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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인물론 후퇴를 전진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정랑 | 2021-09-02 07:45: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문공 文公】 오랜 시련을 극복하고 춘추시대의 霸者가 된다.

시련으로 단련된 인재는 그만큼 성숙하고 남을 돌보며 감쌀 줄 안다.

맹자는 만약 하늘이 누군가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대업을 맡기려 한다면 먼저 그의 정신과 육체가 고난을 겪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증진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유가의 모범적인 교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역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격려하고 자기 발전을 늦추지 않게 하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어떤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잡하고 힘든 시련을 경험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이 각자 시련을 경험한 방식이 다소 다르다는 점이다.

춘추시대 오패(五霸)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최초의 패자인 제나라 환공은 수많은 실패를 겪은 뒤에야 관중의 충고에 따라 점차 패자의 길로 들어섰다. 진(晋)나라 문공(文公)이 시련 끝에 패자가 된 것은 더욱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군주에 즉위했으며 성숙한 정치가가 되었다. 그의 이력은 앞서 말한 맹자의 교훈의 생생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문공이 패자가 되기까지의 역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춘추시대 오패 가운데 진나라 문공은 가장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다사다난한 시기에 군주가 되었으며 위기 속에서 천명을 받았다. 그러나 세태에 밝고 통찰력이 뛰어났던 그는 62세에 즉위하고서도 짧은 몇 년 사이 진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문공이 신속하게 그만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주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에 힘입은 바 크다. 그의 성공의 가장 큰 특징은 후퇴를 전진으로 삼은 점이다. 그 첫 번째 예는 화를 피하기, 위해 국외에서 19년을 떠돌아다니다 마침내 귀국하여 군주가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초나라와 성복(城濮)의 전투를 치르던 중 후퇴하여 충돌을 피한 것이다. 그 결과 문공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패자의 지위를 확립했다.

문공의 부친인 헌공(獻公) 이전에 진나라는 무려 70년에 가까운 전란을 겪었다. 문공의 조부이자 헌공의 부친인 무공(武公)이 마침내 진나라를 통일하고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헌공 역시 비교적 능력 있는 군주였다. 헌공은 여러 차례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 시켜 진나라를 북방의 대국으로 키웠다.

진나라가 계속 순조롭게 발전했다면 헌공은 틀림없이 패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여색에 빠져 그만 왕실에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일은 군주들이 흔히 저지르는 폐단이지만 이후 20여 년간 진나라에 끼친 악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헌공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먼저 정실부인인 제강(齊姜)이 낳은 태자 신생과 융족을 멸망시키고 데려온 두 첩이 각각 낳은 중이(重耳)와 이오(夷吾)가 있었다. 또 여융을 정벌하고 나서 얻은 여희(驪姬)가 낳은 해제(奚齊)와 여희의 동생이 낳은 탁자(卓子)가 있었다. 야심이 컸던 여희는 먼저 국경 수비의 명목으로 태자 신생을 곡옥으로, 중이를 포로, 그리고 이오를 굴로, 파견했다. 이렇게 공자들을 차례로 도읍에서 몰아내어 그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서로 돕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헌공 곁에는 해제와 탁자만이 남았다. 이제 여희의 두 번째 목표는 공자들을 차례차례 살해하는 것이었다.

여희는 태자를 해치기 위해 꿀벌의 계책을 세워 미리 자신의 머리에 벌꿀을 잔뜩 바르고 신생을 화원으로 이끌었다. 잠시 후 꿀벌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날아오자 여희는 신생에게 벌들을 쫓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자신은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연신 비명을 질렀다. 여희의 계책에 따라 먼 곳에서 이를 보고 있던 늙은 헌공의 침침한 눈에는 그 광경이 영락없이 신생이 여희를 희롱하는 것으로 비쳤다. 헌공은 대로했고, 신생은 그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한번은 신생이 제사에 썼던 고기를 관례에 따라 헌공에게 올렸다. 헌공이 이를 먹으러, 하는데 여희가 만류했다. 과연 고기를 먹은 개와 어린 시녀가 죽었다.

충성스러우나 매우 나약했던 신생은 여희의 모함이 계속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생이 죽은 뒤, 중이와 이오는 여희가 이처럼 음험하고 악랄한 것을 보고 급히 도읍을 빠져나갔다. 여희는 헌공에게 그들 역시 독살 계획에 참여했다고 고해바쳤고, 헌공은 즉시 사람을 보내 그들을 쫓아가 죽이게 했다. 중이는 쫓아온 환관이 내리친 칼에 소매를 베이는 위기를 맞았지만 겨우 뿌리치고 도망쳤다. 그는 외조모의 나라인 적(狄)나라로, 이오는 양(梁)나라로 도망쳤다.

오래지 않아 헌공이 병으로 죽고 해제가 즉위했다. 그런데 대신 이극(里克)과 비정(邳鄭)이 상을 치르던 열한 살의 해제를 죽였다. 해제를 옹립했던 대신 순식(荀息)은 다시 탁자를 군주로 삼았지만, 이극은 그와 탁자마저 죽여버렸다. 그래서 여희의 공들인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여희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헌공의 다섯 아들 가운데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진나라는 주인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때 진(秦)나라 목공의 부인은 태자 신생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녀는 부모의 나라가 멸망할까 두려워 진(晋)나라에 새 군주를 세워달라고 매일 남편을 졸랐다. 꾀 많은 목공은 이오와 중이 중에 누가 더 적당한지 시험하고자 했다. 그는 공자 집을 두 사람에게 보냈다. 집이 먼저 찾아간 사람은 중이였다.

“지금 진나라에는 군주가 없습니다. 서둘러 돌아가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면 이오에게 빼앗기고 말 겁니다.”

집의 권유를 받고 중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자식 된 자로서 슬픔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어찌 돌아가신 분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중이는 진나라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어서 집은 이오를 찾아갔다. 이오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했다.

“저희 나라의 대신 이극과 비정이 저를 도와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일이 성사되면 그들에게 각기 토지 백 무와 70무를 주기로 했지요. 진나라가 저를 도와주신다면 다섯 채의 성을 드려 사례하겠습니다.”

집은 귀국하여 그간의 일을 목공에게 보고했다. 사람들은 모두 중이가 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오를 진(晋)의 군주로 삼아야만 자기 나라를 망치고 진(秦)나라에 득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마침 제나라 환공도 이오를 군주로 점찍고 있었으므로 두 나라는 힘을 합쳐 군사를 파견하여 이오를 즉위시켰다. 이 사람이 바로 진나라 혜공(惠公)이다.

이오는 과연 간교하고도 잔인했다. 그는 먼저 이극을 죽인 뒤 다시 비정 등 10여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나라 안이 안정된 다음에는 앞으로 중이가 큰 화근이 될 거라고, 생각하여 예전에 중이를 뒤쫓았던 환관을 보내 그를 암살하도록 명했다.

중이는 적나라에서 12년을 머물렀다. 진나라에서 꽤나 재능 있는 인물들이 그를 따라 적나라에 왔다. 그중 유명한 사람을 꼽는다면 호모(狐毛), 호언(狐偃), 조쇠(趙衰), 서신(胥臣), 호사고(狐射姑), 선진(先軫), 개자추(介子推), 전힐(顚頡) 등이 있다.

어느 날 호모와 호언은 본국에서 대신의 자리에 있는 부친 호돌(狐突)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환관 발(勃)이 3일 안에 그곳에 도착하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중이는 사람들에게 서둘러 짐을 싸 도망칠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아내인 계외(季隗)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25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재혼하도록 하시오.”

“대장부가 천하에 뜻이 있으니 어서 떠나십시오. 제 나이 벌써 스물다섯인데 25년이 지나면 할머니가 돼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때 누가 절 데려가겠어요? 아무 염려 말고 가세요. 전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중이가 막 길을 떠나려 할 때, 갑자기 그 환관이 하루 일찍 그곳에 도착했다. 당황한 중이는 부랴부랴 달아났다. 그런데 그 와중에 짐을 관리하던 자가 물건들을 챙겨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중이 일행은 구걸을, 하며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제나라로 가려 했지만 먼저 위나라를 지나쳐야만 했다. 그런데 위나라는 예전부터 진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중이에게 도움을 줄 리 만무했다. 위나라 군주는 성문을 닫고 중이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중이 일행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성을 돌아가야만 했다. 오록(五鹿)이라는 지역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밭을 갈던 농부 몇 명이 밥을 먹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중이는 호언을 시켜 밥을 좀 얻어오게 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들이 행세 께나 하는 귀족임을 알아보고는 대접할 밥이 없다면서 대신 흙덩이를 파 호언에게 넘겼다. 일행 중 한 무사가 이를 보고 성질이 나 말 채찍을 치켜들었다. 이때 호언이 급히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백성들이 흙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장차 우리가 진나라로 돌아가 국토를 얻으리란 걸 상징하오. 이것은 길조임에 틀림이 없소!”

그들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중이가 허기로 인해 현기증이 나서 개자추가 고깃국 한 사발을 얻어왔다. 중이는 앞뒤 묻지 않고 한입에 바닥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그 국이 개자추가 자기 허벅지살을 잘라 끓인 것임을 알았다.

중이 일행이 배고픔을 참으며 제나라에 도착하자 제나라 환공이 반갑게 그들을 맞아주었다. 환공은 그들에게 수레 20대, 말 80필과 함께 살 집까지 선사했다. 게다가 자기 가문의 처녀를 중이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제나라에 살게 되었다.

환공이 죽자 그의 다섯 아들이 왕위를 놓고 다퉜다. 그 바람에 제나라는 한바탕 혼란에 휩싸였고 급기야 패자의 지위를 잃고 초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본래 제나라의 힘을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려 했던 중이 일행은 희망이 사라졌다. 중이의 부하들은 다른 나라로 가서 방법을 강구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때 중이는 새로 맞은 부인 제강(齊姜)과 금실이 너무 좋아 전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이에 난처해진 부하들은 사냥을 나가자고 중이를 꾀어 강제로 그를 데려가기로 했다. 마침 제강의 여종이 이 말을 훔쳐 듣고 그녀에게 보고했다. 평소 중이의 사업에 간섭이 많았던 제강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호언 등을 찾아가 계획에 가담했다. 그녀는 일부러 중이에게 잔뜩 술을 먹인 다음, 인사불성인 그를 부하들에게 넘겼다. 잠에서 깨어난 중이는 수레에 실려 어딘가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기왕지사라 부하들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곧 조(曹)나라에 도착했다.

조나라 군주는 그들이 딱 하룻밤만 묵고 갈 것을 허락했으며, 무례한 태도로 그들을 조롱했다. 오직 대부 한 사람만이 중이의 부하 중에 인재가 많음을 알아보고 몰래 음식을 주고 보물을 선사했다. 언젠가 중이가 큰일을 이룰 사람임을 알아본 것이다. 중이 일행은 이어서 송나라에 도착했다. 송나라 양공은 전쟁에서 막 패한 처지임에도 중이를 환대했다. 양공은 그들 각자에게 말과 수레를 주었다. 하지만 중이의 귀국을 도울 힘은 없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다시 초나라로 이동했다. 초나라 성왕(成王)은 중이를 귀빈으로 대접했고 중이도 그를 존경하여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당시 초나라의 대신 자옥(子玉)이 중이를 없애 후환을 제거하려 했지만, 성왕의 방해 때문에 실패했다.

한번은 잔치 석상에서 성왕이 농담을 했다.

“공자께서 진나라로 돌아가신다면 내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

“보석이나 비단, 미녀 따위는 넘칠 만큼 갖고 계시니 소용이 없겠지요. 또한, 이 나라에는 상아나 진귀한 동물도 많습니다. 금은보화로는 대왕께 보답할 길이 없겠습니다. 따라서 제가 귀하의 복을 빌려 진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젠가 불행한 사태로 두 나라 군대가 충돌할 때, 저의 군대를 세 번 후퇴해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래도 대왕의 양해를 얻지 못한다면 할 수 없이 대전을 치러야 하겠지요.”

얼마 후 진(秦)나라 목공이 사람을 보내 중이를 초청했다. 목공은 중이를 진(晋)나라로 귀국시켜 군주로 삼을 생각이었다. 본래 목공은 변변찮은 혜공을 군주로 세워 이득을 취하려 했었다. 그런데 혜공은 여러 차례 그의 은혜를 배반하는 짓을 저질렀다. 특히 즉위하자마자 얼마 안 있어 군사를 일으켜 진을 침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워낙 진나라의 병력이 막강했기에 목공은 군대를 격파 하고 혜공을 포로로 삼았다. 목공은 뒤에 그를 본국으로 돌려보냈지만, 혜공의 아들 어(圉)를 인질로 잡고 자기 딸과 결혼하게 했다. 그러나 공자 어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나중에 즉위할 기회를 잃을까 근심하다가 부친 혜공이 중병이 들자 몰래 진(晋)나라로 돌아가 군주가 되었다. 이에 노발대발한 목공은 중이를 군주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다.

목공은 예전에 어에게 시집보냈던 딸을 이번에는 중이와 혼인, 시켰다. 당시에는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결혼하고, 아들이 계모와 결혼하는 일도 흔히 볼 수 있었으니, 큰아버지가 조카며느리와 결혼하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이 일행은 목공의 환심을 사야만 했으므로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때 이미 군주 노릇을 하고 있던 어는, 자신의 가장 큰 적이 국외를 떠돌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이의 부하들의 가족들을 시켜 그들이 3개월 안에 귀국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다 처형할 거라는, 편지를 쓰게 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대신들을 학살하여 백성들의 인심을 잃었다. 이 소식에 더욱 화가 난 목공은 기회를 보아 군대를 파견하여 중이를 귀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636년, 진(秦)나라의 대군이 진(晋)나라와의 국경인 황하에 당도했다.

강을 건널 때 중이는 짐을 관리하는 자가 과거 쓰던 물건들까지 배에 싣는 것을 보았다. 중이는 그것들을 강에 내던지게 했다. 호언이 이 광경을 보고 힘이 쭉 빠져 무릅을 꿇고 말했다.

“지금 공자에게는 밖으로는 진나라의 군대가 돕고 안으로는 대신들이 있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우리 늙은 신하들은 돌아갈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 방금 버리신 헌옷과 신발처럼 이 황하에 내버리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 말에 크게 깨달은 중이는 급히 헌 옷과 신발 등을 다시 건지게 하고, 대신 차고 있던 옥 팔찌를 강물에 던졌다. 그는 황하의 신에 제사를 올리며 맹세했다.

“나 중이는 따뜻해도 추위를 잊지 않고, 배가 불러도 배고픔을 잊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과거 어려움을 함께했던 신하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호언 등은 중이를 따라 황하를 건넜다.
중이는 황하를 건넌 뒤 여러 채의 성을 공격했다. 공자 어가 이미 민심을 잃었고 대신들도 더 저항하지 않았음으로 중이는 순조롭게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진나라 문공이다.

문공은 43세에 적나라로 도망쳤고, 55세에 제나라에 갔으며, 61세에는 진(秦)나라로 옮겨갔다. 즉위했을 때 그의 나이는 벌서 62세였다. 그는 19년간 나라 밖을 유랑했다. 안정된 생활을 누린 적도 있었지만 남의 집 울타리 아래 묵거나 비참하게 떠돌아다닌 날들이 더 많았다. 인정의 차갑고 따스함, 인생의 쓰고 단맛을 다 겪었으며 각국의 정치를 두루 살피며 재능을 단련했다. 그래서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성숙한 정치가가 되어 있었다.

진나라는 20여 년의 혼란기를 거쳐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헌공의 다섯 아들 가운데 오직 중이만 살아 있었고, 게다가 좋은 평판을 얻었으므로 백성들은 그의 즉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문공으로 즉위하고 나서 처음으로 한 일은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혜공과 희공(懷公-공자 어) 시대의 잔당의 우두머리들을 제거했지만 그 부하들의 죄는 묻지 않았다. 다음으로 한 일은 공신들에 대한 포상이었다. 적나라에서 계외를, 제나라에서 제강을, 그리고 진(秦)나라에서 문영(文贏-목공의 딸)을 불러들였으며,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다. 단지 허벅지 살을 베어 자신에게 먹였던 개자추만은 깜박 잊고 빠뜨렸다. 개자추는 아무 말 없이 노모를 모시고 개산(介山)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한 일은 주나라 왕실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적인(狄人)을 추격하여 왕자 대(帶)를 죽이고 주나라 양왕(襄王)을 구출했다. 이 공로로 중이는 제후들 사이에서 크게 위신을 세웠으며 천자를 등에 업고 제후들을 호령했다.

이어서 문공은 패자의 자리를 놓고 제후들과 다퉈야 했다. 그는 우선 군대의 편제를 확대하고 군과 정치를 합일시킨 제도를 실행했다. 또 최초로 군대를 법으로 조직하는 선례를 남겼다. 초나라는 본래 진나라를 꺾고 패업을 이루고자 했다. 그런데 진나라가 오히려 많은, 국가들을 흡수하자 초나라 성왕은 대장군 자옥을 시켜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이때 문공은 초나라 군대가 기세등등한 것을 보고 급히 자국의 군대를 세 번 후퇴하게 했다. 진나라 군사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호언이 나서서 이는 문공이 초왕의 은혜를 갚기 위해 과거의 약속을 지키는 거라고 선전했다. 사실 이것은 진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문공의 위엄을 세우려는 책략이었다. 아울러 군사 전략적 관점에서 본다면 후퇴하는 과정에서 초나라 군사들의 힘을 빼고 그들의 예봉을 피하는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문공의 책략은 후퇴를 전진으로 삼은 전법으로서 일거양득의 묘책이었다.

결국, 초나라 군대는 크게 패했고 자옥은 처벌이 두려워 자살했다.

문공은 이 소식을 듣고 큰 짐을 덜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방해할 자, 또 누구인가?’

이로써 진나라 문공은 패자의 지위를 확립했다.

진나라가 내란을 극복하고 번성하게 된 과정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문공과 그의 신하들은 19년간 시련을 겪으면서 향후 패업을 이루기 위한 조건을 갖추었다. 따라서 문공이 패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 문공이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하는 데 능했던 것도 매우 중요하다.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후퇴를 전진으로 삼는 처세술을 매우 중요시했다. 객관적인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일을 추진하는 것은 경솔한 자의 행동이다. 결국, 화를 자초할 뿐이다. 만약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전략상의 양보를 택해 힘을 축적, 정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나중에라도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상대하는 목적은 이기기 위해서이며 후퇴 역시 전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부드러움과 후퇴 그 자체는 도피주의와 패배주의에 불과하다. 중이는 이곳저곳을 떠돌면서도 항상 기회를 엿보며 목표를 지향했다.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후퇴를 명령한 것은 모두 이기고 전진하기 위해서였다. 즉,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인 것이다.

그러나 이만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맹자가 말했던, 혹독한 정신적 육체적 시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세상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그러한 시련을 견뎌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 연구가,칼럼리스트)

경인일보/호남매일/한서일보/의정뉴스/메스컴신문/노인신문/시정일보/조선일보/서울일보 기자, 편집국장, 논설실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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