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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47
중국 동북지역은 어떤 땅인가
김갑수 | 2018-01-19 13:07:4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2,000년 전의 논쟁과 토론에서 배운다

《염철론, 鹽鐵論》에서 염과 철은 말 그대로 소금과 철이다. 중국 한나라 무제(武帝) 다음의 소제(昭帝) 시대(기원 전 73~49)에 이른바 ‘국가경영전략회의’가 소집되었다. 전대의 무제는 중앙 집권 통치를 구현하면서 민간이 주관해오던 염철의 경영 권한과 화폐의 주조 권한, 술의 전매 권한 등을 국가로 귀속시켰는데, 이 사안들에 대한 당위성을 홍보하기도 할 겸 보다 더 나은 시행 방책을 논의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소집된 학술토론회였다. 간단히 ‘염철회의’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정부 측 의도와는 달리 만만치 않는 반론이 터져 나왔다. 염철의 국가 귀속 자체가 잘못이라는 의견들이 직설적으로 개진되면서 논쟁이 심각한 수준으로 고조된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토론회에 정부 측과 민간 측 학자를 대등한 숫자로 참석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부 측 인사인 승상과 어사대부 등은 염철 관영을 기정하고 현안 해결책에 초점을 맞추어 논쟁을 이끌어가려 했지만 민간 측에서는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를 논제로 부각시키며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당시 정부 측은 법가적 입장이었던 데 반해 민간 측은 유가적 입장이었다. 논쟁은 팽팽한 긴장으로 치달으면서 국가의 통치철학으로까지 논점이 확장되어 과연 회의를 소집한 측이 정부인지 민간인지를 모를 정도로 전개되었다.

5일 넘게 진행된 이 회의에서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염철 관영을 해야 하는가/ 국가 부강을 위해 무역은 얼마나 중요한가/ 상업이 중요한가, 농업이 중요한가/ 국가는 빈부격차를 어느 선까지 조절해야 하는가/ 화폐 제조를 국가가 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오랑캐 정벌은 국가에 이로운가 등이 토론되었다.

뿐만 아니라 법가와 유가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로도 이어져, 진나라 상앙은 이로운 인물인가 해로운 인물인가/ 상앙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의 능력에 대한 질투 때문인가 아닌가/ 자객 형가의 행동은 의로웠는가/ 유생은 국가 경영에 도움이 되는가/ 공자는 긍정적 인물인가 부정적 인물인가/ 공자의 인생은 실패한 것 아닌가/ 옛것을 따르자는 것은 공허한 담론인가 등으로 확대되었다.

나아가, 어진 선비가 등용되지 못함은 누구의 잘못인가/ 관리가 겸손해야 국가가 잘 다스려지는가/ 자연재해는 천재인가 인재인가/ 진나라가 6국을 멸하고도 멸망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흉노는 정벌의 대상인가 화친의 대상인가/ 형벌은 엄해야 하는가 느슨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서도 격렬한 토론이 펼쳐졌다.

염철 관영을 폐지해야 한다는 유가 입장에서는 ‘국가가 백성과 이익을 다퉈서는 안 되며 백성을 다스리려면 먼저 도덕으로 이끌어야지 재산으로 유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부 측에서는 흉노가 흉포하고 방자하여 무력을 일삼는데 한나라가 군비를 비축하려면 염철 관영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맞선다.

화폐는 국가가 주조해야 하는가, 백성에게 맡겨야 하는가의 문제는 한나라 개국 초기부터 있었던 논쟁거리였다. 정부 측은 개인이 돈을 주조하는 것이 국가에 위험하다는 입장이고 유가 측에서는 화폐의 사용 자체를 반대하면서 물물교환이 더 바람직하다는 옛날 논리로 반박했다.

진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재상 상앙에 대한 유가 측의 질책은 매섭다. 그들은 상앙이 염철을 관영하고 백성을 힘들게 했으며 다른 나라의 제후들에게 원한을 사 결국 진나라를 멸망하게 했다고 비판한다. 또한 상앙의 난폭함과 권모술수 그리고 옛 사귐을 어지럽히거나 사람을 무시한 태도들을 신랄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법가 측에서는 “맹인은 흰색과 검정색을 말로 할 수는 있지만 눈으로 판별할 수는 없다. 유생들은 입으로는 혼란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지만 실행하지는 못한다.”고 하면서 “아, 당신들 유생들은 비천하고 무능하며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 마치 담장에 구멍을 파거나 담을 넘는 도적 같아서 옛날부터 사람들이 걱정하던 바였다. 이것은 공자가 노나라 군주에게 쫓겨나 세상에서 쓰이지 않은 이유이다.”라고 더욱 신랄하게 대응한다.

유가는 조정이 오랑캐를 정복하는 것은 단지 국토 확장의 야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민생의 문제를 더 중시한 반면 법가는 무제가 오랑캐를 정벌한 것은 도적을 없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변방을 굳건히 하여 국내 안정을 취하기 위한 것이므로 여기에 전혀 힘을 보태지 않은 유가는 변경 정책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법가는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까지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인 반면 유가는 부보다는 인덕이 존경 받는 근본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법가는 “서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용모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듯이 요임금과 순임금의 덕행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국가를 다스리는 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한 반면, 유가는 시간과 무관하게 인간이 고수해야 할 도덕은 상존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토사구팽’에 대해서도 법가와 유가의 관점은 다르다. 법가에서는 충성을 다하여 공을 세운 신하를 나중에 처벌하는 것은 군주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보는 반면 유가에서는 그들이 군주에 충성하고 공을 세우는 것은 자신의 부귀를 위한 것이고 거기에 인을 해치는 행위가 있었으므로 토사구팽은 자업자득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민족의 사신에 대해서도 두 편의 견해는 갈린다. 법가는 멀리서 빈객이 오면 진귀한 보물과 물품으로 후대하면서 위세를 과시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유가는 인의로써 예절을 다해 중원의 문화적 힘을 보여 주어 감화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신적 우위를 보여야 차후에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가 입장의 정부 측은 전반에서 예의와 법치를 중심으로 논변을 전개하고 후반부에서는 유가학파의 시조인 공자의 완고함, 탐욕성과 어리석음, 뻔뻔함을 폭로하면서, 모든 원칙은 시대가 다르면 적용하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유가는 시대가 달라도 백성의 성품은 차이가 없으며, 국가가 잘 다스려지냐 아니냐의 문제는 백성 본성의 선악에 있는 게 아니라 군주의 정책 결정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유가는 “공자야말로 대대로 군주를 일깨우는 힘이 있고 그 자신은 고통을 마다하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법가는 “옛날 책을 끼고 읊조리며 죽은 사람의 말을 외우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당신들을 이길 수 없다”라고 비꼬았다.

법가와 유가의 대립은 오늘날의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정치는 법가와 유가가 똑 부러지게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상호의 관점이 얼크러져서 대립하는 면도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염철 관영을 주장하는 법가는 오늘날로 치면 사회주의와 가깝고 염철 민간 경영을 주장하는 유가는 자유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 평등 문제에서는 법가가 자유주의적이고 유가가 사회주의와 가깝다. 또한 논리를 전개할 때 법가는 당대 시점임을 전제하고 결론을 내는 연역의 방식인 반면 유가는 역사상의 예에서 근거를 대는 귀납의 방식을 취한다. 양측의 차이를 가장 단순하게 정의하면 법가는 현실적이고 유가는 이상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학술토론회에는 양측 각각 60명의 논객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논쟁과 비판의 대상에 전 황제 무제를 비롯하여 공자와 맹자, 요순임금, 우왕과 탕왕,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 진나라의 상앙과 진시황 등 막강한(?) 인물들을 거침없이 포함시켜 토론했다. 그리고 이것은 2,000년 전의 일이었다.


중국 동북지역은 어떤 땅인가 (1)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 현대사》(장세윤 저)는 이제껏 내가 읽은 독립 항쟁사 책 중 가장 종합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저작이다. 이전 저서와 이 책의 문체로 보아 민족주의자로 읽히는 저자지만 논의의 재료 선정 및 독립항쟁 집단과 인물들의 공과 평가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공정성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05년이고 집필은 그 이전에 됐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최근성은 약간 떨어진다는 흠이 있지만 당대 시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가볍게 용해될 수 있는 사항들이다.

우리가 흔히 만주라고 불렀던 지역의 정식 명칭은 ‘동북’이다. 이것은 중국 중원을 기준으로 붙인 방위(方位) 개념의 명칭이다. 이곳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의 영역이었고 거란, 몽골, 여진족의 무대이기도 했다. 여러 민족의 흥망성세가 잦았던 곳이라고 해서 ‘용흥지지(龍興之地)’로 불리기도 한다.

이 지역은 근세에 들어 중국과 러시아, 조선, 일본, 미국 등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분쟁과 각축의 현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과 러시아의 영역으로 기정되었으며 동북아의 중추 지역으로 부상했다. 특히 중국은 이곳을 미래 번영을 좌우할 요충지로 인식하고 있다.

이 지역은 17세기 병자호란을 일으킨 여진족의 청(淸)이 발기한 곳이고 19세기 한민족이 대거 이주해 가서 살았던 곳이다. 1,300km 조중 국경선 바로 너머의 이곳에서는 일체 침공기 가장 많은 독립 항쟁가들이 피를 흘렸다. “산마다 진달래요, 골마다 열사비”라는 연변 시인의 노래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또한 이곳은 중국 국공내전의 초전 승부를 결정지은 대회전의 현장이기도 했다.

당연히 동북지역은 우리 현대사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조선을 50년 동안 영도했던 김일성 주석이 이곳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고, 이 항일투쟁은 오늘까지 조선 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핵심 요체가 되고 있다.

한국의 박정희, 최규하 전 대통령이 이곳과 깊은 연고가 있다. 우리가 알듯이 박정희는 일제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의 수도 신경(장춘)에 있던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이 지역에서 복무했다. 최규하 역시 만주국 관리였으며 전두환은 길림성 반석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을 비롯해서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강영훈 등 만주군 인맥이 박정희 독재 권력을 떠받쳐 주었다. 6.25 전쟁 때에는 이곳 출신으로 구성된 동북민주연군 병사들이 대거 인민군의 주력으로 참전했다. 이곳은 현재 2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의 자치구(연변)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민족주의와 국사를 하찮게 보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들은 민족이란 것이 마치 ‘상상의 공동체’라고 여기는 것을 세련되고 국제적인 안목인 줄 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서구 중심의 모양주의(慕洋主義)적 발상일 따름이다. 민족의 실체가 애매한 것은 구미의 사례일 뿐이지, 장구한 세월 동안 중국, 조선, 베트남, 일본 등의 아시아 각국은 ‘민족’의 경계 개념을 뚜렷하게 견지해 왔다.

이곳은 따로 ‘간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행 중국 행정구역으로 이곳에는 3개의 성이 있어서 동북삼성으로 불린다. 먼저 압록강 이북은 랴오닝성인데 서간도 또는 남만주가 된다. 다음으로 지린성은 백두산과 두만강 이북인데 동간도 또는 동만주와 겹친다. 그리고 헤이룽장성은 송화강 너머인데 북간도 또는 북만주와 겹친다.

최근 중국 동북공정으로 인해 간도 땅에 집착하는 한국인이 늘어나고 있다. 개중에는 간도가 아예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발상은 우파 반북주의자들에게 더 많이 나타난다. 간도를 우리 영토라고 집착하는 것은 생각이 짧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물론 조선족도 이런 주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동북은 엄연히 중국 영토이며 조선족은 엄연히 중국인이다. 이보다는 삼팔선으로 붙어 있는 북녘 땅과 동포를 같은 나라 같은 동포로 인식하는 일이 절실하다.


동북의 항일열사들과 조선인민혁명군 (2)

이홍광이 있다. 1910년 경기도 용인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31년 남만주에서 최초로 항일무장투쟁 대오인 적위대를 조직한 인물이다. 그는 탁월한 무장투쟁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농민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1935년 2월 13일 새벽 이홍광은 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항일무장세력 최초의 국내진공작전이었다.

마오쩌둥은 1938년에 말하기를, “이홍광은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자 혁명군 수령이었으며 공산당원이었다. 견결히 항일하고 간고 분투한 그의 업적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바이다.”라고 했다.

1946년 중국의 <해방일보>는, “동북항일연군의 참모장이며 제1군 제1사장이었던 이홍광 동지는 항일연합군 중에서 제일 높은 수령의 한 사람이었다.”라고 칭송했다. 이홍광 열사는 1935년 5월 화자구 흑할자 인근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비슷한 이름으로 이동광이 있다. 1904년 함북 경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1936년 동남만성위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군중사업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남만에서 농민들에게 가장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조국광복회 남만 대표로 맹렬히 활동하던 그는 1937년 황토강자 돌파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이름이 비슷한 이홍광과 함께 남만항일투쟁사에 혁혁히 기록될 선열이다.

북만의 허형식이 있었다. 1909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그는 하얼빈 노동절 시위로 투옥되었다가 만주사변 이후 출옥했다. 1930년 초반부터 반일유격대에 가담한 그는 항일 제3로군 총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유수하자 전투, 라라돈 전투, 오도강 전투 등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자기희생 정신을 보여 주었다.

일본군의 대토벌로 소부대 유격전으로 전환한 뒤에도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다가 1942년 8월 33세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했다. 그의 최후 항전은 이후 소련 령에 들어간 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항쟁부대로 인정받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여성 리추악이 있다. 그녀의 본명은 김금주, 1901년 평안남도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7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한편으로 공부, 다른 한편으로 노동하며 자랐다. 그녀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그녀는 국내 독립운동의 와중에도 엄청난 독서를 했다. 3.1항쟁 이후 지명수배되어 중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양림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항일연설을 감행, 중조인민이 연합하여 항일무장대를 조직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격하자고 호소했다.

1932년 가을 리추악은 중공 주하중심현위에 파견되었다. 그녀는 현위 위원, 부녀부장, 철북구위 서기 등 직무를 맡았다. 그녀는 이미 반일유격구의 저명한 항일 여성영웅이 되어 있었다. 1936년 8월 27일 그녀는 적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시종 굴복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1936년 9월 3일 통하현성 서문 밖에서 그녀를 총살하였다. 그때 열사의 나이 35세였다.

동만 제2군 유격대 여대장 김확실도 있었다. 제6사 불사조 재봉대장 최희숙이 있었다. 제4사 기관총 여반장 허성숙의 최후는 숭고했다. 그녀는 간삼봉 전투에 참전 무공을 세웠다. 이후 체포되어 죽음의 순간에 허성숙은 외쳤다. “나는 조선민족의 딸입니다.” 순간 총성이 울렸고 열사의 나이 24세였다.

“참혹한 형벌은 혁명전사의 근육과 뼈를 깎을 수는 있었지만 여성 영웅의 확고한 의지를 굴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적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자 허성숙 동지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허성숙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전우들과 함께 민족의 해방을 전취하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이었다.”(만주항일열사사전)

이름만 나열하기에도 지면이 부족한 항일열사들, 여기에다 무명의 열사들까지 합쳐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수없이 그리고 영롱히 빛나야 할 선열들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고작 이화학당 출신 유관순 열사의 이름을 놓고 티격태격이나 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에게 선열들의 함자를 온전히 부를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조선인민혁명군’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은 크게 보아 세 갈래였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신규식, 김구로 대표되는 ‘상해-중경’의 임시정부 세력, 둘째는 이회영, 김원봉, 김산, 김두봉, 무정 등의 중국 중북부 세력 그리고 세 번째는 동북만주의 유격대 세력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조중 국경인 두·록 양강과 백두산에 가까운 세력일수록 항쟁이 정규적이었고 치열했다는 점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위의 것 중 세 번째 동북만주 유격대 세력과 관련되는 명칭이다. 우선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하면 조선인만으로 편제된 독립적인 군대인 것으로 들린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독립된 군대는 없었다. 다만 1930년대 동북만주에는 ‘동북인민혁명군’과 이것이 재편된‘동북항일연군’이라는 부대는 있었다.

1930년대 초반까지 동만주 항일운동은 그 규모와 영향력에서 모두 전 동북의 제1위를 차지할 정도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33년 9월 동만주의 중공당원 965명중 한인은 97.9%, 공청단원 890명 중 한인은 98.5%를 차지했으며 동만은 전 동북에서 ‘제일 큰 유격구’로 되었다. 1935년 2월경 제2군에서 한인은 대략 90%를 차지했다.(연변대학 김성호 논문 참조)

사실 ‘조선인민혁명군’은 8·15 이후 이북 사학계에서 처음 제기한 명칭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34년 3월 중국 공산당의 영도아래 동만주 지방에서 한민족 항일혁명가들을 기본역량으로 조직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과 그 후에 개편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을 가리키는데, 보다 직접적으로는 그 산하의 '김일성 부대'를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김명호 교수는 <한겨레>에서 김일성 부대가 중국에서는 동북항일연군에 속했지만 국내 침공 시에는 ‘조선인민혁명군’ 명칭을 썼다고 했는데, 문맥의 뉘앙스는 이북의 것과 약간 차이는 있지만 전적으로 틀린 진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북 사학계의 ‘조선인민혁명군설’은 나름대로의 논리성을 가졌다고 본다. 이것은 당시 한민족 항일혁명가들 스스로는 물론, 동북 각 민족 인민들도 제2군을 ‘조선유격대’, ‘조선혁명군’ 등으로 불렀다는 사실, 조선인부대는 중국 관내에 있는 한민족 반일혁명단체들의 충분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조선인부대는 일제와 중국, 소련 등의 객관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들로 근거가 마련된다.

1935년 상해에서 출판된 『동방잡지』에서 동만주는 ‘조선혁명당원들이 활동하는 대본영’이라고 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이‘3,000명’에까지 달한다고 지적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중공당 최선의 항일투쟁 간부 주보중은, “항일연군 제2군은 ‘항일연군’임과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기도 했다...항일유격전쟁 중에서 중조인민은 공동의 사업을 위하여 붉은 피를 같이 흘렸다”고 회고해 놓고 있다.

그리고 1963년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는 동북항일연군은 ‘실제상에서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연합군이라고 인정해야 한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1972년 4월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는 김일성 주석에게 특별히 전보를 보내 ‘조선인민혁명군성립 40주년 기념일을 축하’해 주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는 이태의 『남부군』이나 이병주의 『지리산』 그리고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에서 선보인 남부빨치산의 역사를 편중되게 우대해 왔다. 물론 남부빨치산의 투쟁은 분단을 막기 위한 숭고한 역사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남부빨치산은 인민공화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박헌영, 이승엽 등의 좌경모험주의에 이용당한 측면이 강하다.

조선인민혁명군과 결부시킬 수 있는 진정한 항일무장투쟁가는 비단 김일성에 한한 것은 아니었다. 최용건, 김책, 최현, 강건... 등 김일성에 버금가는 무장항쟁가는 우리의 추정 이상으로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의 이름 석 자조차 낯설 정도다. 이들을 은폐하려다 보니 박헌영, 이현상 등의 남로당 인사 이름이 부각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김일성 가짜설’은 치졸하기 짝이 없는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북에서도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신화화’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북의 신화화는 조작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속된 말로 ‘뻥튀기’ 수준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남의 무장항쟁 ‘반신화화’에는 조작과 은폐와 왜곡이 수두룩하다.


민생단 사건과 동북항일연군 (3)

- 잊힌 이름, 주진과 허형식

중국 홍군이 국민당군의 전면적인 공세에 시달리던 1930년 여름, 장시 소비에트 지역에 국민당의 특무조직인 AB단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첩자들을 숙청해야 한다”며 색출에 나섰다. 장시 전역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폭력이 횡행했다. 이로 인해 지주와 부농 1000여 명, 소비에트 공작 인원의 4분의 1이 AB단으로 몰려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원인도 모른 채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민생단 사건은 시간과 장소가 2년 후와 동북으로 옮겨갔을 뿐 AB단과 거의 똑같은 사태가 재현된 것이다. 1932년 2월 동북의 조선인 밀집 지역인 연길, 왕청, 훈춘, 화룡 일대에는 20여 개의 항일유격 근거지가 있었다. 2만이 넘는 군민 중 1,200명이 공산당원이었고 1300여 명이 공청당원이었다. 일제는 토벌전에 나섰다. 동시에 경찰기구를 확충하고 무장자위단을 만들어 연변 지구의 식민통치를 강화했다. 항일유격 근거지 주위에 집단부락을 만들어 근거지를 봉쇄해버렸다.

때를 타서 약삭빠른 조선의 친일 정객 몇 명이 일본 이민당국을 설득해 동만 지역의 항일무장세력에 대항할 민생단을 결성했다. 민족자치라는 위장된 기치를 세우고 조·중 민족의 단결을 파괴하면서 중·조 항일세력의 연합을 분열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중공 동만특위는 민생단 출현에 긴장했지만 두 민족의 단결과 투쟁을 호소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강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생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은 1932년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우고 새롭게 만든 통치이념인 ‘5족협화(五族協和: 만주국을 구성한 만주족·한족·몽고족·일본인·조선인의 민족적 화합)’에 장애가 된다며 민생단을 6개월 만에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민생단은 해산됐지만, 중공 동만특위 수뇌부들의 머릿속에는 민생단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얼마 후 중공 연길현 비서 송00이 일본 헌병대에 잡혀갔다. 일주일 뒤 석방되자 현 위원회에서 심사가 벌어졌다. 일단 잡혀간 사람이 별 탈 없이 풀려나면 의심을 받기 마련이었다. 신문을 하자 송00은 자기가 일본 헌병대의 밀정이라고 실토했다.

송00은 고문을 가하자 자신이 민생단이라고 자백하며 20여명의 이름을 댔다. 즉각 20여 명을 끌어다가 신문했다. 민생단원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동만특위 간행물에 “민생단 주구들이 우리 당과 청년단에 침투했다. 적색구역과 백색구역, 적색 유격대 할 것 없이 민생단원 투성이다. 토비와 농민들 중에도 민생단원이 있다.”라는 근거 불명의 선동적인 글이 실렸다.

이로부터 3년간 반민생단 투쟁의 광풍이 동만 지역에 창궐했다. 살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잡혀가서 민생단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도 많았다. 집회에서 기침 한번 했다가 민생단원에게 암호 보낸다고 총살당하는가 하면 어제의 사형집행자가 오늘은 민생단원으로 둔갑해 형장으로 끌려가는 일도 벌어졌다.(이상 김명호 글 <동만주 뒤흔든 민생단 사건> 참조)

193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소련 코민테른을 등에 업고 전횡한 이립삼과 왕밍의 지휘를 받게 되면서 급격히 좌경교조주의로 치달았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예컨대 동만 지역에서도 ‘조선인 자치’나 ‘조선 소비에트’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민중자치정권인 소비에트 정권과 홍군 강화에 치중했다. 이른바 국제주의 노선을 선택한 것인데 실상은 소련을 추종하는 사대교조 노선이었다.

이 때문에 항일투쟁이 고양되던 시점에 오히려 항일부대를 적대하고 지주와 자본가를 타도하여 재산을 몰수하는 소위 ‘계급투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결과 많은 적을 만들어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어려운 상황을 자초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이런 착오를 바로잡기로 했다. 그래서 ‘좌경오류를 시정하고 반일 역량을 집결시켜 반일반제투쟁을 전개할 것’과 ‘인민정부 및 인민혁명군’의 건립을 당면 과제로 설정했다.

이런 방침에도 불구하여 ‘좌경의 오류’는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이 ‘반민생단 투쟁’이었다. 이 반민생단 투쟁으로 인해 1932년 여름 ~ 1935년 겨울까지 무고한 조선인 독립운동가 431명이 밀정 혐의를 받고 희생되는 참변이 벌어진 것이다. 민생단 참변은 1921년 연해주 자유시 참변과 함께 사대 교조적인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저지른 최악의 과오였다.

이 광란의 내부 참변이 수습된 것은 1935년이었다. 중국인 혁명가 위증민은 연길에 가서 회의를 소집했다. 참가자 26명 중 반 이상이 조선족이었다. 동북 인민혁명군 산하부대 정치위원 회의도 열었다. 여기에는 조선인 김일성 등 11명이 참석했다. 그들은 임의 체포, 구금, 살인을 전면 불허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기록에는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은 민생단 사건을 종료시켰다. 그는 마안산(馬鞍山)에 감금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던 민생단 혐의자 100여 명을 석방해서 항일연군에 편입시키고, 그들에게 누명을 씌운 민생단 자료를 불살라 버렸다. 여기에 위증민도 흔쾌히 동의했다. 훗날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 등에서 “평생 제일 잘한 일이 둘 있는데, 육문중학 들어간 것과 민생단 자료 불살라 버린 것”이라고 회고했다.

사실 악몽 같은 민생단 사건이 수습될 수 있었던 데에는 중국 중앙의 지도 노선이 마오쩌둥 노선으로 일변한 배경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알듯이 마오는 대장정 중인 1935년 1월 준이회의에서 좌경교조주의들의 실책을 공격하면서 홍군의 지휘권을 되찾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은 ‘동북인민혁명군’이다. 동북인민혁명군 창건 당시 제1군 독립사는 300여 명 정도 규모였는데 사장 겸 정치위원은 중국인 한족 양정우였다. 반면 참모장 이홍광, 소년 영장 박호, 3단 단장 한호 등 주요 간부에 조선인이 많았다.

1934년 동만에서 조선인 주진(朱鎭, 1905~1945)을 사장으로 건립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안도현과 왕청현 일대에서 무려 900회의 전투를 치르며 유격 근거지들을 구축해 나갔다. 2군 독립사는 1,200명의 병력 중 800명이 조선인이었다. 안타깝게도 2군 독립사의 혁혁한 투쟁과 성과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혁혁한 항일투쟁 성과가 조선인들의 항쟁력을 인정받도록 했고, 이후 동북항일연군 결성의 추동력이 되었다.

1935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당 동북 조직은 1936년 1월 동북의 항일부대를 모두 규합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했다. 동북항일연군은 1군부터 11군까지 조직되었다.

이 가운데 1군과 2군은 조선인이 다수였다. 특히 2군에서 김일성이 이끈 제3사의 병력은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토벌이 강화되자 동북항일연군 1군과 2군은 1936년 7월 통합되어 중국인 양정우를 총사령으로 하는 제1로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제2군 1,2,3사는 4,5,6사로 변경 편성되었는데 이 중 조선인이 다수였던 제6사(사장 김일성)와 제4사는 백두산 일대로 진격하여 유격구를 건설했다. 이들로 인해 장백현의 백두산 일대는 1940년까지 동북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유명한 보천보 전투가 돌출했던 것이다.

한편 동북항일연군 제2, 제3 방면군은 함경북도 무산 진입 전투(39년), 안도현 대사하(大沙河) 전투(39년, 일본군 100명 사살) 화룡현 홍기하(紅旗下) 전투(40년 3월, 악명 높은 마에다 부대 120명 궤멸) 등의 빛나는 전적을 올렸다. 그러나 일제의 토벌은 가중되었고 1940년 2월 지도자 양정우마저 처참하게 전사(위에서 얇은 풀뿌리 하나가 나왔다)하면서 동북항일연군은 현저히 위축되어 소멸의 위기에 봉착했다.

잔존 항일연군은 더 이상 조직적인 군사 활동이 어려워지자 1940년 겨울부터 소련 령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1942년 7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편제되었다. 이 교도려는 소련군 산하 국제공산군 제88여단이라고도 했는데 이 무렵 전체 대원은 600명, 이중 150여 명이 조선인이었다. 소련으로 철수한 조선인들은 간헐적으로 국경을 넘어가 잔존 동지를 찾아 수색하면서 철도와 도로 등을 파괴하여 일본군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욱 영용한 항쟁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련으로 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동북에서 사생결단의 투쟁을 이어갔는데 그들이 바로 허형식, 김책, 박길송 등이었다. 이 중 김책은 얼마 후 소련으로 갔지만 허형식은 부상으로 이동하지 못하는 부하들을 돌보며 끝까지 남아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과 성과는 훗날 소련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지금까지 확인했듯이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인과 조선인의 연합부대였다. 동북항일연군 최고위 지도자 주보중은 훗날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항일연군 제2군은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항일유격전쟁 중 중·조 인민은 공동사업을 위하여 선혈로 맺어져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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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민폐  2018년1월21일 00시17분    
사기꾼들에 미쳐날뛰는 이해할수없는 이땅 개,돼지 새끼들

자한당,국당,바당 종자들 2012.1월 26일자 명박이때 평창올림픽 그것도 일반법에 우선하는
특별법으로 제정
동법 85조 1항에 따르면 남북화해 평화증진위해 남북단일팀구성 위해 북과협의
2항 국가,지방자치단체 남북 합의가 이루어진경우 행정,재정 할수있다고 명문화
근디
지금은 자한당은
ioc에 버젖이 북의과도한 평창참가로 도데체 북 주최올림픽인지 헷갈리니
북측 참가인원 제한해달라 공문발송햇다 백주대낮에 버젖이 광고를해되는
이 쌩양아치 사기꾼들의 나라 메국노들

언론 이라기 보다는 저 자한당,국당,바당 수구꼴통들의 홍보지 쓰레기 좃선 중동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지들 이해상관에따라 움직이는 홍위병들

그리고
커피한잔 이해상관 있어서 미쳐날뛰는것 자본주의사회이니 쬐끔 이해라도 되겟지만
그러하지 못하고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 못하고
미쳐널뛰는
이땅 꼭두각시들

어이할꼬나
(93)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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