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 CMS후원
2019.10.16 08:34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세계  |  미디어  |  칼럼  |  서팡게시판  |  여행게시판
 
칼럼홈 > 뉴스프로

6.4 톈안문 광장의 비망록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는?
뉴스프로 | 2019-06-20 12:28:4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6.4 톈안문 광장의 비망록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는?

6월 4일은 천안문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30주기였습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태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나 생존자들과 남아있는 문서들은 그때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공산당 정부의 부패에 맞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시민들이 자국 군대에 학살 당한지 30년이 지난 지금, 중국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요? 사람들은 중국의 정치개혁, 그리고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89년 이후 중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는 계속되며, 영원히 피할 수 없는 관문이라고 말합니다. 뉴스프로가 BBC뉴스 인터뷰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BBC 중국어판 영상 번역문이다.
번역 및 감수: 임아행

영상 바로가기: https://youtu.be/ExqqdUXXdgA  

六四事件:廣場備忘錄
6.4사건: 광장의 비망록  

- BBC News 中文 |天安門|1989
게시일: 2019. 5. 31.

1989년의 베이징 톈안먼 광장.
중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비무장 상태인 학생과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품었던 정치개혁은 갑작스럽게 종결되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중국에서는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것은 민주여신상이다.
이는 당시 학생들의 민주와 자유에 대한 염원을 상징한다.
학생운동이 왜 무력진압이라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도대체 그 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가?이 모든 것은 후야오방(胡耀邦)의 서거에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한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서거했다.
후야방은 누구인가?
그는 중공 중앙 총서기로 중국 문화대혁명 후 개혁개방의 창도자이자 지도자였다.

베이징의 대학생과 민중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서
중공의 이 진보적인 지도자를 애도했다.
그들은 이를 빌어 중국의 개혁과 진보를 추진하고자 했다.
애도는 점차 시위로 변화되었으며
학생들은 관료 타파, 부패 청산, 언론 자유를 요구했다.
중국 최고의 정치권력을 상징하는 톈안먼 광장은
중국 젊은이들의 청원의 장이 되었다.

시위하러 갑니다.
톈안먼 광장으로요. 왜요?
저의 사명이니까요.

80년대에 중국은 이제 막 문화대혁명의 그림자에서 벗어났으며
개혁개방은 경제 발전을 가져왔고.
또한 관용의 문화도 가져왔다.
이는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번영하던 시대였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정치 환경에서
정치체제 개혁 또한 일정에 올랐다.

그(덩샤오핑)은 내려와야 합니다.
그는 ‘양위’해야 해요.

경제체제를 개혁하기 전에
먼저 정치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공동의 염원을 이야기했다. 후야오방 동지의 유지를 받들어 민주와 과학기술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전세계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 때 무엇을 겪고 있었을까?
당시의 소련 총서기 고르바초프는
경제개혁과 시장개방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민중이 국가의 일을 토론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폴란드에서는
자유노조(Solidarność)가 합법적인 지위를 획득했으며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항의와 시위가 폭풍처럼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국제 환경은 항의 중인 중국 학생들을 고무시켰으며
또한 중공 고위층 보수세력들을 불안하게 했다.    

현재 중국은 민주와 자유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특히 ‘언론의 자유’

(뉴스를 통해 진실한 세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정치 선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일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런민따후이탕(人民大會堂)에서 거행되었다.
동문 밖에서는 학생 대표 3명이 장시간 계단에서 무릎을 꿇고
국무원 총리인 리펑(李鵬)과의 대화를 요청했다.
후야오방 애도사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요청은 답변을 얻지 못했으며
학생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4월 26일, 《런민르바오(人民日報)》는 《
동란을 명확하게 반대해야 한다(必須旗幟鮮明地反對動亂)》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으며
이는 ‘4.26 사설’이라고 불리웠다.

이 때의 중국인들은
이제 막 문화대혁명 ‘10년간의 대 재앙’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동란’이라는 두 글자의 정치적 함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4.26 사설’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중국 대학 캠퍼스를 가득 채웠고
원래 이미 톈안먼 광장을 떠나려 했던 사람들은
또 다시 분노했다.

4월 27일, 베이징의 수 십 개 대학
수 만 명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서 톈안먼 광장으로 향했다.
그 드높은 위세는 전대미문의 수준이었다.

학생단체는 ‘베이징 대학 학생 자치 연합회’를 조직해
정부와의 대화와 ‘4.26 사설’ 취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동란’에 대한 논조를 바꾸려 하지 않았으며
정국은 경색되었다.
‘4.26 사설’ 또한
무력진압을 향한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우리는 정부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학생) 대표단과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정부와 함께 정치 토론을 할 수 있는 창구였다고 생각합니다.
광장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당원이었으며, 그들은 정부를 전복시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5월 4일, ‘5.4’운동 70주년
더 많은 시민, 노동자, 심지어 국가기관의 간부와
언론 종사자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당시 중공 총서기 자오즈양(趙紫陽)은 ‘5.4 담화’를 통해
학생들의 뜨거운 애국 정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민주와 법치의 궤도 위에서
협상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간청했다.

자오즈양은 한 때 중공의 진보파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그의 담화는 많은 학생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학생들은 광장을 떠나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때, 톈안먼 광장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등장했다.
왕단(王丹) 차이링(柴玲)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등 학생 지도자들은
학생들이 항의를 지속할 것을 희망했다.

5월 13일, 광장에 있던 수 백 명의 학생들은
단식을 결정했다.저는 베이징대학 학생 대표 왕단입니다.
오늘 우리는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투쟁을 합니다.
단식 투쟁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부는 신속히 베이징 대학교 대화 대표단과 대화할 것
신속히 이번 학생 운동의 명예를 회복시켜
나라를 사랑하는 민주적인 학생 운동임을 인정할 것

5월 15일, 고르바초프의 북경 도착은
1959년 중소관계 단절 이후
소련 최고 지도자의 최초 중국 방문이었다.
이 때 톈안먼 광장에는
여전히 수 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 환영식을 공항에서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중국 정부의 ‘체면’을 땅에 떨어트렸다.고르바초프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르바초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당연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5월 17일, 단식 5일째
많은 학생들이 체력 저하로 쓰러졌다.
셀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이 밤낮으로 광장에 와
학생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베이징 각계각층 민중이 거리로 나서
단식 학생들을 응원했다.

5월 중순, 학생들의 항의는 이미 한 달 동안 지속되었고
항의 시위는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5월 18일
리펑(李鵬)은 결국 학생과 런민따후이탕에서 만나기로 했으며
병원에서 바로 간 학생 대표 우얼카이시가
대화 중 한 차례 리펑의 말을 끊으면서 분위기가 한층 더 긴장되었다.

제가 이미 분명히 말했습니다.
단지 이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이는 객관적인 현실입니다.

대화는 실질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으며
양측은 불쾌하게 헤어졌다.

우리는 이미 단식을 하고 있었고, 정부와의 만남을 요구했습니다.
리펑과 만났을 때 무척 오만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단식한 목적은 대화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훈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에 제가 말을 끊기는 했지만
그 후 그의 말에 답변을 했어요.
저는 충분히 예의를 지켰습니다.

(화면: 5월 19일 새벽 4시, 자오즈양이 돌연 톈안먼 광장에 나타나 엄숙한 표정으로 학생들에게 단식을 중단하라고 간청했다.)

여러분은 아직 젊습니다.
학우들이여. 아직 젊어요.
앞날이 구만리예요.
여러분은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화면: 이는 자오즈양이 중공 중앙 총서기로써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모습이었다.)

자오즈양의 회고록 《개혁 역정(改革歷程)》에는
6.4에 관한 그의 총평이 기록된 바 있다.
‘학생 운동’을 잘 처리하면
개혁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오즈양은 학생들이 광장에서 철수하도록 설득하지 못했다.

5월 20일, 베이징 정부는 계엄을 선포했다.
하지만 광장과 베이징 길거리의 시위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베이징의 학생들은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세계 중국인들의 연대 시위를 호소했고
전대미문의 세계적인 성원이 시작되었다.

곤경에 처해있던 학생들은 다시 고무되었으며
그 후 며칠동안
톈안먼 광장은 흡사 ‘자유의 섬’ 같았다.
사람들은 ‘언론이 자유로운 휴가 기간’을 즐겼으며
각계 인사들은 모두 광장에서 자유롭게 연설을 하였다.

5월 30일 새벽, 자유를 상징하는 민주여신상이
톈안먼 광장에 세워졌다.
수 십 미터 떨어진 톈안먼 성루 위의 마오저둥(毛澤東) 동상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6월 3일 저녁 9시 50분경
베이징 시정부와 계엄부대 지휘부가 공동으로 긴급통지를 발표해
베이징 시민들에게 거리에 나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생명과 안전을 위해 톈안문 광장에 나오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대중은 결코 알지 못했다.
이 때 수 십 만의 대규모 군대와
탱크 그리고 장갑차가 이미 베이징 교외에 집결해
베이징에 진입해 광장을 정돈하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20여 만 명의 계엄부대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톈안먼 광장으로 진격했으며
해방군은 연도에서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을 향해 총을 발포했다.
총 소리가 밤 새도록 끊임없이 베이징에 울려 퍼졌다.

누나가 내 방 카펫에 앉아 있었는데
총알이 창문 유리를 뚫고 들어와
누나 다리에 맞았습니다.

6월 4일 새벽, 해방군이 톈안문 광장에 진입했다.
광장 정돈이 시작됐다.
민주여신상은 쓰러졌고
6.4 학생 운동은 실패했다.

이번 무력 진압에서 확실한 사상자 숫자는
줄곧 수수께끼이다.
민간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수 백에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6.3’ 심야에서 ‘6.4’ 새벽 사이의 진압으로 사망했다.

1989년 11월, 동서양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수 십년이 흘렀지만 ‘6.4’ 진상 발굴과
진압 책임 추궁을 위한 발걸음은 결코 멈춘 적이 없다.

누군가는 ‘6.4’에서 인민들에게 총을 발포함으로써
중공 정권은 철저하게 합법성을 상실했으며
중국 공산당은 주도적으로 정치 현대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했다.

언론의 카메라를 통해
전세계는 인민들에 대한 중국 정부의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목격했다.
89년 이후 정치 개혁은 전면 중단되었으며
정치 참여와 민주주의 실현은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진압을 했기 때문에
중국 사회가 안정되었으며
이는 경제 발전과 정권 유지를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댓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6.4에 대한 평가는
당대 중국 사회가 영원히 회피할 수 없는 관문이라는 점이다.

중국의 민주화 여정은
멀고도 험난하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29&table=c_sangchu&uid=967 









      



모바일 기기에서도 댓글 작성이 가능하도록 보완하였습니다. (현재 아이폰 기기까지 테스트 완료하였습니다.)


닉네임  비밀번호  999255  (스팸등록방지:빨간숫자만입력)

 [1/1]   향암香庵  2019년6월21일 08시38분    
1989년의 (천안문 6.4 항쟁) 북경 천안문 광장 탱크 앞의 한 사람의 용기가 한국인의 끈월를 배워 홍콩 민주화의 심지로 서기2019년 6월에 6000명 엄마등의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과 함께 7백만 명 중 2 백만 명 이상이 하나가 된 일을 만들었답니다.
물은 맑아야 하고 흘러야 하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순리입니다.
(16) (-4)
                                                 
종전선언, 평화협정 체결과 ‘유엔...
                                                 
[연재] 홍콩의 벤처이야기 “홍콩...
                                                 
제2의 을사늑약 지소미아 복원은 ...
                                                 
김사복, 5.18 진상을 세상에 알리...
                                                 
왜 당신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시나...
                                                 
공기업 적자, 정치인-자본-관료의 ...
                                                 
이장희 교수 “미·일, 유엔사 통...
                                                 
[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3...
                                                 
고 발 장
                                                 
강제징용 귀국선 1호 폭침, 원인은...
                                                 
김대중평화센터 일본후원회, 김대...
                                                 
참 희한한 문화일보의 이낙연 총리...
                                                 
천안함의 진실을 지킨 사람들과 박...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에…
                                                 
누가 피를 먹는가
                                                 
[이정랑의 고전소통] 가탁왕명(假...
                                                 
이제 눈을 들어 국가경영 전체를 ...
                                                 
[칼기노트 9] 잔해는 발견되었지만...
                                                 
안병하 공직자 바로 세우기 운동본...
                                                 
[오영수 시] 자재암 부처님
10978 종전선언, 평화협정 체결과 ‘유엔...
9014 강제징용 귀국선 1호 폭침, 원인은...
8417 네티즌이 나경원 고소에 대처하는 ...
7968 기사가 아닌 소설(?) 쓰다 네티즌...
7897 [오영수 시] 자재암 부처님
7605 이제 눈을 들어 국가경영 전체를 ...
5187 故 안병하 치안감과 경찰청 이야기...
4661 [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2...
3467 조국 사퇴 ‘교수 시국선언’ 이병...
3345 ‘한겨레가 보도한 최악의 사진?’...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800 여의도파라곤 930호 (주)민진미디어 | 발행.편집인:신상철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마기선 | 등록번호: 서울 아01961
등록일 2012.02.02 | 발행일: 2012.02.15 | 이메일: poweroftruth@daum.net | 사업자번호: 107-87-60009 | 대표전화: 02-761-1678 | 팩스: 02-6442-0472
회사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방침 | 광고/사업제휴문의 | 기사제보 | 칼럼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