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14
비동맹&버마 외교 : 1977∼1979
강진욱 기자 | 등록:2021-08-02 15:48:41 | 최종수정:2021-08-02 16:17:46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14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14. 비동맹&버마 외교 : 1977∼1979

1976년 판문점 사건을 조작해 비동맹 정상회의와 유엔총회에서의 이북(북한)의 우위를 한 순간에 무력화시킨 미국과 박정희 정권은 한동안 외교적 우위를 향유했다. 과거에 비해 친한(친남) 성향을 보이는 비동맹 국가들이 늘었고, 친북 성향을 보였던 나라들이 하나 둘 친남으로 돌아섰다. 이듬해인 1977년 4월 6일부터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비동맹 조정위원회 외상회의를 앞둔 박 정권의 표정이 전례없이 밝았던 이유다.

[외무부는 6일부터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는 비동맹 조정국 외상회의에 대비해 관계관 1명을 파견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쏟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작년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를 것”이라고 태연한 표정 ... 한 고위 관계자는 “이번 비동맹 조정위 외상회담은 작년 스리랑카 외상회의 등의 분위기로 미루어 북괴의 일방적인 한반도 문제에 대한 언급은 어려울 것”이라고 ... “특히 그들이 종래에 주장해 온 주한미군 철수라는 명제가 없어진 이상 북괴의 입장은 어느 때보다 약화될 것”이라고 전망.] (「북괴 입장 어느 때보다 약화될 것」<경향신문> 1977.4.6)

실제로 4월 11일 비동맹 조정위 외상회의가 채택한 정치선언은 미국과 박정희 정권의 희망대로 비교적 온건한 내용으로 정리됐다.

[외무부 당국[은] ... “작년 스리랑카 선언이 남한에서의 외군 철수 외군 기지 철수, 유엔사[령부] 해체와 함께 북괴의 주장인 ‘휴전협정의 항구적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를 명시했으나 이번에는 이를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항구적이며 실효적인 협정으로 대체’라고 표현했다”고 지적, “이는 휴전협정의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자는 우리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 “스리랑카 정치선언에는 이번 회의에서도 북괴가 주장한 이른바 ‘한반도 북침 위협설’이 언급됐으나 이번 공동성명은 이를 전연 취급하지 않았다”면서 “이는 비동맹 제국이 북괴의 허위 선전을 거부했다는 증거”라고 ... “좌경 비동맹국도 이제는 북괴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변화가 드러났다”고 분석 ... ] (「비동맹, 대한 자세 완화 - 조정위 공동성명에 북괴 주장 반영 안 해」<조선일보> 1977.4.12)

( 조선일보 1977.4.12)

북측 대표 이종옥은 이 회의 본회의 연설에서 남한 측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기도하고 있고 남북대화 중단의 책임은 전적으로 남측에 있으며, 한 해 전 일어난 ‘판문점 사건’은 한.미의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런 내용을 공동성명에 포함시키기 위해 인도와 알제리 대표 등과 접촉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알제리조차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조선일보> 1977.4.12). 

이 회의가 끝난 지 이틀 만인 4월 13일에는 북한 단독수교국이었던 수단의 외무담당 국무상이 내한, 남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국 언론은 이를 가리켜 “북괴 단독수교국에 대한 첫 번째 침투”(<동아일보> 1977.4.13), “유엔 외교 고지 확보”(<경향신문> 1977.4.15)라고 경축했다.

[아프리카 비동맹 중립국인 수단은 그동안 북괴 외교의 독무대가 돼 온 것이 사실 ... 북괴는 수단이 독립한 56년 직후부터 재빨리 외교 접근을 시도한 끝에 소[련].중공을 등에 업고 69년 국교를 튼 후 한국의 대 수단 진출을 철저히 방해해 왔다. 한국은 거의 해마다 특사를 파견하는 등 수단에 문호 개방 의사를 타진했으나 작년에야 비로소 총영사관을 개설할 만큼 고전을 겪었다. 수단은 현재까지 유엔에서 공산측 결의안의 공동제안국으로서 북괴의 이익을 대변해 준 나라 ... 따라서 우리 외교의 수단 상륙은 북괴가 아성으로 여기는 비동맹 중립국의 일각을 무너뜨린 셈 ...] (「대아(對阿).중동 외교 전기」<경향신문> 1977.4.15)

미국과 박정희 정권은 이런 승기를 몰아 버마를 반북친남화하기 위해 무던히 공을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즈음 버마의 네 윈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판문점 사건으로 인해 북측의 위세가 꺾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1년 전 급전직하한 미국의 위상과 영향력이 다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또 북측도 버마를 남한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네 윈도 친미 일변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내막이 어떠했든 네 윈은 이 해 9월 평양을 방문한다.

[네 윈 버마 대통령이 [9월] 20일 하오 북경으로부터 평양에 도착, 김일성과 총리 박성철 등 북괴 고위 관료들의 영접을 받았다고 평양방송이 보도했다. 김일성은 이어 이날 평양의 금수산의사당에서 버마 대통령을 위한 환영 연회를 베풀었으며, 이 자리에는 버마-북괴 간의 친선 증진과 세계비동맹운동의 발전에 쌍방이 공동으로 노력할 것 등이 다짐되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버마 대통령 평양에」<경향신문> 1977.9.21)

(사진 좌 : 김일성, 사진 우:네윈)

[【동경=UPI.동양】네 윈 버마 대통령을 비롯, 우 흘라 폰 외상과 캬우 틴 국방상 등 고위 버마 관리들은 20일 북괴의 열광적 환영을 받는 가운데 평양에 도착한데 이어 21일에는 김일성과 실무회담을 시작했다. 이번 회담에서 버마는 북괴로부터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1977.9.22)

[【랭군=로이터.합동】지난 23일 북괴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네 윈 버마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 철수를 강력히 지지했다고 24일 랭군에서 공개된 공동성명이 말했다.] (「버마 대통령 주한 외군 철수 주장」<경향신문> 1977.9.26)

이때 버마 측은 김일성 수상의 버마 방문을 초청했고 북측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는 내용의 공동코뮈니케가 발표됐고 평양에서 돌아 온 네 윈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그렇게나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버마의 네 윈이 서울이 아닌 평양을 방문한데 이어 주한미군 철수까지 주장한 것은 박 정권과 미국에게는 매우 아픈 일격이었을 것이다. ‘버마 외교’가 실패한 것이다. 또 네 윈의 방북 직후 미국 뉴욕에서 비동맹 외상회의가 열리고, 이북 외상 허담의 뉴욕 방문을 미국을 허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워싱턴=이웅희 특파원】미국 정부는 오는 26일부터 사흘 동안 뉴욕에서 열리는 비동맹국 외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입국을 신청한 북괴 외상 허담에게 비자(입국사증)를 발급 ... .] (「미, 북괴 허담 입국 허용 - 비동맹회의 참석, 각료급으론 처음」<동아일보> 1977.9.21)

미국에서 비동맹 외상회의가 열린 것이나 미국이 처음 이북 각료급 인사의 미국 방문을 허락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해 비동맹 외상회의는 “32차 유엔총회를 계기로 유엔에 참석하는 비동맹국 외상들이 회동하는 모임”(<동아일보> 1977.9.21)이었다지만, 이는 비동맹 진영을 이간시키려는 미국의 술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 등이 1977년부터 집중적으로 - 아마도 네 윈의 방북에 따른 충격으로 - 대버마 포섭 공작을 펼쳤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1983 버마 사건’ 당시 버마주재 한국대사관 참사관이었던 송영식도 동의한다. 그는 아웅 산 묘소 테러 직후 버마가 의외로 ‘쿨 하게’ 북한과의 관계를 정리한데 대해 “미얀마[버마] 정부는 이 사건이 유엔 등이 개입해 국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1977년 이후 대서방 경제협력을 추진해 왔기 때문에 북한과의 경제협려 문제가 사건 처리에 그다지 지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고 밝혔다(송영식『나의 이야기』199∼200쪽).

비동맹 진영의 친서방화 움직임은 계속됐고 1978년 1월에는 역시 친북 비동맹 국가였던 아프리카의 기니가 남한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즈음 미국과 서방의 비동맹 와해 전술이 심상찮았음은 이북의 반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북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월 4일 자에서 “세계 비동맹 세력 간의 단결을 방해하고 이를 분열시키려는 이른바 제국주의 세력들의 암약이 어느 때보다도 증대되고 있다”고 밝혔다(「북괴, 소.중공 비난」<경향신문> 1978.1.7). 평양방송도 1월 18일 “요즈음 남한 당국은 비동맹 중립국 외교라는 간판을 내세워 원조와 협조라는 이름 아래 경제적으로 약한 나라들에 침투하려 애쓰고 있다”고 지적했다(<경향신문> 1978.1.20).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개도국과의 기술협력 강화를 명분으로 ‘비동맹 경제외교’의 기치를 더 높이 들었고 그 주 타깃은 버마였다. 자본을 앞세운 비동맹 경제외교 “방침에 호응, 율산(栗山)실업이 금년[1978년] 중 버마로부터 20명의 기술연수생을 받아들”였다(<경향신문> 1978.2.3). ‘경제 협력’을 내세운 대버마 외교는 1979에도 계속돼 이 해 4월에는 대동공업이 제작한 경운기 500대가 삼성물산을 통해 버마에 수출됐고, 대우중공업이 선박용 디젤 엔진을 버마에 수출했다.

[8일 삼성물산에 의하면 지난해 버마 농업기계공사가 실시한 국제입찰에 응찰, 미국.일본 등 선진국 15개 업체를 물리치고 낙찰에 성공 ... 500대 ... 금액으로 65만 달러 ... 대동공업이 제작한 이 경운기는 이달 중순 200대, 4월초에 300대를 각각 선적할 계획 ...] (<매일경제신문> 1979.3.8)

이즈음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아시아 비동맹 각국에 차관을 제공했고, 각종 한국산 제품이 동남아 각지로 수출됐다. 1979년 한 해 동안 한국이 버마 등지에 경운기를 수출한다는 기사가 여러 번 실렸다.

[【마닐라=로이터.합동】아시아개발은행(ADB)은 한국 인도네시아 버마 등 아시아태평양 7개국의 개발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올해 2.4분기에 1억9천350만 달러에 달하는 차관 11건을 승인했다 ... ] (<동아일보> 1979.8.13)

8월에는 버마의 교통.체신장관이 황인성 교통부장관 초청으로 방한했다.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 친 온 교통.체신장관이 ... 16일 하오 KAL기 편으로 내한 ...
체한 기간 중 최규하 국무총리와 [박동진] 외무장관 등을 방문하고 인천과 부산 등지 항만 시설과 현대조선소 등 산업 시설 등을 시찰하게 된다. 친 온 장관은 22일 떠날 예정 ... ]
(「버마 교통장관 내한」<매일경제신문> 1979.8.16)

( 경향신문 1979.8.16 / 버마 교통.체신장관 친 온이 내한할 때 ‘KAL기 편’으로 왔다는 보도는 그를 데려오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KAL 특별기를 보냈다는 말이었다. ‘판문점 사건’ 두 달 뒤인 1976년 10월 말 버마 외상 우 라 폰의 방한, 1982년 우 칫 라잉 외상의 방한 때, 1987년 6월 8일 우 산 유 버마 대통령의 방한 때도 KAL특별기를 제공했다는 말이 있다.)

이때 한국과 버마는 항공협정 개정 회담을 열었다. 한국 측은 아프리카 노선 취항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버마와의 접촉면을 늘리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이즈음 비동맹 진영의 형세는 미국과 박정희 정권의 이간책이 또 한 번 작동할 틈을 노출하고 있었다.

이해 6월 7-10일 스리랑카에서 열린 비동맹 25개국 조정위원회 회의는 비동맹 회원국이 직면한 난제를 풀지 못한 채 극심한 분열상을 노출했다. 이스라엘과 단독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한 이집트를 축출할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여 9월 아바나 회의에서 다시 다루기로 했고, 베트남의 침략으로 무너진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의 대표권 인정 문제도 정상회의로 떠넘겼다. 비동맹 진영의 분열을 갈구하는 미국이나 미국을 추종하는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환호작약할 일이었지만, 이 회의에서 이란과 파키스탄 및 이북(북한)의 비동맹 가입을 승인한 것은 미국과 박정희 정권에게는 뼈아픈 일격이었을 것이다.

9월 쿠바 아바나에서의 6차 비동맹정상회의를 앞두고 비동맹 진영의 분란은 더 심해졌다. 3년 전 미국은 튼튼한 비동맹 진영의 지지를 받아 날로 목소리를 높이는 이북의 승세를 잡아채기 위해 판문점 도끼 사건을 조작(操作)했다면, 이번에는 비동맹 내부 진영 간 갈등을 부추기면 될 일이었다.

[비동맹 세계는 양적으로 팽창해 감에 따라 국제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면서 공산주의 국가, 친서방 국가, 완전 중립, 반공국가, 친소국가, 친중국가 등으로 분류될 만큼 구성상 착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 및 중공과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있는 북한까지 가입시키는 가맹 자격의 무원칙을 드러내게 ... 특히 75년 앙골라 내전에 소련의 첨병인 1만5천 의 쿠바 군대가 공공연히 개입하고, 76년에도 쿠바군이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를 지원함으로써 소련.쿠바에 대한 반발이 높아갔다. 지금 쿠바군은 아프리카 14개국에 수 만 명이 진출해 있는 형편 ... 쿠바는 이제 소련 일변도의 공산주의국가로 돼 버렸는데, 이제는 베트남이 북경식 표현을 빌면 ‘동방의 쿠바’로 되어 소련의 민족해방 정책을 동남아에서 대행하려 하고 ... ] (「비동맹 세력의 귀추는?」<조선일보> 1979.6.1)

1979년 비동맹 진영에서 또 한 가지 불리한 상황은 비동맹 진영 내 분열이 심해지는 것과 함께 1960년대 비동맹 진영의 큰 축이었던 중공이 서서히 미국 편으로 기우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1972년 소위 ‘핑퐁 외교’로 물꼬를 튼 중공과 미국의 외교관계 정상화가 7년 만인 이 해 1월 마무리된 것과 관련이 있다.

[【북경=AFP.동양】중공은 오는 9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열릴 비동맹회의가 비동맹운동의 순수성 여부를 판가름할 시험장이 될 것으로 보고 이에 강력 대처할 방침을 세워 이번 비동맹회의는 그 성격과 회원국의 자격을 둘러싸고 일대 파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관측통들은 중공이 쿠바와 베트남이 아프리카와 동남아에 대한 패권을 추구하는 소련의 하수인으로 전락, 이미 비동맹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전 포기했으며, 소련은 이들 두 나라를 내세워 비동맹운동을 분쇄하려 하고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중공, 9월 비동맹회의 파란 예상」<동아일보> 1979.8.14)

( 동아일보 1979.8.14)

마치 중공이 비동맹 정상회의의 판을 깨뜨리기라도 할 것 같은 뉘앙스다. ‘소련이 동맹국인 베트남과 쿠바를 앞세워 비동맹운동을 분쇄시키려 한다.’ 미국의 심리전 구호였다. 중국 지도자 등소평이 미국을 방문해 카터 대통령과 만나고 온 직후인 1979년 2월 17일 중국이 친소 국가인 베트남을 침공하고 쿠바가 중국을 비난한 것은 미국이 비동맹 와해 공작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비동맹운동의 창시자인 유고의 티토 대통령을 내세운 이간책도 있었다.

[【아바나=AP.합동】9월 3일에 열릴 세계 87개국 비동맹정상회담을 1주일 앞두고 28일 대사급 예비회담이 개막된 가운데 주최국인 쿠바를 비롯한 친소 동맹국들이 순수한 중립노선으로 출발한 비동맹운동을 친소동맹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반면 비동맹운동 창시자인 티토 유고 대통령 등 온건파 지도자들이 비동맹운동의 이념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반 쿠바 전선을 형성할 조짐을 보임으로써 이념 노선을 둘러싼 일대 충돌이 예상되고 ... 준비회담이 27일 열린데 이어 28일 대사급 회담, 30일 외상급 예비회담이 속행되는 가운데 쿠바는 76페이지에 달하는 반미친소 결의안 초안을 마련, 비동맹운동을 소련의 동맹으로 전환시키려는 중대한 역사적 책동을 노골화 ... 초안은 세계의 모든 분쟁의 책임을 미국에 전가시키면서 소련이 제3세계의 유일한 우호국이라고 주장하고 ... 티토 대통령은 비동맹 운동의 독립 유지를 위해 이에 도전할 캠페인을 주도할 결의를 보여 ... ] (「비동맹권 충돌 예상 ... 친소 쿠바 vs 순수 유고파로 양분」<동아일보> 1979.8.28)

유고가 북한과 친한 쿠바의 친소 노선에 반기를 들 것이라는 뉘앙스다. 이처럼 중공이나 유고 등 소련과 갈등을 빚는 나라들이 아바나 비동맹 정상회의에서 모종의 행동에 나설 것같은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은 미국이 다가오는 비동맹 정상회의에서 일종의 ‘반소(련) 반란’을 획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소련은 사실상 비동맹운동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도 중국이나 유고 등이 소련에 대항해 반기를 들 것처럼 선전한 것은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미국을 압박하는 친소 국가 이북(북한)을 외교적으로 타격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비동맹정상회담에서는 78년 베오그라드 정상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비동맹 운동의 순수성을 고려하는 유고슬라비아 및 온건 노선의 제3세계 국가 그룹과 비동맹 운동을 친소 공산 노선으로 이끌어 가려는 쿠바.베트남 등 친소 그룹의 대립이 재연될 것으로 전망 ... 비동맹 운동이 분열 위기에 처해 있다. 더구나 아바나 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이 비동맹 운동의 방향에 발언권을 갖고 있는 25개 조정국의 자리를 노리면서 이 운동을 통해 한국 고립화를 획책하고 있어서 한국으로서는 이번 아바나 정상회담이 과거 어느 비동맹 회의보다 더 주목되고 ... ] (「정상회담 준비회의 ‘비동맹’ 대립 심각」<동아일보> 1979.8.29)

( 조선일보 1979.8.31)

이북(북한)은 3년 전 판문점 사건으로 인해 상실했던 비동맹 진영에서의 우위를 어느 정도 되찾았고, 재차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 등을 요구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아바나=AFP.동양】북한은 ... 89개 비동맹국 제6차 정상회담에서 참가국들이 한국을 고립시키고 북한의 한반도 통일운동을 지지하도록 치열한 외교 공세를 펴고 있다고 외교 소식통들이 27일 ... 이같은 북한의 움직임은 캄보디아의 신.구 정권 대립, 이집트 축출한 등 비동맹 운동의 단결에 역행하는 일련의 사태에 뒤이은 것으로 이에 반발한 인도네시아와 유고슬라비아는 참가국들이 좀 더 전 세계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촉구하는 결의안들을 정상회담 준비위원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북괴, 비동맹국 회의서 한국 고립화 획책」<동아일보> 1979.8.29 / 기사 본문에는 ‘북한’이라고 쓰고 제목에는 ‘북괴’라고 달았다.)

또 이번 9월 제6차 비동맹정상회의가 이북과 친한 쿠바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미국과 박정희 정권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북한은 거의 비동맹 회원국 대접을 받고 있었지만 남한은 고작 옵저버였다.

[【아바나=AFP.동양.본사특약】북한은 6일 주한미군 철수와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치시키는 문제에 대한 미국 북한 간의 협상에 한국이 옵저버로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수상 이종옥은 이날 남북대화는 단절 직전에 놓여 있다고 ... 또 북한은 재통일 문제를 통의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언제든지 광범위한 대화를 가질 준비가 돼 있다고 ... 그는 비동맹회의 연설에서 카터 미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기 보다는 오히려 증강시키면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 이종옥, 미와 직접 협상 또 주장 “한국은 옵저버”」<동아일보> 1979.9.7)

주최국 쿠바는 실제로 매우 ‘친북적인 결의안’ 을 준비했다.

[【아바나=AP.합동】제6차 비동맹 정상회의 주최국인 쿠바는 “미국이 한반도의 긴장을 자극하고 있다”는 비난이 포함된 결의안 초안을 제출 ... 쿠바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가 될 이번 회의를 쿠바의 국제적 지위 상승의 기회로 간주, 이미 미국과 중공을 개발도상국의 적으로 규탄하고 소련을 그들의 동맹국으로 치켜세움으로써 비동맹운동의 친소화를 시도 ...] (「“미국이 한반도 긴장 자극” ... 쿠바 결의안 제출」<동아일보> 1979.9.3)

( 동아일보 1979.9.3 비동맹 정상회의 개막)

아바나 비동맹 정상회의는 결국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 등 이북과 쿠바 및 유고 등의 이구동성을 반영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주한미군 철수 요구나 평화협정 체결은 동북아와 세계 평화 정착의 초석이 되는 것으로 그 누구도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미국 및 미국과 한통속인 박정희 정권은 이에 강력 반발했다.

박정희 정부의 강대완 외무부 대변인은 9월 12일 ‘한국 문제’에 대해 “비동맹회의가 북한의 요구만을 토대로 복잡한 한반도 사태에 언급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편파적인 견해를 회의 문서에 포함시킨 것은 공정을 잃은 처사일 뿐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면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남북 당사자 간의 대화를 통한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 보장을 구체화하는 노력을 취하기 이전에 전쟁 억지력의 일부인 외군의 철수 문제만을 비동맹이 거론한 것은 문제의 본말을 전도한 것이며, 어떠한 나라가 자신의 안보와 전쟁 방지를 위해 추진한 우방과의 쌍무적인 군사협력은 순전히 당사국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로 제3자가 간섭할 문제가 못 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남측의 이런 반발은 북측이 3년 전 판문점 사건으로 인해 상실했던 비동맹 정상회의에서의 대미 우위를 사실상 만회했음을 뜻한다.

[【서울=내외】북괴는 15일 쿠바의 아바나에서 지난 9일 폐막된 제6차 비동맹 정상회의가 채택한 최종 선언문 중 한반도 조항과 관련 주한 유엔군사령부 해체 및 외군 철수 휴전협정의 대미 평화협정 교체 등을 촉구했다고 뒤늦게 장황히 소개, 이의 합리화 선전에 열을 올렸다. 북괴 방송들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이 ‘아바나선언’이 이 지역의 분단 및 군사적 대치 상태가 평화에의 잠재적인 위협으로 되고 있는데 우려를 표시하면서 그같이 지적했다고 선전했다.] (「비동맹 ‘한반도 조항’ 북괴서 선전 공세」<경향신문> 1979.9.17)

1976년 5차 비동맹 정상회의가 열릴 때 판문점 도끼 사건이 일어나고 곧이어 유엔 무대에서 미국이 이 사건 영상을 틀어대며 이북(북한)을 궁지에 몰았던 것을 상기하면, 1979년 6차 비동맹 정상회의 다음 무대는 이틀 뒤인 9월 19일 개막되는 제34차 유엔총회가 되어야 했다. 북측으로서는 3년 전 판문점 사건으로 무산된 유엔총회에서의 주한미군 철수안의 가결을 시도하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북측은 ‘한국 문제 결의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판문점 사건으로 30차 유엔총회에서의 호기를 상실한 이북은 이번 총회까지 4년째 ‘한국 문제’ 결의안을 내지 못했다. 판문점 사건을 조작한 미국과 남한이 조직적으로 전개한 외교 공세로 인해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한 비동맹 진영의 의견이 많이 갈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중공 외상 한념용(韓念龍)이 9월 27일 연설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뜻밖이었다. 이는 어쩌면 북한이 중공과 함께 주한미군 철수 등을 포함한 한국 문제 결의안을 기습 제출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유엔 총회가 열리기 전부터 그런 전망이 있었다.

[끝으로 우리 입장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한반도 문제’이다. 유엔에서 불필요한 토의를 지양한다는 한국 정부의 방침 ... 북한도 예비의제나 보충의제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선 76년 이래 네 번째로 남북한의 표 대결은 없을 것 같다. 다만 ... 북한이 비동맹회의에서의 위치를 과신하고 ‘긴급하고 중요한’ 이라는 단서가 붙은 추가 의제로 제출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라는 ...] (「34차 유엔 총회 개막 - 캄보디아 대표권 최대 쟁점」<동아일보> 1979.9.19)

이런 상황에서 중공이 주한미군 철수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면 북측은 긴급동의 안건으로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제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깜짝 쇼가 벌어졌다. 중공 외상의 주한미군 철수 요구 다음 날 대표연설에 나선 버마 외상이 갑자기 ‘비동맹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유엔본부=AP.UPI.본사특약】우 민트 마웅 버마 외상은 28일 유엔 총회에서 버마의 비동맹그룹 탈퇴를 발표, 비동맹 회원국은 94개국으로 줄었다. 민트 외상은 이날 9월 초 아바나 비동맹회의가 비동맹 이념을 고수하라는 버마의 제의를 무시했기 때문에 탈퇴한다고 밝혔다.] (「버마, 비동맹 탈퇴 “비동맹 이념 고수 무시당해”」<동아일보> 1979.9.29)

( 동아일보 1979.9.29)

버마 외상은 또 자기네와 뜻을 같이 하는 나라들이 별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버마는 그에 가담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선언했다(<조선일보> 1979.9.30). 비동맹진영을 대신한 제3지대를 만들어 비동맹을 무력화시키겠다는 말이다. 네 윈 정권 출범 이후 약 20년 동안 비동맹 기치를 흔들어대던 버마가 비동맹운동(NAM)에서 탈퇴한 것이 버마를 활용해 비동맹을 와해시키려는 미국의 공작과 무관했을 리 없다.

특히 버마가 쿠바의 카스트로 대통령의 친소 경향이 비동맹 정신에 어긋난다고 시비한 것은 중공이나 유고 등 소련과 갈등을 빚는 나라들을 앞세운 미국의 ‘반소(련) 반란’ 심리전과 궤를 같이 한다. 미국은 중공과 유고가 비동맹 정상회의를 뒤엎을 것같은 분위기를 조장하면서 실제로는 뒤에서 버마를 충동질했을 것이다.

또 1979년 어느 시점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해 TV 수상기가 버마에 보급되고 미국 TV 영화 시리즈 <스타스키와 허치>(Starsky and Hutch), <초원의 집>(Little Hpuse on the Prairie)이 버마에 수입된 것도 서방의 대버마 외교 공세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 강진욱『1983 버마』306쪽)

( 강진욱『1983 버마』306쪽)

P.S.

한편, 한국 내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이북(북한) 등 공산 진영이 ‘한국 문제’ 안건을 기습 상정하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9월 19일 개막된 34차 유엔 총회는 12월 18일까지 3개월 간 계속되는 일정이었고, 10월 14일까지 각국 대표들의 기조연설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10월 6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망명지인 미국에서 갑자기 파리로 가 실종되고 사흘 뒤부터 그 사실이 대서특필됐다. 그렇게 김형욱이 파리에서 실종된 지 20일 뒤, 그의 실종이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살해됐다. 또 유엔 총회가 폐막되기 이틀 전에는 12.12 쿠데타가 일어났다.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특히 정권 차원의 ‘유사’(有事)는 주한미군 계속 주둔의 명분이 된다고 보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틀림없이 유엔 총회에서의 한국 문제 상정과 토의에 쐐기를 박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남북한의 동시 수교국이면서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양측이 비동맹외교의 기치를  내걸고 구애 경쟁을 벌였던 버마가 갑자기 비동맹 탈퇴를 선언하고 곧바로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그 ‘새끼 정권’으로 교체된 것이 ‘1983 버마 사건’의 서막이자 전조였음을 ...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1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