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살아남은 자의 고통 ③
‘천안함 생존장병’ 연구 뒷얘기…“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겨레 기자 | 등록:2018-07-20 09:47:54 | 최종수정:2018-07-20 11:22:23


‘천안함 생존장병’ 연구 뒷얘기…“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겨레 / 김승섭 / 2018-07-20)


천안함, 살아남은 자의 고통③
국가가 이들의 버팀목 돼야

그들의 깊은 상처, 사회가 함께 감당해줄 순 없을까요


▲천안함 사건 한달 만인 2010년 4월26일 경기 평택시 해군 2함대 사령부에 마련된 희생자 대표합동분향소를 찾은 생존장병들이 밤 9시22분 사고 시각에 맞춰 묵념을 하고 있다. 해군 제공

많이 망설였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들의 경험과 고통에 대한 연구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될까. 결국 또 그 소모적이고 지루한 정치적 싸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사건만 있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논쟁으로 이 사람들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두려웠습니다.

부조리한 사회로 인해 상처받은 여러 사람에 대한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들의 삶은 각기 다른 이유로 힘겨웠지만, 그 주변에는 고통을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안함 생존장병들 옆에는 누구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절단된 배만을 바라보고,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은 보지 않았습니다.

김승섭 교수의 ‘연구 뒷얘기’

3월이면 정치인·기자가 찾아와
벚꽃 질 무렵 이야기는 사라지고
현실은 바뀌지 않았답니다

‘천안함 청소하라’ 상상 못할 명령
수면장애, 또래 남성의 83배 달해
유공자도 안되고 보상도 못받고

이제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공동체 위한 희생과 아픔에
국가가 마땅히 보답해야 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들의 아픔에 대한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어떤 이들은 천안함이 가라앉은 이유에 대해 여러 질문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 침몰의 원인이 무엇이건, 자신의 젊음을 바쳐 국가를 지키다 상처 입은 이들에 대해 함부로 말할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왜 6월에 오셨어요?”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당시 하사였던 정주현씨가 연구팀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물었습니다. 매년 3월이면 정치인과 기자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무언가 바뀔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벚꽃이 질 때쯤엔 정치인과 찍은 사진만 남아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는 사라졌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난 세월, 불신은 쌓여만 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생존장병 24명 중 16명(66.6%)이 “매우 조심해야 한다”라고 답했습니다. 연구에 참여한 장병들도 처음에는 같은 이유로 연구팀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거지요.

설문조사를 담당하는 제가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 연구나 성 소수자 건강연구를 진행했던 연구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망설이는 것 같았습니다.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이 천안함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불신이 깊었으니까요. 설문을 시작하고 나서 연구팀은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들의 상처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질문하고 정확하게 분석할 테니, 그 이야기를 나눠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습니다. 그 편지가 천안함 장병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메신저 방에 공유되고 나서, 많은 이들이 설문조사에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군에서 전역한 32명의 천안함 생존장병 중 24명이 응답한 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설문조사를 처음 기획할 때는 천안함 장병들이 얼마나 아픈지 보여줄 수 있는 건강 비교 연구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연구팀은 장병들을 직접 만나 심층인터뷰를 진행하며, 새로운 문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존장병들이 최소한 군에 있는 동안에는 보호받았을 거라 생각했던 저희 짐작이 틀렸던 것입니다. 군대에서 장병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 고통을 숫자로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설문 문항을 만드는 일이 이 연구의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연구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누군가는 영웅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양심 고백’을 요구하는 동안, 생존장병들은 군대에서 패잔병이라고 비난당하고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결과를 보며 가장 괴로웠던 장면은 8명(33.3%)의 장병이 상관으로부터 ‘천안함을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답한 부분입니다. 만약 세월호 생존학생에게 인양된 배를 청소하라고 누군가 시켰다면 그건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대한민국 군대는 ‘트라우마’를 겪은 ‘영웅’들을 존중하지도 돌보지도 않았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 김정원(29)씨가 복용하고 있는 약봉투, 그는 사고 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으로 꾸준히 약을 복용한다고 했다. 김천/김진수 <한겨레21> 기자 jsk@hani.co.kr

설문에 응답한 장병 중 21명(87.5%)이 2010년 이후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12명(50%)이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생각했다고 응답했습니다. 둘 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보다도 6배 이상 높은 수치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미군들은 전쟁이 끝나고 안정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천안함 생존장병은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외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편히 서 있을 자리는 찾을 수 없었으니까요.

‘차가웠던 바다에서 있었던 것보다 더 차가운 현실’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도 잠을 편히 잘 수 없었습니다. 생존장병 14명(58.3%)이 지난 1년 동안 수면 장애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같은 나이대 한국 남성과 비교할 때 83배 높은 수치입니다. 8.3배가 아니라, 83배입니다. 매일같이 술을 마셔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습니다. 연구에 참여한 생존장병 중 16.6%가 지난 한 해 동안 지방간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같은 나이 일반 남성의 지방간 진단 유병률은 1%가 되지 않습니다.

생존장병들은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상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국민 성금으로 만들어진 천안함 재단에서 1인당 500만원을 받은 게 끝이었습니다. 정신과 상담치료조차 자신의 돈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상금을 얼마 받았냐고 묻는 주변 사람들은 그 대답을 믿지 않았습니다.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거나 주변에 알음알음 물어 신청했지만, 21명의 신청자 중 6명 만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습니다. 왜 떨어졌는지 물었을 때, 가장 흔한 대답 중 하나는 ‘몸에 흔적이 남는 신체적 외상이 아닌 경우 국가유공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상처를 세상에 보여주며 이렇게 힘들다고 말할 길이 없었습니다.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해 ‘구걸’하듯 부탁해야 하는 그 과정이 싫어 신청을 포기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하고 보상금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돈으로 치료받아야 하는 그들이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은 힘겨웠습니다. 1년 평균 세전 소득이 2000만원이 안 되는 경제적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9명(37.5%)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와 비교해 천안함 장병의 보상금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며 세월호 피해자들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정부가 결정한 두 사건의 보상금을 비교하며 세월호 피해자들을 욕하는 일이 과연 천안함 생존장병들의 삶을 개선하고 그 명예를 회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요? 아닐 겁니다. 그건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고통을 증폭시키고, 천안함 장병들의 아픔을 호기심 어린 화젯거리로 소비하는 일입니다. 그런 비교가 천안함과 세월호의 아픔을 바라보는 전부라면, 한국사회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월호 참사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동시에 이토록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생존장병들이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공동체를 위해 희생했던 그들이 사회에서 마땅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찾는 것입니다.

2010년 3월26일 서해 앞바다에서 배가 갈라지던 그 날, 당시 병장이었던 최광수씨는 배의 앞쪽에서 뒤쪽이 가라앉은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이후 그는 버스를 탈 때마다 힘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탔던 배의 후미가 사라진 경험 때문에, 등 뒤에 아무것도 없이 공간이 비어있는 게 불안하고 두려웠던 것이지요. 

연구를 진행하며,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국사회가 최광수씨 등 뒤의 빈 공간을 채워줄 수는 없을까. 당신이 대한민국에서 군인으로 일해 준 시간에 감사히 생각한다고 그리고 홀로 그 상처를 감당하게 해서 미안했다고, 부족하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당신의 등 뒤에 서서 무너지지 않는 장벽이 되겠다고 말하면서요.

지금은 2018년입니다. 그렇게 해볼 수 없을까요.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 교수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410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