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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8회(최종회) 下
단절 없는 계승
김종익 | 2020-05-25 08:02:3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8회, 최종회
- 단절 없는 계승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글은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의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 지배하의 소녀들

군이 위안소 제도의 주체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소개한다.

제35비행장 대대 소속 회계 중위 기타무라 오사무北村脩는, 1944년 10월에 남태평양 티모르섬에 부임해 패해서 섬을 떠날 때까지의 경위를, 전후 전우회지에 연재했다.주15) 부임부터 2개월 후, 군의관을 따라 견학한 南溟莊이라는 위안 시설에서 열네댓 살로 보이는 열 몇 명의 소녀가 일하고 있었다. 항공대 식당 웨이트리스로 모집해, 1,800킬로미터에 가까운 서쪽 자바섬 수라바야에서 끌려왔지만, 전투 부대가 떠난 후에는 일요일만 웨이트리스로 일을 시키고, 다른 날은 장교들의 섹스 상대를 하도록 하고 있으며, 임신한 소녀도 있다고 들었다.

南溟莊은 사실상 장교용 위안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웨이트리스라고 해 원격지로 끌려온 소녀들에게 섹스 상대하도록 한 것은, 어떤 사정이 있든 인간의 도리에 반하는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타무라는 이 시설 담당을 이어받게 되어, 전임자로부터, “南溟莊은 회계부 소속하에 들어있습니다[略] 이들이 야마코, 데루코, 하나코…”라고 소녀들을 소개받았다. 지휘하라는 표현으로 보아 南溟莊은 부대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고 생각된다.

패전 후, 기타무라는 “웨이트리스를 하는 것으로 해 스라바야에서 데려온 소녀들을 이런 일을 하게 해 버리고”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중에 기타무라는 소녀들이 배와 도보로 자바섬으로 향했다고 들었지만, 무사히 도착했는지 어땠는지는 불명이다.

매춘 여성을 관리한 사실을 드러내는 자료는 해군 쪽에도 있다. 해군 군의관 중장 다카스기 신이치로高杉新一郞는, 1942년 7월 잡지 『体性』에 수록된 강연에서, 중국에 파견된 해군 부대의 성병 대책에 대해 적나라하게 기술했다.

이것은 말씀드려도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매창부賣娼婦 같은 존재도 해군 군의관이 직접 이들을 ‘통제’해 시종 성병에 걸리지 않은 매창부라는 존재를 공급하도록, 말을 좀 잘못했지만, 조심하고 있는 바입니다. 주16)

■ 육군 최고 책임자의 결단

중일 전쟁 초기, 정부 기관이 제휴 플레이로 위안부를 포함한 동포의 중국 도항을 통제하려고 한 내용을 6회 연재에서 봤다.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 타이완에서 남방에 위안부를 보낼 때의 타이완 주둔군과 외무성의 자료로도 알려져 있다.

1942년 3월 13일, 도조 히데키 내각은 「동포의 남방 도항자 통제에 관한 잠정 조치 요령邦人ノ南方渡航者統制ニ關スル暫定措置要領」을 각료 회의에서 결정했다. 육·해군의 지시에서 도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이름, 신분, 일본 현지 주소, 도항 목적을 육·해군에서 외무성에 통보하는 것으로 하고, 도항 허가서의 발급 제도를 관계 각 부처에서 별도 협의한다는 것이었다. 육군은 이 잠정 조치 요령을 국내외의 주요 부대에 전했다. 주17)

그런데 대략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해 11월 12일, 중국 남부에 있던 제23군 참모장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가 위안부의 정식적인 도항 수속을 문의했다. 주18) 18일, 육군 차관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郞는, 4월 23일의 통첩에 따라 처리하도록, 구리바야시와 남방 총참모장 구로다 시게노리黑田重德에게 전했다. 주19) 이 통첩은, 일본, 만주국, 중국에서 관리와 민간인을 남방으로 가게 할 경우, 육군성이 인물을 조사하고 신분증명서를 발행한다는 수순을 정한 것으로, 수상을 겸한 육군상陸軍相 도조 히데키가 결재한 것이다. 그러니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약 1년 후, 남방으로의 위안부 송출은 육군 최고 책임자가 승인한 수순에 따른다는 규칙이 공식적으로 전달된 것이다. 위안소에 관한 군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자료의 하나이다. 더구나 이런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 없는 현지 여성들도 위안부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 ‘법규 따위는 필요 없다’

군 이외의 정부 기관 가담도 중요하다.

1938년 1월에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동쪽, 무단장성牡丹江省 차장으로 부임한 야마구치 주지山口重次는, 관동군의 대소련전 준비에 보조를 맞추어 교통·통신망의 정비, 식량 증산 등의 계획을 정리하고, 위안소를 포함한 군인 위안 시설 건설을 포함시켰다. 반대하는 부하를, 야마구치는 “국방상, 필요하면, 법규 따위는 필요 없다, 하는 거야”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주20) 시찰을 나간 둥닝東寧현에서도 현 간부들의 반대에 직면해, “병사들의 군기를 지키는 데는, 이유 불문하고 필요한 시설이다. [略] 싫겠지만 해 달라”라며 밀어붙였다. 주21) 야마구치는 이때, 만주사변으로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가 하얼빈에서 치치하얼로 기생을 보냈다는, 연재 4회에서 언급한 일화를 들고나와 설득했다고 한다.

야마구치 계획의 전말은 불명이지만, 전 위안부와 전 군인들의 기록에는 둥닝 위안소가 자주 등장한다. 군인 상대를 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끌려와서 울며 지낸 김순옥金順玉 등 조선인 위안부들은 “간호부 모집 광고에 속아 강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전우에게 들었던 나가오 가즈오長尾和郞 등 다양한 증언이 남아 있다. 주22)

무단장 회사에서 일한 요시다 리쓰코吉田律子는, 패전 전후에 진주해 온 소련군에 의해, 약 2,000명의 일본인과 함께 개척 이민단의 촌락 자리에 수용되었던 경험을 저술했다. 숙소에 둥닝 위안소에 있었던 전 위안부들이 있었다. 요시다는, 이 여성들이 대신해 주어, “소련 군인들에게 능욕을 당하지 않고 끝났습니다”라고 회고한다. 배로 일본으로 귀국했을 때의 사건이 추악하다.

육지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 되었을 때, 이 사람들을 확실하게 구별해 멸시한 사람(부녀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싹 변해 버린다는 슬픈 사실, 인간 마음의 가련함을 생생하게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23)

조선 평안북도 주재소 경찰관이었던 나카하라 유이치中原雄一는, 1945년 4월 무렵, 중국 허베이용 위안부를 모집하기 위해 귀향한 ‘군무원’ 金原始彦와 대화를 했다. 金原는 “한 명이라도 많은 낭자군을 모집해 전력 증강에 기여해야 한다”고 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후 24년이 지나 수기를 정리한 나카하라는 “이상했지만, 성전의 완수를 거드는 길이 있는 것을 인식, 새삼 반도 여성의 정신挺身[몸 바쳐 일함]을 보다 많이, 라고, 남몰래 응원했다”고 회고했다. 생각한 것뿐일까, 구체적인 행동에 나간 것일까.

여성들이 맛본 쓰라림을 언급하지 않고, 나카하라는 “아내의 노화를 볼 때마다, 대동아 전쟁의 뒤안길에 폈던 조선 여성에, 진심 어린 감사와 그 청복淸福을 비는 것이다”라고 위로의 말만 남겼다. 주24)

■ 승리하기 위한 일환

일본 현지에도 위안소를 지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었던 1944년 2월, 일본 정부는 국민에게 결전의 각오를 압박하며, 전력 증강을 도모하는 대책을 정리했다. 국내 유흥업 축소가 포함되고, 고급 요리점과 대합실 등이 휴업과 전업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이때, 오이타大分현의 기생, 작부의 일부는, “일선 병사의 위안부로 만주, 중국 등에 파견된 사람도 있었다”고 하며, “이 전직에 대한 모든 알선 등은 경찰의 손에 따른 사람이 많았다.” 주25)

내무성 경보국이 각 현의 경찰 담당자를 모아 같은 시기에 열었다고 보이는 회의에서. 사창의 여성과 업자의 처우를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묻자, 경보국이 “친주후鎭戍府[구 일본 해군에서 주요한 군항에 두어 각 해군 구역의 경비, 부대의 감독 등을 행한 기관]과 협의해 해군 쪽의 용도에 충당하면”이라고 답한 기록도 있다. 주26) 鎭戍府는 鎭守府일 것이다. 매춘 여성의 위안부 전용을 교사했다고도 볼 수 있는 놀라운 발언이다.

이 정도로 노골적인 것은 아니지만, 전후에 편찬된 각지의 경찰사와 전시 중의 경찰 잡지에도, 매춘 여성이 전지戰地로 건너간 사실을 드러내는 기록이 다수 있으며, 위안소, 위안부라는 단어도 등장한다. 주27). 연재 6회에서 보았듯이, 경보국이 위안부 송출에 대해 중일 전쟁 초기에 전국의 경찰에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지의 경찰이 알고 있던 것도 당연하다고 하면 당연하다.

1942연 9월 4일, 성병과 관련하여 의사와 육·해군 군의관, 매춘을 단속하는 내무성, 경시청 등의 담당자 들이 도쿄 제국호텔에 모여, 「전시하 ‘성병 예방 대책’ 좌담회」를 열었다. 전원, 위안소, 위안부라는 말을 기피하고 있다. 경시청 풍기계장 구사마 마사요시草間雅義가 전쟁, 군인과 매춘 여성과의 관계에 관해 흥미 깊은 발언을 한다.

구사마는, “징집 병사(독신자)가 있어 남는 정력의 배출구를 어디에서 찾을까, 라고 하면, 결국 빼러 가야만 한다. 빼게 할 대상은 뭔가, 라고 하면, 그들(매춘 여성)이 받아들여야 감당해야 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며, “대동아전쟁 승리를 위한 일환으로, 나는 이걸로 하고 있다, 라는 듯한 자부심”을 여성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성병 예방을 위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주28) 매춘업의 부정적 측면에 조금이나마 눈길을 준 1930년대 중반까지의 경찰 내부 논의와는 매우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도조 내각은 1943년 12월 14일, 행정 사무 간소화를 각료 회의에서 결정했다. 후생성 관련에서는, “군 위안소의 작부 여급 등 고용인 취직 인가에 대한 후생 대신에 대한 품의(노무조정령勞務調整令에 의한 것)이 거론되어, 후생성은 ”품의는 이것을 폐지하고, 지방장관에 한해 행하게 하는 것으로 한다“라는 의견이었다. 매우 급하게 실시해야 하는 것이 각료 회의에서 인정되었다. 주29)

노무조정령은, 군수산업 등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노동자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공표된 칙령이다. 위안부 고용을 인정할 권한을 후생 대신에게서 지방장관으로 조급히 이관한다는 것이 각료 회의 결정 취지이다. 다음 해 1월에도 관련 각료 회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군과 경찰, 내무성, 외무성에 한하지 않고, 일본 정부 그 자체가 위안소 운용에 관련한 것을 드러내는 중요한 자료이다. 1993년에 일본 정부가 공표한 자료 중에 포함되어 있는데, 왠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후생성에 의한 심사와 인가, 지방으로의 권한 위양 후의 상황 등 제도의 실정에 관해서는 거의 해명되고 있지 않다. 심층적으로 도전할 가치 있는 자료이다.

8회에 걸쳐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를 더듬어 왔다. 무엇보다 나는 그 시대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묘사할 역량을 지니지 못했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모르는 대로 신구 자료에 눈여겨보면, 위안소·위안부를 둘러싼 군과 정부의 주체성, 조직성, 계획성, 계속성이 보인다. 때때로 인도人道에 반하는 것이 있었다. 빈곤, 여성 멸시, 민족 차별을 배경으로, 일본 현지와 일본의 세력이 미치는 상태에서 매매춘 시스템에 내재된 어둠이, 연장선상에 있는 위안소·위안부라는 구조에 반입되어, 군국주의의 태풍 속에서 좀 더 깊어져 갔던 것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과 말이 떠오른다. 획책한 사람, 찰나의 위안을 추구한 사람. 때린 사람. 강제한 사람. 속인 사람. 거들었던 사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른 사람. 입을 다문 사람. 유린당한 여성들. 역사에 등을 돌리고, 흐름에 편승하여, 이웃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한 번, 사실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싶다. 연재 종료에 즈음해 그녀들이 강요당했던 공포와 절망, 굴욕과 원통함, 일본이라는 국가와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를, 다시 생각한다.<끝>

주15) 『十誠』第8·10·11號 「純情二重奏」(其の三·五·六)(1979~1982년)
주16) 『体性』第二九卷第七號 「時局下の性病問題」高杉新一郞, 『性の國家管理』 藤野豊, 143쪽
주17) 『昭和十七年‘陸亞密大日記 第十七號 三/三』「邦人の南方渡航者統制に關する暫定措置要領送付の件」(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주18) 『政府調査 ‘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②』「渡航手續ニ關スル件」, 209쪽
주19) 『政府調査 ‘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②』「渡航手續ニ關スル件」, 213쪽, 『昭和十七年‘陸亞密大日記 第十七號 二/三』「陸軍關係者南方占領地(含香港) 進出手續に關する件」(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南方關係業務綴(昭和一六·一一·二0 ― 一七·一0·一二)(陸軍省軍務課南方班』「陸軍關係者南方占領地(含香港) 進出手續に關する件」(情報公開法に基づく厚生勞働省開示資料)
주20) 『滿洲建國の歷史』山口重次, 401쪽
주21) 『滿洲建國と民族協和思想の原點』山口重次, 104쪽, 『日本軍性奴隸制を裁く 2000年女性國際戰犯法廷の記錄 第三卷』「朝鮮植民地支配と‘慰安婦’制度の成立過程」藤永壯
주22) 『證言 未來への記憶 アジア‘慰安婦’證言集  二 南·北·在日コリア編 下』「東寧の慰安所に入れられて」, 『關東軍軍隊日記』 長尾和郞 94쪽
주23) 『杳い日に』吉田律子, 36쪽
주24) 『鴨綠江に題す』中原雄一, 210쪽, 『植民地朝鮮の日本人』高崎宗司, 182쪽
주25) 『大分警察史 』, 1133쪽, 『季刊 戰爭責任硏究』第一四號 「日本警察の‘慰安婦’政策②」吉見義明·尹明淑
주26) 『種村氏警察參考資料第九0集』「高級享樂停止に關する會議質疑應答」(國立公文書館所藏), 『性の國家管理』藤野豊, 151쪽
주27) 『神奈川 縣 警察史 中卷』, 287쪽, 『京都府警察史 第三卷』626쪽, 『警察協會雜志』第四五八號, 48쪽, 『自警』第一七 卷第一八七號, 63쪽 등
주28) 『日本醫事新報』第一0五三號, 2599쪽
주29) 『政府調査 ‘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④』「行政事務ノ整理簡捷化及中央官廳ノ權限ノ地方委讓等ニ關スル件」,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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