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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故 안병하 평전 ⑬ 2부 대한민국 ‘경찰 영웅’이 되다
청문회 포문 연, 정웅 의원
안호재 | 2021-07-08 08:22:0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부 대한민국 ‘경찰 영웅’이 되다

■ 청문회 포문 연, 정웅 의원

1988년 7월, 국회는 광주특위를 구성하여 5∙18청문회를 11월부터 열기로 여야가 합의했다. 여당인 민정당은 안병하를 여당 측 증인으로 신청했다. 당시 각 당에서는 89명(민정당 35, 평민당 28, 민주당 18, 공화당 8명)의 증인 명단을 국회에 제출했다. *199 민정당 측 증인으로는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계엄군 상층부 인사를 비롯, 정웅(31사단장) 등 31사단 관계자들, 신우식(7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등 진압군 관계자들, 그리고 안병하 도경국장이 포함됐다. 공화당에서는 이학봉(보안사 대공처장) 등 보안사 참모들과 더불어 특이하게도 서정화 당시 중앙정보부차장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광주 동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웅 전 31사단장이 7월 5일 임시국회가 개원하자마자 대정부질의를 통해 포문을 열었다. *200 “나는 1980년 5월 20일 무혈진압을 주장하다 공수부대 작전지휘권을 박탈당했고, 21일 발포명령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결정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답변에 나선 오자복 국방부장관은 “계엄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가 있었을 뿐 지휘관으로부터 발포명령은 없었으며, 진압작전의 책임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는 정웅 장군, 22일부터 27일 사이엔 소준열 전교사령관 책임”이었다고 답변했다. 전두환, 정호용 등 신군분 핵심인사들의 진압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게 국방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평민당이 정웅 의원을 ‘5∙18저격수’로 내세우자, 군과 정부 여당 측에서는 ‘정웅 죽이기’에 총력전을 펼쳤다.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전 31사단장 정웅 관계자료」*201 에 포함된 「광주사태시 정웅 31사단장 동정」, 「정웅 신상명세서」 등은 5∙18 당시 진압작전 과정에서의 역할 뿐 아니라 그의 사생활까지 낱낱이 들춰내 폭로하는 악의적인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511위원회’는 정웅의 발언을 반대로 뒤집기 위해 당시 31사단 작전보좌관 임00을 회유하여 청문회에 증인으로 내세웠고, ‘정웅 사단장의 5∙18 당시 행적’에 대하여 사실과 다른 허위 증언을 하도록 유도했다. *202

여당 측에서 안병하 경찰국장을 증언자로 신청한 것은 5∙18 당시 경찰의 소극적인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는 점을 추궁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나의갑 《광주일보》 기자와 병상 인터뷰 때 안병하 국장 역시 여당에서 자신을 증인으로 채택한 배경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신군부는 경찰이 안 국장의 지시에 따라 처음부터 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극적으로 시위진압에 나선 것이 초기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511위원회가 준비한 안 국장에 대한 국회답변 자료는 5∙18 직후 국보위 조사단(단장 이광로)과 합동수사본부의 연장선에 있었다. 안 국장의 직무유기와 경찰의 소극적인 대응이 원인이라는 시각에서 군 개입의 불가피성과 경찰이 무장해제를 해버렸기 때문에 군이 불가피하게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99 정당별 5∙18청문회 신청자 명단, 1980. 기무사자료 033-002-000.
*200 142회 임시국회 회의록, 정웅 의원 질의 및 오자복 국방부장관 답변, 1988. 7. 5.
*201 「전 31사단장 정웅 관계자료」, 보안사 018-016-000.
*202 「임00 청문회 증언 전문」, 서울지검 수사기록 035-007.

■ 만약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면∙∙∙

청문회가 시작되기 직전 안병하 국장은 사망했다. 직접 사인은 지병의 악화가 원인지만 그 배경에는 청문회에 대한 중압감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가 1988년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생각대로 증언을 했다고 할지라도 청문회에서 경찰의 불명예가 벗겨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군과 여당 측 증인들은 그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을 훼손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여당 측 증인은 1980년 5월 21일 경찰이 시위대에게 최초로 무기를 피탈당한 시각이 집단발포 전인 ‘21일 오전 8시경’ 나주 반남 지서에서였고, 경찰의 무장해제 조치에 따른 경비 소홀이었다고 ‘조작된 증거’를 제시했을 것이다. *203 또 육군위원회와 511위원회는 31사단 작전문서를 ‘5월 18일 오후 경찰이 군 투입을 요청’했기 때문에 공수부대가 투입됐다‘고 미리 조작해둔 상태였다. 만약 안병하 국장이 청문회 석상에서 그 주장을 부인하고 사실대로 증언하면 이미 조작된 31사단의 문서를 들이대면서 다른 증거를 대보라고 추궁했을 것이다. 정웅 31사단장의 증언을 뒤집기 위해 여당 측 증인으로 나선 당시 31사단작전보좌관은 청문회에서 안병하 국장의 실제 조치사항과 완전히 반대 상황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당시 31사단 가용병력은 약 1,100여 명으로서 소요진압 1차 책임은 경찰력이고, 불가 시는 도지사 또는 경찰의 요청이 있을 때 군 병력이 투입되는 데, 당시는 전남도경 국장 안병하의 요청으로 전교사령관이 사단장에게 지시하여 공수부대의 병력이 투입되었으며∙∙∙” *204

정웅 31사단장의 사례를 보더라도 안병하 국장이 사실대로 증언했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웅 사단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수부대 작전지휘권이 5월 20일에 사실상 이미 박탈돼버렸기 때문에 5월 21일 집단발포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발언하자 여당 측은 미리 회유한 31사단 작전보좌관을 증인으로 내세워 조작된 증언으로 맞섰다. 만약 안병하 국장이 증언할 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1980년 당시 경찰의 원본 문서를 찾아서 반박해야 하는데, 노태우 정부 아래서 경찰이 안 국장의 증언을 뒷받침해줄 그런 핵심자료를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설령 있다고 해도 정부가 스스로 자신의 목줄을 죌 그런 자료를 공개할 가능성은 없었다. 청문회가 열린 ‘1988년’은 5∙18의 진실을 제대로 밝힐 수 있는 여건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 203 청문회에서 평민당 조홍규 의원은 ‘나주지역 무기피탈시각’이 1980년 작성된 원본과 비교해 1988년 청문회를 앞두고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1988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남도경 ‘상황일지’에는 시위대가 최초로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21일 오전 8시경으로 나주군 반남지서에서 카빈 3정과 실탄 270발을 탈취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조작된 것이다. 1980년 6월 3일경 나주경찰서가 작성하여 전남도경에 보고한 「나주경찰서 과내 총기 및 탄약류 피탈 조사보고」에는 나주 반남지서 습격 시각이 ‘오전 8시’가 아닌 오후 ‘5시 30분’으로 나타나 있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엮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90쪽, 2007;전라남도경찰국 「나주경찰서 관내 총기 및 탄약류 피탈 조사보고」, 1980. 6.)

* 204 임00 31사단 작전보좌관, 청문회회의록, 제144회 25차 증언, 1989. 1. 26.


3.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기까지

고인이 된 안병하 국장의 명예회복은 매우 더디고, 힘든 우여곡절을 거친 뒤에야 가능했다. 5∙18은 노태우 정부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으며, 청문회가 열려 진상의 일부가 알려지기도 했지만 명예회복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신군부 정권 아래서 전남경찰은 철저하게 버려진 존재였다. 시민의 편에 서서,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상황에서 경찰의 본분을 지켜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지만 ‘직무유기’로 몰렸고,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받다 끝내 사망했던 경찰국장 안병하의 운명처럼 전남경찰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한 채 더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경찰은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국가권력의 강제력을 행사하는 기관이자, 동시에 시민의 안전을 위한 치안유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5∙18 당시 전남경찰은 국가로부터만 외면당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로부터는 사랑도 받았지만 외면당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5월 20일 밤 사망했던 4명의 경찰관 시신은 27일까지 전남대병원과 상무관에 방석복을 입은 채로 한쪽에 방치돼 있었다. *205 시민 희생자들의 관이 태극기로 덮여 있던 것과 대비된다. 이런 모습은 당시 경찰이 공수부대를 도와 진압작전을 수행했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종료된 후가 더 문제였다.

전두환 정권은 초기부터 5∙18 관련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경찰을 앞세웠다. 대표적인 사례가 망월동에 묻힌 희생자 시신을 다시 파내서 개별적으로 이장시키라는 지시였다. 5∙18 유가족이나 부상자, 구속자의 반발은 거셌다. 해마다 5월이면 망월 묘역에서 유족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함께 뭉쳤다. 강제이장을 거부하는 유가족과 경찰 사이의 갈등은 컸다. 이때 경찰은 시민들로부터 ‘살인마 전두환 정권의 앞잡이’라는 비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갈등이 전두환 정권 7년간 지속되었다. 5∙18 당시 형성됐던 경찰에 대한 광주시민의 우호적인 감정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소진돼 버렸다. 그 대신 ‘폭력경찰’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강하게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노태우 정권 아래서도 전남경찰의 행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5∙18과 정치권력의 갈등이 지속되는 한 경찰이 처한 위치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안병하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개인이기 전에 전남경찰의 책임자였다. 때문에 그의 명예회복은 전남 경찰의 명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전남경찰이 시민들의 비난을 받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그의 명예회복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정권이 명예를 회복해줄 리도 만무했다. 결국 시민들이 안병하 국장의 억울한 사연을 제대로 알아주고 명예회복에 나섰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군부정권 아래서 경찰은 5∙18을 억압하는 데 주력했다. 안병하를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사항이었다. 그래서 그의 명예회복은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5 전남경찰청은 보고서를 통해 “시신 안치 등 사후 수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지휘부를 비롯한 동료 경찰관들의 과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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