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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故 안병하 평전 ⑭ 2부 대한민국 ‘경찰 영웅’이 되다
안호재 | 2021-07-09 10:39:2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3.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기까지

○ 명예회복을 향한 긴 여정

안병하의 명예회복은 살아 있는 가족의 몫이었다. 미망인 전임순이 남편의 명예회복에 나서게 된다. 남편 투병생활에 돈을 쏟아붓다보니 큰 빚만 남았고 결국 단칸 셋방살이로 내몰리게 됐다. 물질적인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5∙18의 진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자식들에게 남편이 ‘무능한 존재’로 비쳐진다는 점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안병하를 근무지 이탈과 진압작전에 실패한 ‘무능한 지휘관’으로 치부했다. 광주학살극의 책임이 안 국장에게 있다는 식으로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광주의 진실’로부터 차단된 서울지역의 ‘냉담한 분위기’도 견디기 힘들었다. 고인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탄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하소연을 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유족들이 안 국장의 명예회복을 위해 치안본부, 보훈처 등 사방 온갖 군데를 돌아다녔지만 누구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세상의 무관심에 상처받고 그 억울함이 한이 되었다.

“1989년 종합청사에 민원을 제기했다. 치안본부로 넘겼다. 치안본부에 찾아가니 보훈처로 가라고 했다. 보훈처는 공무원연금공단으로 보냈다. 연금공단은 다시 치안본부로 돌려보냈다.”

울분의 세월을 홀로 삭여야 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간혹 연락하던 사람들도 발길이 뚝 끊겼다. 국회 5∙18 청문회는 1988년 11월 시작했지만 1월 26일과 27일 사이에 제4차 증인 청취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청문회가 중단된 상황에서 정부는 1989년 3월 대통령의 ‘광주문제 조기 치유’ 방침에 따라 ‘광주민주화운동 피해보상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야당은 청문회를 지속해야 한다며 법안 자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상태에서 1년이 흘렀다.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의 국회 증언 청취를 마지막으로 청문회는 더 이상 열리지 못한 채 유야무야돼버렸다.

정치상황도 어려워졌다. 1990년 1월 22일 ‘3당합당’ 선언으로 민정당(노태우), 민주당(김영삼), 공화당(김종필) 등이 민주자유당(이하 민자당)으로 몸집을 불렸다. 4.26 총선으로 만들어졌던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바뀌어버렸다. 언론에서는 3당합당이 정치적 야합이고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비난했지만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만 홀로 야당으로 남았다. 이때부터 5∙18은 여당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1990년 7월 14일 민자당은 야당과 광주시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주보상법안을 기습통과 시켜버렸다. 평민당은 반칙으로 통과된 광주보상법은 무효라며 헌법소원을 내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으나 정부 독단으로 그해 8월 6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이에 근거하여 5∙18 피해자 보상을 강행했다. 야당은 정부가 진상규명은 덮어둔 채 돈으로 5∙18을 덮어버리려는 속셈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 항의하는 치열한 저항의 움직임이 대학가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듬해 1991년 5월 전남대생 박승희가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이때부터 강경대,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김귀정, 이진희, 석광수 등 13명의 젊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이어갔다. 사상 초유의 분신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경찰과 정보기관을 앞세워 더욱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신공안정국’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 광주 사람들에 의한 5∙18 관련자 인정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5∙18 문제는 다시 큰 변곡점을 맞게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탄생했다”고 선언했다. 1988년 청문회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된 진상규명의 기회였다. 광주시민들은 ‘5∙18 해결을 위한 5대원칙’을 천명했다. 5∙18 피해자들에 대한 2차 보상이 시작됐다. 1994년 5월부터 광주학살 책임자에 대한 고소, 고발운동이 범국민운동 차원에서 전개되면서 5∙18 공동대책위는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관계자 10명을 ‘내란목적 살인죄 및 살인미수죄’로 검찰에 고소했다. 1년 동안의 수사 결과, 검찰은 1995년 7월 13일 ‘공소권 없음’으로 그들을 모두 불기소처분 해버렸다. 그러자 국민들이 나서서 ‘5∙18 학살책임자처벌 특별법’을 제정하자며 ‘검찰의 기소촉구’를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헌법소원이 제기됐고, 노태우 비자금 4천억 원이 폭로됐다.

1995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검찰은 여기에 발맞춰 발 빠르게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하여 12∙12와 5∙18 사건의 재수사에 착수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대통령 재임 중 비리사건으로 전격 구속 기소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신군부 우두머리 전두환(반란 및 내란수괴, 무기징역)과 노태우(반란 및 내란중요임무종사, 징역 17년)를 재임기간 중 수천억 대의 뇌물을 수수한 범죄자로 확정했다. 그밖에도 내란중요임무종사 및 내란목적살인죄로는 황영시(8년), 정호용(7년), 이희성(7년), 주영복(7년) 등 4명이 처벌됐다. 보안사 참모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 3명에게는 반란 및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각각 징역 8년씩이 선고됐다. 12∙12 당시 행동대 역할을 했던 최세창(5년), 박종규(3년6월), 신윤희(3년6월)는 반란중요임무종사로, 차규헌(3년6월), 유학성(재판 중 사망) 등 모두 15명이 반란 및 내란모의참여자로 실형을 받았다.

남편을 여의고 통한과 실의에 차 있던 미망인 전임순 여사에게 5∙18 당시 남편과 함께 근무하다 해직당한 부하 경찰관들 몇 명이 찾아왔다. 1990년 8월 광주피해보상법에 따라 정부가 보상을 실시하자 이 가운데  4명이 소청을 냈다. 이때 이들이 나서서 안병하 국장도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며 함께 소청을 상신했으나 기각돼버렸다. 노태우 정권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남경찰의 ‘직무유기’ 혐의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군사정권 아래서 남편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정부의 입장을 확인하고 보니 절망감과 분노심이 컸다. 전임순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묵직한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두문불출한 채 삶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들어서 다시 5∙18 피해자 신고 접수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광주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이 안병하 국장을 명예회복 시켜야 한다며 찾아왔다. 안 국장의 명예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남 경찰 나아가 대한민국 경찰 전체의 명예이고, 광주시민의 긍지가 걸린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만약 정부가 명예회복을 시켜주지 않으면 ‘광주시민’이 앞장서서 그분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노태우 정권 때 개인적인 차원에서 소청을 낸 것과는 달랐다. 그때는 억울하게 해직된 공무원의 신분을 회복해달라는 청원이었다. 이번에는 ‘5∙18 피해자’로 인정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임순 여사는 그때 “광주 분들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어 ‘해직공무원’으로서가 아니라 ‘5∙18 피해자’로 당당하게 인정받아야 떳떳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1993년 7월 8일, 고 안병하 도경국장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 5∙18 피해자로 신고했다. 그러자 광주지역 언론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6 그러나 광주시에 설치된 5∙18 관련자 심의위원회는 1심에서 고 안병하 국장을 관련자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위원회는 기각 사유를 뚜렷하게 밝히지 않았다. 5∙18 수배자로 미국에 망명했다 귀국한 윤한봉도 그때 관련자 심사에서 기각됐다. 이들은 5∙18 피해보상법에 명시된 ‘관련자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각 사유였다. 광주지역 여론이 거세게 반발하며 들끓었다. 결국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5개월 후 1993년 12월 17일 열린 재심에서 안 국장을 비롯 ‘실정법상의 한계’ 때문에 제외된 인사들 상당수가 ‘5∙18 관련자’로 인정됐다. ‘광주에서 광주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5∙18 관련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206 이재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 신고한 당시 전남도경국장 미망인 전임순」, 《월간예향》. 96~101쪽, 1993. 9.

○ 광주에서 찾은 ‘아버지 안병하에 관한 진실

13년 만에 명예회복의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전임순 여사는 한많은 세월을 고통 속에서 살다 돌아가신 남편의 시신을 당장 광주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묘역에 안장하고 싶었다. 당시 고 안병하 국장의 유해는 경기도 장호원 소재 공원묘지에 묻혀 있었다. 명예가 회복되면 국립묘지에 안장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쉽지 않았다.

남편이 5∙18 관련 피해자로 인정받은 데 대한 그녀의 기쁨은 컸다. 당장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셋째 아들 안호재 부부와 함께 광주로 내려갔다. 1993년 12월 초였다. 광주 동구 광산동 구 시청 사거리 식당들이 밀집된 골목에다 ‘도궁회관’이라는 자그마한 식당까지 차렸다. 광주에 뿌리를 내리고 살겠다는 생각이었다. 남편의 5∙18 당시 행적을 늦게나마 이해해준 광주 시민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어머니와 함께 아들 안호재는 아내와 여섯 살배기 딸 모두 광주로 이사를 했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광주에서 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안호재는 광주에서 아버지의 옛 직장 동료 경찰들을 한 사람씩 만났다. 그들을 통해 5∙18 당시 아버지의 행적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훌륭한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어렴풋이 알았던 아버지에 대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광주에 가서야 비로소 ‘5∙18 당시 광주에서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가족들의 광주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식당이 잘 운영되지 않았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이 광주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1994년 2월 15일 ‘광주민주화운동 상이자 장해 등급 판정 등 심의위원회’는 안병하 국장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가 5∙18 당시 고문으로 인한 부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며 ‘간접사인’을 인정했다. 그해 5월 2일, ‘보상금심의위원회’는 안병하 국장의 피해보상금을 832만 원으로 결정했다. 1980년 5월 27일부터 6월 2일까지 합동수사본부에 억류돼 있던 8일간 연행구금 일수에 대해서만 하루 4만 원씩 적용해서 32만 원, 여기에다 생활지원금 및 위로금 800만 원을 합친 금액이었다. 합동수사본부의 고문, 그로 인한 8년간이 투병과 사망은 피해보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공직자로서 공무상 희생은 인정하지 않았고, 단순 피해자로만 인정한 셈이었다.

유족은 곧바로 1994년 9월 8일 피해보상금 산정이 원천적으로 잘못됐다며 ‘기타지원금 지급 중 사망보상금 추가 지급 이행’에 대한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1997년 5월 29일, 3년 6개월에 걸친 법정소송 끝에 대법원(97, 누3330)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사망에 이르렀다 할 것이어서 생계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라 할 것이므로 피고는 기타지원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보상금 지급 결정액은 이자 포함 1억2백만 원이었다.

법원의 판결은 합동수사본부의 고문이 사망의 원인이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었다. 승소는 했지만 유족으로서는 매우 씁쓸했다. 왜 보상금심의위원회는 명백한 사실을 두고 유족에게 이토록 인색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울컥 치솟는 억울하고 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5∙18은 이미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인 평가가 내려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기관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고 안병하 국장은 광주시민을 보호하고 경찰의 본분을 지키고자 자신은 물론 가족마저 희생시켰다. 국가가 앞장서서 예우는 못할망정 이렇듯 궁색하게 재판까지 거쳐서야 겨우 사망자로 인정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족은 이때 받은 보상금 대부분을 투병 때문에 쌓였던 빚을 갚는 데 썼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 2003년 1월 21일 고 안병하 국장은 국가보훈처에 광주민주유공자로 등록되었다. 그해 4월 15일 노무현 대통령 이름이 새겨진 ‘광주민주유공자 증서’거 유족에게 우편으로 배달됐다. 2002년 1월 26일 제정된 ‘5∙18 민주화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 3항에 규정된 적용대상자 *207로 공식 인정된 것이다. 이 법의 취지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망, 부상 또는 구속 등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희생을 당하신 분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그분들의 민주화에 대한 공헌과 희생에 상응하는 보상과 예우를 하는 것은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의 당연한 의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208 이 법에 따라 보상심의위원회는 2002년 10월 8일 ‘재심의 결정서’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207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2002. 1. 26, 제정)은 제4조 적용대상자를 1. 광주민주화운동사망자 또는 행방불명자, 2. 광주민주화운동부상자, 3. 기타 광주민주화운동희생자(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2조의 규정에 의하여 보상을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
*208 국회정무위원회,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 검토보고서’중 법 제정의 필요성, 2001. 2.

*저자 이재의
전남대 경제학과 졸업, 조선대 경영학 박사, 《광주일보》 ‘월간 예향’ 기자, 《광남일보》 논설위원.
19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 그해 10월 체포, 1981년 5.18특사로 석방.
1985년 5?18 광주항쟁 최초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기록) 초고 작성, 2017년 전면개정판 공동 집필.
2000년 내외신 기자들의 5?18 취재기 The Gwangju Uprising(M.E, Sharpe)을 《뉴욕타임스》 특파원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와 함께 편집하여 미국에서 출판.
현재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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