버마 사건 발생 약 두 달 만에 벌어진 ‘부산 다대포 작전’으로 종결됐다고 밝혔다. 애초에 벌초계획’은 아웅 산 묘소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기획됐으나 이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갑자기 부산 다대포에 간첩이 나타나 이들을 소탕하면서 보복작전을 마무리했다는 웃기는 이야기다. 위 인용문 다음에 이어지는 <주간조선> 글.

[존재 자체가 극비였던 이 작전 계획[벌초계획]은 약 두 달 뒤인 그해 12월 3일, 부산 다대포로 침투했던 무장간첩을 생포하면서 없던 일로 돌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특수부대 관계자는 “다대포로 무장 간첩선이 들어온다는 유력한 정보를 입수, 평양으로 보내려 했던 병력을 부산으로 투입했다”며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고 간첩 침투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무장간첩 두 명을 생포하고 북한 반잠수정을 침몰시켜, 정전협정을 위반한 북한의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고 했다.](<주간조선> 통권 2100호, 2010.4.12)

아웅 산 묘소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벌이려 했는데 바로 이때 무장간첩이 부산 다대포로 내려온다는 첩보를 듣고, 보복전에 투입하려 했던 병력을 다대포 간첩 체포 작전에 투입해 간첩을 체포했다? 그래서 간첩 둘을 잡아 북한의 정전협정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린 데 만족했다? 웃기는 얘기다.  

우선 ‘벌초 계획’은 ‘1983 버마 사건’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만든 계획이 아니었다. 1981년 8월 12일 이북의 미그기 2대가 백령도 인근 영공을 넘나들었다는 이유로 - “그 보복으로” - 시작됐다는 ‘812 계획’이 바로 ‘벌초계획’이었다. 이 사실은 며칠 뒤 발간된 <월간조선> 2010년 5월호를 통해 밝혀진다.「비화 : 28년 전 백령도 해상에서 대북 보복작전 계획 있었다」는 제목의 글에서 “망치작전[벌초계획의 딴 이름]이 일명 ‘812계획’에 의해 탄생했다”고 밝힌 것이다.
   
“1981년 8월 12일 북한의 미그21기 편대가 백령도 상공에 침공해 저공비행을 실시한 사건으로 인해 서해 5도의 안보 위협이 증폭되자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 의지를 사전에 봉쇄하고 도발 시 보복작전을 통한 전술적인 대응 차원에서 시작된 계획 ... ”

( 월간조선)

( 월간조선)

<주간조선>과 <월간조선>의 소스는 분명 동일한 국정원 비밀 파일일 것이다. 그런데 <주간조선>은 ‘812 계획’의 탄생 비화를 쏙 뺐다. 그리고는 이 계획이 마치 ‘1983 버마 사건’ 이후 이북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짠 것인 양 거짓말을 늘어놨다. 왜 그랬을까?

이 1981년 ‘812 계획’이 1983 버마 공작의 일환이었고, 그 공작 계획에 따라 버마 사건을 최종 정리하는 다대포 작전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 즉, 하나의 시퀀스를 토막토막 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일련의 흐름을 차단하고 선후 관계를 뒤죽박죽 만들어 각각의 사건이 별개로 보이도록 혼선을 유발한 것이다. <주간조선>의 콤비 <월간조선>의 플레이. 

[1980년대 초 북한군의 잦은 도발에 대응,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구체적인 북한 침투 작전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망치작전’으로 불리는 이 계획은 1982년 1월부터 2년 10개월 동안 해병대 요원들을 선발해 백령도 인근 NLL(북방한계선) 해상에서 기만작전을 펼치며 북한의 월례도 등 3개 목표 지역에 침투해 ▲군사시설 파괴 ▲요인 암살 ▲납치.교란 등 2시간 만에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작전 계획은 1980년 11월 전남 횡간도 무장간첩 침투, 1981년 8월 북한 미그기 백령도 상공 침공 및 미 정찰기 SR-71(블랙버드) 격추 시도 등 고조된 남북 대치 상황에서 수립된 것으로 ... 1981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은 국군의 날 행사에서 “단순히 적의 도발을 물리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도발에 대한 철저한 응징력도 함께 갖춰야 한다”면서 ... 망치작전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 “해병대 각 부대에서 1차로 선발된 요원들은 1982년 4월까지 포항에서 훈련을 받은 후 백령도로 이동해 소대 규모로 훈련 및 작전을 펼쳤습니다.” ... 1981년 9월 UDT, 공수 교육 등 이미 특수 교육을 이수한 인원 중 최정예 대원을 뽑는 것으로 1차 요원 선발이 시작 ... 이듬해[1982년] 1월부터 ‘망치 교육’이라 불리는 ‘특수침투훈련’을 받고 백령도로 파견 ... 1983년 10월 말까지 총 300여 명의 요원이 6차례에 걸쳐 투입 ... 작전에 참여했던 한 장교는 “육군에서 실시한 ‘벌초계획’도 같은 시기에 계획된 것”이라며 ... ](<월간조선> 2010년 5월호)

( 월간조선)

( 월간조선)
 
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1981년 8월 ‘812 계획’(일명 ‘벌초계획’ ‘망치작전’)에 따라 1983년 10월 말까지 총 6기수 300여 명의 특수공작원을 양성했다는 사실! 정리하면 이렇다. ①1981년 8월 12일 백령도 상공에 이북의 미그21기 2대가 넘어온데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북침 공격 계획을 세웠다. ②‘812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특수한 목적의 부대가 창설됐고 이 부대 요원으로 차출된 이들이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이 일어난 1983년 10월 말까지 훈련을 벌였다. ③“존재 자체가 극비였던 이 작전 계획은 1983년 12월 3일 부산 다대포 작전을 끝으로 종료됐다. <월간조선>은 812 계획과 벌초계획이 별개인 것처럼 썼다.

[지난 4월 12일 <주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육사 12기 출신 군 지휘관들이 주도한 벌초계획은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특수부대를 평양으로 파견, 주석궁을 폭파하고 김일성을 사살한 뒤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 돌아오는 비밀계획이다. 이 계획은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과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며 부정적 입장을 표명해 1983년 12월 경 폐기된 것으로 알려졌다.](<월간조선> 2010년 5월호)

‘812 계획’을 수립한 이유가 너무 비상식적이다. 미그21기 두 대가 우리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야기를 사건 발생 아흐레가 뒤 신문에 대서특필한 것도 이상한 일이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MAC) 회의를 요청해 항의하고 정부 차원에서 엄중히 경고하면 될 일! 그런 걸 보복하겠다며 별도의 특수부대를 양성한다? 정말로 보복을 하려 했다면 수 십 년 전부터 양성해 온 UDT나 HID 등 육.해.공 각 군 특수부대를 활용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름조차 수상한 ‘812 계획’이란 것을 세우고 장장 3년 동안 300여 명의 특수공작원을 양성한단 말인가. 그래놓고 그 보복작전을 3년 동안 질질 끌다  ‘1983 버마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정.리.하.기. 위한 다대포 작전으로 종결해? 그러면 ‘812 계획’은 애초부터 ‘1983 버마 사건’을 종.결.하.기. 위.한. 작.전. 즉, 1983 버마 공작의 일환으로 기획됐다는 말이다. 아닌가?

만약 다대포 사건이 우연이었다면 이 추리(推理)를 부정할 수도 있겠다. 1981년 8월 12일 백령도 영공 침범 행위를 보복하겠다며 300여 명의 특수공작원을 양성하면서 3년을 질질 끄는 비상식적 군사작전을 수행했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다 난데없이 간첩이 내려와 잡은 것을 끝으로 3년 간 질질 끌던 작전을 종결할 수도 있다(고쳐 주자).

그런데 다대포 작전은 우연히 북에서 간첩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기획’ 즉, 그가 “간첩을 잡아 아웅 산 묘소 테러가 북한의 소행이라는 자백을 받으라”고 명령을 내려 시작된 작전이었다(『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157쪽). 버마 공작과 다대포 작전이 동일한 기획이라는 방증은 또 있다. 사건의 범인이라는 강민철이 “나 서울에서 왔고 영등포에 어머니와 살고 있다”고 말하고, 이에 버마 수사당국이 남이나 북을 특정하지 않은 채 “범인은 코리언”이라고 발표한 다음날 버마로 날아가 강민철에게 “너, 어떻게든 살아야 할 것 아니냐”며 달랜 성용욱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 다대포 작전에도 관여한 정황이다. 그가 국세청장으로 재직하다 뇌물 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의 변론.

[피고인은 평소 ...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했으며 특히 안기부 재직 시에도 대공수사에만 전념하였을 뿐 정치나 공작 업무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피고인은 대공수사로 여러 가지 공로가 많습니다. 지난  버마 랑군 사태 때 합동수사반장을 맡으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다대포 간첩 침투 시 일부를 생포하고 나머지는 격퇴까지 했으며, 생포된 북한 공비를 전향시키기까지 했습니다. 피고인은 결코 5공 정권의 창출에 도움을 준 사실이 없으며 ...](「<全씨 비자금 3차공판 지상중계>」<연합통신> 1996.4.29)

[성용욱 피고인의 변호인 손진곤 변호사는 ... “우리나라에서 간첩을 가장 많이 잡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아웅 산 사건 때 합동수사반장으로 현지에 파견돼 버마(현 미얀마)와 북한을 단교시켰고, 부산 다대포 간첩단을 생포해 전향시켰다는 대공수사 실적을 나열했다.](「<全씨 비자금 3차공판 이모저모>」<경향신문> 1996.4.30)

(*성용욱(成鎔旭)은 육사 15기.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1983 버마 사건’에 관여한 뒤 감사원 사무총장, 국세청장으로 영전에 영전을 거듭하며 무도한 권력의 전횡을 만끽하다 그만 버마 공작에 연루된 행적이 발각된 것이다. 그는 공직을 그만둔 뒤에는 ‘별’들(군 출신자들)의 집합소인 마사회 회장까지 지냈다. 손진곤 변호사는 ‘부장판사 출신 안기부맨’이다. ‘5공 판사’로 전두환 정권을 비호했고 노태우 정권 출범 후 안기부장 특보, 안기부 1차장이 된다.)

 

( 성용욱 씨(사진 왼쪽)가 안현태 전 안기부장이 함께 ‘5공 비리’ 관련 재판을 받을 당시 모습)

‘버마 사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이가 ‘812 계획’의 완결판인 ‘다대포 작전’에도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812 계획이 아웅 산 공작의 시초였고, 다대포 작전은 그 대미였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혹시, 버마 작전에 투입됐던 신기철.김진수(가명 진모).강영철(가명 강민철) 등 3명은 ‘812 계획’에 따라 양성된 여섯 기수 300여 명 중에서 차출된 이들이 아닐까.

버마와 남한에서 ‘1983 버마 사건’을 벌이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동시에 마련되는 해괴한 일은 1981년 8월에 이어 1983년 5월 또 한 번 일어난다. 이때는 버마 군 정보국장이 숙청돼 정보국이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고, 그 틈을 타 남한에서는 대통령 전두환이 이범석 외무장관에게 버마를 순방국 일정에 넣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버마와 남한 양측에서 ‘1983 버마 사건’이 일어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동시에 마련되는 일이 최소 두 번이라면 - 필자가 확인 한 것만 두 번이다 - ‘1983 버마 사건’은 남측(및 남측을 음양으로 돕는 어떤 세력)의 자작극임이 분명하다.

P.S.

위에서 ‘812 계획’의 구실이 된 미그21기 두 대의 백령도 영공 침범 사건(1981.8.12)이 아흐레 뒤에야 신문에 대서특필됐다고 썼다.  

[북괴 미그(MIG) 21 전투기 2대가 지난 8월 12일 서해 5도 중 백령도 상공을 침범했다고 유엔군사령부가 21일 발표 ... 8월 12일 낮 12시 쯤 북괴의 미그21 전투기 2대가 백령도 상공을 동으로부터 서쪽으로 침투비행했으며 ... ](<경향신문> 1982.8.21)

[북괴는 최근 백령도에 대한 군사도발을 감행 ... 휴전 이후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 5도를 넘보려는 침략적인 야욕을 다시 드러냈다. 북괴는 지난 55년 이후 33차례에 걸쳐 이들 지역에 대한 도발을 감행해 왔으나 이번처럼 미그기를 동원, 우리의 영공을 침공한 적은 없었다. ... 최근 수 년 간은 별다른 도발 행위가 없었다가 이번에 다시 기습 침공 ... 이번 도발 행위를 계기로 국민 모두가 북괴 측의 야욕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우리의 안보태세를 한 층 강화해야 될 것이다.](<경향신문> 1982.8.21)

( 경향신문 1981.8.21)

이처럼 사건 발생 일로부터 아흐레가 지난 뒤에야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대서특필할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그 즈음 1983 버마 공작 계획인 ‘812 계획’을 짜 비밀리에 특수공작원들을 양성하려다 보니 군 내부용으로라도 어떤 구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남측 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북측에게 거짓 정보를 흘릴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뭐 하는 거 딴 게 아냐. 니네 비행기가 영공을 침범해서 보복하려는 거야.”
그런데 그 작전을 3년을 뭉개기가 뭐해서였을까 또 다른 구실들을 보탰다. “이 작전 계획[812 계획]은 1980년 11월 전남 횡간도 무장간첩 침투, 1981년 8월 북한 미그기 백령도 상공 침공 및 미 정찰기 SR-71(블랙버드) 격추 시도 등 고조된 남북 대치 상황에서 수립된 것으로 ... ”(<월간조선> 2010년 5월호)

3개 구실 중 앞의 두 개에만 사건 발생 연월(年月)이 명기 돼 있다. SR-71기 격추 시도에는 왜 사건 발생 시기가 없을까. 기자의 실수? ... 아니다. 그 날짜를 명기하면 안 되기에 슬그머니 뺀 것이다. 왜? 이 사건 발생일이 8월 26일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미군이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고 떠벌렸다.

[【워싱턴=UPI.연합】미 공군의 최신예 전략고공정찰기 SR-71기 [한]대가 26일 한국과 공해 상공을 비행 중 북괴군으로부터 미사일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러나 미사일은 정찰기로부터 수 마일 빗나갔다고 미 국방성이 공식 발표했다. 국방성 대변인은 이날 공해와 한국 상공을 비행 중이던 미 공군의 SR-71 정찰기의 승무원들이 기체에서 수 마일 떨어진 거리에서 비행운과 함께 뒤이은 공중 폭파를 목격, 이를 보고해 왔다고 밝히고 이 정찰기가 아무런 피해 없이 무사히 기지로 귀환했다고 덧붙였다. 이 대변인은 그것이 미사일일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하고 ... ](「북괴, 미 고공정찰기 미사일 공격 - 미, 대응조처 검토」<조선일보> 1981.8.28)

(조선일보 1981.8.28)

SR-71기 격추 시도 날짜를 명기할 경우 1981년 8월 12일 미그기의 백령도 상공 출현에 대한 보복작전으로 ‘812 계획’을 세웠다는 말이 ‘꼬인다’. 8월 26일 발생했다는 사건 때문에 ‘8월 12일 보복작전’을 세웠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812 보복 계획이란 것을 세워 놓고 3년이나 질질 끈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이처럼 ‘1983 버마 사건’에 대한 모든 ‘썰’(說)은 엉성한 거짓말의 조합이다. 이런 엉성한 이야기들을 긁어모아 책을 내고 ‘썰’을 풀면서 이 사건을 이북의 소행이라고 강변한다. 내로라하는 자들이 모두 그 모양이니 온 국민이 그런 줄 안다. (7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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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황진우  2021년4월28일 00시40분    
사기꾼 이승만 일당이 세운 나라라서 여전히 사기꾼들이 판 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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