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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고금의 관료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이정랑 | 2021-04-30 07:34: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풍도 馮道】 이익에 따라서 여러 군주를 섬겼든 몰염치한(沒廉恥漢)

봉건시대 관료사회에서 오래 살아남기란 고차원의 처세술이 필요했다.

풍도(馮道)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후한(後漢)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쓴 『장락노자서 長樂老自敍』는 매우 유명하다. 그것은 중국 봉건관료 사회의 몰염치한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에서 풍도는 자신의 이력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역대로 자신이 역임한 관직과 칭호를 득의양양하게 나열했다. 심지어 거란 정권이 자신에게 준 허위관직까지 포함했다. 실로 대단한 실사구시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송대의 대문호이자 사학자, 정치가였던 구양수(歐陽修)는 『신오대사 新五代史』에서 그를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풍도는 확실히 ‘오래 즐거움을 누린 노인 長樂老’이었다. 중국에는 ‘만족을 아는 자는 항상 즐겁다’라는 말이 있는데, 풍도는 관직이 있어 오래 즐거움을 누린 자였다. 또한 ‘관직이 없어 한 몸 가볍고, 자식이 있어, 모든 일이 만족스럽다’라는 말도 있는데, 풍도는 관직이 없으면 살 수 없고 관직이 있어야 모든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이었다.

풍도의 일생은 한 편의 ‘관료학’ 이었다. 그는 관료사회에서는 승승장구했던, 한 편의 살아있는 교재였다. 그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관료 생활의 방법을 가르치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 관료사회에서 좌절하지 않는 비결을 선전하는 데 삶의 의미를 두었을 것이다. 그 비결이란 곧 양심을 버리고 투기에 통달하는 것이다.

봉건시대의 관료사회에서 관리로 행세하는 것은 대단히 고차원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이 예술은 사실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관료사회에서 좌절하지 않는 비결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시비를 가리지 말고 양심을 버린다. 둘째, 형편을 잘 살펴 유리한 쪽에 빌붙는다.

관료사회에서 살아남은 이 노인의 인생 철학은 ‘가슴만 있으면 여자이고, 칼만 쥐고 있으면 왕이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 현명한 임금이나 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직한 관리들이 백성들을 대변했으며 또한 적지 않은 사대부들이 국가의 안정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피를 흘렸다. 그러나 시비에 무관심하고 몰염치했으며, 누가 황제가 되든지 자리보전에만 급급했던 무리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도 때로는 좋은 일을 할 때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인격은 너무나 비천하여 본받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전통학문의 대가 전목(錢穆) 선생은 고대 중국사에서 가장 몰염치했던 시대로 오대(五代)를 꼽았다. 확실히 오대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쉽게 자기 본색을 드러냈던 시대이다. 바로 그 시대에 악명 높은 ‘아들 황제’ 석경당(石敬塘)이 출현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섯 왕조를 내리 섬기면서도 한 번도 좌절을 겪지 않은 풍도의 생애이다.

그것은 분명 중국 관료사에서 하나의 기적이었다. 『오대사 五代史』의 「풍도전 馮道傳」, 『신오대사』, 『자치통감 資治通鑑』 등 관련 사적을 자세히 들춰보면 이 풍도라는 인물의 형상이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풍도는 자가 가도(可道)이며 영주 경성 출신이다. 당나라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882)에 태어났다.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문벌을 중시하는 당시의 사회적 기풍 때문에 관리가 되기는 어려웠다. 당나라 말기는 군벌이 할거하고 전란이 빈번한 시대였다. 이때 이극용(李克用)이 진양 지역을 점거하여 군벌로 행세했다. 그는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그의 아들 이존욱(李存勖)도 매우 유능한 인재였다. 풍도는 아마도 이런 점을 간파하고 이존욱에게 몸을 의탁하여 앞날을 기약했을 것이다. 그 전에 풍도는 먼저 고향에서 가까운 유주에서 말단 관리를 지냈다.

당시 유주의 군벌 유수광(劉守光)은 잔악하기로 유명했다. 살인을 다반사로 저질렀으며 부하들도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가차 없이 목을 베었다. 한번은 유수광이 역주와 정주를 공격하려는 것을 풍도가 감히 말렸다. 결국, 유수광의 성미를 건드려 그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뻔했지만, 사람들의 호소로 옥에 갇히는 데 그쳤다.

이 일화를 보면 그때만 해도 풍도가 꽤 정직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로 풍도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감옥을 탈출하여 태원으로 가 진(晋)의 대장군 장승업(張承業)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리고 곧 장승업의 추천으로 이존욱의 측근이 되었다. 풍도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관리의 길을 걷게 된다.

처음에 풍도는 진왕부의 서기를 맡아 각종 정치문서와 군사우편을 책임졌다. 얼마 후 이존욱은 주온(朱溫)이 세운 후량(後梁)의 부패상을 보고 공격을 준비했다. 마침내 진왕 이존욱의 군대와 후량의 군대가 황하 양편에서 대치하여 매우 잔혹하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풍도는 이존욱의 총신으로서 솔선수범하여 근검한 생활 태도를 보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군영 안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침상도 없이 풀더미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당연히 바람직한 것, 이었다.

풍도는 왕과 신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도 솜씨가 있었다. 후량의 군대를 격파했을 때, 진왕의 군대는 군량미가 매우 부족했다. 진왕 이존욱의 수행병이 너무 많아 그들을 다 먹이기가 벅찼기 때문이다. 대장군군 곽숭도(郭崇韜)가 이존욱에게 말했다.

“식량이 부족합니다. 수행병을 좀 줄이실 수 없습니까?”

이존욱이 발끈하여 말했다.

“날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들에게 밥도 못 먹이면서 어떻게 대장군 노릇을 한단 말이냐?”

곽숭도가 기가 질려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풍도가 앞에서 말을 거두었다.

“군량미가 정말로 부족하다면 곽숭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대왕을 위한 일편단심입니다!”

그의 이 한마디로 험악했던 분위기가 금방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존욱은 후량을 멸하고 후당(後唐)을 세우고 나서 오직 귀족 출신만을 중시할 뿐, 풍도처럼 배경 없는 이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때 풍도는 관리로 있었지만, 부친의 부음을 받았을 때,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가서 본 집안 형편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장종(莊宗) 이존욱이 피살되고 명종(明宗)이 즉위한 후에야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명종은 이존욱의 예를 교훈 삼아, 문재(文才)들을 중용해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다. 풍도는 그제야 재상에 임명되어 입신하게 되었다.

재상으로 있던 7년간, 풍도는 몇 가지 훌륭한 일을 수행했다. 하루는 명종이 신하들에게 그, 해의 농사가 잘되었는지를 물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듣기 좋은 소리만 떠들어 댔지만, 풍도는 명종에게 이야기 하나를, 고해 올렸다.

“제가 진왕부에 있던 시절, 업무차 하북 중산에 간 일이 있습니다. 도중에 정형을 지나게 되었지요. 그곳이 원래 험하기로 유명한지라 무척 조심스레 말을 몰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정형을 지나 평지에 이르러서 말에서 굴러떨어졌습니다. 하마터면 죽을뻔했지요. 저는 그제야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조심해야 하며, 어느 때라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국가의 대사도 이에 비춰볼 수 있습니다. 오곡이 풍성하고 태평성대라고 해서 지나치게 낙관하시면 안 됩니다. 또 부지런하고 성실하시되, 방종하거나 향락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저희 신하들의 희망입니다!”

한번은 명종이 풍도에게 직접 물었다.

“요즘 백성들의 생활이 어떠한가?”

풍도는 이 기회에 충언을 올렸다.

“농민은 곡식이 귀해도 배를 곯고, 곡식이 흔해도 피해를 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이치입니다. 당나라 시인 섭이중(聶夷中)은 「상전가 傷田家」라는 시에서 ‘2월에는 새 명주실을 팔고, 5월에는 햇곡식을 파네. 눈앞의 종기를 고치려다가 마음속 살을 도려내었네. 원컨대 임금의 마음이여, 반딧불로 바뀌소서. 비단방석 비추지 말고 텅빈 농가를 비추소서’라고 했습니다.”

명종은 명시라고 거듭 감탄하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여 늘 낭송했다.

나중에 명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이종후(李從厚)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부터 풍도는 정직한 기풍을 잃고 자리보전에 급급한 전형적인 관리로 돌변했다. 명종이 죽은 지 4개월이 채 안 되어 종씨인 이종가(李從珂)가 군사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종후는 신하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부랴부랴 이모부 석경당의 군대에 몸을 맡겼다. 이튿날 아침, 조정에 나온 풍도와 다른 대신들은 왕의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그제야 이종가가 난을 일으켜 도읍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때 풍도는 실로 상식에서 벗어난 예상 밖의 태도를 취했다. 그는 본래 명종의 은덕을 입어 미천한 처지에서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원칙대로라면 이때야말로 그가 명종의 큰 은혜에 보답해야 할 시점이었다. 게다가 이종가의 반란은 대역무도한 죄에 속했다.

그러나 풍도는 그런 점은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이종가와 이종후를 비교했다. 이종가는 대군을 가진 데다가 성격이 고집불통이었다. 이에 반해 이종후는 어린애에 불과하고 즉위 후 아직도 실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격까지 너무 온화하고 유약했다. 한참 주판알을 튕긴 뒤, 그는 결국,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이종가를 영접하기로, 결정했다. 풍도는 재상으로서 모든 관리 중 으뜸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또 일부 관리들은 그가 직접 선발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리는 그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정직한 몇몇 관리들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제일 먼저 항의한 사람은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도(盧導)였다.

“천자가 엄연히 살아 계신 데 신하들이 어떻게 다른 자를 황제로 모신단 말이오? 우리는 마땅히 천자가 계신 곳에 가야만 하오!”

승상 이우(李愚) 등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풍도는 대신들에게 정세를 정확히 직시할 것을 요구하며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그래서 대다수 신하는 어쩔 수 없이 풍도를 따라 낙양 교외로 나가 이종가를 영접했다. 이렇게 해서 풍도는 구 왕조의 원로 충신의 신분에서 다시 새 왕조의 개국공신으로 변신했지만, 이종가는 그를 믿지 못했다. 이종가는 그를 중용하지 않고 지방의 관리로 전출시켰다. 나중에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다시 낙양으로 불러들이긴 했지만 역시 실권이 별로 없는 한직에 임명했다.

오래지 않아 석경당과 이종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석경당은 명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내세워 이종가를 타도하려 했지만, 군사력이 빈약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석경당도 제위 찬탈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맹주 야율덕광(耶律德光-요(遼)나라의 태종)에게 원조를 청했다. 석경당이 내건 조건은 세 가지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첫 번째, 거란을 섬길 것이며 두 번째, 석경당 스스로 아들이라 칭하여 야율덕광을 공경할 것이며 세 번째, 안문관 이북의 땅을, 거란에 바치겠다고 제의했다. 마침 중원진출의 야심을 품고 있던 야율덕광은 쾌히 승낙하고 추석 이후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결국, 거란의 지원으로 석경당은 이종가를 격파시키고 중국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아들 황제’가 되었다.

명종 시대의 복권을 호소했던 석경당은 황제가 된 후, 명종 때의 관리들을 대거 복귀시켰다. 풍도도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다. 이종가를 섬긴풍도의 과거 전력을 석경당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풍도가 이종가에게 중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은 듯하다.

석경당이 황제가 된 뒤에 맞은 첫 번째 어려움은 야율덕광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만약 지키지 않으면 왕조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석경당이 ‘아들 황제’로서 거란에 황제와 황후의 존호를 바치는 것은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서의 작성을 맡은 관리의 ‘안색이 변하고 부들부들 손을 떨었고’ 끝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거란에 책봉 사절을 보내는 것은 더더욱 수치스럽고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석경당은 재상 풍도를 보내고자 했다. 재상을 보내야 더 정중해 보이리라 여겼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풍도가 노련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는 풍도가 거절할 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풍도가 군소리 없이 명령에 따르자 석경당은 정말 뛸 듯이 기뻐했다.

사실 풍도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풍도는 자신이 야율덕광과 잘 사귀어놓아야만 석경당 아래서 온전히 자리보전을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황제’만 잘 구슬리면 ‘아들 황제’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확실히 풍도는 부귀를 오래 누리는 데 있어서 노회한 인물이었고, 배짱과 식견을 갖춘 인물이었다.

풍도는 자신의 외교 임무를 지극히 원만하게 처리했다. 거란에 두 달 가량 머물면서 그는 몇 차례충성도를 시험당했다. 야율덕광은 이 노인이 충성스럽고 믿을 만하다고 여기고 되돌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풍도는 야율덕광에 대한 충성심을 거듭 호소하고 거란에 계속 머물고자 했다. 야율덕광은 그럴수록 그를 되돌려보낼 마음을 굳혔다. 그가 석경당 곁에서 자신을 위해 일해줄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돌아가길 종용하자 풍도는 그제야 마지못한 듯 짐을 꾸렸다.

거란에서 돌아온 풍도는 한마디로 전성기를 맞았다. 석경당조차 그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석경당은 그에게 병권을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노국공(魯國公)의 작위를 내렸다. 자신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석경당은 더할 나위 없이 풍도를 총애했다.

석경당의 후진(後晋) 정권은 겨우 10여 년 만에 국운이 기울었다. 후진 개운(開運) 3년에 야율덕광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변경(汴京)을 점령했다. 거란이 곧 중원을 평정하리라고 생각한 풍도는 곧바로 양등을 떠나 야율덕광에게 투신했다. 그는 야율덕광이 틀림없이 자신을 환대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북방의 이민족은 중원 사람과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풍도를 보자마자 야율덕광은 대뜸 그가 후진에 있으면서 일을 그르쳤다고 꾸짖었다. 놀란 풍도는 급히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야율덕광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나를 찾아왔느냐?”

“저는 병사도 없고 땅도 없는 천한 몸입니다. 어찌 감히 뵈러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너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늙은이냐?”

“어리석고 멍청하고 부덕하고 쓸모없는 늙은이입니다!”

일부러 비굴하고 바보 같은 태도로 알랑대는 풍도를 보고 야율덕광은 한참 웃어댔다. 그리고 더, 이상 윽박지르지 않았다.

얼마 후 야율덕광은 중원 백성들의 도탄에 빠진 생활상을 보고 풍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천하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겠느냐?”

기회를 놓칠세라 풍도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지금은 부처님이 세상에 와도 이 땅의 재난을 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폐하만이 구하실 수 있습니다!”

사탕발림을 좋아하는 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이다. 점차 풍도를 믿고 좋아하게 된 야율덕광은 그에게 요나라의 태부(太傅) 자리를 맡겼다. 나중에 어떤 이가 한때 거란에 저항했던 풍도의 전력을 들춰냈을 때에도 야율덕광은 극구 그를 감싸고 돌았다.

“풍도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결코 그런 역모를 저질렀을 리 없으니 함부로 모함하지 마라.”

거란인의 잔혹한 통치가 길게 갈 수 없음을 간파한 풍도는 곧 뒷일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갖 방법을 강구해 거란에 투항한 한족(韓族) 지역을 보호함으로써 정권이 바뀌었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했다. 그의 이런 행적에 대하여 구양수 같은 문인도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풍도를 선하다 했다’고 기록했다.

백성들의 저항에 밀려 거란인들은 중원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풍도는 거란군을 따라 항주까지 철수했다가 거란군의 패배를 틈타 줄행랑을 쳤다. 이때 석경당의 대장군 유지원(劉知遠)이 정권을 탈취하여 후한(後漢)을 세웠다. 유지원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세력들을 회유했는데, 풍도도 한족 지역을 보호한 공로로 태사(太師)에 임명되었다.

오대 시대에는 정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정권이 자주 바뀌었다. 후한 정권도 세워진 지 겨우 4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 곽위(郭威)가 반기를 들고 도읍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풍도는 이때 다시 옛 장기를 발휘하여 신하들을 이끌고 곽위를 맞아들였다.

그런데 몇 년 후 곽위가 병으로 죽자 그의 양자 시영(柴榮)이 세종(世宗)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당시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후한의 후예 유숭(兪崇)이 거란과 결탁하여 후주를 무너뜨리려 했다. 반세기 넘게 살아온 풍도의 경험에 비춰볼 때, 후주도 오래 가지 않아 다른 왕조로 바뀔 게 분명했다. 풍도는 얼마 남지 않은 생애 마지막까지 높은 관직을 누리고 싶었다. 그때 시영은 34세의 나이로 담력과 기백이 넘쳤다. 유숭과 거란의 연합군이 습격해올 때, 신하들은 황제가 바뀌고 민심이 동요하리라 여기고 가벼운 행동을 삼갔다. 그런데 시영은 극구 전투에 직접 나아가 싸우고자 했다. 사람들은 그의 의지가 굳건한 것을 보고 말리지 않았다. 오직 풍도만이 그를 조소하며 토를 달았다. 시영이 그에게 말했다.

‘과거에 당 태종은 늘 친히 출전하여 전투를 지휘했내. 설마 나라고 해서 그러지 못하겠는가?“

”폐하가 당 태종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군요.“

풍도의 대답에 시영이 다시 말했다.

”강력한 내 병력으로 유숭과 거란의 연합군을 친다면 그건 곧 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격일세. 어떻게 칠 수가 있겠나?“
”폐하가 산이란 말입니까?“

풍도의 알쏭달쏭한 말에 시영은 크게 기분이 상했다. 그는 넌지시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풍도가 나를 깔보는구나!“

사실 풍도는 깔보지 않았다. 단지 뒤이어 들어설 왕조에서도 한자리하기 위해 미리 새 주인에게 의탁할 밑천을 마련하느라 그런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시영은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고평 전투에서 유숭과 거란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소식은 곧 풍도의 귀에 들어왔고 드디어 시영이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왔을 때, 풍도는 기름 떨어진 등불처럼 자신감을 잃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판단 착오를 두고 상심했던 것 같다. 고평 전투에서의 시영의 승리는 결국 그의 늙은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풍도는 자기 집에서 숨을 거뒀다. 죽은 뒤 그에게는 아무 영예도 주어지지 않았다. 실로 초라한 최후였다.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 연구가,칼럼리스트)

경인일보/호남매일/한서일보/의정뉴스/메스컴신문/노인신문/시정일보/조선일보/서울일보 기자, 편집국장, 논설실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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