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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39
경연, 서릿발처럼 왕을 몰아치다
김갑수 | 2018-01-02 12:07:0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경연, 서릿발처럼 왕을 몰아치다 (1)

경연(經筵)이란 말은 ‘경전을 공부하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총리, 장관, 비서관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연에서는 공부 외에도 국가 중대사에 대한 토론과 논의가 함께 이루어졌다. 경연은 하루 1~3회 실시되었다.

경연이 활성화된 시기는 치세였고 이것이 파행된 시기는 난세였다. 더불어 훌륭한 왕은 경연에 적극적이었고 부족한 왕은 경연에 소극적이었다. 이를 테면 세종, 성종, 영조, 정조 등은 경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세조, 연산, 광해 등은 경연을 백안시했다.

이것은 경연이 단순한 학술모임이나 정책회의가 아니라 헌법적 위상을 가지는 국가 체제의 제도(시스템)였음을 방증한다. 세종의 집현전, 성종 대의 홍문관, 정조 대의 규장각 등이 경연을 관장했다. 한편 왕세자에게는 따로 서연(書筵)을 실시하여 미리 왕업 수업을 받도록 했다.

중앙당교가 활성화되어 있는 중국과 달리 한국에는 현직 정치 지도자를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없다. 나는 경연이야말로 서구식 데모크라시를 무분별하게 수용한 나머지 중우정치로 치닫고 있는 한국에서 반드시 부활해야 할 제도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경연에 대한 책 두 권이 최근에 발간되었다. 하나는 쉽고 얇은 책 《경연, 평화로운 나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진지하고 두꺼운 책 《율곡의 경연일기》이다.

한국은 정치인들이 무식하다 보니 언론과 대중에 정치인에 대한 냉소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세련된 현대적 태도인 양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인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한국 언론이나 대중의 수준도 결코 높아 보이지가 않는다. 비판정신은 좋은 것이지만 무지가 파생시키는 냉소주의는 불쾌감을 안길 따름이다.

1575년 선조 8년 사헌부 집의(執義, 종3품) 신점이 말했다. “북방이 텅 비어 오랑캐 기병이 쳐들어온다면 막아낼 계책이 없으니 미리 장수를 선택하여 기르십시오.” 이에 선조가, “오랑캐 기병이 오거든 조정에 큰소리치는 사람이 많으니 그 사람을 시켜 막을 것이다.”라고 대꾸했다.

사실 이것은 군주로서 용렬한 반응이었다. 기득권 세력이 아직 남아 있고 신진 사류가 뚜렷한 전망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대안 없이 주장만 하는 신하들에 대한 반감이 섞인 말실수였다. 이를 잠자코 보고 있던 율곡이 입을 열었다.

“주상께서 방금 말씀하신 ‘큰소리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지목하신 겁니까? 큰소리만 치고 실속이 없는 자를 지목하시는 겁니까? 그런 사람을 쓰면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인데, 어찌 그 사람을 시켜 적을 막게 한다는 말씀입니까? 또 만일 옛것을 좋아하고 성인을 배우려는 사람을 큰소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면 주상의 말씀이 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맹자가 양 혜왕과 제 선왕을 만나서도 오히려 요순 임금을 목표로 삼으라고 했는데, 그것도 큰소리를 친 것입니까?”

율곡은 선조의 발언을 표면과 이면 양면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표면상으로 보아 큰소리만 치는 사람을 장수로 삼겠다는 것은 군주로서 정책의 포기나 다름없다는 것, 이면으로는 바람직한 이상을 추구하는 것과 큰소리치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파고드는 논리에는 반론을 펴기가 어렵다. 선조는 아무 답변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율곡은 멈추지 않고 자기가 우려하는 바를 더한다.

“임금이 말이 한 번 나오면 천리 밖에까지 전파되어 옳지 못한 일이라면 왕명을 거역하게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학자를 큰소리나 치는 사람으로 지목하여 북쪽 변방으로 보내겠다고 하시면 훌륭한 학자는 기운이 꺾이고 못난 사람이 자기에게 관직이 돌아올까 기대하여 갓을 털면서 좋아할 것입니다. 임금의 발언이 선한 사람을 좌절시키고 악한 사람을 기쁘게 해 준다면 어찌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만 하면 서릿발 같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이토록 명석한 논리와 실제적 판단력은 조선 최고학자 겸 정치가인 율곡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깨우칠 수 있다.

먼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조선 조정의 풍토이다. 이것은 대통령이 ‘뭐라고 뭐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받아 적기만 하는 대한민국 청와대의 모습과 비교된다. 사실 대통령의 말 중에 그럴듯한 내용이나 제대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똑같이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이 받아 적기만 한다.

하나 더 말하면, 면전에서 그것도 신하들이 배석한 자리에서 행해진 강성 비판을 제어하지 않고 침묵으로나마 인정하는 왕의 태도가 엿보인다. 결국 시간이 조금 지나자 선조는 율곡의 이 충언에 동의를 표했다. 우리가 조선 시대 역사에서 배울 것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많다.


율곡은 조광조 ‧ 이황 ‧ 기대승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2)

율곡의 《경연일기》는 율곡이 30세 때인 1565년(명종 20)부터 세상을 뜨기 3년 전인 1581년(선조 14)까지 17년간의 기록이다. 이 시기는 사류(士類)가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했으며 동서 분당이 시작된 때로서 향후 조선 정치의 향방에 대한 모색이 혼란스럽게 이루어졌다. 대동법과 군역 개혁의 논의도 이때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역사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긴요한 인물들이 출몰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율곡만큼 탄탄한 실력과 논리를 갖춘 학자는 없어 보인다. 그는 사람을 평가하는 데 일말의 타협이나 지나침이 없다. 이런 인물 평가의 원칙은 그 대상이 중국 황제라고 해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1569년 경연에서 율곡이 저술한 《동호문답》을 읽어 본 선조가 이 책에서 해 놓은 한문제(漢文帝)에 대한 평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동호문답에서 어찌 한문제가 자기(自棄, 자신을 버림)하였다고 하였는가? 그 논의가 지나친 듯하다.”

“신이 그를 자기하였다고 평가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선유(先儒, 옛 훌륭한 유학자)의 말에 1등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2등을 자처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文帝)는 바탕이 좋은 임금으로 한나라가 한창 융성한 때를 맞아 옛 도(왕도)를 회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높지 못하여 패도(覇道)를 혼용하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율곡은 신하가 임금에게 거스르는 일은 있어도 숨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중국 황제에 대해서도 냉철한 평가를 서슴지 않았던 율곡은 당대의 인물들(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율곡과 경쟁적인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내렸을지 궁금하다. 이를 테면 조광조, 이황, 기대승 등이다.

[조광조에 대한 율곡의 평가]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 도를 행하고자 하였는데, 도를 행하고자 하는 요체는 임금을 바르게 하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애석하도다. 조광조는 현철한 자질과 경세제민의 재주를 가졌지만 학문이 채 대성하기도 전에 갑자기 요로에 올랐다. 위로는 임금(중종)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권력자들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다.

간절한 충심을 다하려 하자 참소하는 입이 먼저 열려 몸은 죽고 나라는 어지러워졌고, 도리어 뒷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징계로 삼아 감히 일을 해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늘은 어째서 이런 인물을 낳기만 하고 성공하도록 만들지는 않았던가?

조광조가 비록 진퇴의 기미에는 밝지 못한 점이 있었으나 왕도가 귀하고 패도가 천한 것을 알았으니 배우는 이들에게 성리학의 종주가 될 만하고 뒷사람들이 태산과 북두처럼 우러러보고 또 위에 내린 은총이 갈수록 더욱 융숭함은 당연하도다.

[퇴계 이황에 대한 평가]

이황의 학문은 문(文)을 통하여 도(道)에 들어갔고 의리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의 가르침을 준수하였다. 여러 가지 학설의 차이 또한 조리가 분명했고 훤히 이해하였지만 주자의 학설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황에게 특별한 저서는 없었으나 성학의 모범을 발휘하고 현명한 가르침을 드러내어 널리 밝힌 의논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그의 이론은 기(氣)를 이(理)로 생각한 곳이 많았다.

이황은 자기 생각을 글로 지어 이견을 반박했는데 논지가 밝고 통달하여 배우는 자들이 믿고 인정하였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고 정미한 경지에 이른 것은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기대승에 대한 율곡의 평가]

선비에게는 다행과 불행이 있으니, 누구인들 때를 만나면 다행으로 알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불행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혹 때를 만나도 불행하고 때를 만나지 못해도 다행한 이가 있으니 어찌 한 가지 기준으로 말하겠는가?

기대승은 재능과 박식함으로 그 기개가 일세를 덮을 만했으나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고 자신에게 바른 말하는 벗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뜻을 얻어 배운 바를 행했다면 그가 때를 만난 것이 다행이었을지 불행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우리 학문이 불행하여 기대승이 죽었다”고 했지만 이에 반해 “이 사람의 죽음이 우리 학문에 불행할 것이 뭐가 있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하는 이도 있었는데, 식자들은 이 말이 다소 지나쳤을지는 몰라도 전연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율곡의 인물 평가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가 있다. 먼저 한문제에 대한 평가 내용 중 ‘자기가 뜻을 이룰 수 있는데 지나치게 신중하거나 양보하는 것은 자기 포기’라는 논리이다.(안철수를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일시적으로는 칭예하지만 이것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교훈은 사람을 평가할 때 일방적인 칭예와 폄하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특정 인물의 평가에서 3분의 2선의 지지면 최선의 평가라고 생각한다.(이것은 헌법도 개정할 수 있는 선이다.) 일찍이 생전의 마오쩌둥도 자기 업적에 대한 평가를 6 대 4 정도로 해주기를 원했다.

현대 한국인들은 자기 또는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을 참지 못한다. 비판이 부당하다고 느끼면 반론을 펴면 되는 것이다. 아니면 부당한 비판자를 적나라하게 조롱, 야유해 주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비판 자체를 문제시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저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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