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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인물론 天才 詩人의 再照明
[백거이 白居易] 문학 창작을 평생의 보람으로!
이정랑 | 2021-09-17 07:50:3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백거이 白居易】 문학 창작을 평생의 보람으로!

장한가(長恨歌)를 비롯한 작품의 수만 무려 3,840여 편.

백거이(白居易-772~846)는 중국 당(唐)나라, 출신으로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의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시가에서부터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 형식을 망라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 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허난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 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 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新樂府)』•『진중음(秦中吟)』 같은 풍류시와 『한림제고(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였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 그의 시심(詩心)을 ‘한적’•‘감상’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郎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조칙(詔勅)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 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항저우자사(杭州刺史)•쑤저우자사(蘇州刺史)를 역임했다. 뤄양(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秘書監)•형부시랑(刑部侍郎)•하남윤(河南尹) 등의 고위직과 태자빈객분사(太子賓客分司)•태자소부분사(太子少傅分司)와 같은 경로직(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했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詔勅)•주장(奏狀)•책(策)•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 형식을 망라했다.

또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원진(元稹) 및 유우석(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대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推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文言)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草木)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왕자(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 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악부서(新樂府序)』에서“글은 임금•신하•백성•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諷諭)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경(詩經)』이야말로 이 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육조(六朝)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 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책(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중서제고(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조(詔)‘•’칙(勅)‘•’제(制)‘•’고(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육전(六典)』 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육전』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 했다. 뛰어난 작가는 ‘대수필(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 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광주 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동림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다음은 백거이의 풍유시(諷諭詩)로 망국의 사치풍조와 부패 타락상을 고발한 ‘진중음(秦中吟)’ 10수 중 한편이다.

-호화저택을 슬퍼하노라-

누구 집이 제일 좋나, 대로변 붉은 대문들.
안에 고대광실 즐비하고 바깥은 높다란 담장
예닐곱 넓은 집채 줄줄이 이어졌다.
한 채에 백만금, 푸른 연기 솟아오르네.
주인장 이곳에서 편히 지내며
십 년 동안 고관대작 지내었노라.
주방에는 고기 썩는 냄새 코를 찌르고
창고에는 돈 꾸러미 묶은 줄 썩는다.

어찌 가난한 친척 없으리오만
그들의 배고픔을 외면하는가?
어찌 제 한 몸만 떠받들면서
천년 동안 혼자만 잘살려고 하는가?
그대 보지 못했는가?
그 옛날 으리으리했던 마수(馬燧)의 집도
이제는 봉성원(奉誠園) 빈 뜰이 되어버린 것을.

사람 사는 세상에는 늘 부의 편중이 있고 이런 호화주택들로 그 양상이 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사회에 부를 환원하는 부자도 있지만 제 한 몸만 아는 부자들도 많다. 예나 지금이나 부의 형성 과정에는 모종 흠결이나 문제가 있기 쉽고, 권력과 돈이 서로 몰리는 현상은 아무리 투명한 정치를 내세우고 있는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위의 시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역시 10년 동안 고위 직책을 지내고 있는 관료이며 부정축재를 하여 고대광실을 짓고 산다. 저택 규모에 어울리는 온갖 풍요를 누리지만 가난한 친인척에게조차도 인색하며, 고기와 돈꿰미 줄이 썩어가는 가운데 제 한 몸만 떠받들며 천 년을 기약한다. 하지만 시인은 끝의 두 구에서 보듯, 그런 부는 영원하지 않다고 경종을 울린다. ‘마가댁(馬家宅)’처럼 부자가 졸지에 망해버리는 사례는 오늘날의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목격되는 바 아니겠는가?

청나라 사람 장남산(張南山)은 백거이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널리 대시인들이 교화주로 추대하고
지극한 백성 사랑 지금까지 전해진다.
편안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 즐기니
백낙천이라 부르는 게 부끄럽지 않구나.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 연구가,칼럼리스트)

경인일보/호남매일/한서일보/의정뉴스/메스컴신문/노인신문/시정일보/조선일보/서울일보 기자, 편집국장, 논설실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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