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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54
《삼국사기》의 천적 《조선상고사》, 어떻게 보아야 하나
김갑수 | 2018-02-02 13:12: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유가학단의 적, 영원한 비주류 묵가와 양주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조선의 유학자들이 양주와 묵가를 비난하는 말이 자주 보인다. 양주와 묵자의 사상은 유학과는 크게 달라서 공존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양주와 묵가를 기피하고 혐오했다.

일찍이 맹자는 “묵가의 무리는 군신과 부자의 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순자의 묵가 공격은 더욱 논리적이었다. “묵자는 실용에 가려서 예문을 알지 못했다. 실용만을 도라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공리만을 추구할 것이다. 이는 도의 한 모퉁이일 뿐이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묵가의 유가 공격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묵가의 시조 묵적은 공자 바로 다음 시기의 사람으로서 맹자나 순자보다 이른 시대의 인물로 추정된다. 근검과 절약을 강조했던 묵가는 유가의 천명론과 허례허식에 경멸을 보냈다. 묵가는 유가학단을 싸잡아 ‘속유의 무리’라고 비난했다.

《한비자》에는 “세간에 이름 높은 학파로 유가와 묵가가 있다, 유학의 으뜸은 공구(孔丘, 공자)요, 묵가의 으뜸은 묵적(墨翟)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요컨대 당대 약 100년 동안 묵가는 유가와 대등한 세를 형성한 양대 학단이었다.

‘묵수(墨守)’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는 묵적지수(墨翟之守)의 줄임말인데, 글자대로 하면 ‘묵적이 (성을) 지켰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견고하게 지켜 나간다는 좋은 뜻임에도 불구하고 융통성이 없어 답답하다는 투의 부정적 어감을 풍긴다.

묵적(BC 480 ~ ?)은 제자백가 중 묵가의 시조로서 묵자라고 경칭되는 인물이다. 공자가 인(仁), 순자가 예(禮), 맹자가 의(義)를 강조했다면, 묵자는 애(愛)를 강조했는데, 그의 애는 정확히 말해서 이타적인 애, 즉 겸애(兼愛)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다시 묵적지수로 논의를 돌리자면, 이 말에는 대단히 견고한 반전주의 논리가 들어 있다는 점이 간과되는 것 같다. 묵자는 사상 최초의 반전평화주의자로 꼽힌다. 묵자는 겸애를 그르치는 최악의 행위를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전쟁은 다수인 인민의 삶을 파탄내기 때문이다.

《중국철학사》를 저술한 펑유란은 “유가는 사대부, 법가는 신흥지주, 도가는 몰락 귀족, 묵가는 하층 평민층을 대표하는 사상이다.”라고 말했는데, 결과론적으로만 본다면 매우 그럴 듯한 분석인 것 같다. 묵자는 어떤 명분의 전쟁에도 반대하는 가운데, 다만 방어를 위한 전투의 필요성만을 인정했는데,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묵적지수라는 말이었다.

묵자는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 자두나 복숭아를 훔치는 일보다 더 나쁜 것은 남의 개, 닭, 돼지를 훔치는 일인데 그것은 남을 해롭게 한 것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그는 타인을 해롭게 하는 것이 클수록 불인(不仁)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고 보았다. 이렇게 따질 때 전쟁이야말로 최대의 불인이 되는 것이다.

묵자는 “사람을 한 명 죽이면 불의하고 10명 죽이면 10배로 불의하고 100명 죽이면 100배로 불의하다. 이 경우 천하의 군자들 모두 불의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남의 나라를 공격할 경우 불의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작은 불의를 저지르면 이를 비난하다가 전쟁을 일으키는 큰 불의를 보고는 비난은커녕 오히려 칭송하면서 ‘의’라고 말하는 자들, 즉 작은 불의와 큰 불의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어찌 군자란 말인가?”라고 말했다.

근현대 제국주의 국가 영국과 미국은 걸핏하면 남의 나라를 침공하면서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등을 주워섬겼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예외 없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묵적지수’의 방어전쟁 이외 그 어떤 전쟁에도 묵자처럼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묵가보다도 양주를 더 혐오했다. 그래도 묵가는 유가를 공격하기는 했지만 사상적으로 유가와 공통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양주는 유학과는 공통되는 면이 없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양주를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 Laertios) 는 알지만 양주(楊朱, BC 440?~360?)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양주는 중국 전국시대의 학자로서 ‘위아설(爲我說)’, 즉 이기적인 쾌락설을 주장했다. 그의 삶은 명확하지 않고 《장자》, 《열자》 등에 그 편린이 남아 있다. 그러나 맹자가 “양주·묵적(墨翟)의 말이 천하에 충만하였다.”고 지적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양주학파는 나름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의미 있는 철학사상일지라도 국가 공동체의 권력이나 기득권에 방해되는 것들은 후대까지 계승되기가 어렵다. 사실 민본혁명론을 주장한 맹자만 하더라도 춘추전국시대는 물론 한, 당대까지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맹자가 부각된 것은 송대 이후의 일이었다.

디오게네스와 양주는 국가권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양주가 그렇듯이 디오게네스에 관련된 기록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노숙자 디오게네스’와 ‘황제 알렉산드로스’의 일화를 알고 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가?”
“아, 몸을 좀 비켜 폐하의 그림자를 치워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햇빛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이 되고 싶구나.”
하지만 그냥 넘어갈 디오게네스가 아니었다.
“제가 디오게네스가 아니라면 폐하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이 되어도 좋겠습니다.”

이처럼 디오게네스는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세상에 대해 조롱과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장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점에서는 장자보다 양주와 더 닮았다. 디오게네스와 양주의 공통점은 일면 개인주의적이지만 ‘개체 중심적인 세계관’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가 있다.

拔一毛而利天下 不爲(발일모이리천하 불위)
몸의 털 한 올을 뽑아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맹자》, 〈진심장〉 편에서 인용)

이는 양주가 남긴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맹자는 양주의 핵심 사상인 위아(爲我), 즉 나를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결국 사람과 짐승의 경계를 허물게 될 것으로 보아 혹독하게 비판했다. 맹자는 양주를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또는 허용될 수 없는 혹세무민의 사설(邪說)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양주의 입장은 지나친 점이 있어 보인다. 몸에서 털 한 올을 뽑는다고 해서 뭐가 그리 손해 보는 일이라고? 그런데 나라를 위해서 그것조차 하지 않겠다고 하니 너무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특히 털 한 올과 나라의 비중을 고려하면 양주는 전혀 합리적인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털 한 올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나의 건강을 유지하고 나의 의지에 반해서 누구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는 ‘생명체의 상징’이라고 생각해보자. 일모(一毛)도 개인의 생명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므로 천하의 가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일모는 천하와 대등하거나 더 소중할 수도 있다. 부국강병을 내세우는 국가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희생해서라도 나라에 이바지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했지만 제대로 보답을 받지 못하는데도 계속해서 개인의 희생만 요구한다면, “내가 왜 나라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가?”라고 되물을 수가 있다. 양주는 바로 이러한 시대, 다수를 형성하는 개인들의 여망을 담아서 ‘위아’를 주장했던 것이다.

한비자는 양주의 사상을 물질의 가치를 가볍게 보고 생명의 가치를 높게 봐야 한다는 뜻의 ‘경물중생(輕物重生)’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한비자의 평가는 맹자의 비판에 비해서 단연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부분으로 나눌 수도 없고 어떤 외적 가치에 의해서 양도될 수도 없는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 바로 이런 인식을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떠한 외부의 요구로부터 우리의 심신을 온전히 지키려는 ‘인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이 있어야 우리는 나의 심신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유를 가지면서 내 생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국가보다 자기 생명을 중시한 양주의 글은 거의 소실되었지만, 사회와 국가의 힘에 굴하지 않고 생명의 온전한 가치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양주는 ‘대단히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제자백가’였다는 평가를 내릴 수가 있다.

《삼국사기》의 천적 《조선상고사》, 어떻게 보아야 하나

나는 우리 역사 중 고대사에 대해 무지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등의 내용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을 따름이다. 이 중 《삼국유사》는 야사이고 《환단고기》는 위서 논란이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고대사에서 《삼국사기》와 《조선상고사》를 일단 중시한다.

우리가 알듯이 《삼국사기》는 고려인 김부식이, 《조선상고사》는 근현대인 신채호가 저술한 역사서이다. 이 중 《삼국사기》의 내용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 그리고 제도권에서 통용되는 여러 한국 통사들의 내용과 거의 같다.

나는 역사에서 중요한 순서를 매길 때 최근의 역사가 오래 된 역사보다 단연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사와 조선사까지는 내 나름 공부를 했지만 시대를 거슬러 고려, 삼국, 부여와 고조선 등의 역사에는 노력을 들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고대사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공부가 안 되어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고대사에 대한 몇 가지 논쟁거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멀리는 홍산문명의 존재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조선과 부여‧고구려의 성격, 한사군의 위치, 삼국의 정립 시기 등이다. 이런 안건들에 대해 제도권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주장이 크게 다르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재야 사학계의 주장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신채호는 고구려를 알기 위해서는 《삼국사기》를 공부하는 것보다는 고구려 유적이 살아 있는 중국 집안현을 답사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나는 신채호가 말한 고구려 유적지들을 최소 5회 이상 답사해 본 결과 신채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신채호의 사관이나 역사적 주장들이나 역사연구방법론 등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나는 신채호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한 역사의 정의 규정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여기서 아는 누구이고 비아는 누구인가? 아는 우리 민족 - 비아는 외세, 아는 선 - 비아는 악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역사는 3간(間), 즉 인간이 공간과 시간에서 벌이는 활동이라는 말도 너무나 지당하지만 평범하다.

신채호는 고려 시대 묘청의 반란사건을 ‘조선역사 1천년대 제1대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이것은 김부식 유의 ‘사대’에 저항한 ‘자주’의 선언이었다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되 다소 공소하게 들린다. 물론 나는 ‘자주’를 단연 더 중시하지만 자주에는 무엇보다도 내실이 있어야 한다. 내실 없는 자주는 사대파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제물이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첨예한 고대사의 쟁점에서 김부식보다는 신채호의 사관이 갈수록 형세를 얻어가고 있는 점은 그만큼 역사가로서 신채호의 저력을 실감케 한다. 이 글에서는 《조선상고사》의 방대한 내용 중에서 내가 사색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사안 그리고 학문적 형세를 얻어가고 있는 사안 몇 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 고대 동아시아 종족은 우랄 어족과 중국 어족의 두 파로 나뉘었다. 한족 ‧ 묘족 ‧ 요족 등은 후자에, 조선 민족 ‧ 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다. 조선 민족이 분화하여 조선, 선비, 여진, 몽골, 퉁구스 등이 되었고 흉노족이 분화하여 돌궐(신강족),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이 되었다. 오늘날 몽골, 만주, 터키, 조선 네 개 민족 간에는 유사한 어휘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 상나라, 즉 은나라는 중국 한족보다는 우리 민족과 문화적, 정서적으로 더 가까웠다. 상나라와 부여는 같은 역법을 썼다. 은이 오랑캐, 주가 중화의 나라라고 말한 《사기》의 주석(한나라 공안국)은 졸렬한 것이다.

-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이 추모대왕의 12대 손인 것으로 해놓았지만 광개토왕 비문에는 17대 손으로 명기되어 있다.

“(추모)왕께서는 세자에게 유언으로 명령을 내리시면서 왕도로써 통치를 진흥시키도록 하였다.... 대주류왕께서 왕업을 이어받은 뒤 17대 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고 했다.”

1세대를 30년으로 간주한 신채호는 5대 150년을 추가하여 고구려의 건국은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이 아니라 기원전 190년 전후로 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탁견이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편에는 668년을 고구려 건국 900년째라고 한 당나라 조정 가언충의 대화가 소개되어 있다.

참고로 조선(북) 학계에서는 압록강 일대의 무덤들을 근거로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277년으로 비정한다. 이렇게 될 경우 백제의 건국도 자동적으로 기원전 259년으로 물러남으로써 백제 건국이 기원전 18년이라고 한 《삼국사기》의 내용은 부정된다.

- 한나라는 진번, 임둔, 현토, 낙랑 네 개 군을 설치했다. 4군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우리 역사의 중대한 쟁점이다. 한사군의 위치는 당대 위씨조선과 북부여, 고구려 강역 등을 두로 고찰할 때 한반도 내가 아니라 요동반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 당대 고구려는 대제국 당나라와 대등한 세를 형성한 제국이었고 백제는 중국 양자강 이남까지 진출했던 해상강국이었다. 심지어 신라는 중국 길림 지역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중국 측 기록인 《만주원류고》에도 나오는데 사대주의자 김부식은 이를 고의로 누락했다. 김부식은 우리 역사를 철저히 한반도 이내로만 한정지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천적 관계의 사서라고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사관은 자주적이고 김부식의 사관은 사대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자주에는 내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대’라고 해서 마냥 나쁜 것만도 아니다.

동아시아 국가 간의 역사에는 언제나 사대와 사소가 함께 있었다. 대등한 국가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 ‘사대’는 가치중립적이다. 즉 어떻게 사대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법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이고,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단군조선부터 백제부흥운동까지를 다른 역사서이다. 양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긍정, 부정하려는 태도는 둘 다 합리적이지 않다고 본다. 고대사를 잘 모르는 나의 입장에서는 역량 있는 역사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토론, 논쟁을 보아가면서 점진적인 판단을 내려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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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나태영  2018년2월4일 15시28분    
일신우일신 하시는 김갑수 선생님! 존경합니다. 선생님은 진정 청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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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나태영  2018년2월4일 15시30분    
http://blog.ohmynews.com/goongeumi/541944

궁금이 사랑방 방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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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나태영  2018년2월4일 15시37분    
나태영 한국상고사 혁명

상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지나국 역사에서 상나라는 하나라 다음의 국가로서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다. 당연히 지나국 사람들은 상나라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런데 여러 가지 역사 기록물이나 증거를 보면 이 상나라를 지나국의 한(漢)족이 아니라 우리 동이족이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상나라를 세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역사 기록물들을 살펴보자.
사마천이 쓴 『사기』에 이리 기록 되어 있다.

‘상나라 시조 설은 동이족이다.’


상나라 초대왕은 탕왕이다. 탕왕의 14대 조상인 설이 동이족이라는 뜻이다. 『상원류사(商源流史)』를 쓴 하광악은 이렇게 기록했다.



‘음식을 먹는데 조두를 사용한다거나 은력(殷曆: 은나라 즉 상나라 달력)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거나 옥벽(玉璧: 사람이 죽은 후 가슴에 올려두는 동그라미 옥)·규(珪: 구슬)·찬(瓚: 옥잔) 등의 물건으로 보건대, 부여가 산동(山東)으로부터 동북을 향하여 옮겨 갔던 것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은상(殷商)과 동족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는 당시 한(漢)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은력을 약 700년 사용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상나라는 지나국 보다는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성이 있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부여의 발상지가 산동반도이고 부여 사람들이 산동반도로부터 만주로 옮겼음을 알려준다. 부여가 상나라 사람들과 같은 민족이었음을 알려준다. 부여 사람들은 상나라 사람들처럼 흰색(백색)을 숭상했다. 동이 대표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도 흰색을 좋아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흰색 동물이 많은 나라는 신라, 고구려, 백제 순서이다. 또한 부여 사람들은 상나라 사람들처럼 두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했다.


1930년대 상나라의 대표 유적지인 은허 발굴을 총지휘한 부사년은 이리 기록했다.


‘상과 동북은 본래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상의 선조가 동북에서 황하 하류로 와서 나라를 세웠고, 상이 망하자 기자가 동북(고향)으로 돌아갔다.’


단군조선 일부 사람들이 황하 하류 지역으로 내려가서 한(漢)족의 하나라를 무너뜨리고 상나라를 세웠다가, 상나라가 무너지자 상나라 왕족인 기자가 단군조선 땅으로 되돌아왔다는 말이다.



지나국 학자 문승일은 이리 기록했다.


‘순임금과 은(상)나라와는 혈통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동이집단 가운데 기타 각 민족들과도 많게 혹은 혈연관계를 유지하였다.’(『중국고대문화』 「예맥민족과 기(其)문화」, 문승일, 233〜234쪽, 1990년)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순임금이 상나라 사람들과 혈통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은 상나라 사람들이 동이족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런데 고고학 발굴 결과를 보아도 상나라 사람들이 동이족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인골전문가인 반기풍은 상나라 귀족들의 묘에서 발굴된 대다수 유골들이 동북방 종족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 보니 북아시아인과 동아시아인의 특징이 섞인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황하 중하류의 토착세력인 한(漢)족의 특징과는 전혀 달랐다.



상나라는 상, 은, 상은, 은상 등으로 불리어져 왔다. 갑골문에서는 상(商)만이 확인된다. 따라서 상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상이라고 불렀다. 은나라 라는 이름은 도읍을 은허로 옮긴 뒤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하나라는 전설상의 나라로만 여겨졌다. 고고학 유물을 바탕삼아 상고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80년대에 들어와서 지나국 역사상 첫 번째 나라로 하나라가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하나라가 있었음을 뒷받침해주는 문화는 이리두문화이다.



이리두문화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었다. 청동기의 도(刀, 칼), 검〔鉆, 칼〕, 추(錐, 송곳)와 어구(魚鉤, 낚시 바늘), 병기(兵器: 무기)와 예기(禮器: 제사 지낼 때 쓰는 그릇)가 발굴되었다.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면 국가단계로 본다. 또 궁궐터가 발굴되었다. 이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정치 기구, 즉 국가가 이미 있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하, 상, 주 세 나라에서 하나라와 주나라는 지나국 한(漢)족 나라이다. 상나라는 우리 조상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다. 하나라는 서기전 2070년〜서기전 1600년까지 유지된 나라이다. 하나라가 서기전 2070년에 시작된 것은 단군조선이 서기전 2333년에 시작된 것보다 더 늦다. 상나라는 서기전 1600년〜서기전 1046년까지 유지된 나라이다. 주나라는 서기전 1046년〜서기전 771년까지 유지된 나라이다. 상나라는 약 550년 유지된 나라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돌이켜 보면 나라 수명이 참 길다. 가장 짧은 경우가 대략 500년이다. 가장 긴 경우는 단군조선으로 약 2300년이다. 신라가 약 1천년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약 700년이다. 우리 조상 나라인 상나라도 약 550년이다. 나라가 능력이 없었으면 약 550년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이족이 세운 나라인 상나라는 어떻게 세워졌을까? 사마천이 쓴 『사기』권130 <태사공자서(태사공 사마천이 스스로 쓰다)>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설이 상을 일으켜 성탕에 와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태갑은 동으로 쫒겨 났으나 개과천선하고, 아형 이윤의 도움으로 공덕이 빛나게 되었다. 무정은 부열을 얻음으로써 고종으로 일컬어졌다. 제신은 술과 여자에 빠져 제후들로부터 공납을 받지 못함으로써 나라가 끊겼다. 이에 제3 「은본기」를 마련하였다.’




사마천이 상나라 역사를 아주 짧게 요약한 기록이다. 성탕은 상나라 첫 제왕 탕을 이른다. 공자 이전 유교의 4대 성인 ‘요순우탕’에서 탕을 이른다. 상나라 시조인 설(契) 이라고 하는 사람은 요순시절 우의 치수를 도운 덕에 상이라는 봉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상나라’라고 불린다. 그리고 사도(司徒)가 되어 백성을 가르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설의 출생설화가 재미있다. 어머니 간적이 제비 알을 삼켜 설을 낳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름은 상나라가 모계사회였음을 뜻한다. 새알에서 태어났음은 그 종족이 새를 숭상하는 종족임을 뜻할 것이다. 새를 숭상한 종족이었음은 밝달(맥)족 조이(鳥夷)와 관련된다.



알과 관련된 이야기는 동아시아 동북지역의 여러 부족들의 이야기에서 많이 보인다. 이러한 이야기의 공통점을 통해서 상나라 사람들과 동북지역 여러 부족 사람들이 피로 이어져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상나라 사람들 이야기에서는 엄마가 알을 삼키고 아이를 임신했지만 동북지역의 이야기에서는 알에서 직접 아이가 태어났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아리랑은 지역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렇더라도 똑같이 우리 민족이 이루어낸 아리랑이다. 알과 관련된 이야기가 조금 다르더라도 같은 민족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契)이라는 이름의 한자 契은 ‘귀갑을 지지다’ 는 뜻을 지닌다. 곧 설(契)은 갑골점복(甲骨占卜: 거북이나 기타 동물 뼈를 지져서 생긴 모양을 보고 점치는 행위)의 뜻을 지닌다. 또 설이 맡은 사도라는 자리는 예(禮)를 책임지는 일을 하는 자리였다. 당시에 예는 신과 인간 사이에 지켜져야 할 의례절차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따라서 사도의 일 가운데 점복의 행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다. 이렇게 설이라는 이름과 사도라는 자리는 점치기와 관련되므로 그는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설로부터 3대 상토는 마차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발해연안까지 넓혔다. 6대 명은 물 관리에 힘써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7대 왕해는 우마차를 발명해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여러 부락들을 상대로 무역활동을 벌였다. 8대 왕항과 9대 상갑미 시대에 유이족을 쳐부수고 그 세력을 하북성까지 떨쳤다. 이렇게 세력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상나라 세운 제왕 탕 이전에 여덟 번 도읍을 옮긴다.



14대 상나라 초대 제왕 탕은 공자 이전 성인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에 들어가는 성인이자 제왕이었다. 도읍을 박(밝, 백)으로 옮기고 요리사 이윤을 재상으로 삼아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윤의 삶에 관한 기록은 『죽서기년』, 『서경』, 『장자』, 『묵자』, 『맹자』, 『손자』, 『여씨춘추』, 『사기』, 『설원』 등에 나온다. 이윤은 명재상으로 탕 제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렸을 뿐 아니라 탕 제왕의 스승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윤은 유신씨 씨족(지금의 산동성 조현, 하남성 진류 일대) 출신이다. 이윤은 열심히 공부해서 두루 두루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탕 제왕은



‘우리나라에 이윤이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의사와 좋은 약에 비유할 수 있다’(『묵자』 「귀의」)



고 여길 정도였다.



하나라와 상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던 갈·위·고·곤오는 모두 하나라의 속국이었다. 이들 나라 가운데서 상의 도읍인 박 부근에 위치했던 갈나라는 힘이 약하고 통치도 불안했다. 탕임금은 갈나라를 정벌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아 여러 나라를 합치고자 했다. 그는 우선 갈나라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핑계를 들어 정치적 공세를 펼쳤다.



또한 제사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보내 농사를 돕게 하고 노약자에게 술과 음식을 나눠주고 민심을 얻었다. 그럼에도 갈은 선조에게 제사 드리지 않는 풍속을 바꾸기는커녕 탕임금이 보낸 술과 음식을 약탈하고 그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아이들마저 죽였다. 탕임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고는 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후 하나라 제후국인 곤오가 하나라 걸의 학정에 못 이겨 반란을 일으키자 탕임금은 하나라를 무너뜨릴 결심을 한다. 탕임금은 드디어 명조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하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친다. 서기전 1600년 동이족 탕임금이 한(漢)족의 하나라를 무너뜨려 천하를 통일하고 상나라를 세운다. 그리하여 탕임금이 상나라 초대 제왕이 된다. 상나라 시조는 설이고 상나라 국조(나라 세운 임금)은 탕이다.


상나라를 세운 탕임금은 정권 탄생이 하늘의 뜻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역법(曆法: 달력)을 새로 만들었다. 상나라는 흰색을 숭상했기 때문에 옷 색깔을 주로 흰색으로 바꾸었다. 무정왕이 부열을 발탁하여 탕왕 시절 못지않은 전성기를 이룬다. 하지만 10대왕 중정 이후 왕위가 자주 바뀌는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반경왕이 서기전 1300년 무렵 제후와 대신, 백성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은허로 도읍을 옮긴다. 그 뒤 상나라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해 서기전 1046년까지 12명의 왕이 254년간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다


그런데도 상나라는 약 한 세기 전만 해도 전설의 나라로 여겨졌다. 그 나라가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유물 따위의 증거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적인 나라로 밝혀진 사연이 재미있다. 1899년 가을 당시 청나라 국자감제주(오늘날 국립대 총장) 직책을 가졌던 청동기 전문가 왕의영이라는 사람이 학질에 걸린 일과 관련이 있다. 이 분이 한의사한테 받은 처방전 가운데 단맛이 나는 거북이 등껍질 조각인 ‘진귀판(陳龜版)’이라는 약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왕의영이 약봉투를 열어 보고 귀판(龜版)이라는 약재를 보게 되었다.



“이게 뭐지? 무슨 글자인 것도 같고‧‧‧‧‧‧.”
“맞아! 이것은 가장 오래된 글자일지도 몰라.”



그는 자신이 연구하는 청동기시대 청동기나 돌 따위에 새겨진 글자보다 더욱 앞선 글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의영은 골동품상으로부터 글자가 새겨져 있는 갑골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왕의영은 갑골을 발견한 지 불과 1년 만에 죽었다. 서양의 8개국 연합군에게 맥없이 당하는 허약한 청나라 모습에 울분을 참지 못해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하지만 그가 갑골을 발견한 뒤에 라진옥이라는 학자가 561개의 갑골문 글자를 풀이했다. 그리고 전설로만 알아왔던 상왕조의 왕 이름을 22개나 밝혀냈다.



또 왕국유라는 학자는 갑골문을 검토해 『사기』 「은본기」에 ‘명이 세상을 떠나자 진이 그 뒤를 이었는데’라는 부분에서, ‘진(振)’이라는 글자를 ‘왕해(王亥)’로 고쳤다. 갑골문을 보고 『사기』에서 틀린 부분을 찾아내 고친 것이다. 멋진 학자의 모습이다!



상나라 왕릉유적은 원수의 북쪽 언덕인 무관촌(村)에 자리 잡고 있었다. 궁전 및 종묘(돌아가신 왕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유적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동서 길이 450미터에 남북 폭은 250미터이다. 이 왕릉유적에서 1936년에 12기의 왕릉과 2500여 기의 제사갱 및 부장묘가 발굴됐는데, 이것들은 상나라 말기(서기전 1300년〜서기전 1046년)에 재위했던 12명의 왕의 것으로 해석되었다. 12왕의 이름은 반경, 소신, 소을, 무정, 조경, 조갑, 늠신, 강정, 무을, 문정, 제을, 제신이다. 이렇게 해서 책에 나오는 이름들과 발굴성과가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1973년에는 하남성 안양 소둔촌 남쪽에서 큰 발굴 성과가 있었다. 이곳을 은의 유적이라고 해서 은허(殷墟)라고 부르는데 무려 5,041편이나 되는 갑골이 나왔다. 거북의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이기 때문에 갑골이라고 부르고 거기에 새겨진 문자를 갑골문자라 부른다. 갑골문자는 한자의 기본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자의 기원으로 본다. 1991년에는 하남성 안양 화원장 동쪽에서도 갑골문 1,583편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확인한 학자들은 『상서』 「다사(多士)」편에 나온



‘오직 상(은)의 선인들만이 전(典)이 있고 책(冊)이 있었다.’



는 구절을 떠올리면서 수많은 갑골이 나온 이곳을 지나국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문서 보관창고로 추정했다. 책(冊)이란 한자를 가만히 보면 대나무 조각을 끈으로 엮은 모양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글씨를 쓴 대나무 조각을 합쳐서 가죽 끈 또는 비단 끈으로 묶은 것을 책(冊)이라 말한다. 전(典)은 책상 위에 두고 늘 참고해야할 책을 말한다. 사전(辭典)과 법전(法典) 등의 경우에 쓰인다.



상나라의 찬란한 문화를 입증하는 유물이 바로 청동기와 옥기이다.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는 5000점이 넘는다. 청동기 종류는 예기(제사 지낼 때 쓰인 그릇), 병기(무기), 장식품과 거마기(수레 부속품)등이다. 가장 큰 것은 1939년에 발굴된 ‘사모무(司母戊: 최근 연구에 따라 후모무后母戊로 고쳐졌다.)’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로 높이가 133센티미터에 두께가 78센티미터이며 무게는 832.75킬로그램이나 된다.



이 네발솥은 직육면체에서 윗부분이 없고 다리가 네 개 달린 모양이다. 그 다리에 도철문(괴이하고 무서운 동물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든다. 윗부분에 귀 모양의 손잡이가 양쪽에 두 개 달려 있다. 배 부분 안쪽에는 후모무(后母戊)라는 세 글자가 보인다. 이런 발굴성과에 힘입어 이제는 상나라의 존재는 물론 그 역사까지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상나라 문화에는 동이 문화가 많이 들어 있다. 상나라 사람들은 흰색을 무척 좋아했다. 점복(占卜)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 성공 여부를 미리 알아보려 했다. 소나무 심기를 좋아했다. 『예기』 「단궁」 편에 상나라 사람들은 흰색을 좋아해서 싸움터에 나갈 때에도 흰말을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나라 사람들은 동북방 쪽을 좋아했다.
또 상나라 때의 도읍에 있는 성, 대형 건축터와 대형 고분 모두가 동북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안양 원수 이북에 있는 원북상성(城) 궁성터는 동북방향으로 13도 가량 틀어져 있다. 은허 서북쪽에 있는 왕릉과 후강대묘의 기본적인 방향도 동북쪽으로 10도 정도 틀어져 있다. 이런 식의 방향관(觀)은 상왕조의 중심지역뿐만 아니라 주변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주나라 사람들의 방위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주나라의 유적들은 북서쪽 방향을 향해 있다.



그러면 상나라 사람들은 왜 동북방향을 좋아한 것일까? 이는 강물과 같은 지리적인 이유라든가 환경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상나라 왕실에서부터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좋아한 것은 아마도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 때문일 것이다. 그 동북방향은 어디인가? 다름 아닌 대릉하 및 요하 유역이다. 그 지역이 상나라 사람들의 고향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는 이유이다. 대릉하 및 요하 유역은 당시에 단군조선 영토였다. 당시의 단군조선과 상나라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를 필요가 있다.

지나국 기록물과 고고학 발굴성과로 미루어 보면 서기전 6000년(사해문화와 흥륭와문화)으로부터 시작된 발해연안 문명이 그 유명한 홍산문화(서기전 4500년〜서기전 3000년)을 거쳐 하가점하층문화(서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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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나태영  2018년2월4일 22시09분    
문성재
한국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
추천 드립니다.
(55) (-51)
 [5/5]   나태영  2018년2월6일 21시23분    
서평
단군조선 핵심체크: 문성재가 쓴
<한국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
문성재는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서 '낙랑군 호구부'가 서기 20세기에 위조된 가짜일 확률이 높다는 주장을 했다. '별'이라는 한자 한 글자의 쓰임새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50 ~ 200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언어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서영수는 북조선 땅에서 낙랑군 호구부가 나왔기 때문에 북조선 땅에 한군현 낙랑군이 있었음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해버렸다. 서영수한테 문성재의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330쪽을 읽으라고 권고한다. 서영수는 화이사관 식민사관 이병도 이기백을 잇는다. 윤내현 선생이 리지린 선생이 쓴 <고조선 연구>를 표절해서 약 900쪽에 이르는 <고조선 연구>를 썼다고 주장했다.

김상태가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란 책에서 윤내현 선생이 표절했다면 이병도 사단 모든 잡놈들이 표절한 거라는 력사적 사실을 조근 조근 보여줬다.
어쨌든 문성재는 낙랑군 호구부가 조작되었음을 통쾌하게 밝혔다.

단군조선 분야 세계척 석학 윤내현 선생 수제자 복기대는 북조선 남한 차이나 일본에서 낙랑군에 관련된 논문이 약 1천 편이 나왔다고 말한다. 고대사 연구는 국방이다. 라고 말한다. 그 만큼 낙랑군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미래 통일한국의 영토가 결정 된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앞으로 100년 ㅡ 300년 안에 서희 장군 소손녕 담판이 반복될 수도 있다. 역사는 반복 된다. 한국상고사 튼튼하게 지켜서 미래에 우리나라가 서희 장군처럼 통쾌하게 우리 영토 넓히기를 고대한다. 어찌하면 그리 될까? 얼숲 친구 여러분 이 책을
읽으시라!
이 책에서 문성재는 단군조선과 관련된 쟁점을 몇 개만 골라서 조근 조근 설명한다. 399쪽이 마지막 쪽이다.

쟁점 하나. 한국국상고사에서 패수가 어디인지가 쟁점이다. 그렇다면 패수가 왜 쟁점일까? 패수가 어디인 지에 따라서 단군조선 서쪽 강역이 확정되기 때문이다. 문성재는 이 쟁점이 21세기 현대에서만 쟁점이 된 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쟁점이었음을 조선시대 여러 학자들 주장을 분석했다. 냉정하게 분석했다. 안정복과 정약용의 한계가 드러난다. 김정호 능력이 드러난다. 박지원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왜 고구려 평양을 조선 땅 안에서만 찾냐고 꾸짓는다. 당시 차이나 땅에서 �?으라고 주장했다.

상흠이 쓴 <수경>은 서기 3세기경에 쓰인 책이다. 문성재는 상흠이 쓴 책의 구성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윤내현 선생님 40대의 모습과 겹쳐진다. <수경>에 소개된 137개 하천의 98프로 이상이 전통적인 중원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쾌거이다. 이를 토대로 패수도 중원 내부에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과학적으로 보여줬다. 한반반도에 패수가 있을 수 없다. 패수는 서고동저형 차이나 땅에 있었음을, 동고서저형 한반도에 있을 수 없었음을 문재성은 상식적으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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