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이범석은 ‘내부의 적’이었나
강진욱 기자 | 등록:2021-04-19 08:01:35 | 최종수정:2021-04-19 16:13:21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5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5. 이범석은 ‘내부의 적’이었나

이범석(李範錫) 전 장관의 죽음을 놓고 북측이 어쨌다는 패륜적 잡설은 왜 만들어졌을까? 대체 왜 이범석 한 사람만 콕 집어 해괴한 이야기를 꾸미지? 이범석이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에 여러 번 참석했고 그의 언변이 뛰어나고 논리가 정연하다는 사실을 들어 이범석을 북측이 싫어했을 것이라는 말을 만들고, 그가 죽자 북측이 ‘아, 고거 잘 됐다’ 한 것처럼 거짓말을 퍼뜨리면서 평소 북측이 그를 미워했다는 각본을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적대하는 남북 간 회담에서 상대가 매사 뻣뻣하게 군다면 싫어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범석이 남북회담에 나선 때는 1970년대 초반이다. 그가 당시 북측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해도 ‘북측이 그를 살해한 뒤 잘 죽였다고 좋아했다’는 언설은 가당찮다.

최 전 대사는 <월간조선>의 ‘황장엽 이야기’를 인용해 “이범석이 대북전략을 잘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북측이 “그를 죽인 것을 가장 큰 성과라고 봤다”(279쪽)고 주장하지만, 그런 말과 달리 이범석은 1970년대 말부터 남한 정보기관과 갈등을 빚었다. 그를 껄끄럽게 여긴 것은 북측이 아니라 남한의 핵심 권력이었다는 말이다. 자기들이(남측) 미워해 놓고 재네들이(북측) 미워했다고 거짓말을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독자들도 한 번 추리해 보시라.

남한 정보기관과 이범석이 갈등일 빚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월남이 패망한 직후 인도 대사로 있던 그가 월맹(북베트남)에 억류됐던 남한 외교관 석방 교섭을 벌일 때였다. 1979년 말까지 계속된 협상의 요체는 남한 외교관을 석방하는 대신 북측이 요구하는 인사들을 남한이 몇 명이나 석방하느냐였다. 문제는 당시나 지금이나 북측과의 대화를 정보기관이 좌지우지한다는 것. 매사 직설적이고 합리적인 이범석이 중앙정보부와 부딪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 허영섭 책 402쪽)

( 허영섭 책 403쪽)

중앙정보부가 무소불위의 폭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감히 중정의 지시를 거부하고 박동진(朴東鎭) 외무장관에게 직보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했다는 말이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고 자신의 권한은 분명히 행사하려는 그를 중앙정보부가 어찌 봤을까는 불 보듯 빤하다. 이범석이 나선 월맹과의 협상은 미국 로비스트의 개입으로 중단되고 억류됐던 이들도 무사히 풀려났지만, 이때부터 중앙정보부는 이범석을 계속 주시했을 것이다.

만약 박정희 정권이 연명하고 중정이 계속 하늘을 찌르는 권력을 행사했더라면 이범석은 벌써 목이 잘렸거나 한직을 전전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다행(?)이었는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반란으로 박 정권이 무너졌고, 대통령을 시해한 중정은 바람 빠진 풍선 신세가 돼 버렸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직후 이범석은 통일원장관이 된다.

아마도 미국과 전두환네는 잔인무도한 광주에서의 살육에 대한 원죄를 씻기 위해 정권 초기부터 그럴듯한 이름의 ‘통일방안’을 발표해야 했고, 그러려니 이범석 같은 인물이 필요했을 것으로 본다.

( 조선일보 1981.8.28. 1면 좌측에는 1980년대에 통일기반을 조성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지만, 톱기사와 그 아래 기사에는 이북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겠다는 미 레이건 정권의 강한 욕망이 드러나 있다.)

이범석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맡겨진 데 만족했을 것이다. 
 

( 허영섭 책 416쪽)

당찬 포부를 밝히는 모습이 참 멋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당참은 전두환네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의 그의 거침없는 언행도 남한 정보당국이나 미국이 매우 고깝게 여길만한 것들이었다.

( 허영섭 책 416쪽)

지극히 원론적인 말이지만, “국민이 원하는 통일”은 곧 정권 차원의 이념 편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로 읽힌다. 그의 소신과 능력은 미국과 전두환네가 바라는 그의 정치적 이용가치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생각하는 통일은 과거 이승만.박정희 식 반공.멸공.승공 통일이 아니었다.

( 허영섭 책 417쪽)

이 말은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시 공직자로서는 감히 발설할 수 없는 발언이다. 그는 소신발언을 넘어 이미 자신의 통일 구상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 허영섭 책 417쪽)

‘무궁화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 아쉽지만 남북이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어떤 구상이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이념과 체제의 장벽을 넘어 ... ” 위.험.천.만.한 말이다. 북측이 제시한 연방제 통일방안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남북 양측이 각자의 체제와 이념을 유지한 채 서로를 존중하며 통일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 연방제의 골자.  더 머리를 굴려 봐도 이 이상의 통일 방안은 나올 수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1980년대는 국가조작테러를 연달아 저지르면서 군사독재정권을 연장하던 무도와 패륜의 시대였다. 만약 재야인사 또는 정치인 누군가가 이 말을 했다면 그는 즉시 안기부로 끌려가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국회의원 유성환(兪成煥)이 “우리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원직이 박탈되고 구속 수감된 때가 1986년임을 상기하면, 1981년 통일원장관이 위와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이범석은 분명 ‘어떤 선’(red line)을 넘었다고 봐야 한다. 이땅의 분단체제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분단적폐 세력은 분명 그렇게 봤을 것이다. 급기야 그는 그 분단체제의 주춧돌인 ‘승공통일’을 치받는다.

( 허영섭 책 422쪽)

“내가 통일원장관으로 있는 한 ‘승공통일’식 논의는 불가하다.” 위 책 저자는 “통일정책에서의 중요한 변화”이고 “종래의 대결지향주의에서 벗어났다”고 썼지만, 1981년 전두환 정권이 - 또한 이 잔인무도한 정권을 음양으로 돕는 미국이 - 과연 그렇게 너그럽게 봐 주고 넘어갈 수 있었을까? 당시 미 레이건 정권은 박정희 체제를 종식시키고 전두환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한반도 분단체제를 더 심화, 고착시키고 있었다. 이범석의 소신은 이런 분단체제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 허영섭 책 422쪽)

‘승공 통일’을 지양하고 ‘북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북한 체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전두환 정권의 권력기관이나 미국에게 그는 이미 ‘위험인물’로 낙인돼 눈 밖에 났을 것이다. 저들의 눈 밖에 났다는 말은 머잖아 거세된다는 뜻이다. 그 거세의 방식이 무엇이든 그는 결코 이 땅의 분단체제를 고착화시키려는 세력과 함께 갈 수 없었던 것이다.

통일원 내부에서의 저항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이범석 밑에 있던 이들의 면면이 그러했다. 1월 13일 두 번째 간부회에 참석했던 송영대(宋榮大)와 이동복(李東馥). 이들이 어떤 인물인가. 이범석의 참신하고 순수한 소신을 ‘좋습니다’하고 받아들일 이들이 아니다. 특히 이동복은 1992년 남북대화를 깨뜨린 ‘훈령 조작 사건’의 주역이다. 분명 이범석은 안팎으로부터상당한 저항과 질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범석은 자신의 소신인 통일의 꿈을 현실화시키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가 평양소학교와 평양고보 2년 후배인 유명 작곡가 길옥윤(吉屋潤)에게 ‘통일의 노래’ 작곡을 의뢰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통일이 되면 다 같이 불러야 할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한다.

( 허영섭 책 431쪽)

위 책 저자는 길옥윤이 민요풍의 노래를 만들어 이범석에게 퇴짜를 맞았다고 썼지만 ‘통일의 노래’가 불발된 내막은 따로 있지 않을까. 1981년 이 분단의 땅 남녘에서 ‘남북통일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을 미국과 전두환 패거리가 그냥 두고 보려 했을까. 해가 바뀌어 1982년. 남북통일 열망을 보이던 이범석이 갑자기 전두환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령이 난다. 1월 4일 자 인사였다.
 

( 허영섭 책 433쪽)

그를 발탁한 이유를 그럴듯하게 둘러대고 있지만 그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승공’을 치받고 ‘북괴’라는 용어를 거부하는 이범석이 계속 남북 평화통일의 꿈을 일궈나가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고 봤을 것이다. 통일을 향해 힘차게 펼쳐질 그의 날개를 일찌감치 꺾어버린 것이다. 또한 이때는 전두환 패거리와 미국이 ‘1983 버마 사건’을 획책하는 때였다(버마 공작은 1981년 8월 시작된 것으로 본다). 1982년 1월 4일 자 인사에서 이범석을 비서실장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이범석은 그 자리에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저들의 마수는 이미 그를 얽어매고 있었던 것이다.

( 허영섭 책 433쪽)

“소신을 갖고 도와주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남북통일이니 뭐니 하지 말고 제 ‘시다바리’나 하라는 것. 그런데 이범석은 그렇게 고분고분 시키는 것만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비서실장에 임명된 다음날인 1월 5일 안응모 치안본부 2부장을 대동하고 서울 시내 통금해제 상황을 시찰하는 등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분주하게 해외 출장도 다녔다. 그는 또 소신껏 하라면 소신껏 하는 사람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종교계를 탄압할 때도 이범석은 강경대응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소신을 폈다.  

( 허영섭 책 437쪽)

자신의 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표를 내고 그만두겠다는 ‘대쪽’ 소신은 타고난 것이기도 했다. 그의 모친은 은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조신성(趙信聖) 여사를 돕던 여장부였고, 교회에 나가 권사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한다.

( 허영섭 책 438쪽)

그가 모친의 ‘야성(野性)’을 만류했다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전 정권의 행태에 반감을 갖고 저항하고 싶지 않았을까.

( 허영섭 책 438쪽)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그 반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겠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다. 그는 비서실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려 했을 것이고 그럴수록 그를 불편해하는 자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 허영섭 책 491쪽)

청와대 비서실장 이범석의 소신 행보를 가장 불편해하고 못마땅하게 여긴 이는 장세동 경호실장이 아니었을까(장세동은 전두환 정권의 2인자였다. 참조 글 
http://www.surprise.or.kr/board/view.php?uid=127557&table=surprise_13&start=770
이 글의 논거인 박철언 책『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은 장 씨가 안기부장이 된 뒤의 이야기에만 집중했지만 그는 청와대 경호실장 시절부터 2인자였다.)

저들에게 이범석은 이미 ‘내부의 적’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지 불과 5개월 만에 외무장관이 된다.

( 허영섭 책 491쪽)

다들 영전이라 했고 그 역시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외무직 최고봉에 올라 나라를 위한 외교 역량을 발휘해 보리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 자리가 죽음의 강을 건너는 배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이범석에게서 청와대 비서실장 자리를 물려받은 함병춘(박정희 시절 주미대사 역임)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이범석을 외무장관 자리에 앉힌 자들은 그의 전임자인 노신영 재직 시기에 이미 다 결정됐던 서남아 순방국 수를 늘이고 줄이고를 반복하다 나중에는 이범석에게 직접 버마 방문 일정을 추가할 것을 강요했다.

그때는 바로 버마에서 군정보국장이 숙청되고 그 정보국이 해체돼 버마의 치안 및 안보 조직이 와해된 때였다. 버마의 권력 공백을 틈타고 - 권력 공백을 만들어 놓고 - ‘버마 공작’을 본격화한 것이다. 그렇게 버마를 순방 일정에 끼워 넣은 뒤부터 이범석은 어떻게든 버마에 가지 않으려 몸부림쳤지만 결국 그는 전두환의 버마 행각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이 순국일까? (6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