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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故 안병하 평전 19. 3부 군인에서 경찰로
안호재 | 2021-07-21 09:41:5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6·25전쟁 영웅

전쟁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전쟁은 청년 장교 안병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6·25전쟁 시기의 안병하에 대한 기록은 충암 아산에 자리 잡은 경찰인재개발원에서 2015년에 발간한 교육용 책자 『불멸의 경찰, 이곳에 영원히 살아 숨쉬다』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234 이 자료를 바탕으로 6·25전쟁 시기 그의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23세의 청년 안병하는 중위로 승진하여 춘천에 주둔한 국군 6사단의 포병 관측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당시 6사단장은 김종오 장군이고, 안병하 중위는 임부택 중령의 7연대 16포병대대 소속이었다. 휴전선과 가까운 춘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부터 북한군의 포화가 집중됐다. 6사단 7연대는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교전을 벌였다. 북한군의 전략은 서부전선을 돌파하는 동시에 춘천과 홍천 방면의 동부전선을 뚫어 수원 이남으로 진출해서 수도권을 포위한다는 계획이었다. 급작스런 남침 상황에 서부전선 1사단과 7사단이 대책 없이 무너졌다. 동해안 강릉에 상륙한 북한군에 의해 그곳을 지키던 국군 8사단 역시 대관령으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내륙에 위치한 춘천과 홍천의 동부전선만 전투에 대비할 시간 여유가 다소 있었다.

춘천을 6월 25일 새벽에 기습 공격한 북한군 부대는 2사단과 7사단으로 2만4천 명이나 되는 큰 규모였다. 국군 6사단은 25일과 26일 이틀간 춘천 옥산포 보리밭 개활지에서 밀려드는 적을 맞아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다.*235 이 전투에 참전한 안병하 중위는 무전병 한 명만 데리고 북쪽 지역으로 침투해 적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구해오겠다고 자청했다. 북한군 화력이 너무 우세해서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안 중위를 적진에 보내고 참모들은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렸다. 적진 깊숙이 들어간 안 중위는 본부에 무전을 보냈다. 적의 화력과 배치상황을 상세하게 본부에 보냄으로써 6사단은 북한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화력이었지만 이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적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 7월 5일 미군 지상군이 투입됐지만 죽미령 전투에서 패배한 미군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황은 좀체 호전되지 않았다. 안병하가 소속된 6사단도 8사단과 더불어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철수를 거듭했다. 국군은 미군과 낙동강 방어선을 경계로 지연전을 계획했다.

음성 동락리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바로 이때다. 6사단은 춘천 전투를 치르고 원주를 거쳐 충주로 후퇴하면서 적의 남하를 늦추기 위해 전투를 계속했다. 7월 7일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북한군 15사단이 장호원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병하가 소속된 7연대를 장호원에 급파한다. 장호원에 도착해보니 북한군은 이미 장호원을 통과해 음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려왔다. 7연대는 음성 북쪽에 매복했다.*236 그날 오후 5시, 국군 7연대의 기습 공격이 시작됐다. 방심하던 북한군 48연대는 포위망을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 채 전력 손실을 크게 입었다. 이 전투는 다음날 7월 8일 오전 8시까지 15시간이나 지속됐다. 북한군 전사자는 1천여 명이나 됐고, 포로가 97명에 이르렀다. 7연대는 이 전투에서 차량 80여 대와 장갑차 10대, 소총 등 2,050여 정, 122미리 박격포 6문 등 각종 무기를 노획했다.*237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린 것이다. 당시 동락리 전투를 주도했던 국군 7연대 2대대는 병력이 400여 명, 81밀리 박격포 1문, 중기관총 1정뿐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국군의 전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950년 9월 29일 대통령이 제6사단에 표창장을 수여했고, 7연대 모든 장병들은 1계급씩 특진했다. 안병하 역시 중위에서 대위로 특진했다. 국군 창설 이후 최초로 거둔 가장 큰 규모의 전과였다. 여기서 노획된 무기들은 유엔총회로 보내져서 소련이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국군은 이후 평택, 안성, 충주, 울진을 잇는 저지선을 설정할 수 있었다. 저지선의 동부는 국군이, 서부는 유엔군이 담당하는 전선의 재정비가 이뤄지게 됐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1950년 10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 진출 한계선인 38선을 철폐하고 제8군사령관과 제10군단장에게 전 병력을 투입해 가장 빠른 속도로 국경을 향해 진격하라는 수정명령을 하달했다. 그러자 모든 부대들이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압록강의 국경선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안병하가 소속된 6사단은 선두에서 평양을 우회하여 순천에 맨 먼저 진출했다. 이곳에서 퇴각하던 북한군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150여 대의 차량을 노획했다. 6사단은 이 수송수단을 이용함으로써 가장 앞선 선두부대로 북진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할 수 있었다. 북진 중 계속해서 차량을 더 노획하여 300대의 트럭을 타고 어느 부대보다 빠르게 압록강에 도착했다.

1950년 10월 26일 아침 7시에 6사단 7연대는 압록강을 향해 마지막 진격작전을 시작했다. 초산 남쪽 6킬로미터 지점에서 북한군 8사단의 패잔병과 치열한 교전이 있었으나 곧 제압했다. 차량에 탑승한 안병하의 7연대 1대대(대대장 김용주 중령)는 초산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고, 이날 오후 2시 15분 드디어 압록강 남단의 한만국경선까지 진출했다. 국군으로서는 압록강에 도착한 최초의 부대였던 것이다. 그곳은 한반도 북부 끝으로 강 너머는 중국 땅인 만주였다. 더 이상 진격할 곳이 없었다. 안병하의 1대대 장병들은 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압록강 물을 수통에 가득 채웠다. 가슴 벅찬 흥분의 순간이었다. 이 역사의 현장에 안병하가 있었다. 이 부대는 ‘초산 부대’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감격의 순간은 짧았다. 다음날인 10월 27일,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압록강변 초소를 방문해서 서쪽 벽동 쪽으로 진격했던 2연대가 중공군 매복에 걸려 고전하고 있다고 걱정하며 돌아갔다. 압록강에 머문 시간은 채 이틀도 되지 못할 만큼 짧았다. 28일 오후 5시 초산읍에 자리 잡은 1대대에는 중공군이 퇴로를 차단했다는 소식과 함께 즉각 신속히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29일, 7연대는 중공군의 사격과 교량 파괴를 뚫고 남하하면서 포위망을 벗어나려 했으나 실패했다. 30일 자정 한밤중에 길게 늘어선 7연대를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 사단이 동쪽으로, 제40군 예하 3개 사단이 서쪽으로 묘향산 일대 퇴로를 차단하면서 덮쳤다. 이때 7연대는 병력의 76%가 전사했다. 생존자도 대부분 포로가 되었다. 부대 자체가 붕괴되고 말았다. 안병하 대위는 이날 밤 야음을 틈타 깊은 산속으로 피신했다. 낙엽 속에 몸을 숨긴 채 3일을 버텼다. 9일 후에야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아군 지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238 1957년 5월 7일 자 보병 6사단 소속 대위 안병하는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군인에게 주어지는 ‘무공훈장’을 받았다. 무공훈장증에는 ‘멸공전선에서 제반 애로를 극복하고 헌신 분투하여 발군의 무공을 수립하였으므로 그 애국지성과 혁혁한 공적을 가상하여 대통령내훈 제2호에 의거 부여된 국방부장관의 권한에 의하여 이에 무성화랑 무공훈장을 수여“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안병하는 6·25전쟁을 통해 화랑무공훈장 2개와 상이기장, 6·25참전기장 등을 수훈했다. 전쟁 영웅이 된 것이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살아남았던 그는 보기 드물게 운도 좋았지만 부하들을 아끼고 실제 전투에 임했을 때는 지휘관으로서 용맹스러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결혼

그 후 안병하 대위는 대구 육군본부 감찰장교로 감찰관실에 근무하다가 강원도 고성에 주둔하고 있던 15사단 감찰부 보좌관으로 전속되었다. 1953년 봄에 결혼했다.*240 휴전 체결을 앞두고 있던 때라 전방에서는 아직 포연이 사라지지 않았다. 휴전협정 타결을 앞두고 막바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수시로 소규모 전쟁이 발생할 때였다. 그런 상황인지라 민간인은 고성까지 마음대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는 안병하의 이모가 살고 있었다. 신부 전임순은 군복을 입고 안병하 대위와 둘이 지프차에 탄 채 고성면에 있는 이모집으로 갔다. 속초중학교 강당에서 신랑의 친지들과 고향친구, 군부대 동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15사단 사단장 주례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들러리는 신랑의 지인들이 맡았다. 신혼생활은 이모집에서 시작했다. 그 후 부모도 고향에 다시 와서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다.

결혼 후 안병하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사단 감찰부장이 되었다. 곧이어 몇 달 후 부대 이동에 따라 춘천으로 이사를 했고, 그 후 화천의 9사단을 거쳐, 양구 2사단에서 중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 부연대장이 됐다. 결혼한 다음 해인 1955년 말에 첫 아들을 낳았고, 둘째 아들은 1956년 12월, 셋째 아들은 1959년 5월에 태어났다. 비록 전방생활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었다. 안병하는 강원도 양구에 있을 때 중령을 마지막으로 군복을 벗고 경찰로 전직했다.

안병하의 부인 전임순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1933년에 8남매 중 장녀로 출생했다. 아버지 이름은 전우(全祐), 어머니는 이순녀다. 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이었는데 3남매 중 장남이었다. 전임순의 삼촌과 고모는 동경에 유학을 갔고, 아버지 역시 일본 유할 후 30대 초반에 함경북도 성진에다 출판사를 차렸다. 성진에서는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출판사였다. 전임순이 8살 되던 1941년 대동아전쟁이 한참일 때 충청남도 성환으로 집을 사서 이사했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곧바로 서울 용산 원효로 쪽으로 이사했고 전임순은 용산국민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사업수완이 좋았다. 무궁화표 비누, 닭표 간장, 닭표 성냥 공장의 창설자로서, 하는 일마다 잘 풀렸다.

한편 전임순의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해방 전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자주 왕래했지만 휴전선이 생기면서 할아버지는 더 이상 나오지 못하고 고향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남북이 통일되기를 소원하면서 월남해서 서울로 오는 친척들을 일일이 보살폈다. 집을 얻어주고 학비도 대주면서 여러 친척들이 자리 잡고 살 때까지 도움을 베풀었다. 그러다보니 집에는 20여 명 이상의 식구들이 항상 북적거렸다.

전임순이 수도여고 2학년 때 6·25가 터졌다. 억수같이 비오는 날 피난가려고 준비하던 중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끊어졌다. 한강철교와 가까웠던 그녀의 집 마루에 폭탄이 떨어졌다. 그날 아침 18명의 식구가 한데 모여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몇 명이 다치기는 했으나 다행히 한 명도 죽지는 않았다. 옆집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 그 후 효자동 자하문 밖 과수원에 집을 얻어서 살다가 1·4후퇴 때는 일찌감치 대구로 피난을 갔다. 대구에서는 경북여고에 다녔다. 아버지는 대구에서도 과수원 창고를 얻어 닭표 성냥공장을 차렸는데 전쟁 중이지만 잘 팔렸고, 딸린 식구는 여전히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에 폭탄이 떨어졌을 때 얻은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51년 봄 방학 때 어렸을 적 함께 자랐던 삼촌 소식을 들었다. 피난 중에 헤어졌는데 부산 동래 온천 지서장으로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와 함께 부산으로 찾아갔다. 친구는 오빠가 군인이었는데 전쟁 중에 소식이 끊겨서 혹시 삼촌을 만나면 알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함께 나섰다. 마침 삼촌은 전라도 지리산 토벌작전에 참가한 터라 숙모만 만날 수 있었다. 오빠를 찾고 싶어 하는 친구의 사연을 듣고 숙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군인이 있는데 혹시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그를 불렀다. 다음날 그 군인이 숙모집에 나타났다. 호리호리한 키에 미남형의 대위였다. 그때 안병하 대위를 처음 만났다. 안 대위는 당시 전투 중에 입은 상처 때문에 부산 동래에 있던 육군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숙모 부부는 서울에 있을 때 안 대위가 노량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했다. 친구가 오빠의 부대를 이야기하면서 안 대위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하자 곧바로 소재지를 알려줬다.

그때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당시 부산에 살던 수도여고 친구 안정옥(아버지가 부산 영도 자혜병원 원장)을 통해 이어졌다. 대구 육군본부 감찰관실에 근무할 때에도 전임순은 친구들과 함께 안 대위를 몇 차례 더 만났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돼 통영으로 이사를 했다. 안 대위는 부산 친구 안정옥을 찾아와 전임순과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꺼냈다. 전임순은 당시 결혼할 형편도 아니고 서울 가서 대학에 다닐 생각이라 청혼을 거절했다.

이윽고 안 대위는 전방으로 떠났다. 얼마 후 전임순의 식구들은 서울로 올라왔다. 문득 안병하 대위가 그리워진 전임순은 용기를 내서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를 찾아갔다. 감찰 배지를 단 장교에게 안병하 대위의 근무지를 수소문했다. 장교는 친절하게 전화까지 연결해줬다. 안병하 대위는 설레는 마음으로 당장 서울로 전임순을 찾아왔다. 건강을 회복한 안병하의 모습은 대구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늠름하고 매력적이었다. 안병하는 전임순의 아버지가 딸의 공부 때문에 결혼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집으로 찾아왔다. 마침내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결혼 승낙을 얻었다.

결혼 후 안병하는 곧바로 소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결혼 후에도 줄곧 감찰 장교로 지냈다. 휴전 후 군은 아직 질서가 잘 잡히지 않은 데다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던 시절이라 원조 군수 물자를 둘러싸고 비리사건이 많았다. 소위 ‘끗발 좋은 자리’였다. 당시 군 감찰부는 비리가 심했던 보직이고, 마음만 먹으면 큰 부를 축적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를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군납업자의 비리를 파헤치고 조사를 하여 납품업자들에게 테러를 당하거나 협박을 받는 등의 일도 빈번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비리를 적발하면 단호하게 처리했다.

1960년 4월 19일, 4·19혁명이 터지던 날 처갓집에 와 있던 아내를 만나기 위해 안병하는 잠시 서울로 나왔다. 아내와 함께 광화문 일대를 지나면서 격렬하게 시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군인은 국방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 이재의
전남대 경제학과 졸업, 조선대 경영학 박사, 《광주일보》 ‘월간 예향’ 기자, 《광남일보》 논설위원.
19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 그해 10월 체포, 1981년 5.18특사로 석방.
1985년 5?18 광주항쟁 최초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기록) 초고 작성, 2017년 전면개정판 공동 집필.
2000년 내외신 기자들의 5?18 취재기 The Gwangju Uprising(M.E, Sharpe)을 《뉴욕타임스》 특파원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와 함께 편집하여 미국에서 출판.
현재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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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불초자  2021년7월26일 17시38분    
이재의 작가님에게 한 말씀 드립니다.
안병하 치안감의 민주화의 업적과 공로는 가히 칭송하고 본받을만 하지만,
민족사의 비극에서마저 그 삶의 위대함을 거론하는 것은 솔직히 불편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6.25를 남침야욕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만은 없습니다.
일방의 침략이었다면, 과연 38선에서 밀리고밀리는 전투가 874회나 계속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입장도(미국의 역사학계마저도) 당시 누가 먼저 시작하느냐는 시간문제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우리가 이 지점으로부터 출발하는 데 무척 인색한 것 같아 당혹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국군의 지휘부는 일본육사, 만주군관, 군사영어학교, 한마디로 매국이 전쟁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을 통과하면서, 애국으로 치환된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반면 인민군의 주력을 형성했던 부대들은 모두 하나같이 항일무장독립 투쟁의 전력이 있던 부대들이었습니다. (김두봉의 독립동맹/ 김원봉의 조선의용군/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등)
십만의 독립군이 참전했을 정도면 6.25에 대한 해석을 이제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아야 할 때도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역사학계는 친일반공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도 주도권을 쥐며, 이 전쟁의 주범인 미국을 미화하고, 반공을 통과한 친일을 애국으로 기록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왜 이런 자들이 기록한 것을 우리의 민족사로 받아들여 동족을 멀리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지, 큰 분노가 입니다.

(반공의 눈으로, 미국 중심으로 민족사를 바라보지 않기를 우리부터 탈피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은 역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대립과 흑백의 눈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더는 역사가 아닌 것이 됩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실체이기에 그 해석의 도구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탐색의 결과가 다채롭게 나오게 돼있는 것이 역사가 갖는 유일한 진실입니다.
이것이 참이고, 다른 것은 배척해야 마땅하다면, 그때부터 역사는 <진영>으로 변질됩니다. 대립과 반목의 이념을 끊임없이 생산해내어 인류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불행히 현재 인류가 지나고 있는 세상입니다. 핵 무기를 포기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머지않은 때에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전쟁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진 역사입니다. 당시의 국내상황, 주변 열강들의 이해관계, 민심을 크게 자극한 사건과 사고 등 매우 복잡한 과정이 해석돼야 그 실체가 그마나 아주 조금 드러납니다. 어떤 해석의 도구를 썼느냐에 따라 관점이 크게 달라지기에 우리는 여러 도구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라는 단순한 흑백과 대립의 이데올로기의 도구만을 가지고 그날을 들여다본다면, 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가 아닌, 왜 그 비극이 우리 땅에서 벌어졌는가를 묻는 민족의 시각이 우리 역사해석에서는 매우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도구)입니다.
또 왜 그날의 진실을 알 수 있는 사료와 증언과 기록들이 북한 땅에도 없겠느냐를 묻는 기득권에 맞선 기백도 우리 역사해석에서는 빠질 수 없는 덕목입니다.
한쪽만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한면만을 강조해 전체를 왜곡하는 것은 일방의 주장일 뿐, 역사가 아니라는 철학적 관점과 인문적 사유도 역사해석의 도구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도구들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이 6.25라는 말부터 다시 탐색해 적당한 용어를 발굴해내야 할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날을 기억하자는 정치적 의도가 그 밑에 도사리고 있는 군사정권의 산물이 숫자로 각인되어 우리의 심리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25=남침야욕'이라는 공식이 일반화되어 왔기에, 누가 먼저 침략했느냐에 극도로 집착해 왔기에, 이 비정상의 분단체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근현대 세계사 어디를 둘러보아도, 국경을 둘러싼 대규모의 군사적 충돌은 그 화해까지 30년이 안 되어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들에 비해 단일민족 체제입니다.
우리가 유일하다는 것은 이 비극의 시작점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도그럴 것이 7천만 한겨례가 살고있는 이 땅은 세상의 무력과 권력이 몰려드는 합수지점인 까닭입니다. 저들이 우리 남북을 동맹과 동지의 이름으로 기만하며 놓아주지를 않는 배경입니다.
우리가 이 거대한 힘을 뚫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왜 이 분단과 이산의 아픔이 계속 되는지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묻는 작업을 이제 시작해야 합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갸 아니라, 왜 이 비극이 우리 땅에서 벌여졌는가를 물어야 현재 우리가 어디에 처해있는지 그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그 힘을 제압하게 됩니다.
단결해도 이 힘을 극복하기는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서 그에 대한 저항심이 일어날 양이면 바로바로 동맹과 동지의 이름으로 무력화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남북이 합심해서 이 힘을 제압해야 역사의 틀어진 물줄기를 본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절박한 시점에, 앞장서 항거해야할 우리 지식인들이 무기력함과 나른함에 대중들이 빠져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식인들이여, 민족사를 이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국에 가깝습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해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목숨을 살린 안병하 치안감이었다면,
국립묘지보다는 망월동 묘역에 그가 지키고자 했던 광주시민들과 안장되는 편이 어땠을까, 그것이 더 그분의 고결한 희생정신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마지막 가는 모습에 더 어울리고 부합하는 풍광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권력과 재물을 중대한 가치로 여겼던 기회주의자들이 잠들어있는 그곳이 과연 <민중과 진실>과 늘 함께 하기를 염원했던 안병하 치안감이 있을 자리였던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렇게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 민초들이 고인을 우리와 더 가까운 곳에 두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 때문일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고결한 희생으로 민주화된 나라에서 살고있는 수혜자의 한 사람으로 유족들의 그간의 노고와 희생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작가님도 감동깊은 글로써 우리 경찰을 다시보게 해준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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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적자, 정치인-자본-관료의 ...
                                                 
미국 “북한 미사일 발사 규탄… ...
                                                 
[연재] 지금, 이 혹성에서 일어나...
                                                 
[신상철 TV] [민초강론-08] 천안함...
                                                 
청소노동자의 외침 “차별받아도 ...
                                                 
이재명, 다자대결도 계속 1위… 이...
                                                 
태풍 ‘찬투’ 최근접 제주, 항공...
                                                 
천안함의 진실을 지킨 사람들과 박...
                                                 
지평선
                                                 
물구나무 선 대학 순위, 언론 순위
                                                 
[이정랑의 고전소통] 인물론 天才 ...
                                                 
전두환 비서출신 이용섭 사건 재정...
                                                 
“귀환” KAL858기 사건 33주기 추...
                                                 
[연재II] 故 안병하 평전 ⑦ 1부 ...
                                                 
[오영수 시] 친정과 시댁 사이
19625 [오영수 시] 우리의 사랑은 천 년...
10530 후원의 이유
6631 [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
6556 “한반도 평화공존 공동번영의 새...
6500 [오영수 시] 한국 검찰과 사무라이...
6344 한국형 아이언돔, 북한 장사정포 ...
5962 미군이 ‘참가’ 발표한 연합훈련...
5933 진실화해위원회 결정 짓밟힌 진실...
5913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는 필연...
5737 ‘꼬꼬무’ 아웅산 테러 이야기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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