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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55
동아시아 현대사의 10대 사건
김갑수 | 2018-02-05 07:12:2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동아시아 현대사의 10대 사건

우리의 근·현대사는 말 그대로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세기였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19세기 중반부터 동아시아에 밀어닥친 서구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수많은 전쟁들을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뿐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와 중국과 일본은 물론 베트남까지의 근·현대사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아쉬운 대로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을 함께 다룬 근·현대사 책이 있다. <창작과 비평사> 발간 《동아시아를 만든 열 가지 사건》이다. 이 책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자들이 2007년부터 자기들 신문에 연재한 특집기사 「역사는 살아 있다」를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이 책은 동아시아 4국의 역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해 놓았다는 점, 4국간의 연관 관계를 추적했다는 점 그리고 각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해 놓았다는 점 등에서 기본 학습서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교육을 담당한 사람이라면 필독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을 텍스트로 하여 동아시아를 만든 10대 사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아편전쟁과 메지지 유신 : 아편전쟁은 1840~42년 중국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침략의 서막을 알린 전쟁으로서 중국과 영국 사이에 치러진 전쟁이다. 한편 메이지유신은 1860년대 일본이 봉건왕조였던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중앙집권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이 하나로 묶여 논의된 이유는 아편전쟁에서 서양의 힘을 목격한 일본인들이 이를 타산지적으로 삼았기에 메이지유신을 이룰 수가 있었다는 관점 때문이다.

2. 청일전쟁과 대만 할양 : 1894년 청일전쟁은 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의 동학군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 청을 배제하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청으로부터 대만을 할양받았다. 이전에 일본이 청과 조공관계에 있었던 유구국(오끼나와)을 복속시킨 것이 대만 할양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러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 :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조선 독식을 구미열강으로부터 용인 받았다. 러일전쟁 때 일본은 13,000명의 군대를 인천과 용산에 주둔시켰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 땅을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한반도에는 110년 이상 외국 군대가 주둔해오고 있다. 사실상 조선은 러일전쟁의 결과로 망한 것이다. 다만 2008년에 발간된 이 책은 일본이 러시아와 강화하고 조선을 독식하는 데 미국과 영국의 음모와 협잡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놓치고 있다.

4. 신해혁명과 민중운동 : 1911년 손문이 영도한 신해혁명은 청조를 무너뜨렸다. 일본은 조선에 이어 중국에까지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이에 저항하여 1919년 조선에서는 3.1 인민항쟁이, 중국에서는 5.4운동이 발발했다.

5. 만주사변과 만주국 설립 :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은 일본 정부에 통제되지 않는 관동군의 일탈 행위로 빚어진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전쟁이었지만 서구 열강을 의식한 일본이 의도적으로 ‘사변’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만주국은 만주사변의 결과로 새워진 가짜 국가이며 이때부터 동맹관계였던 일본과 미·영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6. 중일전쟁 :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일본이 만주를 넘어 중국 관내로 침공해 들어간 사건이다. 이때부터 미국은 아예 일본과 적대국이 되어 석유 금수조치를 취하고 중국(국민당군)을 공개적으로 지원했다. 이 전쟁은 보급 전쟁이었다. 보급이 차단된 일본군과는 달리 미·영·중 연합군은 중국 원난성 쿤밍에서 미얀마의 완띵까지를 연결하는 도로(원장루트)를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로써 충칭의 국민당 군대가 맹렬한 일본군의 공세에 8년 동안이나 견딜 수가 있었다.

7. 아시아·태평양 전쟁과 중국 국공내전 :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발발한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일본에서는 대동아전쟁, 미국에서는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 후 일본제국은 패망했고 조선은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분단되었다. 중국 국공내전은 동북만 전쟁이 결정적이었고 여기에서 이긴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북경과 남경을 함락시키고 국민당 군을 대만으로 축출, 1949년 10월 1일 대망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8.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 두 전쟁이 모두 냉전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연계된다. 한국전쟁은 한국에서는 ‘6.25 전쟁’ 조선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중국에서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저항하며 조선을 지원)전쟁’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은 미국인이 부르는 명칭이다. 박정희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 32만 명을 파병했다. 한편 조선에서는 공군 조종사를 북 베트남에 지원했다. 베트남인들은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섬뜩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한국군 참전자의 고엽제 피해로 인한 후유증도 심각하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하노이에 가서 베트남에 사과했다.

9. 각국 국교정상화 :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는 박정희가 돈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미국의 강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는 1972년 9월 이루어졌는데 직전에 나고야 탁구대회에서 미국과 중국은 핑퐁 외교로 접근했다. 일본은 조선(북)과의 국교정상화를 숙제로 남겨 놓고 있다.

10. 개혁·개방과 민주화 : 중국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중국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켜 이제는 G1을 넘볼 정도가 되었다. 1980년 한국의 광주항쟁과 비슷한 시기 대만 까오슝에서 발발한 메이리다따오 사건은 각각 두 나라의 민주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역사의 심층적 이해, ‘근현대사’와 ‘최현대사’

한국의 현대사는 근현대사와 최현대사로 나눠볼 수가 있다. 근현대사라고 하면 출발 시점은 각기 달라도 종료 시점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즉 1945년 8.15가 된다. 그렇다면 최현대사는 8.15 이후부터 2000년 대까지가 된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전 23권)은 1945년부터 2009년까지 65년의 대한민국 역사를 다룬 최현대사의 결정판이다.

이 시리즈는 사건의 단순한 나열 수준을 뛰어넘어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그 이면적 주제를 파헤치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2000년대 편(전 5권)이다. 저자는 노무현 시대의 명암을 좌와 우, 진보와 보수에 경계를 두지 않고 냉철하고 공정하게 평가한다.

이 시리즈는 2002년 노무현의 극적인 당선, 100년 정당을 외치다 3년 9개월 만에 사라진 열린우리당, 2008년 촛불집회, 2009년 노무현의 죽음과 부활 등을 자세하게 추적한다. 또한 동시대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연예인 성 접대 파문, 성형수술 붐, 영어 권력, 휴대전화 보급과 88만 원 세대의 등장, 부동산 투기 광풍 등 서민이 더 살기 힘들어진 현실을 지적한다.

마지막 2000년대 편 1~5권의 주제는 '2008년 이명박 시대의 개막', '2009년 노무현의 몰락과 부활'이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은 워낙 방대한 분량(7,700쪽)이라서 각론적인 논의를 생략한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는 총 10개 장 중 앞부분 3개 장이 1945년 8.15까지이고 4장부터 마지막 10장까지가 최현대사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은 우리 현대사의 특정한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이해와 해석에 도움을 준다. 예컨대 한국전쟁의 책임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전쟁이 여러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단계적으로 발전되지 않을 수 없었던 내전이었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주지하듯이 우리는 제국주의 세계와 부딪치면서 식민 지배, 남북 분단 및 전쟁의 갈등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운동을 통해 재기하고 있으며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 역사 기술의 특징은 역사의 장면을 심층적이고 예리하게 포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모든 역사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 현대사》 중에서 인상 깊은 두 장면을 골라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원명 교체와 이성계 세력의 조선 건국]

- 중국의 명왕조(1368~1644)가 몽고를 전복하자, 왜구와의 전투를 통해 강고히 단련된 신흥 군인집단은 권력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명나라가 고려 내의 예전 몽고영역에 대해 지배권을 주장했을 때, 고려 궁정은 친몽고 세력과 친명세력으로 분열되었다. 두 사람의 장군이 각기 자기 군사를 이끌고 요동반도에 주둔하던 명군을 급습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인 이성계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려 고려의 수도를 공격해 곧 항복을 얻어냈다. 그는 그리하여 20세기까지 지속된 한국의 최장 통치왕조 조선(1392~1910)을 세우게 되었다. 새로운 국가는 1,500년 전의 고조선을 상기시키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서울에 도읍을 건설했다.
- 이상,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61쪽

이 글에서 몽고는 몽골, 즉 원나라를 가리킨다. 원나라는 13세기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었으며 고려는 약 100년 동안 원의 지배를 받았다. 이에 따라 자주성을 잃은 고려 친원파 귀족들은 급격히 수구화되었다. 반면에 신흥 군인집단과 사대부들은 명을 선택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두 인물이 잘 알려진 대로 이성계와 정도전이었다.

그렇다면 친원파 보수군벌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였을까? 역시 우리가 잘 아는, 이름 뒤에 으레 ‘장군’ 칭호를 붙이는 최영 장군이다. 최영은 자기 서녀를 우왕의 비로 들여보냈다. 다시 말해 그는 우왕의 장인이었다. 최영이 무리한 영토 요구(철령위 설치)를 해온 명을 치기 위해 요동정벌을 기획한 것은 권력의 라이벌로 부상한 이성계를 멀리 보내려고 꾸민 일이었던 것 같다.

위 글의 3행에 나오는 두 사람의 장군은 누구일까?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였다. 최영은 스스로 요동정벌의 최고지휘관 직인 팔도도통사를 맡았지만 우왕이 만류한다는 구실로 개경에 남았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고려 말기의 상황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출생부터 의심을 받은 우왕은 권문세족의 횡포와 보수반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국가권력은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가 쥐고 있었고, 이들의 전횡은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토지 겸병이 자행되어 부자의 땅은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또한 땅 하나에 주인이 7~8명이나 되는 곳도 있어서 백성들은 이중삼중의 수탈을 당했다.

권문세족은 외교에도 둔감했다. 그들은 신흥하는 명을 적대시하고 퇴조하는 원을 추종하는 시대착오적인 외교를 펼쳤다. 어지러운 내정에 설상가상으로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해안지방의 백성들은 농사도 짓지 못하고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살기도 했다. 심지어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도 공격당하여 수로가 막혔으며, 수도인 개경까지 위험한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최영의 요동정벌은 정당성을 잃는다. 우리가 잘못 배운 역사는 이성계가 권력욕으로 왕명에 거역하여 위화도 회군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책에서도 “이성계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성계는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는 마지못해 출병했으며 출병 전부터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의사를 분명히 개진했다. 물론 이성계는 요동정벌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성계는 신흥하는 명과 적대관계에 놓이는 것은 국가 장래에 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때가 우기인 것도 사실이고 군량미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왜구의 위험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왜구는 개경 함락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성계는 여러 차례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건의서를 보냈다. 하지만 이성계의 건의는 최영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었다. 이후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려 개경에 와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창왕을 추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요즘 한국의 정세를 조선말기 또는 병자호란 전과 비슷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조선말이나 병자호란에는 외국군의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 벌어졌다. 나는 당분간 한국에 외국군의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 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원나라는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고려를 100년 간 지배하다가 퇴조하고 있었다. 반면에 명은 신흥 강대국으로의 부상이 뚜렷했다. 나는 원과 명을 각각 미국과 중국에 유추해 본다. 그렇다면 당시의 최영을 필두로 한 권문세족은 누구일까? 미국에 집착하는 새누리당 세력이 아닐까? 오늘의 진짜 문제는 이성계, 정도전 같은 실력 있는 신흥세력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8.15 ‘해방’과 분단에 대하여]

- 1945년 8월 10일 자정이 가까운 시각, 미국 행정부의 3부(국무·전쟁·해군)조정위원회(SWNCC)의 존 머클러이는 딘 러스크와 찰즈 본스틸 두 대령에게 옆방에 가서 한국을 분할할 지점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두 대령은 채 30분도 안 되어 38도선을 선택해 왔다. 그것은 “수도를 미국의 영역 안에 둘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딘 리스크는 “(38선은) 소련이 반대할 경우 현실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지점보다 더 북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반대하지 않아 “다소 놀랐다”고 말한다. 태평양전쟁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는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일반명령 제1호를 공표했는데, 거기에는 38도선에 대한 결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

이상은 브루스 커밍스 저 《한국현대사》 p.263에 담긴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브루스커밍스는 이것을 ‘1943 - 51 미국 및 한국의 문서보관소 문서’를 참조했다고 주(註)에서 밝혔다.

1945년 8·15 이후 우리는 왜 단일국가를 만들지 못했는가? 이것은 왜 우리는 분단되었는가를 묻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송건호, 강만길이 각각 집필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과 2권은 이 시기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저작은 분단의 원인을 지나치게 내재적인 데에 비중을 두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앞질러 말하자면 우리는 ‘해방’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든 역사 저작물들은 해방이라고 기술해 놓았다.

우리에게 8·15는 무엇이었나? 뒷날 안재홍이, “해방은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라고 탄식했다고 하는데, 나는 바로 이 말처럼 8·15의 본질을 관통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해방’이라는 용어를 큰 고민 없이 선택했다는 점에서 ‘해전사의’ 저자들에게까지 나는 아쉬움을 느낀다.

나는 ‘해방전후사’건 ‘해방공간’이건 이런 유의 용어들에는 새로운 정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해방공간’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공간’ 자를 붙임으로써 치기가 느껴질 뿐더러 어법마저 불안정한 조어가 되고 말았다.

그럼 815를 ‘해방’이라고 안 한다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해도 대안이 없을 때에는 아예 고민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방법이 유효할 때가 많다. 요컨대 그냥 ‘8·15’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8·15 종전’, ‘8·15 일본항복’, ‘8·15 미소점령’, ‘8·15 전후사’ ‘8·15 정국’ 등으로 맥락에 따라 호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다시 처음 논의로 돌아가기로 하자. 우리는 왜 분단되었는가? 전승국 미·소의 야합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미국과 소련 중 미국의 책임이 단연 크다. 분할을 먼저 제안한 것은 미국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할시킨다면 독일을 그렇게 했듯이 패전국인 일본을 분할했어야 한다. 더욱이 미국은 이미 1945년 후반쯤 ‘냉전적 봉쇄정책’을 한국에 적용시키기로 결정해 버렸다.

분단사의 관점으로 파악할 때 우리 땅에서 가장 치욕적인 장소를 꼽는다면 어디가 될까? 인천이 아닐까 한다. 인천에는 두 번의 상륙작전이 있었다. 첫 번은 1948년 9월 8일이었다.

- 5척의 구축함을 포함한 21척의 배로 구성된 제 24군단 호위대는 9월 5일 태풍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 속에 오키나와 근해를 출항, 9월 8일에는 등화관제를 한 채 다섯 줄의 밀집종대로 인천을 향해 위험한 파도를 가르며 전진했다. 한국이 특히 아름다워 세상에 이렇게 높은 하늘이 있을까 하고 생각 드는, 그런 따뜻하고 청명한 늦여름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두 번의 인천상륙 중 첫 번의 것이었으니, 두 번째 상륙은 5년 후 (거의 같은 날에) 또 다른 승전 장군인 맥아더가 북한을 승리의 문턱에서 패퇴시킨 것이었다. 미군부대는 검은 외투를 입은 일본 기마경찰이 한국 군중을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서 상륙했다.

몇 주 내에 미군과 행정요원들의 총 인원은 25.000명에 달했다. 미국의 ‘흑선(黑船)’(1853년 요코하마에서 일본을 굴복시킨 미국 페리 제독의 선박)이 도착함으로써 한국은 서기 668년 이래 역사상 가장 변칙적인 시기, 즉 민족분단의 시대를 맞이했다.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에 있는 지문이다. 사실 해방이라는 말은 남보다 북에서 더 즐겨 쓴다. 이것은 자기들의 반일투쟁을 건국의 한 과정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혁혁하다고 할지라도 그 공로는 따로 논의되어야 한다. 우리는 8·15를 통해 해방을 얻지 못했다. 해방은 북이건 남이건 민족통일을 이루어야만 쓸 수 있는 말이다.

[부언] 99번째 책이다. ‘100권의 책’ 연재가 어느덧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 100권째의 책은 무엇으로 할지… 최소 4,5종의 책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 조언이 있으면 들려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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