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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53
김구 주석과 학도병 장준하의 만남
김갑수 | 2018-01-31 14:11:0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김구 주석과 학도병 장준하의 만남(5)

1945년 1월 31일 하오, 대륙의 끝까지 쫓겨 간 약소국의 임시정부 청사에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임정 청사는 암반을 등 대고 있는 5층 건물이었다. 한국 학도병 50명은 뜰에 2열 횡대로 정렬해 있었다. 그들의 침묵 속에는 벅차오르는 감격이 숨어 있었다. 학도병들은 펄럭이는 태극기를 신기한 눈으로 치어다보았다. 장준하는 태극기를 처음 본 순간 시간의 흐름이 정지하는 것 같은 환각에 빠져 버렸다.

특이하게도 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늘은 저녁처럼 어두워졌고 태양은 가락지 형상으로 잠시 빛을 뿜더니 이내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학도병들은 숙연히 임정의 지도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준하는 7개월에 걸쳤던 대륙 횡단 6천 리의 장정이 완전히 끝났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진 교관이 청사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거세진 바람을 타고 태극기는 더욱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깃발은 마치 젊은이들의 험한 역정을 다 안다는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드디어 청사 가운데의 문이 열리고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군인이 진 교관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는 누런 군복을 입은 장정 6,7명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선두로 나온 50대 후반의 군인은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이었다. 약소민족 독립군 장군으로서 그의 삶은 투쟁과 역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젊은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주름이 켜켜이 파인 노병의 입에서 이윽고 카랑카랑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고생들 했소이다. 여러분이….” 웬일인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앞으로 같이 지내실 것이니까 차차 얘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나는 어서 여러분에게 우리 정부의 주석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말을 맺으며 고개를 들어 올려본 돌계단에서는 푸른 두루마기로 몸을 감싼 노인을 필두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 7, 8명이 내려오고 있었다. 푸른 두루마기의 노인은 굵은 검은 테 안경 속에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그는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였다.

일본군이 혈안이 되어 사살하려 했던 백절불굴의 혁명가는 의외로 소탈하고 검소해 보였다. 망명길 30년의 풍상을 겪은 노인은 학도병들을 아들같이 보고 손자처럼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사뭇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음성은 의외로 차분했다.

“젊은 동지들을 환영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해외에 나와 있어서 국내 소식에 어둡습니다. 그동안 일제의 폭정 밑에서 온 국민이 모두 일본인이 된 줄 알고 염려했는데 그것이 한낱 기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주어질 것입니다.”

김구는 임정의 각료들을 학도병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최동호, 신익희, 엄항섭, 차이석, 조완구, 유동열 등이 차례대로 소개되었다. 학도병들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의를 표했다. 식을 마친 젊은이들은 내무부장 신익희의 안내를 받아 5층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늦게 만찬을 겸한 환영연이 열렸다. 중국 정부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고 있는 임시정부의 차림상은 궁색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을 맞이한 임정 사람들의 움직임은 생기에 넘쳤다. 장준하는 상차림을 지휘하고 있는 몸집 작은 아낙네에게 눈이 끌렸다. 어머니 또래의 조선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젊은이들에게 아주 친절하고 자연스럽게 대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임정 자금을 구하려고 국내에 단신으로 여러 번 잠입한 적이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동농 김가진으로 임정의 최고령 어른이었다고 했다.

동농은 70을 넘긴 나이에 총독부가 준 남작 작위를 팽개치고 상해에 망명해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그녀의 남편도 독립운동가로서 임정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정정화였는데 지금은 임정의 안살림을 맡고 있다고 했다.

상에는 배추절임을 비롯한 소채 안주 몇 가지에 배갈 병이 놓여 있었고 그나마 잔도 없어 뚝배기에 돌려가며 마시도록 되어 있었다. 김구는 자애로운 억양에 혁명가의 의지를 숨기고 있었다.

“여러분이 왜놈에게 항거하여 용감히 병영을 탈출, 여기까지 와 주었으니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맙습니다. 착잡했던 나의 마음이 오늘 저녁 씻은 듯이 가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숭엄한 조국의 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그 증거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너무도 자랑스러워 다 함께 시내로 뛰쳐나가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장준하는 학도병 대표로 답사를 했다.

“저희들은 왜놈들의 통치 아래서 태어난 신세대들입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우리나라의 국기조차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때 임정요인의 좌석 한 귀퉁이에서 '흐윽' 하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 사이를 두었던 장준하는 답사를 이어 나갔다.

“저희는 철이 들면서 일장기가 우리나라의 국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조국의 현실입니다. 저희는 조국의 국기가 보고 싶었습니다. 전국에 나부끼는 일장기가 우리 국기라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곧 슬픔이 조수처럼 밀려왔습니다.

우리 조국은 얼마나 못났기에 청년들에게 국기 하나를 보여주려고 6천 리를 걷게 만든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슬픔은 지금 일제를 향한 분노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편 저희는 지금 이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가지고 몸 바칠 곳을 찾았다는 기쁨에 떨고 있습니다.”

답사를 끝낸 장준하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숙연한 표정으로 임정요인들을 보고 있었다. 김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노인 각료들이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눈에도 이윽고 눈물이 맺혀졌다.

급기야 ‘흑’하는 김구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70을 바라보는 주석의 울음은 환영회장을 삽시에 울음바다로 바꾸어 버렸다. 울음은 통곡으로 변해갔다. 음식을 가지고 들어오던 아낙네 몇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슬그머니 음식 용기를 바닥에 놓더니 함께 울기 시작했다.

식탁을 주먹으로 치는 사람도 있었고 식탁 다리를 잡고 마구 흔들며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망국인이 아니면 체험할 수 없었던 차별과 고초의 묵은 비애를 마음껏 터뜨리고 있었다.

김구를 찾아온 여운형과 송진우의 면모(6)

8.15 이후 임정요인이 귀국한 후 장준하는 잠시 김구의 비서 일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임정요인들은 물론 남한의 지도자들은 국제 정세에 너무도 둔감했다. 그들에게는 한국이 국제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현실을 보는 눈이 없었다. 그들은 민족의 현실을 타개하는 데,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김구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김구는, 자신이 해외에만 오래 있어 국내 사정에 어둡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정작 그가 어두운 것은 국내가 아니라 미· 소 강대국의 의중이었다. 사실 그때 이미 조선민족의 운명은 조선민족의 손을 떠나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 이미 조선반도의 운명을 100%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다음은 김구 환국 후 경교장을 찾아온 남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장준하가 스케치 해 놓은 것을 요약한 것이다.

건준 위원장 여운형, 그는 일찍이 청년 시절에 상해 임정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모나 학벌 같은 외형적인 화려함에 비해 독립운동의 실적이 미약했다. 물론 이승만보다는 독립운동을 훨씬 적극적으로 한 사람이기는 했다.

그는 해방 직전에 투옥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혐의는 유언비어 유포였고 2년 정도 복역했다. 그는 아베 조선 총독이 치안유지권을 주겠다고 하자 넙죽 받아서 건준과 인민공화국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에게 인공에 참여하라고 권유하고 있었다.

풍채가 좋은 그는 활달한 걸음으로 경교장에 들어왔다. 그는 김구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빠른 시간에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 보였다.

장준하는 무심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저 분의 코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여운형은 의미 있는 대화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는 사담으로 일관했다. 그는 자기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사실 그는 식민지 시절 자기희생이 적었던 정치인이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선생님이 들어오신 후 일하실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보겠다고 애써 보았습니다.” 김구는 여운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들어오셨으니 제가 할 일은 없어진 줄로 압니다.”

김구는 가볍게 웃으면서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떴다. 여운형은 계속해 이 사람 저 사람의 안부를 물었고 자기가 상해에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말을 했다. 그는 40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진우. 사실 그가 식민지 시대에 한 일 중에서 감동적인 것은 없었다. 그는 김성수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는 것이 흠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와 중앙학원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선총독 아베는 치안유지권을 처음 송진우에게 제의했었다.

그러나 송진우는 거절했다. 패망한 일본에게 정권을 인수받을 이유가 없다는 명분이었다. 명분이야 옳지만 그에게는 치안 유지를 맡을 자격이 없었고, 그것을 송진우는 잘 헤아렸던 것이다. 그는 겉으로는 열렬한 임시정부의 지지자였다.

비대한 체구의 그는 짙은 회색 양복을 입어서인지 더 육중해 보였다. 그는 김구를 보자 흥분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금세 달변조의 발언이 쏟아냈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렸다. 김구는 담담히 경청하고 있었다.

송진우는 준비해 온 5개조의 건의서를 내놓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1.민주통일국가 완성 2.연합국들에 사절단 보내 독립 승인 촉구 3.재정 문제 해결 방안 4. 사무 조직 완비 5.광복군 모체로 국군 편성 등이었다.

김구는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를 표시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수고하셨소” 라고 응대했을 따름이었다.

김구의 무리수와 때늦은 남북회담(7)

8.15 정국에서 미군정이 한국 정치 지도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그들이 지어 붙인 별명에서 드러난다. 먼저 김규식은 시클리(sickly), 이름자 ‘규식’에서 딴 별명인데 아울러 약골이란 뜻이 담겨 있었다. 여운형은 ‘실버엑스’, 은도끼처럼 겉보기에는 좋은데 막상 써 먹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김구에게는 ‘블랙타이거’라고 했다. 그들은 김구를 제거해야 할 맹수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김구가 반탁운동에서 무리수를 둔 것은 사실이었다. 김구는 신탁통치안이 불거지자 그동안 미군정에 억눌렸던 감정을 분출이나 한다는 듯이 반탁운동의 선봉을 자처하며 미군정을 공격했다.

김구는 임시정부 공식 승인을 요구하면서, 전국 군정청 관리의 총사직, 38선 이북의 조선인 행정·사법 당사자 총 이탈, 전 국민 총파업, 신탁통치 배격운동 불참자에 대한 민족 반역자 규정, 전체 정당의 즉시 해체 등을 골자로 하는 12개 항의 실행 방법을 관철하려 했다.

또한 그는 ‘국자 1호’를 발표하여, “현재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조선인 직원은 전원 임정 지휘 하에 들어오라”고 촉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행정권 행사를 강행하려 했다. 그는 아울러 전국 총파업을 재차 촉구했다.

사실 김구의 강경책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었다. 그는 정치를 해야 할 시점에 여전히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군정은 이런 임정의 기도를 쿠데타로 간주한다면서, 임정 요원의 중국 추방을 통고했다. 그러자 김구는 국민 총파업을 철회했다. 결국 김구의 강력한 반탁 운동은 오히려 군정의 장악력과 이승만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에 철저히 이용되고 만 것이다.

“삼팔선을 베고 죽더라도 민족의 분단을 막겠다.”

나는 김구의 이런 수사법이 안타깝고 민망하게 느껴진다. 다 늦은 시간에 김일성과 어떤 회담을 한들 성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그것은 김구가 분단을 막으려고 고심했다는 점을 역사에 남기는 정도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김구, 김규식의 북행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세력의 저지 노력도 드세게 일었다. 미군정과 우익단체, 기독교 단체와 월남동포 단체들이 그들이었다. 하지만 문화인과 법조인 단체들은 남북회담에 찬성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평양에서는 이미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미·소 양군의 즉시 철수와 단독정부 수립 반대가 결의되었다. 북에서는 김일성과 연안독립동맹 주석이었던 김두봉이 김구와 김규식 등을 맞이했다. 이어 남쪽 대표 11인과 북쪽 대표 4인이 모여 15인 연석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에서는 외국군 즉시 철수와 철수 후 내전 발생 부인, 조선 정치회의 구성과 그 주도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와 정부 수립,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등 4개 항이 채택되었다. 다음으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인이 따로 모여, 남쪽에 대한 북쪽의 송전 계속, 연백 수리조합 개방, 신탁통치 반대로 북에 억류되어 있는 조만식의 월남 등이 합의되었다.

이어서 남북 대표는 합의안을 관철시키려는 행동에 돌입했다. 그들은 소련과 미국군 군사령부를 방문해 본국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군이 철수하면 하겠다고 응대했고, 미국은 유엔의 결의대로 정부 수립 후 철수하겠다고 대응했다.

사실 안타깝게도 남북 합작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미· 소의 동의 없이는 성과를 낼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김구와 김규식은 미구에 닥칠 무서운 민족 결별을 예감하며 노을이 지고 있는 38선을 허허로이 걸어 내려와야 했다.

백범 김구의 비통한 죽음과 사건 미스터리(8)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한국인들은 노선의 구별 없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통일의 염원을 담은 혈서들이 연일 경교장으로 답지했다. 그의 죽음을 따라 할복과 음독을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상객 중에는 거지도 있었고 여승도 있었다. 고구마 장수 할머니도 그의 영정 앞에 나와 오열했다. 신분고하를 막론한 추모객들이 경향 각지에서 몰려들어 1분 당 100명꼴로 분향 배례했다.

김구의 장의 행렬을 따라가는 인파 중에 장준하도 있었다. 상여는 소공동 전차길 위를 지나갔다. 흰옷 입은 수만 명의 청장년들이 상여를 따라 걸었다. 상여가 시청 앞 광장에 이르자 백범 추도가가 울려 퍼졌다.

오호!/ 여기 발 구르며 우는 소리/ 지금 저기 아우성치며 우는 소리/ 하늘도 땅도 울고 바다조차 우는 소리/ 끝없이 우는 소리 / 임이여 가십니까?

이 겨레 나갈 길이/ 어지럽고 아득해도/ 임이 계시옴에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조각 갈라진 땅 그대로 버리고서/ 천고에 한을 품고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범인은 포병 소위 안두희라고 했다. 그는 평안도 용천 출생이었다. 그는 한독당의 비밀 당원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가 안두희를 경교장에 출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김학규는 광복군 책임 장교였다. 그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안두희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안두희는 비서들이 보는 가운데 총을 차고 경교장에 들어갔다. 그는 서북청년단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이범석의 족청에도 잠시 몸담은 적이 있었다. 안두희는 범행 직후 총을 계단에 던지면서, “내가 주석 선생을 시해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헌병들에게 연행되었다. 당일 오후 2시 헌병 부사령관 전봉덕은, “범인이 의식을 찾는 대로 배후를 엄중 조사하겠으나 아직까지 알려진 바로는 단독 범행인 것 같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오전 안두희는 특무대로 이송되었다. 국방부 보도과는, “진상은 목하 엄중 취조 중에 있으며 지금까지 판명된 것은 다음과 같다”고 공식 발표했다.

1. 안두희는 한독당원으로 김구의 측근이었다.
2. 안두희는 누누이 김구와 상봉하여 직접 지도를 받은 자이다.
3. 당일 인사 차 김구를 만나러 갔다가 언쟁 도중 격분하여 순간적으로 살의가 발생했다.

사건 다음 날인 6월 27일, 호남 순찰 도중 김구의 암살 소식을 전해들은 국무총리 이범석은 백범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일반 국민은 억측과 요언을 엄금하기 바란다"라고 덧붙이는 성명을 발표했다. 3일 후 이승만도 성명에서, ‘암살 사건은 한국독립당의 당내 분쟁의 결과임을 강조하면서, 암살의 자세한 동기를 밝히지 않는 것이 고인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추후 안두희는 검사에게 총살형을 구형받았지만, 재판장 원용덕은 종신형으로 감형한다. 1949년 8월의 일이었다. 그는 술, 담배, 집필, 목욕, 신문 열람, 특별면회가 허용되는 감방에서 생활했다. 그는 3개월 후 15년으로 감형되었다. 다시 4개월 후 10년으로 감형되었고 11개월 후에는 아예 잔형 면제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 육군 장교로 복귀했다. 대위로 진급한 그는 대북 특수공작대에서 일하다가 제대하여 강원도에서 군납사업을 벌였는데 도내 납세액 3위에 오를 정도로 성공했다. 한편 김학규는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킨 혐의로 헌병사령부에 구속되었다. 당시 현행법에는 군인의 정당 가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는 24시간 수갑을 채워놓는 육군 형무소 지하 감방에 투옥되었다.

김학규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장인 백홍석 대령이 재판장인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이후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안두희와 같은 형량을 받은 것이었다. 이후 그는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석방된 후 수원에 내려가 이름을 바꾸고 변장하며 살다가 발각되어 재수감되었다. 그는 4·19 때까지 복역했다.

참고 [백범 김구 암살사건 프로파일링]

염동진(1902~?)은 8.15 정국에서 여러 테러를 주도한 <백의사>의 두령이었다. 백의사는 신탁통치를 놓고 벌인 좌우 대립의 소용돌이에서 임시정부의 정치 공작대와 연계하여 대북 테러 공작을 전개했다. 1946년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것은 백의사와 결탁한 북의 테러리스트라는 설이 있다. 당시 김일성은 무사했지만 그를 경호하던 소련 장교 노비첸코는 오른 팔을 잃었다.

염동진은 좌익이었던 김두한을 설득하여 반공 폭력배로 전향하게 만들었다. 그의 테러 대상은 좌익이거나 노선이 모호한 우익이었다. 8.15 정국 남한에서 벌어진 무수한 테러 살인의 다수는 염동진이 주도한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는 6·25 즈음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나는 백범 김구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굴하여 공개한 자료들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공개한 자료들을 취합하여 읽어 보았다.

결과 정치적 테러사건은 언제나 명확한 규명이 이루어지는 예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 사료(史料)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언제나 상반되는 자료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판단은 내 직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역사 기록의 허구성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알고는 크게 놀랐다. 아울러 역사를 판단하듯이 범인을 추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8.15 정국의 중도인사라고 할 수 있는 여운형의 암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좌와 우의 중간노선을 택했으므로 좌·우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제거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여운형을 죽인 사람은 좌인가, 우인가? 심증으로는 우익이지만 문제는 증거가 없으므로 단정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정치적 테러는 배후가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적 테러라고 해서 배후가 드러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15 정국의 정치적 테러들은 하나같이 배후를 밝히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그것은 수사관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른바 '영구 미제 사건'이 된 셈이다.

영구 미제 사건을 낳는 경우는 두 가지다. 수사가 잘못 되는 경우와 수사가 방해를 받을 경우 사건의 배후는 밝힐 수가 없다. 그런데 8.15 정국의 암살테러들은 후자의 경우로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건들에는 하나같이 수사를 방해할 실력을 가진 권력 집단이 개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의 권력 집단이란 누구인가? 그것은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이었다.

김구의 암살은 가장 큰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내가 읽은 모든 자료에는 추정이나 단정만 존재할 뿐이었다. 온전한 증거를 제시하는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공개한 기밀 사항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글을 읽으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해도 그 글이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는 법이다. 진실한 주장에는 언제나 합리적인 근거가 제시되기 때문이다.

8.15정국의 테러사건들은 모두 ‘미제(未濟)’로 남아 있다. 나는 연습 삼아서 가장 큰 미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백범 김구의 암살사건 배후를 프로파일링 해보았다.

1.김구를 저격한 것은 당시 포병 소위 안두희이다.
2.그는 단독 범행이었다고 주장하며 끝내 입을 열지 않다가 죽었으므로 그의 진실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자백에 의한 증거 확보는 불가능해졌다.
3.살인범 안두희는 사건 발생 전후 이승만 정부의 줄기찬 보호와 비호를 받았다.

4.최근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문서에 의하면 안두희는 염동진이 주도하는 한국 테러 조직 백의사(白衣社)의 단원이었다.
5.동시에 안두희는 미국 C.I.C 요원이었다.
6.동시에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의 단원이었는데 당시 이 단체는 이승만의 일을 돕고 있었다.

7.동시에 안두희는 김구 주도의 한독당원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8.4, 5, 6, 7항 중에서 적어도 2~3개는 위장을 위한 준비 방책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9.당시 백의사와 김구는 적대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었다.

10.당시 이승만과 미국은 담합의 관계였다.
11.공개된 미국의 기록문서에는 당시 미국과 이승만은, 김구가 좌우익 합작의 군사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증거 제시 없음.)
12.공개된 미국 기록문서에는 "당시 백의사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를 죽이라고 말했다면 안두희 역시 피의 맹세를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실제로 지시했다는 것이 아니고 지시한다면 그리 했을 것이라는 가정적 추리에 불과하다.

13.결과적으로 미국의 문서는 김구를 죽인 배후가 염동진의 백의사인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14.그러므로 안두희의 배후는 일단 미국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외교 기록 문서에는 일련의 세탁 과정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15.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김구 암살은 미국의 기획과 이승만의 용역 제공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16.따라서 미국 관련자와 이승만의 신병을 확보해야 하고 운이 좋으면 그들의 자백에 의해 물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17.그런데 현재로서 16항의 실현은 불가능하다.(이승만은 죽었고 한국 경찰은 미국에 대한 수사권이 없다.)
18.그러므로 이 사건은 영구히 미제(未濟)로 남을 가능성이 단연 높은 것이다.

8.15 정국의 테러사건들 말고도 한국의 현대사는 무수한 고통과 의혹들을 간직하고 있다. 경제 발전으로 일견 활기에 넘쳐 보이는 이 나라는 불과 몇 십 년 전의 과거만 들춰보아도 참으로 많은 상처와 흉터로 얼룩져 있다. 그 얼룩무늬들은 이름 하여 암살과 학살, 투옥과 처형, 고문과 조작 등이었다.

이 모든 것들의 뿌리가 좌·우 대립에 있다. 결국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해 있는 대부분의 모순과 부조리들은 분단체제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한국의 산하에는 분단체제로 인한 억울한 유골이 최소 100만 이상은 묻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멀쩡해 보이는 내 조국의 배후에 오열과 원한의 처절하고 섬뜩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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