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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23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이려 했을까 ①
강진욱  | 등록:2022-01-27 08:36:58 | 최종:2022-02-04 15:41: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23.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이려 했을까 ①

흔히들 아웅 산 묘소 테러를 이야기할 때 ‘아까운 인재들이 죽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목숨을 ‘북괴가’ 앗아갔다는 ‘순국의 세뇌’는 이땅의 평화와 통일을 방해하는 주술과도 같다.

( 매일경제신문 1983.10.10)

신문들이 써 댄 것처럼 장.차관(급)만 인재일리 없지만, 이들에게 눈길이 가는 이유가 있다. 횡재하듯 장차관 자리가 주어졌고, 한 순간 그 영전의 영광을 만끽했던 이들이 끔찍한 자작테러의 희생자가 됐기 때문이다. 또 장차관 자리를 빼앗기듯 갑자기 물러났던 이들은 훗날 공기업 회장.이사장, 국영 은행 총재, 삼성과 롯데, 금호, 동양 등 굴지의 재벌그룹 회장이 돼 나라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만약 ‘1983 버마 사건’이 전두환네의 자작극이 아니라면 그 ‘영전’(榮轉)과 ‘퇴전(退轉)’은 팔자(八子)의 소관이고 생사의 갈림은 하늘의 뜻으로 치부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전두환 패거리와 미국이 남측의 대북 적대감을 조작해 남북 분단체제를 고착시키고 미국의 동북아 패권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자행됐다면, 그 음모에 동원된 이들의 생사는 음모를 획책한 자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고 봐야 한다.

최소한 자신들과 손발을 맞춰 이땅의 대북적대 체제를 보전할 자신들의 꼭두각시나, 최소한 미국이 남한의 정치와 경제를 틀어쥐는데 저항하지 않는 저들의 ‘자산(asset)’은 어떻게든 살리려 하지 않았겠나. 그러면 누군가는 이들 대신 사지로 가야한다. 신문 방송들이 떠벌려 온 ‘아까운 인재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을 것이다.

또 이땅의 분단체제와 미국의 패권적 질서를 구축하는데 자칫 방해가 되거나, 자신들과 제대로 손발을 맞추지 못할 이가 있다면, 그를 ‘북괴 테러의 순국자’로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미국과 이땅 남녘의 꼭두각시 정권들이 대대로 자국민을 ‘국가의 적’으로 몰아 살상해왔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역대 독재정권 시절 살상을 당한 이들은 독립운동가나 통일운동가, 반정부.재야인사들이었지만, 분단체제적 야수성이 극에 달한 전두환 정권에서라면 고위 관료도 얼마든지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남측의 대북 적대를 근간으로 하는 분단체제의 논리가 그러하다.

그렇게 누구는 살리고 다른 이를 사지에 밀어 넣는 작업은 개각 인사를 통해 이뤄졌을 것이다. 사건 발생 1년 5개월 전부터 두 달 전까지 1년 1개월 동안 누구를 급히 빼고 다른 누군가를 ‘깜짝 발탁’하는 인사 공작이 계속됐다. 1982년 5.21개각을 시작으로 6.2 ‘깜작 인사’, 6.24 ‘부분 개각’, 1983년 3.31 민정당직 개편, 7.6 ‘보각’(輔閣)과 7.13 차관 인사까지 여섯 번. ‘버마 공작’ 실행일이 다가올수록 시간에 쫓기듯 했고, 그렇게 발탁된 이들은 모두 아웅 산 묘소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야 했다.

먼저 1982년 5.21 개각. 11개 부처 장관이 갈렸다. 유독 눈에 띈 것은 서석준(徐錫俊)이 상공장관에서 물러나고 후임자로 김동휘(金東輝) 외무차관을 임명한 것. 유능한 외교관을 상공장관으로 임명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너무 뜻밖이었다. 김동휘는 개각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근무 중 직원들이 뉴스를 듣고 찾아와 말하기에 그때서야 상공부장관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다소 생소하다고 볼 수 있는 업무를 맡게 돼 책임이 무겁게 됐다”고 말했다(<매일경제신문> 1982.5.22).

[신임 김 상공부장관은 ... 외무부에서 잔뼈가 굵어 경제부처와 인연을 맺기는 처음 ... 외무부 경제차관보, 주이란대사 등을 역임해 오는 동안 경제외교에는 남달리 탁월한 편 ... 요즘처럼 수출이 부진할 때 김 장관과 같이 통상외교에 밝은 인물이 상공장관을 맡게 돼 일부에서는 통상외교 측면에서 적극성이 기대된다고 ... ] (「“통상외교 적극 추진할 터”」<매일경제신문> 1982.5.22)

외무부 경제차관보를 지낸 적이 있다지만(1973.12.31~1976.1.5), 이것이 그를 상공부 장관에 앉힐 이유의 전부일 리 없다. 상공부에는 그 보다 유능한 ‘상공 인재’가 많았을 것이다. 외교부(장관 노신영)는 사기충천했지만, 상공부 쪽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인사를 했을까.

( 매일경제신문 1982.5.22)

서석준 역시 1년여 뒤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발탁돼 버마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그를 살리려 김동휘를 박아 넣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김동휘를 사지로 밀어 넣으려 했을까. 그 답은 서석준과 김동휘를 아웅 산 묘소 앞에 세운 자들만이 할 수 있겠지만, 김동휘가 1970년대 말 이란 대사를 지냈다는 사실에서 모종의 연관성을 추리해 볼 수는 있다.

김동휘가 이란 대사로 재직하던 때(1978.6∼1980.4) 이란에서는 호메이니 회교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이때 미국은 자국 대사관원들이 인질로 잡혀 곤욕을 치렀지만, 한국 교민들은 모두 무사했고, 기업들도 밀린 공사대금까지 다 받고 왔다 한다. 이란 측의 배려도 있었겠지만, 김동휘의 외교적 능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란 대사 임명 2년만에 그가 외무차관으로 승진한 것도 그 공을 높이 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이란을 적대시하는 한 이란 혁명기에 발휘한 그의 외교적 능력은 그의 오점이 되고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그의 상공장관 임명 시점도 미국의 꼭두각시였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미국의 새로운 적 이란을 침공한 지 2년 만으로, 격전이 한창일 때였다. (*이 전쟁은 1988년까지 계속되고, 그 후유증이 계속되다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이어지고, 이 1차 걸프전을 통해 미국은 이란 혁명의 악몽을 떨치고 다시 중동의 패권을 쥐게 된다.)

미국은 이라크에 무기를 팔았고, 조선(북한)은 이란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등 한국 입장에서 보면 이란-이라크전은 제2의 베트남전이었다. 한국 정부에 북베트남과 친한 인사가 있다면 미국이 곱게 봐 줄 리 없다. 미국과 미국의 꼭두각시인 전두환 패거리의 입장에서 보면 김동휘는 ‘적과 친했던 인사’인 것이다.
(*미국의 등쌀에 못 이겨 이란을 적대시해야 하는 상황은 1982년이나 2022년이나 별 차이가 없다. 미국은 지네들 멋대로 이란을 제재한다며 한국 금융권에 이란 석유 대금을 묶어 놓고, 지네들 허락 없이는 돈을 내 주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그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친미 중동 국가들만 골라 순방했다. 이땅의 분단체제 70년의 역사는 대미 종속사와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한 땀 벗어날 때, 이땅의 분단체제도 그만큼 벗겨지는 것이다.)

김동휘를 발탁한 5.21 개각 열흘여 뒤인 1982년 6월 2일에는 ‘허수아비 안기부장’(노신영)을 임명하는 ‘정오의 방송 인사’가 있었다. 전두환은 노신영 외무장관을 안기부장으로 보내고, 그의 자리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된 지 몇 달 안 된 이범석을 앉히기 위해 이런 깜짝쇼를 벌였다.

( 조선일보 1982.6.3)

또 멋모르고 안기부의 수상한 공작(1981년 11월 ‘모 프로젝트, 9편 글 참조)에 동원됐던 연세대 교수 함병춘이 이범석의 자리를 메워야 했다. 5.21개각으로 11개 부처 장관을 경질해 놓고 또 열흘 만에 이런 인사를 할 이유는 없었다.

[충격적인 사건에 상응하는 후련한 개각 ... 11명의 장관이 한꺼번에 바뀐 ... 예상은 햇지만 규모가 큰 데 놀라움을 금지 못하면서 ... 정치와 민심의 쇄신을 위한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 ... 국민들은 의령 사건과 장 여인 사건 등으로 사회가 불안정한 이때 이같은 악몽을 씻어버리고 민심을 수습해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새출발을 다짐하는 조치 ... ] (<경향신문> 1982.5.21 / ‘충격적인 사건’은 1982년 4월 26일, 청와대 경호실에 있다 경남 의령군 궁륭지서로 좌천된(됐다는) 경찰 우범곤이 지역 주민 90여명을 살상한(63명 사망) 사건을 말한다.)

노신영은 어떻게든 안기부장만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그 자리에 가야만 했고, 그 덕분에 살았지만, 그가 서야 했던 자리에 대신 섰던 이범석, 이범석의 자리를 차지했던 함병춘은 1년 4개월 뒤 버마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했을 안기부장 노신영은 문책은커녕 총리로 영전하며(1985.2.13) 오랫동안 전두환의 곁을 지켰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1983 버마 공작’의 일환으로 설립된 ‘일해재단’에 몸을 담았다. 그 후에는 롯데그룹 산하 삼남장학재단(훗날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1997~1999.2),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1999.10), 롯데그룹 총괄고문을 지냈다. 왜 이범석이 사지로 몰렸을 지에 대해서는 앞글(4.5편)에서 자세히 밝혔다.

‘라디오 인사’ 22일 뒤 단행된 6.24 개각도 뜬금없었다. ‘일대 쇄신’이라는 5.21 개각 때 유임됐던 총리(유창순.劉彰順), 동자부장관(이선기.李宣基)과 재무장관(나웅배.羅雄培)을 한 달 만에 바꾼 것이다. 또 5.21 개각 때 입각한 법무장관 정치근(鄭致根)을 한 달 만에 끌어내리고 후임자(배명인.裵命仁)을 앉혔다.

( 동아일보 1982.6.25)

언론은 “의표를 찔렀다”느니(경향신문), “최초로 대학총장 총리가 나왔다”느니(동아일보) 법석을 떨며 김상협(金相浹) 고려대 총장의 총리 임명에 과대한 의미를 부여했지만 이런 법석은 개각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뜬금없는 개각의 이유는 1년 4개월 뒤 일어나는 자작테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 정권과 미국이 ‘북괴의 소행’이라 떠들어 댄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낸 유일한 이가 바로 김상협 총리이기 때문이다.

[1982년 6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인해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유창순의 후임으로 전두환 정권이 그를 국무총리에 임명하자 이에 응하였다. 그러나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민심 수습 차원에서 국무총리직에서 경질되었다. 보통 대학 교수나 총장이 얼굴마담 차원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다가 경질되는 경우가 많은데 전형적인 사례이다.](<위키백과> 김상협)

[83년 10월 9일 ... 노신영 안기부장과 장세동 경호실장의 거취가 가장 주목 ... 김상협 총리 경질 ... 상식적으로 인책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졌던 경호책임자 장 실장과 정보책임자 노 부장은 끄떡없었다. 무사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위상이 강화됐다. 노 부장은 전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범석 외무장관·김재익 경제수석의 죽음으로 외교 업무는 전담하다시피 됐고 경제정책에도 관심을 가졌다. ... 장 실장은 여전히 측근 중의 측근으로 전 대통령의 권력 관리와 인사 운영을 보좌했다.]「(140)아웅산 경호·정보 책임자 유임 - 이례적인 면책인사」<중앙일보> 1993.8.20)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안기부장(노신영)이나 청와대 경호실장(장세동)을 그대로 두고 대신 총리를 날리는 쇼를 미리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6.24 개각에 숨겨진 또 다른 이유는 서상철(徐相喆) 동자부장관의 ‘깜짝 발탁’이었다.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다 건설부 차관에 임명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장관에 임명됐다. 1년 3개월 뒤 ‘아웅 산 묘소에서 산화할 아까운 인재’가 남긴 “최단 시간 장관 승진 기록”(<조선일보> 1983.10.11)이다.

5.21 개각 때 유임됐던 재무장관과 그 때 새로 임명됐던 법무장관을 한 달 만에 교체한 것은 서상철 전 고대 교수의 장관 임명에 쏠릴 세간의 이목을 감추려는 위장막이었는지 모른다. 미국의 객쩍은 ‘환영 성명’도 해괴한 인사의 가림막이었을 것이다.

[【워싱턴=연합】레이건 미 행정부는 24일 전두환 대통령의 부분 개각 단행을 환영했다.  국무성 대변인은 이날 한국의 개각에 대한 짤막한 논평에서 김상협 신임 국무총리 서리가 중책을 맡게 되었다면서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조선일보> 1982.6.26)

한 달 전 서상철의 차관 발탁부터가 의외였다.

[건설부 고위 간부들은 이규효(李圭孝) 차관이 경남지사로 전임됨에 따라 후임 차관이 건설부 내에서 승진, 기용되기를 은근히 바랐으나 엉뚱하게도 서상철 고대 교수가 신임 차관으로 오게 되자 몹시 시무룩한 표정들. ... 은근히 차관으로 승진될 것을 기대했던 모 간부는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 듯 계속 신경질만 부리고 있다는 후문.] (「“예상 밖 외부”에서 차관 되자 시무룩」<조선일보> 1982.5.22)

서상철은 당시 서상목(徐相穆)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1993년 보건복지부장관, 현재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과 서상룡(徐相龍) 서강대 교수와 형제간으로 셋은 ‘3형제 박사’로 소문이 나 있었고, 개각 때마다 입각설이 돌았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제의 연줄이나 박사학위가 그의 차관 발탁 이유의 전부일 수 없다.

[고대 경제학과 교수에서 건설부 차관으로 임명 ... 매사를 차분하고 꼼꼼하게 처리 ...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한 성격 ... 대인관계가 원만 ... 중요한 일에는 사무적인 매서운 면도 없지 않다는 주위 평 ... 학원에서는 강의를 잘 하는 교수로 정평 ... 서울 상대 재학 중 도미, 미국 클라크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및 석사를,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 ... 클라크대학 조교수, 세계은행 EDI 교수를 거쳐 72년 귀국, 고대 부설 경제연구소 소장, 세계은행 한국대표 교체이사를 지냈다. 취미는 ... ] (<매일경제신문> 1982.5.25)

이렇게 별 까닭 없이 건설부 차관에 임명된 이를 또 한 달 만에 동자부장관 자리에 앉힌 것은 그를 ‘특별한 용도로’ 써먹기 위한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서상철을 동자부장관에 임명한 것도 이상했지만, 더 이상했던 것은 1982년 1월 동자부 장관에 임명돼 5.21 개각 때 유임됐된 이선기(李宣基)의 까닭 없는 퇴진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조문 사절로 총리를 수행하고 귀국한 뒤 하루 만에 물러난 이선기 장관은 개각 소식이 전해진 24일 하오 실.국장들의 인사를 받고 “본래 장관은 과객”이라고  ... 취임 5개월 만에 다시 민정당원으로 ... 동자부 직원들은 갑작스런 장관의 경질에 어리둥절 ... 최근 일련의 사건들과 무관했던 동자부 장관 경질에 의아한 표정 ... 마침 동자부를 방문했던 모 정유회사 간부는 “장기적 정책을 추진해야 할 부처의 장관이 개각 때마다 바뀌어 이 또한 애로 사항(?)”이라고 한 마디.] (<매일경제신문> 1982.6.25)

누군가 급히 이선기를 장관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고, 대신 서상철을 그 대타로 앉힌 것이라면, 그를 살린 자들은 이선기의 ‘쓸모’를 높이 평가했다는 말이 된다. 그는 대체 어떤 쓸모가 있었기에 ‘살림’을 당했을까. 그의 장관 임명도 실은 이례적이었다. 경제기획원 차관까지 역임하다 민정당의 총재(전두환) 비서실장에 간 지 2주 만의 일이었다.  

( 매일경제신문 1982.1.4 / 이선기 동자부 장관 임명)

[지난해[1981년] 12월 21일 총리 행정조정실장에서 민정당 총재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지 14일 만에 장관으로 입각 ... 58년 부흥부 총무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관광경제협력국장, 경제협력 차관보, 조달청장, 경제기획원 차관을 역임한 대외경제협력통으로서 한국 경제의 중동 진출을 위한 발판을 굳히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이번 동자부 장관 발탁에 고려된 듯 ... ] (<동아일보> 1982.1.3)

[이선기 씨가 민정당 총재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지 14일 만에 동자부장관으로 자리를 바꾼 것은 그가 60년대 한국 경제의 중동 진출 기반을 다지는데 한 몫을 했다는 점이 평가받은 것 같지만, 그러나 적어도 14일 전까지는 그가 동자부장관 물망에 들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 ] (<동아일보> 1982.1.4)

이렇게 갑자기 장관에 임명된 그도 “뜻밖에 중책을 맡게 되어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는 “간 곳(민정당)이 생소한 곳이라 그동안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며 “이제는 공부 과목을 바꿔 배워 나가면서 일한다는 생각으로 새 직책에 임하겠다”고 말했다(<매일경제신문> 1982.1.4).

이선기가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에서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영전하고, 곧바로 그 자리를 서상철에게 물려줘 사지에서 벗어나는 동안, 그가 앉았던 당 총재 비서실장 자리에 앉았다 액운을 당한 이도 있다. 1983년 3월 31일 그 자리에 간 심상우(沈相宇). 이선기(1981.12.21 임명)에 이어 이한동(李漢東, 1982.1.17 임명), 남재두(南在斗, 1982.5.21 임명)가 거쳐 간 자리가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서상철과 심상우. 동자부장관과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자리. 이선기는 두 번이나 사지를 벗어났다. 우연이라면 실로 천운이고 조상의 음덕이라 하겠지만, 수상한 인사 공작이 반복되는 가운데 그가 두 차례나 요행을 얻었다면 그는 누군가에 의해 ‘살림’당했을 공산이 크다.

이선기가 ‘살림을 당한’ 것이 맞는다면, 저들이 그를 살린 이유는 이후 그의 화려하고 짱짱한 이력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외자도입심의회 위원으로 위촉된다. 이때 함께 위원에 위촉된 이들 가운데 김기환(金基煥)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있다. 두 사람은 얼마 뒤 아웅 산 공작의 후속 작업으로 탄생한 일해재단 멤버가 된다. 그 후 이선기는 한국무역협회 부회장(1984.10)을 거쳐 동양화재보험 고문(1983.3), 동양화재 사장(1983.5)이 된다. 또 얼마 뒤부터 1986년까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이사장을,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장을 지낸다.

노신영과 이선기, 이범석.함병춘과 서상철.심상우 ... 이유 없는 수상한 인사는 계속됐다. ‘1983 버마 음모’의 실행일이 가까워질수록 시간에 쫓기는 듯 해괴한 개각 인사가 연달았다. 사건 실행일을 두 달 여 남겨 놓은 시점에 단행된 ‘7.6 보각(補閣)’과 ‘7.13 차관 인사’가 그랬다.

‘7.6 보각’은 김준성(金埈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갑자기 물러나게 하고, 그의 자리에 1982년 5.21 개각 때 상공부장관에서 떨려났던 서석준(徐錫俊)을 급히 불러다 앉히기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한 해 전 6월 2일 라디오 정오 방송을 통해 노신영을 안기부장에 보내고 그 자리에 이범석을 앉힐 때처럼 전격적이었다. 
 

( 경향신문 1983.7.6)

7.6 인사에 대해 청와대 대변인(황선필.黃善必)은 “선진조국 창조의 막중한 과업” 운운하며 그럴싸한 해설을 붙였지만, <조선일보>는「의외의 ‘시기’... 뜻밖의 ‘얼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의아심을 드러냈다.

[기획원장관과 내무장관을 바꾼 6일 일부 개각은 그 내용과 시기에 있어서 감지되지 못했던 갑작스런 인사였다. 지난 3월 제5공화국 출범 2주년에 즈음해서 대폭 개각이 있을 것이라는 풍설들이 증권가를 중심으로 심심찮게 나돌았[지만] ... 정부 고위 소식통들이 반(半)공식으로 부인하여 지난 5월말께부터는 사그라들었다. 또 지난 6월 임시국회에서 야당 측이 부총리를 비롯하여 내무.문교 장관의 해임 권고 결의안을 들고 나왔을 때도 관계 당국자는 냉담한 반응 ... 시중의 개각설이 쑥 들어갔던 ... 그런데 6일, [강조]특별한 계기도 없었는데 주요 장관 2명이 경질돼 일부에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 ... 개각이란 어휘를 붙이기가 어색할 정도 ... 기용된 인물이 서석준 씨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강조] 끌었다 ... ] (<조선일보> 1983.7.7)

( 조선일보 1983.7.7)

1982년 5.21 개각으로 상공장관에서 물러날 때는 김준성 부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사직서 제출을 요청했던 서석준이 13개월 만에 김준성을 밀어내는 모양새를 연출한 것도 특이했다. 서 씨가 상공장관에서 물러날 때는 미국에서 열리는 한미 상공장관회담에 참석 중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에서 두 달 동안 열리는 ‘한국 경제에 관한 특별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6월 11일 출국했다 부총리 임명 소식을 듣고 인사 다음날인 7월 7일 새벽 비행기로 귀국해야 했다. 그의 부총리 임명에 대해서는 계속 말이 돌았다.

[김준성 부총리의 경질은 시기 문제였지 예견됐었으나 지난번 이[철희].장[영자] 사건 이후 일괄 퇴진 때 물러났던 서 씨의 재기용은 의외 ... 현 경제 운영팀의 균형과 조화를 위한 인사인 것 같다 ... ] (「시기.폭.대상에 ‘관심’ 만발 - 7.6 개각의 정치 ‘유.무색론’」<동아일보> 1983.7.9 / 7.6 개각의 또 다른 의미는 내무장관 노태우(盧泰愚)를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 올린 것으로, 이는 차기 정권 창출 공작의 일환이었다. 그의 자리에 주영복(周永福. 전 국방장관)을 앉힌 것은 무의미한 ‘땜빵’이었다.)

(사진 좌: 동아일보 <만평> 1983.7.7) (사진 우: 동아일보 1983.7.9 삽화)

이런 7.6 개각의 여진은 기자들이 인사의 내막을 알아내기 위해 계속 탐침을 꽂았지만, 그 내막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데 따른 것이었다. 당시 언론은 ‘왜 서석준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왜 김준성인가’에 초점을 맞췄더라면 그 내막을 조금이나마 들출 수 있지 않았을까. 이때 40대에 불과한 서석준을 갑자기 경제 총수의 자리를 앉힐 이유가 없었다면 그것은 김준성을 급히 살생부에서 빼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김준성은 1920년 대구 출생으로 1938년 대구고보, 1942년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치하 금융계에 몸담았다. 해방 2년 뒤인 1947년 금융조합으로 전직했고 농업은행 부산지점장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 출범 시기인 1963년부터 대구상공회의소 부회장, 경북 메리야스공장 이사장, 칠복양말공업사를 경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1967년 대구은행이 창설된 뒤 대구은행장을 2차례나 중임했다. 이때까지의 출세도 놀라웠지만 이후 그의 출세 가도는 더 화려했다.

1975년 5월 제일은행장, 1977년 한국외환은행장을 거쳐 1980년 7월 10일 비(非)한국은행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한은 총재가 됐다(제13대). 그 후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을 거쳐 1982년 1월 재계 인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제11대)이 됐다.

물론 그는 유능했겠지만, 이렇듯 일제 치하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을 넘나들며 출세가도를 달린 것은 한국 정권의 교체와 무관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강한 세력이 그의 뒤를 받쳐줬음을 시사한다.

[김준성 부총리는 자신의 사표 수리 사실을 5일 밤 통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6일 아침 곧바로 청와대에 들러 9시40분 경제기획원에 등청, 업무 보고를 받고 10시 조금 지나 총리실로 ... 이날 낮 중앙청 후생관에서 열린 이산가족찾기 관계 장관 회의에 불참 ... 가까운 친구와 L호텔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 하오 1시 40분 집무실로 돌아온 후 이발소에 다녀오겠다며 2시경 집무실을 떠나 청와대의 개각 발표가 있고 난 3시 40분께 기획원으로 돌아왔다.] (「뜻밖의 얼굴, 의외의 시기」<매일경제신문> 1983.7.7)

( 조선일보 1983.7.7 / 청사를 떠나며 수위장과 인사를 나누는 김준성 부총리의 표정은 밝다. 누군가 그를 살렸다면 그에게 ‘내가(또는 우리가) 너를 살렸다’는 암시를 주지 않았을까. L호텔에서 만난 이가 그였을까.)

김준성이 빠진 자리에 서석준이 앉은 것은 우연이었을 것이다. 서석준의 액운을 대신 맞을 뻔한 이가 있었다. 1982년 5.21 개각 때 서석준과 함께 물러난 고건(高建, 농림수산부 장관)이 그였다. 물러난 지 6개월 뒤인 1983년 1월 말 미국 하버드대 ‘연구학자’로 갔고, 그로부터 몇 달 뒤 전두환에게서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생활에 한창 익숙해져 가던 1983년 5월께 주미 한국대사관의 무관(武官)인 노 소장(少將)의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께서 잠시 들어왔다 가시라고 합니다.” 한창 강의와 세미나를 듣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 “학기가 끝난 후 7~8월에 들어가 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상공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하러 미국에 가 있던 서석준도 비슷한 시기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83년 7월 6일 ... 서석준 전 장관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됐다. ... 대사관에서 온 연락의 의미를 그때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 얼마 후 보스턴에서 비보를 들었다.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 한없이 비통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서늘했다. ... 전 대통령의 요청대로 미국 유학을 중간에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왔다면 나도 아웅산[묘소]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중앙일보> 2013.5.23)

(사진 좌,우, 중앙일보 2013.5.23 - 1,2)

서석준도 비슷한 시기에 연락을 받았을 것이라는 고 씨의 생각은 착각이다. 서 씨는 갑자기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귀국했다. 누군가 급히 ‘김준성을 빼라’ 했을 것이고, 전두환네는 그를 대신해 고건을 앉히려다 그가 고사하자 ‘대타’를 물색했을 것이다. 서석준이 막판에 저들의 마수에 걸린 것이다.  

7.6 보각 일주일 뒤인 7월 13일 차관 인사에서 ‘깜짝 발탁’된 이도 아웅산 묘소에 서야 했다. 3명의 차관과 2명의 은행장을 교체하는 이 인사에서 유독 눈길을 끈 이는 재무차관에 임명된 이기욱(李基旭)이었다. 김흥기(金興起) 재무차관을 경제기획원 차관으로 보내면서(기획원 차관 정인용(鄭寅用)은 외환은행장으로) 그 자리에 이기욱을 앉힌 것.

이기욱은 박정희의 유신(惟新) 쿠데타 직전인 1972년 6월 고대 교수로 있다 경제기획원장관(태완선.太完善)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1973년 1월 경제기획원 경제조정관, 그 해 11월 자원국장, 다시 1년 뒤인 1974년 11월 물가정책국장이 돼 이후 3년여 동안 박정희 정권의 물가정책을 총괄했다. 당시 그의 활약상에 비춰보면 그의 다음 자리는 경제기획원 차관이나 재무차관 쯤 됐어야 했다.

그런데 1978년 3월 갑자기 브뤼셀 공사로 나가더니, 1979년 6월에는 주미공사로 나갔다 박정희 정권의 종언을 맞았다. 재기의 기회가 없지 않았다. 전두환 집권 직후인 1981년 6월에는 서울(중앙청)에서 열린 한미경제협의회 회의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박정희 사망 직후인 1979년 11월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 회의는 박정희 정권 말년에 수입 장벽을 높이며 박 정권을 옥죄던 미국이 자국 수출입은행과 IBRD(세계은행) 차관을 제공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활로를 열어주는 절차였다.

[이번 협의회에서는 △섬유·컬러TV 등 대미 수출 주종 상품의 수입규제 완화 문제 △미 수출입은행 차관 및 IBRD(세계은행) 차관의 원활한 제공 문제 등 국제금융기구에서의 협력 문제 △곡물구매 지원 자금의 공급 확대 등 농산 분야 협력 문제 △비상시 대한 에너지 공급 방안을 비롯한 에너지 분야의 협력 문제 등 경제 현안들이 포괄적으로 협의될 것으로 알려져 한국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관련, 그 귀추가 주목되고 ... 소식통은 “이번 협의회에서는 한미 양국의 경제 현황 및 세계 경제관에 대한 상호 의견 교환을 통해 양국 대외 경제정책의 방향을 조정하는 거시적인 정책 협의가 주요 의제가 될 것”이라면서 ... ” 그밖에 한미 합작 은행을 우리나라에 설립하는 문제를 비롯한 금융기관 상호진출 문제, 미국의 대한 어획 쿼터 조정 문제도 아울러 토의될 것 ... ] (<매일경제신문> 1981.4.23)

이처럼 미국이 신생 전두환 정권을 떠받쳐줄 때는 ‘미국과 말이 통하는’ 이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3개월 뒤인 그 해 9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이기욱에게 주어진 자리는 ‘국회 전문위원’이었다. 처음에는 예산결산위원회, 석 달 뒤인 1981년 12월부터는 재무위원회 전문위원을 겸했다. 그렇게 1년 9개월 간 민정당 뒤치다꺼리를 하다 아웅 산 테러 두 달 전 갑자기 재무차관 자리가 주어진 것이다.

( 매일경제신문 1983.7.13 / 세 번째가 이기욱 차관)

경제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은 이가 변방을 떠돌다 재무차관에 임명됐으니 자타 공히 ‘영전’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국회 사무처 측은 이기욱 재무위 전문위원이 재무부 차관으로 임명된 사실에 적지 않게 고무된 표정. 한 관계자는 1일 “그동안 국회의 전문위원이나 기타 요원 중 행정부 요직으로 전임된 경우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 국회 사상 거의 ‘초유’의 사태임을 지적 ... 차관보인 전문위원에서 차관으로 승진 ... “우리 입법부의 무게를 더하는데도 중요한 계기 ... ”] (「국회, 전문위원 ‘영전’에 고무」<조선일보> 1983.7.13)

이기욱의 갑작스런 ‘복권(復權)’에 서석준과의 인연도 거론된다. 둘 다 경북 성주 출신이자 대학 동기동창(서울대 정치외교학과)이고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밴더빌트대(Vanderbilt University) 동문이기 때문이다. 둘이 경제기획원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는 미확인 전언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연(私緣)으로 서석준이 이기욱을 재무차관으로 불러들였을 리 만무하다. 고건의 대타로 서석준을 찍은 자들이 이기욱을 함께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기욱은 저들이 볼 때 ‘버리는 카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고 있어 일을 처리하는데 소신이 분명하다. 6척 거구와는 달리 부드러운 성격이고 말보다는 실천을 앞세우는 실천형...] (「이기욱 재무차관, 6척 거구 소신 분명」<매일경제신문> 1983.7.13)

[고도성장기인 74∼77년에는 물가국장으로 어려운 일을 잘 처리 ... 명석한 두뇌에 소신이 뚜렷하다. 선이 굵고 직선적이며 바른 말을 잘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경향신문> 1983.7.13)

어쩌면 이기욱은 1981년 9월 주미공사 임기를 마친 뒤 ‘국회 전문위원’으로 내돌려질 때부터, 또는 1978년 3월 벨기에 공사로 밀려나갈 때부터 이미 ‘버려진 카드’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자들이 볼 때 이기욱이 ‘버리는 카드’였다면, 그에게 재무차관 자리를 물려주고 기획원 차관으로 영전한 김흥기는 저들이 ‘보전해야 할 카드’였을 것이다.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출신으로 오랜 기간 미국 및 일본 등과의 차관 도입 협의에 참가한 이력이 그것이었을까. 김흥기는 이기욱에게 재무차관 자리를 물려주고 기획원 차관으로 영전한 지 2년 뒤 산업은행 총재(1985~1988)가 되고, 또 얼마 뒤에는 금호석유화학 사장(1992~1998)이 된다.

7.13 차관 인사를 끝으로 ‘아까운 인재들’을 발탁하는 인사가 모두 끝난다. 그리고 20여일 뒤, 그렇게 선발된 ‘아까운 인재들’은 전두환의 서남아.대양주 순방 ‘공식 수행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했고, 아웅 산 묘소 앞에서 산화해야 했다.

( 조선일보 1983.8.6)

P.S,

1.
위에서 ‘1983 버마 사건’을 조작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유용한 이들을 살렸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저들에게 ‘유용한 자’의 정체가 밝혀진 - 밝혀질 뻔한 - 적이 있다. 2006년 10월 31일 국회 문화관광위 국정감사장에서 경인TV 공동대표였던 신현덕 씨(국민일보 기자 출신)가 또 다른 공동대표였던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정보팀을 운영하며 국가정보를 수집해 미국에 보고해 왔다”고 폭로했을 때다. 신 대표는 당시 미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로 한국 문제를 관장하던 리처드 롤리스가 백 회장이 정보보고를 하는 통로라고 지목했다. 백 씨는 신 전 대표에게 국내 정치상황과 북한의 동향 등에 관한 정보를 담은 문건을 작성하라고 지시했고, 수집한 문건을 영어로 번역한 후 미국에 전달했다고도 했다. 또 한국에는 자신처럼 대를 이어 미국의 첩자 노릇을 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다고 밝혔다.
(「‘백성학 미스터리’ 누가 진실을 말하나」<시사저널> 2006.11.13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252)
/ 블로그 글「“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20년간 미국에 정보 보고”」2006.11.8  
https://blog.naver.com/1930song/40030606643)
이 사건과 관련해 CBS가 2006년 11월~2007년 4월까지 백 회장의 국가정보 유출 의혹에 대해 보도하자, 백 회장은 CBS 측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주장하면서 정정 보도와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리처드 롤리스가 직접 한국에 와 기자회견을 자청하는 등 미국의 거센 압박 속에 한국 법원이 관련 글 삭제를 명령한 일도 있다.

이처럼 미국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우리는 흔히 ‘검은 머리 미국인(들)’이라고 부르고, 미국은 자신들의 ‘자산(asset)’이라 부른다.

2.
위에서, 김준성이 일제 치하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을 넘나들며 출세가도를 달린 것이나, 막판에 아웅 산 묘소 참살을 모면한 것은 한국 정권의 교체와 무관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강한 세력 덕분일 것이라고 봤다. 그를 살린 것은 어쩌면 전두환 정권 출범에 즈음해 수시로 한국을 드나들며 전 정권의 뒷배를 자처한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공개된 만남만 두 차례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전두환 정권 출범 직후인 1980년 9월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체이스맨해튼은행 부산지점 개점식 참석차 내한해 한국은행 총재인 김준성을 만났고, 1년 7개월 뒤인 1982년 4월 10일 다시 내한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준성을 만났다.

미국 스탠다드오일을 창업한 록펠러가(家)는 지금도 미국의 군수업과 금융가의 큰 손으로 거대 돈줄을 쥐락펴락하며 세계정치를 주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록펠러 2세인 아들 넷 중 넷째, 6남매 중 막내인 데이비드는 미국의 파워엘리트 그룹 모임인 CFR(미국외교협회)의장이었고, 미국과 유럽 엘리트들이 매년 공개적으로 모이는 빌더버그(Belderberg) 그룹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973년 아시아 정.재계 인사들을 불러들여 미.유럽.아시아 3대륙 실세 모임인 TC(트리래터럴 커미티, 3자위원회)를 창설해 그 해 일본 도쿄에서 첫 회합을 가졌다.

또 김준성 부총리가 1982년 12월 11일부터 18일까지, 공식 수행원 7명을 데리고 이라크에 가 있었던 것도 미국 정부 또는 재계의 심부름이었을 공산이 크다. 이때 미국을 등에 업은 이라크가 미국이 적대하는 이란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이 한창일 때, 한국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 여드레나 이라크에 머물렀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준성은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에게 전두환의 친서를 전달한(12월 14일)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24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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