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1981 버마 ‘네윈-산유 체제’
강진욱 기자 | 등록:2021-06-24 12:11:07 | 최종수정:2021-06-25 16:31:39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12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12. 1981 버마 ‘네윈-산유 체제’

앞글(11편)에서 전두환 정권과 미국이 ‘필리핀에서의 최중화 작전’을 마무리하면서 곧바로 ‘버마 공작’에 착수했다고 봤다. ‘필리핀 작전’은 1981년 7월 전통(全統)의 동남아 순방 중 필리핀 방문 시점에 종료됐고, 8월에는 버마 지도자 네 윈이 물러난다는 소식과 함께 남한에서는 육사 12기들을 앞세운 수상한 대북공작 ‘812 계획’(1981.8.12)이 시작됐다. ‘버마 공작’이 시작됨과 동시에 ‘북한의 도발’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여론 조작이 본격화됐다는 사실도 앞글에서 살펴봤다.

그러는 동안 버마에서는 ‘네 윈 양위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1981년 8월 네 윈 양위 계획 발표에 이어 9월에는 버마 국가평의회 서기 산 유 전(前) 군참모총장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두 달 뒤인 1981년 11월 산 유가 대통령이 된다.

(사진 39-20 : 동아일보 1981.10.11)

[버마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된 산 유 장군(63)은 근 40년 동안 군.정계에서 그의 전임자인 네 윈 대통령을 보좌해 온 측근 ... 62년 네 윈의 무혈 쿠데타가 성공한 후 산 유 대통령은 버마 군 부참모총장과 함께 재정기획상을 겸임했으며, 72년부터 74년까지 버마 군 참모총장 겸 국방상으로 봉직 ... 64년 버마 유일 정당인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의 서기장으로 임명돼 지난 10월까지 그 직책을 맡아 ... 네 윈 전 대통령과 같이 철저한 민족주의자인 산 유 대통령은 동서 어느 진영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통 비동맹 정책을 고수할 것으로 전망 ... ] (「산 유, 40여 년 간 네 윈 보좌 ... 비동맹정책 고수할 듯」<동아일보> 1981.11.10)

1962년 3월 네 윈의 2차 쿠데타 때부터 버마는 ‘네윈-산유 체제’로 운영돼 왔다는 말이다.
1971년 6월 28일 산 유가 버마 혁명지도부의 ‘민정 이양’을 선언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73년 네 윈과 산 유가 군복 대신 양복을 입고 마치 민간 정부가 새로 구성되는 것처럼 버마 지도부를 재구성한 일도 있었다.

[【랭군=AFP.합동】버마 혁명통치위원회는 지난 9년 간 계속돼 온 군정을 끝내고 신헌법에 따라 구성되는 민선 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것이라고 ... 버마 군 참모장 겸 버마 사회주의계획당 간사장인 산 유 소장이 28일 ... 버마 유일 정당인 사회주의계획당 제1차 전당대회에서 낭독한 정치보고서에서 이와같이 선언하고, 민정 이양을 위해 우선 혁명위원회를 내각체제로 개편하고 정치 지도권을 사회주의계획당으로 넘기고 당으로 하여금 사회주의 원칙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경제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기초토록 할 것이라고 ... 그는 이어 버마가 비동맹정책을 계속할 것이며 ...] (「버마, 민정 이양 선언 - 혁명위를 내각 체제로 개편」<조선일보> 1971.6.30)

이렇듯 버마는 네 윈을 앞세운 두 번의 쿠데타 때부터 누군가의 매우 주도면밀한 기획 아래 ‘네윈-산유 체제’로 운영돼 왔지만 일단 외부에 비춰지기로는 네 윈이 1인자였고 산 유가 2인자였다. 그랬던 것을 네 윈이 물러나고 산 유가 1인자가 되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한 것이다.

[산 유 대통령은 ... 집권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 당수직을 맡고 있는 네 윈 전 대통령의 그늘에 남게 될 것으로 정통한 관측통들은 보고 있다. ... 산 유 대통령은 과거에 많은 지지자를 끌어 모았지만 대중을 이끌 카리스카적 수완은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AP】] (「네 윈 친정(親政) 받을 듯 ... 산 유, 정치엔 미숙」<조선일보> 1981.11.10)

네 윈이 1인자의 자리를 내 준 것도 아니고 네 윈이 이즈음 딱히 양위할 이유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11월 15일 자 ‘주간세계’ 해설판에서, 네 윈이 건강상 이유로 양위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표시하며 “희귀한 일”이라고 논평했다. 실제로 네 윈은 그 해 4월에는 일본을 방문해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수상 및 히로히토 천왕 등과 두루 만나는 등 매우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39-30 : 네윈-스즈키 젠코)

또 산 유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네 윈이 모든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의 실력자 네 윈. 그는 [1962년 쿠데타 이후] 2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버마를 통치 ... 81년 대통령직을 산 유에게 넘겨 준 뒤 현재 집권 사회주의계획당 의장직만을 맡고 있다. 그러나 네 윈은 올해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베일 뒤에 깊숙이 눌러 앉아 여전히 버마를 섭정통치하고 있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다.](「베일 속에 가려진 버마 통치자 네 윈」<경향신문> 1986.1.18)

1986년 2월 6일에는 독일 바이체커 대통령이 버마를 방문해 네 윈과 만난 일도 있다. 결국 네 윈 양위는 네 윈과 산 유 둘 중 누군가를 허수아비로 앉혀 놓고 다른 하나가, 또는 이 둘을 움직이는 누군가가 뒤에서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카게무샤 전술’(과거 일본 전국시대 가짜 영주를 세워 진짜 영주를 보호함)이었다. 왜 이런 술수가 필요했을까. 그 이유는 버마 정부 내 의사결정 과정을 비정상화 비공개화하기 위해서였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1983 버마 사건’ 발생 5개월 전(1983.5.17) 버마 군정보국(MIS) 국장이 갑자기 숙청돼 군 정보국 기능이 마비되는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자신들의 성지(아웅 산 묘소)의 경호 및 안전 점검 책임을 방기하는(전적으로 전두환네 경호팀에게 맡기는)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이렇게 ‘1983 버마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완비되는 때(버마 군 정보국장이 숙청된 직후인 1983년 5월 하순) 예정에 없던 전두환의 버마 방문이 결정됐다는 사실도 앞서 밝혔다.)

이처럼 상상불허의 초현실적 사건으로 귀결될 네 윈의 양위가 자연발생적이었을까. 일단 그의 양위와 후계자 산 유의 발탁 및 1년 6개월 뒤 군 정보국장 숙청 등은 모두 네 윈의 ‘인지(동의) 하에’ 이뤄졌을 것으로 본다. 명목상 최고지도자인 네 윈 모르게 이런 일들이 벌어졌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네 윈의 인지(적 행위)는 여기까지다.

어떤 이유로 대통령 자리를 내 주고 1년 6개월 뒤 군 정보국을 해체함으로써 자국의 치안 권력에 틈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틈을 탄 누군가가 아웅 산 묘소 천장에 몰래 폭탄을 설치한 것은 네 윈과는 무관했다고 봐야 한다(이런 가공할 음모를 네 윈이 주도했거나 알고도 방치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볼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그 버마 내 권력 공백을 유발한 대통령직 양위나 1년 6개월 뒤의 군 정보국장 숙청 등 ‘1983 버마 사건’ 조작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을 만든 것은 네 윈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작업이었다고 봐야 한다. 누가 이렇듯 주도면밀하게 ‘1983 버마 사건’을 조작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1983 버마 사건’을 저지른 자들만이 알고 있겠지만, 네 윈 및 네 윈 정권의 정체를 파악하면 그 답의 근사치를 구할 수 있다고 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네 윈의 버마는 ‘사회주의 비동맹국가’를 자처했지만 무늬만 그러했다. 네 윈은 미국이 원하는 아시아 반공의 기수였고 그의 1.2차 쿠데타는 모두 중국(중공)에 대한 미국의 적의를 대변했다. 또한 네 윈 정권은 ‘비동맹 노선’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미국 및 서방의 편에 서서 비동맹 진영을 흩뜨리는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트로이 목마’였던 셈이다. 이를 논증하는 데는 1962년 두 번째 쿠데타 이후 5년 남짓한 기간에 그와 그의 정권이 보인 행보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또한 네 윈 정권의 정체를 파악하다 보면 그 정권이 남한의 박정희 정권과 흡사 일란성 쌍생아였다는 사실, 결국 두 정권이 미국에 의해 동시에 잉태돼 매우 불량하게 양육된 지 20여년 뒤 ‘1983 버마 사건’이 벌어진다는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네 윈 정권은 1958년과 1962년 두 차례 쿠데타로 들어섰다. 한 사람이 두 번이나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그것은 누군가 그의 쿠데타를 지속적으로 부추기고 방조한 것이다. 4.19 의거 약 일주일 전 미 CIA 한국지부장 피어 드 실바(Peer De Silva)가 당시 연합참모본부의장이던 백선엽을 찾아가 “한 번 나서보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쿠데타를 부추기고(「백선엽의 6.25 징비록」①CIA 한국지국장의 은밀한 정권 장악 권유), 이즈음부터 박정희가 미국(주한미국대사 매카나기와 CIA 한국지부장 브루스터)과 미군(주한미군사령관 매그루더 및 그의 고문 제임스 하우스먼)의 묵인과 방조 아래 여러 차례 쿠데타를 모의하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것과 꼭 닮았다.

또한 네 윈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은 남한에서 여운형과 김구 등 남북 합작 즉, 외세에 저항하며 자주독립을 표방했던 인사들이 미국의 끄나풀들에 의해 살해된 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과 흡사했다. 아니 똑같았다. 여운형(呂運亨)과 김구(金九)가 각각 1947년과 1949년 살해되고 그 사이인 1948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것처럼 버마의 독립영웅 아웅 산 등이 1947년 살해된 뒤 네 윈이 득세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운형 선생과 아웅 산 장군이 1947년 7월 19일 한 날 암살된 것을 상기하면(여운형 선생은 61세, 아웅 산 장군은 32세), 당시 조선과 버마는 미.영 및 일본 등 (친)서방 세력에게는 일종의 ‘동시작전구역’이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1958년 9월 26일 네 윈의 1차 쿠데타 때 ‘반공’에 기치를 든 것은 박정희 쿠데타 직후 ‘반공’이 ‘국시’로 내걸린 것과 똑같다. 이들 두 정권은 아시아 공산주의 확산 저지 및 아시아 침탈을 위한 미국의 교두보였음이 분명하다. 

(사진 39-31 : 조선일보 1958.9.28)

[【랭군=AP.동화】버마 육군은 26일 밤 동요하고 있는 현 정부가 공산주의자 수중에 넘어갈 것을 미연에 방지할 의도 하에 무혈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 ... [버마는] 중공과 1천500 리에 걸쳐 접경하고 ... ] (「버마에 반공 무혈혁명 ... 우 누 수상, 육군 압력으로 정권 이양」<조선일보> 1958.9.28)

네 윈은 당시 미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아시아의 반공주의자였다. 한때는 아웅 산 등과 함께 버마 독립투쟁에 나섰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을 등에 업으면서 어느 새 미국이 원하는 반공의 기수가 돼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박정희가 한때는 ‘남로당 빨갱이’였지만 곧바로 미국이 원하는 반공의 기수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과 똑같다.

[진취적인 기질을 가진 당년 48세의 동(同) 장군[네 윈]은 공산주의에 맹렬히 반대하고 있으며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악착같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등의 언명을 한 바 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버마인 중의 한 사람 ... ] (<조선일보> 1958.9.28)

<조선일보>가 설명한 네 윈 쿠데타의 이유는 흡사 일제 패망 이후 극심했던 조선의 혼란기가 ‘좌파 말살’로 정리됐던 끔찍한 우리 역사를 상기시킨다. 

[우 누 수상은 자기 위치 유지를 위하여 공산주의자들을 포섭하는 등 그야말로 지지멸렬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었던 것 ... 우 누 수상의 이와같은 지나친 용공정책으로 합법화된 공산도당들은 ‘공산세계 창설’을 공공연히 선언하면서 중공과 접경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을 이용하여 버마의 완전 공산화를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개시함에 이르러 마침내 군부에서 현 정권에 반기를 들고 ... 전권을 장악하고 우 누 수상을 축출하기에 이른 것 ... ] (「버마 혁명의 내막」<조선일보> 1958.10.3)

우리의 이 혼란기가 미군 방첩대(CIC) 등에 의해 여운형과 김구 등 남북합작 또는 통합파가 잇달아 살해되고 또한 ‘보도연맹’ 사건 등으로 수많은 이들이 ‘좌익효수’ 당하면서 정리됐듯,  버마의 정치적 혼란 역시 - 우리에 비해서는 비교적 평온했지만 - 비슷한 방식으로 정리됐다. 네 윈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세력을 탄압하면서 권력을 키웠고 1968년 9월 27일 에는 공산당 당수가 살해되기도 했다.

[【랭군=AP.동화】버마 공산당수 타킨 탄 툰이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낀 한 청년 공산당원에게 암살됨으로써 버마공산당은 자멸을 결과할지 모를 내부 권력투쟁에 직면했다.] (「버마 공산당수 피살」<중앙일보> 1968.9.28)

버마의 국부로 추앙받는 아웅 산이 바로 버마공산당의 창립 멤버였다. 그가 1947년 암살된 뒤 득세한 네 윈이 두 번에 걸쳐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것이나 - 그가 사회주의니 국유화니 떠드는 와중에 - 버마공산당 대표가 살해된 것은 네 윈과 그의 사회주의는 한낱 미국의 마리오네트 연극이었음을 웅변한다. 한국에서 좌익계를 말살하고 극우 꼴통들을 키운 것이 미국이었듯이, 버마에서도 좌익계가 소멸하는 가운데 네 윈이 버마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모두 미국의 작계였다.

[육군총사령관 출신으로서 그는 AP 기자에게 자기의 과업은 두 가지라고 ... “첫째 우리는 반란과 테러 행위를 완전히 진압하여야 한다. 둘째 우리는 조국을 방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군대를 증강시켜야 한다.” ... 8만 버마군을 지휘하는 동 장군은 [강조]작년에 신병치료차 미국을 방문[강조]한 바 있다.] (<조선일보> 1958.10.3)

<동아일보>의 네 윈 프로필을 보면 당시 미국은 버마 군부 내 네 윈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네 윈 장군은 작년에 치료를 받고자 [강조]미국에 가서 무기 구입에 관하여 미국 군사당국자들과 회담[강조]한 바 있다. 버마 전역은 불과 2개 군관구로 구분 ... 최근까지만 하여도 최대 규모의 군사력 단위가 대대 본부 ... 근자에 와서 여단 본부를 두게 되었는데 육군은 금년 말 경 일선에 사단을 배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1950년 네 윈 장군은 버마 내각의 부수상으로 있었는데 그 당시 사회당 각료가 집단 사퇴한 바 있다. 그는 현재 두 번째 부인과 함께 조용히 살고 있으며 한가한 틈에는 골프와 경마를 즐긴다.] (「열렬한 반공주의자 - 네 윈 장군 프로필」<동아일보> 1958.9.28)

그처럼 미국의 지원 아래 네 윈은 차근차근 버마 군 및 정치권에서 세력을 넓히고 인지도를 높였다. 1차 쿠데타 6개월 뒤인 1959년 3월 즈음 네 윈은 이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갖게 된다.

[47세의 장군 네 윈 수상은 ... 네 윈 배격 운동, 국회 내에서의 네 윈 불신임 등으로 발악하던 여당 내 부패세력 간부들도 요즈음에 와서는 침묵을 지키거나 네 윈 정권에 협력 ... 악질 불법 분자 ...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공판에 회부 ... 우 누 씨가 수 년 전부터 민주주의 절차를 밟아서 실천하려던 여당 혁신은 네 윈 장군에 의한 강권 발동을 통해서만 실현되었던 것 ... 여당인 반파쇼인민자유연맹의 압력과 공산파괴세력에 의해서 협공될 듯이 보이던 네 윈 정권은 이리하여 그 권력 기반을 튼튼히 할 수가 있게 된 것 ... ] (「중공의 침략 근성과 인근 동남아 제국」<조선일보> 1959.3.31)

미국의 네 윈 지원은 노골적이었다. 그 목적은 버마를 중국 및 소련의 영향권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

[【워싱턴=UPI.동양】미국은 5월 버마에 대한 경제적 증여원조를 재개 ... 전 버마 정부는 냉전에서의 그 중립성을 위태롭게 할는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1953년 이래 증여 원조의 수락을 회피하여 왔다. 국무성은 오는 4년 간에 걸친 3,700만 불의 대 버마 원조계획을 ... 버마의 대외적 중립정책은 변경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 미국 원조액은 버마가 차관협정에 의하여 1956년부터 소련 및 중공으로부터 받고 있는 3천500만 불 내지 4천만 불의 원조액과 거의 동액이 될 것이다.] (「미, 버마에 원조 - 4년 간 3천700만 불」<동아일보> 1959.7.7)

(사진 39-32 : 동아일보 1959.7.7)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기로 했다는 것은 네 윈 쿠데타가 미국 등 서방의 긴밀한 방조 아래 이뤄졌다는 확신에 이르게 한다. 1959년 6월 8일 네 윈이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도 마찬가지다.

(사진 39-33 : 1959년 6월 8일 네 윈이 이스라엘 로드(LOD) 공항에 도착해 데이비드 밴 구리온(David Ben Gurion) 이스라엘 수상 및 버마 주재 이스라엘 대사의 영접을 받는 장면. 당시 이스라엘이 버마에 대사관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 사진 위키백과)

네 윈이 쿠데타 한 해 전에는 ‘신병 치료 차’ 미국에 가고 쿠데타 이듬해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은 그의 배후 조종자가 누구인지를 시사한다. 1959년 말 경 네 윈 정권의 친미.친서방 성향이 드러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버마의 네 윈 군인 내각은 명년 2월 말에서 3월까지에 총선거를 행하여 정권을 정당에 돌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동 내각의 1년 간의 시정이 [강조]버마의 중립정책을 사실상 친서방정책으로 바꾸어 버린 일이다. 중립정책은 명목만 남았을 뿐[강조]이다. 지난 7월 동 정부는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을 용의가 있음을 선언 ... 미국도 앞으로 4년 간 3,700만 불의 원조를 공여할 계획 ... 독립 이후 10여 년을 중립정책이라는 장막으로 국가보전을 꾀해 왔던 버마가 이 1년 동안에 갑자기 친서방 정책으로 바꿔진 원인은 네 윈 정부의 정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동안 국내외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이 공산 진영의 버마에 대한 야심을 폭로하게 되고 버마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여 반공 감정을 가꾸게 한 때문이다.] (「무너진 버마의 중립 - 친서 정책으로 전환 ... 소, 10년 공작도 도로아미타불」<조선일보> 1959.11.26)

( 조선일보 1959.11.26)

버마의 중립 노선을 친서방 노선으로 바꾸는 데는 돈이 주효했다. 미국의 대외 원조는 제3세계 약소국 정권 교체의 주요 수단 중 하나. 미국이 이승만 정권을 용도폐기할 때도 원조를 중단했고 이승만이 물러난 뒤 원조를 재개했다. 똑같은 수법을 남한에서 쓰고 또 버마에서 쓴 것이다. 미국은 이런 식으로 네 윈의 세력을 키웠을 것이다. 그렇게 네 윈은 서방 세계의 원조 자금을 뭉텅이로 끌어올 뿐만 아니라 여러 반군 세력을 제압하는 등 버마 외정과 내정의 혼란을 제거한 구원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버마 최대의 고민인 치안 문제는 우누 전 정부보다 현 [네 윈] 정부가 확실히 나은 성과를 올렸다. 1년 동안의 과감한 토벌로 반란군 측은 사상 3천 이상, 포로 투항자 4천800여의 타격을 받았고, 현재 카렌족 반란분자 인민의용백색단 등의 잔존 반란분자는 중공-버마 국경 방문의 산 속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공산당과 합류하고 ... 그들이 국경 부근에서 중공의 원조로 힘을 회복하여 또다시 버마 교란의 기회를 엿보고 ... 중공의 특수공작원이나 스파이들이 승려나 난민을 가장하여 자유롭게 버마 국내에 들어와 침투 공작을 하고 ... 정부가 금년 4월부터 전국에 걸쳐 승려의 등록을 엄격히 한 것도 이 때문 ...] (<조선일보> 1959.11.26)

네 윈이 급속히 친서방.친미로 기울자 소련과 중국도 대응에 나섰을 것이다. 1960년 1월 24일 네 윈은 북경을 방문해 주은래(周恩來) 수상과 만나 버마-중국 간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고(1960.1.28), 2월 16일에는 후르쇼프(Nikita S. Khrushchyov) 소련 서기장이 버마를 방문해 네 윈 수상과 만나 양국 간 문화과학교류협정을 체결하기로 하는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했다.

그런데 그 사이인 2월 6일 총선거가 실시돼 3월 20일 우 누가 다시 수상이 됐고, 네 윈은 군 참모총장으로 물러났다. 1958년 10월 네 윈 쿠데타 후 1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아마도 네 윈을 수상이나 대통령으로 내세우기는 부족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쿠데타 당시 네 윈이 “우누 씨와의 합의로 ... 정권을 담당하게” 됐다거나 “버마 정계의 원로 우 누 씨의 의도를 잘 받들어 여당 내 부패분자와 공산파괴분자를 신속 과감하게 숙청했다”는 등등의 표현(<조선일보> 1959.3.31)이 그것이다.

미국은 제3세계 약소국의 쿠데타를 획책할 때 자신들이 내세우고자 하는 이의 인지도나 실력이 부족할 경우 일단 인지도와 신망이 있는 자를 앞세운다. 그와 똑같은 예를 한국에서 찾을 수 있다. 5.16 쿠데타 때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박정희 소장 대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을 내세웠던 것. 장도영이 곧바로 ‘반혁명분자’로 몰려 거세됐듯이 우 누 역시 1년 뒤 다시 네 윈에 의해 쫓겨난다.

버마와 남한 군사독재체제의 쌍생아적 동질성은 또한 동시성을 띤다. 버마의 이 과도기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네 윈의 2차 쿠데타를 부추기려는 듯 한미 양국 사절이 잇달아 버마를 방문했다. 5.16 쿠데타 당일 외신들이 “버마 쿠데타를 닮았다”고 타전한 것은 한국과 버마의 두 군사정권이 태생으로 동질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서울=UPI급전.동양】16일 서울에서 발생한 한국 군부 쿠데타는 과거 파키스탄 및 버마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형태를 따른 것 ... 한국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을 위시한 군 장성들은 ... 1958년 10월 무혈 쿠데타로 파키스탄의 실권을 장악했던 아유브 칸 장군 및 버마에서 실권을 장악한 네 윈 장군의 전례를 따르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동아일보> 1961.5.16)

5.16 쿠데타 두 달여 만인 1961년 7월 28일부터 한국의 ‘동남아사절단’이 동남아를 순방했고 그 첫 방문국이 버마였다는 점도 특이했다.

[【랭군=권오기 특파원】동남아친선사절단은 그 첫 중립권 방문국인 버마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제1일을 보냈다. 29일 상오 외상 서리인 에 마웅 박사와 외무성 사무차관인 우 소에 틴 씨를 만나 2시간 이상 회담 ... 사절단장 최덕신(崔德新) 대사는 이들 버마 당국자는 이번 군사혁명을 충분히 이해하였고 유엔에서 가능한 한 최대한의 지지를 할 것을 약속하는 한편 특히 한국의 통일은 유엔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였으며 국교 수립을 위해서도 구체적인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유엔서 지지 약속” - 우리 사절단 버마 방문 성과」<동아일보> 1961.7.30)

박정희 정권의 사절단이 버마를 먼저 찾은 것은 이즈음 북한이 먼저 버마에 영사관을 개설하자 그 ‘맞불’을 놓기 위함이었다. 이 해 1월 버마 무역사절단이 중국에 이어 이북을 방문했고, 얼마 뒤에는 박성철 부수상을 단장으로 한 이북 사절단이 버마에 와 영사 관계 개설에 합의했다. 버마와의 관계에서 남측은 박정희 쿠데타 때부터 북측을 따라잡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남한은 북한보다 1년 늦은 1962년 7월 버마와 영사급 외교관계를 맺지만, 1975년 대사급 외교관계 맺은 것은 북한과 동시였다.

최덕신은 주월(베트남)대사로 박정희의 쿠데타 전후에는 사실상 한국을 대표하는 - 미국이 가장 신임하는 - 외교관이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61년 3월 장면 대통령 시절에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극동 경제위원회(15차 회의)에 한국대표단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런 그가 5.16 쿠데타 직후 버마를 방문해 쿠데타의 정당성을 역설했다면 그것은 네 윈의 2차 쿠데타를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로부터 닷새 뒤 미 국무차관이 버마를 방문한 것도 마찬가지다.
 
[【랭군=로이터.동화】체스터 보울스[Chester Bowles] 미 국무차관은 4일 우 누 버마 수상의 초청으로 하룻 밤 체류코자 당지[랭군]에 도착 ... 보울즈 차관은 곧 우 누 수상과 국제정세에 관해서 장시간의 회담을 가졌다.] (「보울스 차관 랭군 도착」<조선일보> 1961.8.5)

또 한 달 뒤에는 미국의 순회대사가 버마에 갔다. 

[【랭군.13일.AP=합동】라오스의 중립주의자 수바나 푸마 공(公)과 미국 순회대사 해리만[Averell Harriman] 씨가 15일 라오스 위기를 타개하려는 새로운 노력으로 랭군에서 회동할 예정이라고 13일 버마의 우 누 수상이 말하였다. 우 누 수상은 해리만 씨와 수바나 공이 수일 전 회담 개최를 위한 허가를 요청하여 버마 정부가 허락했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조선일보> 1961.9.14)

석 달 뒤인 1961년 12월 5일에는 이스라엘 수상 밴 구리온이 버마를 방문한다. “국빈으로서 우 누 버마 수상과 만나기 위해”였다지만(<동아일보> 1961.12.7), 네 윈이 1차 쿠데타 한 해 전 이스라엘을 방문해 밴 구리온을 만난 것을 상기하면 그의 버마 방문이 석 달 뒤인 1962년 3월 2일 일어나는 네 윈의 2차 쿠데타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또 박정희의 쿠데타 10개월 뒤 네 윈의 2차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사실, 그로부터 1년 8개월 뒤인 1963년 11월 1일 미국이 월남의 디엠 정권을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조작한다는 사실로 미뤄보면 한.미 양국 사절들이 번갈아 버마에 간 것 역시 예사로 보아 넘길 수 없다. <동아일보>는 또, 1차 쿠데타 때와 마찬가지로, ‘반공’이 그 목적이라고 크게 제목을 달았다. 그러면서 네 윈을 버마 독립운동의 영웅이라고 추켜세웠다.

(사진 39-35 : 동아일보 1962.3.3)

[【랭군.2일.AP=동화】버마독립운동의 영웅인[?] 당년 51세의 네 윈 장군은 1958년 9월 26일의 군사쿠데타에서 우 누로부터 정권을 인수 ...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하고 있다고 비난 ... 우 누 수상은 자신이 이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다고 자인 ... 네 윈 장군은 15개월 간 군사정부의 강자로서 국가를 통치하고 그 후 선거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은퇴 ... 그리고 동 선거는 우 누 씨를 수반으로 하는 민간 민주정부에 정권을 복귀시키는 결과를 ... 네 윈 장군은 방송을 통해서 육군이 “극심하게 악화된 사태를 장악하겠다”고 말하였다.] (「버마 혁명 완전 성공 - 공산화 방지 목적」<동아일보> 1962.3.3)

2차 네 윈 쿠데타도 우 누 정부의 ‘친공 중립’ 노선을 깨뜨리고 버마에 친미.친서방 정권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 누 씨 영도 하의 여당인 사회당의 극좌익적인 반파쇼인민주유연맹은 최근의 수 주 간 점차 세력을 가지게 되어 1개월 전에 열린 치열한 당 대회에서의 선거에서 동 당의 집행권을 가진 직책 5개를 차지하였다. 우 누 씨는 당수로서 재선되려고 모색하지 않고 자기는 1964년 정치계에서 은퇴하여 불경 경전 연구에 전심하겠다고 발표 ... 좌익적인 교육사법상인 에 마옹 씨가 당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 ... 우 누 씨는 버마를 중립 노선을 인도 ... 그러나 그는 버마를 공산 블록으로 기울이게 하라는 압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 완강한 반공주의자인 네 윈 장군은 자기는 군부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만일 국가가 위협을 받을 때는 자기의 군사력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동아일보> 1962.3.3)

[이번의 쿠데타는 ... 우 누 자신이 좌경적인데다 그가 영도하는 연방연맹이 실질적으로 친공적 인사들에 의해 그 헤게모니가 장악되고 있으며 따라서 우 누 수상 자신이 ‘공산주의 일보전 정책’이란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다는데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 총선거에서 집권한 우 누 수상의 연방연맹은 그 후 또다시 온건.강건 양 파로 갈려 ... 이 연맹 총재의 자리는 우 누 수상으로부터 강경파(좌파)의 수령 우에 몽(우 누 내각의 사법상 겸 문교상)에게로 넘어갔고, 기타 당 내 5개 중요 간부직도 강경파의 수중에 들어가 ... 우 누 수상의 정책도 표면적인 친공정책으로 기울어져 이 나라의 공산화에의 길을 채찍질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에서 불의에 들고 일어난 것이 네 윈 장군 ... 두 번에 걸쳐 쿠데타를 유발시킨 우 누 수상의 좌경노선 ... ] (「혁명을 불러 온 우 누의 곡예 - 공산주의 일보 전 서 네 윈 장군 등장」<경향신문> 1962.3.4)

그런데 쿠데타 직후 네 윈은 마치 자신의 쿠데타가 미국과는 무관한 것인 양 제스처를 취하면서 사회주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랭군=AP.합동】네 윈 장군이 영도하는 버마 혁명정부는 중립국가인 버마에서 포드재단과 아세아재단의 운영을 금지하기로 결정 ... 버마 정부는 앞으로 정부 대 정부를 통한 원조만을 수락하고 개인재단으로부터는 받지 않을 것이라고 ... ] (「미 재단 활동 금지...버마 정부 결정」<동아일보> 1962.4.21)

[【랭군=AP.동화】버마 혁명위원회의 의장인 네 윈 장군은 공산주의적인 국민통일전선당에게 자기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세우기로 결의했다는 뜻을 전했다고 ... 국민통일전선본부에서 발표한 코뮈니케는 네 윈 장군이 말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란 반제국주의적인 모든 분자, 애국자, 농민 및 노동자에게 권력을 주는 정치제도인 인민민주누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적 민주국가 세울 터”」<조선일보> 1962.5.10)

외세를 등에 업은 네 윈이 두 번이나 ‘반공 쿠데타’를 일으킨 뒤 ‘사회주의’ 운운하는 것은 가당찮았다. 네 윈이 사회주의를 표방한 지 두 달만인 1962년 7월 랭군대학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도 네 윈의 위선을 간파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네 윈의 군대는 학생들의 시위를 군홧발로 짓밟았고 미국은 수수방관했다. 박정희 정권이 집권 내내 계엄과 비상조치를 남발하며 국민의 저항을 무마할 때, 또 전두환이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진압할 때 미국이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과 같다. 이때 문을 닫은 버마 대학들은 2년 2개월 뒤인 1964년 9월에야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네 윈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학생 시위를 진압한 뒤 전국 라디오방송을 통해 “만약 학생들이 계속 소요를 일으켜 우리에게 도전한다면, 우리는 ‘칼에는 칼로, 창에는 창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한다. 그리고 일주일 채 지나지 않은 1962년 7월 13일 그는 “치료 목적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및 영국을 여행했다. 대학을 폐쇄하고 국민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어 놓고 유럽 여행에 나선 것이다.
이듬해인 1963년 국유화 계획은 거짓 사회주의 깃발을 흔드는 것만큼이나 위선적이었다.

[【랭군=AP.동화】버마의 모든 개인기업들을 국유화한다는 군사정부의 발표에 기업주들은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이런 정부 방침은 지난 15일 네 윈 장군과 실업가들 사이에 1시간 동안의 회담이 있은 뒤에 발표된 것 ... ] (「모든 기업체 국유화...버마 정책 급변」<동아일보> 1963.2.25)

대개 국유하는 식민지를 청산하고 독립을 쟁취한 나라들이 서방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그들의 사유재산을 국가 소유로 만드는 작업을 의미하지만, 네 윈의 국유화는 서방이 아닌 중공을 겨냥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지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는 네 윈의 국유화가 중국을 겨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랭군=로이터.동화】버마 최고통치자 네 윈 장군은 23일 버마 내에 있는 모든 내.외국인 소유 은행을 국유화하는 행정명령을 공포 ... 14개 외국인 소유 은행과 10개 버마 민간은행은 모조리 접수 ... 외국은행들은 현존 부채를 제외한 그들의 원 자본, 건물대금 및 고정자산을 회수하게 될 것 ... 이 국유화 조치에 대한 업계 반응은 경악과 낙담으로 뒤섞여 ... 특히 인도 및 중공 실업가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버마, 전 은행 국유화」<동아일보> 1963.2.25)

또한 네 윈의 국유화는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추진돼 자연스럽게 ‘반정부’ 움직임이 일었고, 이를 기화로 반(反)네윈 세력이 일거에 제거되는 효과를 발휘했다. 모든 대학을 폐쇄해 놓고 정치권의 반대 세력까지 정리해 버린 것이다.

[【랭군=AP.동화】버마 혁명위원회 의장인 네 윈 장군이 저명한 제일선 정치인 9명을 체포 ... 자동식 무기를 소지한 군인들이 9일 새벽 일제검거에 착수하여 9명을 체포 ... ... 반파쇼인민자유연맹 위원장 우 바 스웨 씨, 전 민간인 정부 각료 6명 및 영자 일간지 주필 등 ... 우 바 스웨 씨는 지난 7월 네 윈 장군의 사회주의 정책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난 ... 반파쇼인민자유연맹은 그 후 우 바 스웨 씨의 연설을 전국에 배포했고 반군사정부 데모를 조직 ... ] (「버마에 정치 위기...반정부 정객 9명 체포」<동아일보> 1963.8.10)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뒤 은근슬쩍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중국 자본을 쫓아내기 위한 국유화 쇼를 벌이는 네 윈의 카멜레온 본색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랭군=AP.UPI.동양.동화】버마의 무서운 군사정권 지도자 네 윈 장군은 갑자기 전국적으로 버마 공산주의자들을 색출 탄압하라고 명령 ... 그의 정권이 좌경화하지 않느냐던 회의를 불식시켰다. 지난 15일 밤 늦게부터 군경합동반은 전국의 공산주의자 본부를 급습하고 이름이 알려진 공산 지도자들을 모조로 검거 ... 버마 혁명정부는 17일 지난 48시간 동안에 좌익 정치가 작가 노동자 및 언론인 등 420명 이상을 대량 검거했다고 ... 혁명정부는 지난 15일 밤 버마 공산당과의 화평회담을 단호히 결렬시킨 직후 군경을 출동시켜 검거를 개시 ...] (「버마에 검거 선풍」<동아일보> 1963.11.18)

이때는 미 군산복합체 전쟁모리배들이 베트남 침략에 앞서 그 걸림돌이었던 베트남 대통령 응오 딘 디엠 형제(동생은 정보국장)들을 죽이고(1963.11.1), 3주 뒤 자신들의 대통령인 케네디를 살해할(1963.11.22) 때다. 또한 이때는 박정희에게 양복을 입혀 대통령으로 만드는 민정이양 공작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이기도 했다. 1964년 들어 네 윈의 독재는 더 공고해져 네 윈이 창설한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이 버마 유일의 합법 정당으로 선포된다.

[【랭군(버마)=AP.동화】버마 혁명정부는 28일 공포한 새 헌법에 의거하여 모든 정당을 해산시켰다고 보도 ... 버마의 3대 정당인 중립주의적인 반파쇼인민자유연맹, 프이다웅수당 및 공산국민노동자인민당은 즉각 해산되었다. 프이다웅수당은 1962년 쿠데타로네 윈 장군이 집권했을 때 정권을 잡고 있었다.] (「버마에 정치위기 ... 정부, 전 정당에 해체령」<동아일보> 1964.3.30)

미국을 등에 업은 네 윈의 권력이 점차 공고해지자 소련과 중국도 버마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을 것이다.
 
[【랭군(버마)=AP.UPI.동양.동화】중공 수상 주은래(周恩來).외상 진의(陳毅)가 뜻밖에 10일 아침 ... 이들은 소련 제1부수상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다녀간 지 한 주일이 못 되어 당지를 방문 ... 주은래 수항 일행은 공항에서 버마 혁명위원회 의장 네 윈 장군 및 고위 혁명위원들의 영접을 받았다. 공항에는 물샐틈없는 경비망이 펴졌으며 ... ] (「주은래.진의, 어제 돌연 버마 방문」<조선일보> 1964.7.11)

이듬해인 1965년 네 윈은 중국을 방문해 모택동 주석과 만나고(7월 26일), 소련을 방문해 흐루쇼프 서기장과 만나는(9월) 등 자신이 표방한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듯한 행보를 이어갔다. 또 1965년 11월 8일부터 2주 간 이북(북한)의 문화성 차관 강양구을 단장으로 한 3명의 문화대표단이 버마를 방문한 일도 있다. 또 이 해 이북의 김일성 주석이 버마에 들렀다는 이야기도 있다(최병효 책 41쪽).

아무튼 1964년과 1965년 두 해 네 윈의 행보만 놓고 보면 그가 중공이나 소련에 접근하려 노력한 것처럼 보이지만 소련과 중공 및 이북이 적극적으로 월맹이나 버마와의 접촉을 늘린 결과였을 것이다. 이들 공산 진영은 특히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부터(1964.8) 한국 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 월남 파견(1964.11) 및  한일수교(1965.6.22) 등 미국의 베트남 침략 음모가 노골화되는 상황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마의 일과성 친중친소 및 친북 행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966년 미국이 아시아 지역 하위 동맹국들을 불러 모아 ‘아시아 반공 체제’를 정비했기 때문이다. 이 해 4월 초, 네 윈이 가을에 미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이 미리 전해졌고 곧이어 미 존슨 정권이 주도하고 박정희와 마르코스가 선두주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아시아 반공연맹’에 네 윈 정권을 합류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마닐라=AP.합동】인도네시아.필리핀 및 타이[태국] 3개국 외상들은 지난 주말 방콕에서 ‘아시아국가동맹안’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고 정통한 소식통이 5일 ... 이 ‘아주국가동맹’은 ‘마.필.인도’(말레이시아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사이에 결성됐던 정치연합체와 동남아협의회(ASA. 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 3국 간 사회.경제.문화 협조기구)의 구성 멤버를 회원국으로 하게 될 것이라고 ... 아시아는 중공의 위협을 견뎌낼 수 없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해서 운영될 것이라고 ... 상기 제국 외에 ... 버마.일본.자유중공[대만] 및 한국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아주동맹을 창설”」<동아일보> 1966.5.6)
 
이 해 9월 9일 네 윈이 미국 백악관에서 존슨 미 대통령과 만났고 약 열흘 뒤에는 일본을 방문해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을 만난 것은, 1961년 11월 박정희가 케네디의 초청으로 워싱턴으로 가기 전 도쿄에 들러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수상과 만난 것과 동일한 패턴이다. 당시 박정희는 이케다와 만나 미국이 원하는 한일수교 문제를 논의했다. 또 존슨이 1966년 9월 네 윈을 백악관으로 초청하기 한 해 전인 1965년 5월 17일 백악관에서 박정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 박정희 존슨 )

( 네 윈 존슨 )

또 존슨은 백악관에서 네 윈과 만난 지 한 달 만인 1966년 10월 31일 한국을 방문하고, 그로부터 며칠 뒤 미국 특사가 버마를 방문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박정희 정권과 네 윈 정권이 미국의 하위동맹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했음을 웅변한다.

[【랭군=AP.동화】유진 블랙 미 대통령 동남아담당고문은 3일 기자들에게 자기는 미국이 동남아 지역의 경제개발을 위해 협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한국 등 동남아 11개국 순방 길에 올랐다고 말했다. 버마 네 윈 혁명위원회 의장과 회담하게 될 블랙 씨는 이곳에 도착하여 자기는 동남아 지역 지도자들과 그들의 경제개발 문제를 협의하고 이러한 노력에 미국이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네 윈 장군과의 회담에서 버마를 전(全)아시아 월남평화회담 장소로 이용할 것을 제의할 것이라는 보도를 부인했다.] (<매일경제신문> 1966.11.4)
 
이처럼 미국이 베트남 침략에 한국과 버마를 활용하는 동안 두 나라는 극심한 내홍을 겪었다. 한국은 1966년과 1967년 월남 파병을 둘러싼 찬반 논란 속에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이 일대 홍역을 치러야 했고, 이런 국민적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동백림 사건’과 간첩 조작 등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국가조작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의 반북 적대의 최전선인 남한에서는 북한을 겨냥한 국가조작 사건들이 꼬리를 물면서 반북 적대감을 고조시킬 때, 미국의 반중 포위망에 걸려 있는 버마에서는 ‘반중 폭동’이 일어나 버마 주재 중국 외교관이 피살되는 등 반중 정서가 확산됐다.

[【랭군.북평[베이징]=AP.AFP.합동.동화】2일 간의 반중공 폭동에 대해 28일 밤 12시 계엄령이 선포된 랭군은 29일 긴장 속에서 평온을 회복 ... 2명의 버마인이 28일 밤 랭군 주재 중공대사관의 담을 넘어 들어가서 중공의 원조 관계 관리 1명을 찔러 죽이고 다른 1명에게는 상처를 입혔다고 버마 방송이 보도 ... 1만 명 이상의 중공 청년들은 29일 오전 이곳 버마대사관 앞에서 데모, 버마대사관 정문에 버마 국가 원수 네 윈 장군의 허수아비를 걸고 그 중 하나에 불을 질렀다.] (「랭군 시에 계엄령 ... 중공 관리 1명 피살」<조선일보> 1967.6.30)
 
‘반중 폭동’은 1966년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문화혁명’의 여파로 버마 주재 중국인들이 버마 정부가 금지한 ‘모택동 배지’ 착용을 고집한 것이 빌미가 됐다. 이 사태로 중국은 버마와의 단교를 선언했고 몇 달 뒤에는 경제 분야 기술진들을 철수시켰다.

[【동경=UPI.동양】북평[베이징] 정권은 신화사통신이 보도한 성명서에서 “랭군에서 일어난 반중공 폭동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중공과 버마 간의 악화된 외교관계에 비춰 버마 주재 중공 대사가 임지에 귀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버마 주재 중공 대사는 지난 수 개월 동안 북평에 머물고 있어 랭군 주재 중공대사관은 대리대사가 지키고 있다.] (「중공, 버마와 단교」<동아일보> 1967.6.30)

[【동경=AP.동화】중공은 31일 버마 주재 중공 기술자 및 경제전문가들의 철수를 발표하고 버마 정부의 ‘범죄행위’를 규탄 ... 신화통신은 버마에 주재한 중공 전문가와 기술자 전원을 철수할 수밖에 없으며, 네 윈 정부가 일방적으로 경제기술협력협정을 폐기하고 버마 인민의 이해와 아시아.아프리카 제국의 반제국주의 단결을 배반했다고 말했다.] (「버마 주재 중공 기술자 전원 철수 발표 ... 신화사통신」<동아일보> 1967.11.1)

중국의 단교 선언 이후 이 해 7월부터 10월말까지 4개월 동안 버마를 떠난 중국인은 700명이 넘었으며 이 중 약 600명은 중국 본토(중공)로, 약 100명은 대만(자유중국)으로 이주했다 한다(<조선일보> 1967.11.5). 중국과 버마 관계는 3년 반 뒤인 1970년 10월 12일 양측이 각각 신임 대사를 임명한 뒤에야 정상화된다.

이처럼 시종 반중 노선을 걷던 네 윈의 버마가 1979년 ‘쿠바의 친소 노선’을 시비하며 비동맹 탈퇴를 선언하고, ‘1983 버마 사건’을 기화로 이북(북한)과 단교하는 것은 차라리 예정된 수순이었다. 네 윈은 결국 중국과 소련 및 이북 등 공산 진영과 제3세계 비동맹 진영의 분열을 노린 미국의 트로이 목마였고 버마의 대북 단교는 그 목표의 완성태였다.

그러면 미국이 노리던 목표를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충분조건’ 즉, 버마 내 권력 공백을 만드는 치밀한 공작이 누구의 소행이었겠나. 그것은 미국과 전두환 정권 외 다른 누구의 소행일 수 없다. 저들이 ‘섭리’ ‘피할 수 없는 역사(役事)’ 운운하는 이유도 그것이 아니겠나.

( 장세동 책『일해재단』89쪽)

( 장세동 책『일해재단』94쪽 / 앞에 잘린 부분 “그분들은 가셨지만, 그(후) ... ”)

 “피할 수 없는 역사(役事)”란 ‘신의 섭리에 따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막중대사’가 아닌가. 1960년대 초 미국에 의해 버마와 남한에 일란성 쌍생아처럼 잉태된 두 군사정권이 20년 뒤 새끼를 칠 때 ‘1983 버마 사건’을 일으킬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됐을 것이다. 1981년 네 윈의 양위와 산 유 정권의 탄생이 지닌 역사적 함의다. (1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