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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52
《백범일지》는 최소 네 가지가 있다
김갑수 | 2018-01-30 15:08:1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백범일지》는 최소 네 가지가 있다 (1)

《백범일지》는 최소 네 가지다. 첫째, 김구가 직접 쓴 친필본 백범일지가 있다. 둘째는 김구가 유언으로 자식들(인, 신)에게 남기기 위해 쓴 《백범일지 상권》, 셋째는 친필본을 옮겨 적은 것으로 편의상 필사본 백범일지라고 한다. 네 번째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접한 국사원본으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1947년 집필)다. 김구의 글 중에서 유명한 <나의 소원>은 이 국사원본에 수록되어 있다.

항간에서는 백범일지를 이광수가 다시 쓴 것이라고 하여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백범일지는 한문은 아니지만 국한문 혼용체에 가까우므로 한글로 풀어써야 현대 독자가 읽을 수가 있다. 김구의 유족도 이광수가 윤문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 자체의 신뢰성을 의심할 만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네 가지 백범일지를 비교, 대조해 보면 유의미하게 유달리 상충되거나 특별히 가감된 내용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최근에 집필된 백범일지를 다시 구해서 읽어 보았다.(2017. 11.15 양윤모 집필) 나에게는 내 나름 역사를 보는 눈, 즉 사관이 있다. 일단 나는 이념의 편향성을 배제한다. 나아가 내가 혐오하는 것은 진영논리이다. 나는 역사적 인물을 평가함에 한 인간이 보인 ‘진실과 노고’를 먼저 중시한다. 이것은 김구가 비록 반공적 인물이었지만 중도인사인 여운형보다 내가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 김구(1876~1949) : 황해 해주 출생 호는 백범(白凡).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었다.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1896년 민왕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살해하였다. 체포되어 복역 중에 탈출하였다.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1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14년 출옥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활동을 시작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고 북한에 들어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육군소위 안두희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

다소 길게 인용된 윗글은 뉴라이트 교과서 포럼에서 만든 책의 내용 중 김구와 관련된 서술이다. 이 글에는 김구를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개입되어 있다. 먼저 이 글은 김구가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읽기에 따라 김구가 무고한 사람을 때려죽인 살인자로 인식될 수도 있는 위험한 서술이라고 본다.

물론 이 부분은 김구 연구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의 신문 <독립신문>이 김구가 살해한 사람은 일본 상인이라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일어용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할 이유는 우리에게 없다. 《백범일지》(2017. 11.15 출간, 양윤모 윤문)에는 김구가 살해한 사람은 일본군 중위로서 이름은 스치다 조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서술이기도 하다. 2004년 7월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한 바 있다. 당시 정현태 검사는 김씨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뉴라이트는 김구가 사람을 오인하여 죽인 것으로 단정하여 서술했다.

다음으로 뉴라이트 교과서는 김구가 ‘항일테러활동’을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굳이 ‘테러’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또 뭘까? 그렇다면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도 자연 '테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김구의 업적인 이 사건들을 김구와 관련된 서술에서 아예 누락시켰다.

또한, ‘국제연합 결의에 반대’, ‘북에 들어가서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등의 문구는 김구를 부정적인 인물로 비치게 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는 서술은 과연 뉴라이트가 긍정하는 인물은 김구 주석인지 아니면 암살범 안두희인지를 혼동하도록 만들 지경이다.

결국 이런 일련의 일들은 우선 순국선열에 대한 기본 예의를 차리지 못하는 무례한 짓이다. 김구는 이역 중국 땅에서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을 떠나보낸 불운의 삶을 살았다. 특히 장남 ‘인’은 중국정부가 지원한 페니실린을 김구가 주지 않아 폐렴으로 죽었다. 아울러 김구는 식민지 시대 유일한 임시정부를 이끈 주석이다. 따라서 그는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대한민국의 영원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성향을 떠나 그는 모든 것을 바쳐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風餐露宿)한 우리가 떠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 선열이다.

김구를 부인하는 것은 우익의 자기 부정이자 스스로 우군을 줄이는 어리석은 짓이다. 우익이라면 꼭 독재자인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좋아해야 하는 법이 없지 않은가? 우익이 김구를 부인하는 것은 스스로 우익이 아니라 수구꼴통 또는 파시스트임을 드러내는 일종의 '커밍아웃'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봉창 열사 거사와 백범 김구(2)

백범은 1920년대 중반 임정 내무부 경무국장을 지냈다. 그는 임시정부를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그는 테러 투쟁에 관심이 높았다. 언제나 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좀처럼 돈을 쓰지 않았다. 임정 사람들은 백범에게 돈이 가면 나오는 법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일부 생활이 나은 사람들은 가끔씩 백범에게 돈을 주었다. 백범은 워낙 체격이 커서 식사 양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자금이 생기면 임정의 살림 비용에 보태거나 책임 맡고 있는 애국단의 무기 비용에 쓰느라 개인적으로는 먹고 사는 게 어려웠다. 백범은 가끔 정정화(군자금 모집, 임시정부 안살림을 맡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집에 들렀다. 주로 오후 늦게 오는 경우가 많았다.

“저, 밥 좀 주실 수 있나요?” 백범은 어려운 사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녀자에게는 친절하면서도 격의가 없이 대했다. 백범은 매번 밥을 달게 들었다. 그는 걱정거리가 있을 때 하루 종일 앉아 줄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통담배라고 해서 50개 들이 담배를 백범은 하루에 다 피워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런 백범이 그 좋아하던 담배를 끊었다. 테러 비용 마련을 위해 작은 경비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1930년대 들어 임시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잠정 보류하고 새로운 투쟁 방법을 강구했다. 전략상 임시정부가 나서지 않고 백범 혼자서 책임지는 형식을 취하며 테러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때까지의 테러는 주로 <의열단>에서 주도했었다. 그런데 의열단의 대부분 인원이 좌경화되면서 그들은 연안이나 만주로 옮겨갔다.

백범은 <애국단>을 만들어 일본 천황을 표적으로 삼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적 총수를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1932년 이봉창 열사의 거사는 국내에도 보도가 되었다. 이봉창은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이 탄 마차에 수류탄 두 개를 던졌다. 그러나 수류탄의 성능이 좋지 않아 천황은 죽음을 모면했다. 중국 신문들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한인 이봉창, 일본 천황 저격, 불행히 맞지 않다.”

이렇게 제목을 뽑아 실었다. 이봉창 열사의 거사 보도가 나간 후 상해의 일본인들이 중국 신문사에 몰려가 사옥을 부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감정은 아주 좋아졌다.

테러 행위는 자기희생의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테러는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동기에 비하여 적에게 입힐 수 있는 타격은 제한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테러는 저항 의지를 내외에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이봉창 열사는 이 목적을 충분히 수행했다. 게다가 한중 양국을 결속시키기까지 했다.

지하에서 만나자고 언약했던 윤봉길과 김구 (3)

1932년 4월 29일, 백범이 정정화를 찾아와 어른 몇 분의 점심 준비를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정화는 깔끔하게 점심상을 보아 놓았다. 이동녕과 조완구가 왔고 얼마 안 있어 백범이 합류했다.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백범이 정정화에게 술과 신문을 사다 달라고 했다. 왠지 모르게 백범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술을 즐기지 않았으며 더구나 낮술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정화가 집 밖으로 나오자 거리 분위기가 좀 술렁거리는 것 같았고 호외가 뿌려지고 있었다. 중국인 청년의 폭탄 거사로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하고 원흉 시라카와는 중상을 입었으며 그 외에도 십여 명의 문무대관이 부상당했다는 급보를 알리는 호외였다. 정정화는 그때서야 짚이는 바가 있어 서둘러 술과 신문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호외를 받아든 백범은, “일이 제대로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두 사람에게 술잔을 권했다. 그들은 축배를 들었던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난 후 폭탄을 던진 이는 중국인이 아니고 한인 청년 윤봉길이라는 호외가 또 나왔다.

며칠 전 백범은 일본 신문인 상해일일신문을 읽고 거사 결심을 굳혔다. 당시 일본군이 상해 인근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는 기사가 일본계 신문에 보도되었다. 참석하는 사람은 물통과 도시락과 일장기를 지참하라고 되어 있었다.

백범은 굵고 검은 안경테를 매만지며 다시 한 번 기사를 확인했다. 백범은 윤봉길을 떠올리고 있었다. 윤봉길이 백범을 찾아온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윤봉길은 동포가 경영하는 일용품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시장에서 야채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백범을 만나자마자 한탄하는 어조로 말했었다.

“제가 야채를 지고 쏘다니는 것은 다 기회를 얻으려 했음인데 이제 일본 놈들이 상해까지 왔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백범이 윤봉길을 불러 자신의 거사 뜻을 전하자 윤봉길은, 감사합니다. "이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백범은 서문로에 가서 김홍일을 만났다. 그는 상해 병공창에서 일하는 송식표에게 교섭하여 일본식 물통과 도시락에 폭탄 장치를 하여 사흘 안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이틀 후 백범은 안심이 안 되어 김홍일과 함께 병공창으로 갔다. 송식표는 전문기사 왕백수와 함께 물통과 도시락 폭탄의 성능 시험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는 마당에 파 놓은 토굴의 사면에 철판을 둘렀다. 그러고는 폭탄을 그 속에 넣고 줄을 하나 끌어내더니 수십 보 밖으로 물러났다. 그는 엎드린 후 줄을 잡아 당겼다. 폭탄은 무섭게 터져 오르며 철판을 산산이 조각내 버렸다.

“지난 번(1932, 1.8, 이봉창 건) 동경에서 불발된 것이 너무 안타까워 이번에는 20여 차례 실험을 하고 나서 실물에 장착한 겁니다.” 백범은 폭탄을 받아서 친구 집에 보관했다. “귀중한 약이니 불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해 주시오.”

4월 29일이 다가왔다. 윤봉길은 매일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보며 분위기를 익혔다. 그는 거사 3일 전에 선서문을 써서 백범에게 제출했다.

그는 다음 날 안공근의 집에 가서 선서문을 가슴에 붙이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다음에는 백범과도 한 장을 더 찍었다. 이어서 윤봉길은 약력과 유서를 썼다. 유서에는 고국의 청년들과 두 아들과 백범에게 주는 유시가 기록되었다.

백범은 윤봉길을 여관으로 보내고 폭탄 두 개를 찾아 김해산의 집으로 갔다.

“내일 윤봉길 동지가 중대 사명을 띠고 만주로 떠나게 되어 대접하려 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주시오.”

다음 날 백범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6시에 김해산의 집으로 가 윤봉길과 최후의 조찬을 했다. 백범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봉길의 기색을 살펴보니 차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마치 농부가 밭 갈러 가기 전 아침을 먹는 모습과 같았다. 백범은 성공을 확신했다.

옆에 있던 김해산이 백범에게 한마디 했다.

“지금 상해에서 민족 체면을 위해 할 일이 많은데 윤 동지와 같은 인재를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내는 이유가 뭡니까?”
“윤 동지가 어디에서 터지는지 두고 봅시다.”

시계가 일곱 시를 알렸다. 윤봉길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것은 시가 6원의 새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일원짜리도 안 돼 보이는 고물이군요. 제 시계는 이제 한 시간 후면 터질 것이니 바꿔 차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범은 윤봉길의 최후 선물을 뜨거운 가슴으로 받았다.

윤봉길은 대절해 놓은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는 이번에는 돈을 차창문 너머로 내밀었다.
“차비 주고도 5, 6원은 족히 남습니다.”
자동차가 움직였다. 백범은 젊은이에게 고개를 숙여 절했다.

‘지하에서 만납시다.’ 8.15 후 백범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유해를 효창묘지에 안장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 묻힘으로써 지하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켰다.

윤봉길 거사에 왜 안창호만 체포됐을까(4)

윤봉길의 거사는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고 연일 후속 기사가 이어졌다. 중국의 <신보>는 윤봉길의 거사 상황을 톱기사로 자세히 보도했다.

- 당시 무대 아래에는 도처에 일본 헌병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한 소년이 성냥을 그어 불빛이 번쩍이더니 한 가닥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이어 폭발 소리가 났다. 일본 헌병은 즉시 소년을 등 뒤에서 잡아 두 팔과 허리를 끌어안았다. 주변의 일본인들이 가세하여 소년을 마구 구타했다. 금세 소년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지금은 헌병 1대에서 그를 압송하여 심문하고 있다. 범인은 한국인임이 밝혀졌는데 그는 25살의 청년으로서 프랑스 조계에 있는 어느 염색회사의 직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년 8월에 청도에서 상해로 왔고 한국독립당의 당원이며 모든 혐의 사실을 인정했다. 일본 헌병대는 공모자가 최소 3, 4명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상 중국 <신보> 기사

중국인들은 상해 임정에 몰려와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임정 사람들은 당장 상해를 떠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동안 프랑스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정치 망명자로 인정해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프랑스는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는지 임정에 빨리 상해를 탈출하라고 통고했다. 일본군이 백범을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하고 프랑스 조계에 들어가 임정 관련자를 모두 체포하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일본군은 백범을 잡으려다 안 되니까 이제는 잡으려 하지 말고 보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백범은 모든 사람에게 신속히 연락해 대피하도록 조치했다. 내무부와 애국단원들의 활약으로 대부분 탈출에 성공했지만 도산 안창호만 체포되었다. 그는 평소 백범의 테러 투쟁에 반대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규 무장항쟁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주로 교육과 강연 등의 계몽이었다. 그래서 백범에게 피하라는 연락을 간접적으로 받는 도산은 켕길 게 없다고 생각했던지 피하지 않고 있다가 ‘꿩 대신 닭’ 격으로 체포된 것이다.

백범은 도산의 안전을 위해 이봉창과 윤봉길의 두 거사는 자신과 애국단이 전 과정을 주도했다는 성명을 각 언론기관에 보냈다. 이 일로 백범은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에게까지도 일약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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