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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38
“넙짜뚜이쭉(入家隨俗)”, 베트남의 역사
김갑수 | 2017-12-29 12:59: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넙짜뚜이쭉(入家隨俗)”, 베트남의 역사

1945년 8월 말 그는 자신의 민족에게 새로운 나라의 창건을 선포하기 위해 준비해 온 연설문을 마무리했다. 9월 2일 오후가 조금 지났을 때 그는 도시의 서쪽 가장자리, 머잖아 바딘광장이라고 알려지게 될 널찍한 공원에 급히 세운 임시 단상 위의 연단에 올라섰다. 빛바랜 카키색 양복이 그의 바싹 여윈 몸을 헐렁하게 감싸고 있었다. 발에는 고무 슬리퍼를 꿰고 있었다.

수천 명의 군중이 그의 연설을 들으려고 아침부터 몇 시간씩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고향 사투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높은 음조의 목소리로 나라의 독립을 선포한 다음 새로운 헌법을 읽어 나갔다. 청중에 섞여 있던 소수의 미국인들에게 그의 첫마디는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흡사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기까지 거쳐 온 과정은 험난했다. 그 형극의 길은 19세기 멀리 유럽에서 난데없이 쳐들어온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물러나자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으로 기어들어왔다. 프랑스는 여전히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다. 물론 이들의 방식은 피지배 민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베트남 민족은 외세의 침탈로부터 조국을 보호하는 데에는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군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에는 호치민(胡志明)이라는 놀라운 인물이 있었다. 호치민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베트남 민족은 이후 프랑스의 재침탈을 물리쳤다. 나아가 베트남 민족은 프랑스의 뒤를 이어 침탈한 미국까지 물리쳐 건국 이래 대외전쟁에서 최초의 패배라는 수모를 미국에 안겨주었다.

이러한 역사의 분기점이 된 것이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였다. 1953년 5월 인도차이나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앙리 나바르(Henri Navarre) 장군을 이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 무렵 강력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에게 간헐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사령관으로 부임한 나바르는 불리한 전황을 단숨에 타개할 전략을 구사하고자 했고, 그 결과 디엔비엔푸 전투를 기획했다.

나바르는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베트남 게릴라들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디엔비엔푸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요새는 베트남 게릴라의 거점을 압박함과 동시에 라오스로 연결되는 게릴라들의 보급로를 봉쇄할 목적으로 구축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베트남 게릴라들은 물적 지리적 기반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스 사령관 나바르는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1만 5,000명이 넘는 병력과 야포 전차 비행중대 등을 배치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가 부임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특히 디엔비엔푸 기지 외곽에는 49개에 이르는 거점과 이 거점들을 연결한 방어진지를 편성해 사방에서 이루어지는 적의 움직임을 샅샅이 파악할 수 있도록 만반의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렇다면 이 시기 베트남군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강력한 공군력과 화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베트남군은 오직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이루어지는 게릴라전에서 우위를 점할 뿐 평야지대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전투에서는 프랑스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취약한 전황에서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이동시키자 베트남군 지휘부는 역사적인 결단을 강요받았다. 바로 디엔비엔푸를 선공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군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보면 무모하기 그지없는 반면 적국 프랑스로서는 원하던 바였다. 디엔비엔푸 주위에는 베트남군의 거점이 없었고, 특히 그곳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변변한 도로마저 없었다.

따라서 막강한 공군력을 보유한 프랑스군에게 모든 것이 노출되고 있던 베트남군이 그곳까지 수많은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베트남군은 전투에서의 승리는 고사하고 전투를 유지할 물자와 병력조차 움직이지 못할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승리했다.

[우리와 베트남의 차이점]

나의 중요한 관심은 베트남이 어떻게 해서 제국주의 열강인 프랑스와 초강대국 미국까지 몰아내고 통일국가를 이루는 데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있다. 사실 이것을 밝히는 데에는 한 편의 긴 논문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고찰이 필요할 터이다.

첫째, 베트남은 중국과 끊임없이 투쟁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베트남에는 우리처럼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 같은 고대국가가 없었다. 결과 을지문덕 같은 영웅이 우리보다 훨씬 많이 배출되었다.

반면에 베트남에는 근대에 들어 외세 의존, 유인 세력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가톨릭 집단이었다. 심지어 교황청마저 인도차이나에서의 교세 위축을 우려한 나머지 베트남보다는 제국주의 프랑스 편을 들어주었다.

둘째,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체험을 80년이나 한 결과 서양의 실체를 비교적 일찍 알게 되어 서구사대주의가 적게 나타났다. 이것은 한국이 같은 동양권인 일본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일본의 동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대해 터무니없는 선망과 동경을 가지게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컨대 베트남 인들은(최소 지식인들은) 서구제국주의의 똥속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다음은 남베트남에 최초로 부임한 프랑스 민간인 총독 르 비르드 빌레가 1881년 12월 본국에 신속한 무력 개입을 건의한 글의 일부이다.

“과일은 충분히 익어 따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따든가 산산이 터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베트남의) 후에 조정은 저항은 하겠지만 무능합니다.”

이처럼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베트남을 ‘따먹어야 할 과일’에 비유하고 있다.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에 개입한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대해서도 냉철한 태도를 취해 우리의 서재필, 이승만 부류의 숭미 지도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 지엠은 이승만과 비슷했지만 실제 국민 지지율은 우리와 달리 현저하게 낮았다.

셋째, 베트남에서 베트민은 월맹으로 우리의 북로당 격이고 베트콩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로서 우리의 남로당 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이나 지압 장군의 영도력도 탁월했지만 베트콩 지도자들 역시 사심 없는 애국자들이었다.

베트콩은 베트민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공산당 색채를 드러내지 않고 민족주의를 표방함으로써 남베트남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수행했다. 결과 베트남의 남과 북 혁명용사들은 최다 54만의 지상군을 파견하고 무한량의 북폭을 퍼부은 초강대국 미국의 전쟁 의지를 분쇄하는 데 성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박헌영이나 이승엽 같은 남로당 지도자들이 자기 영역 구축을 위해 남로당 빨치산들을 과격한 모험주의로 치닫게 한 나머지 괴멸을 자초한 점과 뚜렷이 대조된다. 실제 미국의 전의를 결정적으로 꺾은 1968년의 ‘뗏(설) 공세’는 전적으로 베트콩이 희생적으로 이룬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크게 보아 세 가지가 베트남이 우리와 다른 점이었고, 이것이 베트남으로 하여금 분단을 극복하게 한 중대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의 자주적인 민족통일에 대해 경하해마지 않는다. 하지만 베트남의 통일에는 운과 외부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베트남의 통일전쟁 성취는 한국전과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머잖아 베트남은 아시아 수위권의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만약 우리도 통일국가를 이루었다면 이미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수위권의 강국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베트남의 자주적 역사]

베트남의 역사를 간단하게 숫자로 나열하면 1,000년 + 1,000년 + 900년 + 80년 + 30년 + 40년 = 3,050년이 된다.

맨 처음 1,000년 기간은 B. C 11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청동기시대이다. 다음 1,000년은 B. C 111년부터 AD 938년까지인데, 이 긴 기간 동안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기간은 우리의 삼국시대와 발해·신라 남북조시대에 해당된다.

다음 900년 기간 938년~1865년은 중국 지배에서 벗어난 베트남의 독립왕조시대이고, 이후 1862년~1945년 80년 동안은 프랑스 식민지, 그 다음 1945~1975 30년 동안은 식민지 독립과 통일 전쟁기 그리고 마지막 40년 1975년~2013년 기간은 현대 통일베트남시대가 된다.

베트남에는 중국 한나라의 지배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왕조가 있었다. 중국을 재통일한 한 고조는 B. C 196년 베트남의 패권자 찌에우다에게 사신 루자를 보내 그를 남비엣 왕으로 봉하려 했다. 찌에우다는 중국인 관리 출신이었다.

하지만 찌에우다는 중국의 사신을 중국의 예절이 아니라 베트남의 풍속으로 대했다. 그는 머리에 상투를 틀고 다리는 쭉 뻗은 채 앉아서 중국 사신을 맞이했다. 베트남 속담에 ‘넙짜 뚜이 쭉’이 있다.

이는 한문으로 입가수속(入家隨俗), 의역하자면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 뜻이 된다. 베트남인들은 지역 풍속을 가장 중시한다. 그래서 ‘왕의 칙령도 촌락 문 입구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루자 : 당신과 당신 조상은 중국인인데 어찌 이처럼 무례한 행동으로 한을 적대시하는 것이오?
찌에우다 : 남방의 만이(蠻夷)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 예절을 잊었노라. 그런데 하나 묻겠소. 나와 한제(漢帝) 둘 중 누가 더 현명한가?

루자 : 한제는 삼황오제의 업을 이어 한을 지배하는데 인구는 억을 헤아리고 영토는 만 리에 이르오. 왕의 무리는 10만에 불과하고 산과 바다 사이에 섞여 있어 한의 1개 군에 불과합니다.
찌에우다 : 하하. 내가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왕이 된 것이지, 만약 내가 그곳에 거했다면 어찌 한의 황제만 못했겠소?

이것은 베트남이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강조한 발언이었다. 찌에우다는 중국의 무력 횡포에는 무력으로 응징했다. 그는 결코 중국에 주눅 들지 않았으며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찌에우다의 이런 태도는 이후 베트남의 군주들이 중국과 대동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하나의 원형이 되었다.

찌에우다는 B. C 179년 남중국에서 북부 베트남에 이르는 최초의 통일 독립왕조를 건립했다.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베트남 역사는 찌에우다의 남비엣(南越)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찌에우다가 죽자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AD 679년에 안남국이 세워졌지만 여전히 당의 속국으로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의 중국 지배를 종식시킨 것은 응오꾸엔이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베트남 바익당강에서 중국 함대를 격퇴시키고 응오 왕조를 건립했는데 이것이 AD 938년의 일이다. 이로부터 900년 간 베트남 독립왕조의 시대가 전개되었으며 많은 왕들이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베트남 왕조역사에서 인상 깊은 인물로는 우선 쩐 왕조의 쩐홍다오 장군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지금도 베트남인들에게 신처럼 존경 받고 있다. 그는 1257년, 1285년, 1288년 세 차례에 걸쳐 당대 세계 최강 군대인 몽골족의 침입을 물리쳤다.

다음으로는 명나라군을 격퇴시킨 레러이와 응우엔짜이가 있다. 1428년 그들은 레 왕조를 건립하고 남진정책을 펼쳐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이후 영토가 길어진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1771년 남부의 떠이선에서 응우엔 삼형제가 거사를 일으켰다. 그 중 막내인 꽝쭝이 농민혁명의 방식으로 중국의 개입을 차단하고 남북 베트남을 통일했다. 그는 현대 배트남인들에게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788년 북에서 발기한 응우엔푹아인이 새로운 응우엔 왕조를 세우고 1802년 탕롱을 점령했으며 수도를 중부 후에로 옮기면서 탕롱의 명칭을 하노이로 변경했다. 응우엔 왕조는 최초로 베트남(越南) 국호를 사용했으며, 베트남 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캄보디아를 병합하여 지금의 영토를 확정하였다.

[프랑스에 이어 미국 침공]

제국주의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베트남에 분단의 시련이 닥친 것은 미·영·소·불·영·중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우리와 또 하나의 닮은 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 민족은 분단 22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다.

베트남을 분단시킨 것은 1954년의 제네바협정이었다. 이 협정의 골자는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이북은 북베트남 정부군이, 이남은 프랑스군이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은 베트남의 절반이 공산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채 무력개입은 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을 적극적으로 재검토하게 되었다. 결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 공산세력들은 지역 내 평화를 역설하면서 자신들의 주도권을 행사해 나갈 것이다. 결국 동남아 지역에서의 지도력 상실은 일본으로부터 시작되는 봉쇄망의 붕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최종 판단을 내린다.

한편 1958년 토지개혁의 문제점을 해소하여 농촌의 불안을 가라앉힌 하노이 정부는 다시 농업 부문의 급속한 사회주의화를 시도했다. 농업 발전을 위한 토지의 집단화는 40.000개의 합작사 설립으로 구체화되었고 전체 농가의 85% 이상이 여기에 참여했다. 합작사는 농민의 계급 구성을 중시하여 빈농과 중하층 농민이 주도권을 가지고 운영되도록 했다.

이런 정책은 부작용도 있었지만 일정한 성과를 낳았다. 농민들의 열성 참여와 농업 노동력의 협동화, 관계수리의 공동 관리 및 비료의 공동 구매 등을 통해 면적당 벼의 생산량이 증가되었다. 이로써 기아 문제를 해결한 하노이 정부는 자신감을 가지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합작사 확대와 농업 기술의 향상에 주력했고 아울러 공업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은 1954년 수상에 오른 반공주의자 응오 딘 지엠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이에 앞서 미국은 모든 원조는 프랑스 당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지엠 정부에 주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프랑스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미국에 밀린 프랑스는 1956년 4월 인도차이나 사령부의 폐쇄를 공식 선언했고, 그해 9월 마지막 군대가 사이공 항구를 떠났다. 이렇게 됨으로써 하노이 정부는 프랑스 대신 미국이라는 새로운 외세와 대립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의 지지를 확인한 지엠은 독재정치를 실시하고 부정선거를 자행하여 차츰 민심을 잃어갔다. 특히 농정 파탄은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만들어냈다. 하노이 정부는 제네바협정대로 총선거를 하지고 제안했지만 지엠과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훗날 ‘당시 선거가 치러졌다면 유권자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지엠 정권은 족벌독재로 치달으면서 공산주의자 색출에 몰두했다.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가운데 공산당이 주도하는 농민 봉기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사이공 정부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해방시키고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시행하는 한편 농민 자위대를 조직해서 지엠 정부에 무력으로 항쟁했다. 농민 봉기와 동시에 공산당은 사이공 정부 관리에 대한 암살과 정부 공공건물과 시설들에 대한 파괴 투쟁을 벌였다. 비하의 뜻을 가지고 있는 ‘베트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북에서는 1960년 9월 개최된 제3차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북부에서의 사회주의혁명 완수와 동시에 미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남부를 해방시켜 국가의 통일을 완수한다”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1960년 12월, 남부공산당은 하노이 측의 권유를 받아들여 남베트남 민족해장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을 결성했다. 그러나 하노이 지도부는 남부에서의 혁명은 무력에 의존하기보다 반 지엠 세력을 결집시키는 정치운동에 주력할 것을 촉구했다.

이것은 베트민 조직에서와 마찬가지로 비공산당원인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런 전략은 미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최소화시킬 것을 기대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때 미국이 집계한 베트콩 지지 세력은 전 국민의 2% 정도에 불과했고 대다수가 농민이었다.

1961년 미국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전임자 아이젠하워보다 베트남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명분상으로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웠지만 1949년 민주당 정부의 중국대륙 상실, 그의 취임 전 날 소련 후르시초프가 행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지지연설 및 그 자신의 쿠바 침공계획의 미수 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미국은 8년 간 노력을 기울이고 2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지엠정권의 족벌독재가 지속되는 한 베트남의 상황은 호전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1963년 베트남에서는 반정부시위가 잇따라 발생했다. 특히 6월 11일 승려 틱광득의 분신자살 장면이 전 세계로 생생한 전파를 타게 되자 국제여론은 지엠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지엠의 동생 뉴는 단독으로 미국, 북베트남과 동시 접선하면서 베트남의 중립화를 기도하여 미국의 불신을 증폭시켰다.

이런 와중에 응우에 카인이 쿠데타에 성공하여 민 장군을 추대해서 미국의 승인을 얻긴 했지만 미국은 카인이 당파를 자주 바꾼 이력 때문에 그를 별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남부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하노이 정부는 1963년 12월 중대한 단안을 내렸다. 대담하게도 그들은 하노이 정부군의 남부 침투와 미군에 대한 직접 공격 등을 결정했던 것이다.

케네디가 비명에 죽자 대통령 직을 승계한 존슨은 베트남에 한층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국 군부는 보다 확고한 행동을 취할 것을 건의했다. 합동참모본부는 북베트남 공습을 제안하는 동시에 하이퐁 항구를 봉쇄하기 위한 기뢰 부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문제는 의회의 동의를 얻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뜻하지 않은 데에서 풀리게 된다. 1964년 8월 초 그 유명한 통킹만 사건이 발발한 것이다.

이로써 미-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미 공군의 북폭과 함께 지상군 투입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1년 후 베트남에서는 또 한 차례의 쿠데타가 발발하여 성공했다. 1964년 12월, 젊은 공군 장성 까오 끼와 육군의 반 티에우가 카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베트남에서 두 번의 친미 쿠데타를 조종했고 베트남 참전 구실을 만들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1966년부터 미국은 매일 164회씩이나 베트남을 폭격했지만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 1967년 초 영국 노동당 의원 100명이 베트남을 초토화하는 미국의 폭격을 범죄행위로 규정했으며, 4월에는 50만 명의 미국 시민이 뉴욕 유엔 건물 앞에서 반전시위를 벌였다.

그해 10월에는 동부에서 반전시위를 벌인 여 가수 조엔 바에즈, 서부에서 반전시위를 벌인 작가 노먼 메일러가 체포되었다. 그해 섣달그믐인 12월 31일 호찌민은 미국 평화시위자들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고 이에 미 국무성과 국방성은 즉각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1968년 미군은 베트남에서 매주 수백 명의 전사자가 났고 매월 20억 달러의 전비를 지출했다. 이미 53만 이상의 병력을 파견했고 2차세계대전 때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지만 전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미군 총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멀랜드는 승리가 눈앞에 있다며 더 많은 병력과 예산 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강심장이라는 미 대통령 존슨은 자신의 지지자 리처드 러셀 상원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전의 어려움 때문에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구정공세는 ‘아무리 전쟁에도 명절은 있는 법’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일대사건이었다. 1968년 1월 31일을 기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베트남 영토 전역 최소 40지역 이상에서 ‘설 연휴 3일 휴전’ 약속을 깨고 대대적인 공세를 벌였던 것이다. 특히 베트콩은 유력한 라디오방송국을 점령하기도 했고 심지어 사이공 미국 대사관 구내에 침투하기도 했다.

유럽의 좌파들은 “작은 후진국 농민군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초강대국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극적으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이 공세에서 실제 피해는 베트콩이 더 크게 입었고 베트민이 기대했던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국은 보이지 않는 타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가히 치명적이었다.

미국은 전쟁의 심리전에서 결정적으로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구정공세는 반전운동에 시달려 오던 미국인에게는 오히려 패배를 의미했고 베트콩은 마음만 먹으면 베트남 영토 내 어디든 미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순진하다. 그들은 미국이 언제나 승리하고 있으며 미국이 치르는 전쟁은 늘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미국 땅에 대도시는 물론 지방 작은 마을에까지 전사자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렇게 되자 메이저 언론은 물론 지방 신문들까지 앞 다투어 미국의 전쟁 피해를 보도하기 시작했는데, 구정공세는 절묘하게도 바로 이런 시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정공세 중인 1968년 2월 1일, 남베트남 경찰국장 구엔 곡 로안은 사이공 대로상에서 베트콩 포로 한 명을 권총으로 즉결처분했다. 당시 AP통신 에디 에덤스 기자는 이 장면을 담아 <라이프 지>에 게재했는데, 이 사진은 전 세계로 퍼지게 되어 전쟁의 잔혹성을 충격적으로 알리는 상징물이 되었다.

요컨대 미국 국민들은 ‘우리가 이렇게 재판도 없이 사형을 집행하는 잔인한 정부를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가?’라고 자문하게 되었다. 나이브한 미국인들은 전쟁의 공포심을 새로운 정의감으로 쉽게 치환했다.

미국 텔레비전의 반전 보도는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베트남 전선을 둘러보고 돌아온 CBS 엥커맨 월터 크롱카이트는 1968년 2월 27일 저녁 뉴스에서 사뭇 준엄한 목소리로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전 수행은 잘못된 것이며, 미국에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협상이라고 단언했다. 이보다 결정적인 사건은 이틀 후 벌어진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사임이었다. 그는 미국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장관직을 내던진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존슨의 지지율이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을 했고 급기야 존슨은 3월 31일에 대통령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 와중에서 1968년 4월과 6월, 마틴 루서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연이어 암살당함으로써 미국 사회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한편 대학생들의 반전 시위는 인종 폭동과 겹쳐 격렬한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

[미라이 양민학살사건]

새로 들어선 닉슨 행정부는 그동안 미군이 맡던 역할을 남베트남군에 이양하는 정책을 시행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던 중 1968년 3월 16일에 발발하여 1969년 9월 2일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미라이촌 양민학살사건’은 미국의 반전운동을 더욱 거세게 확산시켰다. 이 사건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라는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미라이 양민학살은 한국전에서의 노근리 학살과 비슷한 성격을 띤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전의 것은 철저히 은폐된 반면 베트남전의 것은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탐구적이거나 양심적인 미국인들은 한국전에서 미국이 어떤 짓을 했는지에 유추하여 베트남전을 추적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내 반전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한국전과 달리 베트남전에서는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었다. 내가 베트남의 통일전쟁 성공은 실패한 한국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말한 이유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어느 날 미 육군 11보병부대 관할 찰리부대의 지휘관 월리엄 케리 중위는 대대장 어니스트 메디나 대령으로부터 이상한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그 부락을 일소하라”는 밑도 긑도 없이 애매한 명령이었다. 찰리부대원들이 헬기 편으로 미라이 부락에 당도해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노인과 부녀자들뿐이었다. 미라이 촌 어디에도 그곳이 게릴라 기지임을 의심케 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주민들을 촌락 중앙에 집결시킨 미군은 소녀를 포함한 부녀자 몇 명을 제외하고는 주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했고, 움막집들을 수류탄으로 파괴했다. 그리고는 따로 남겨 두었던 소녀들을 포함한 부녀자들을 강간하고는 사살했다. 이렇게 해서 학살당한 사람은 560명이었다. 켈리 중위는 혼자서 109명의 민간인을 처치했다.

찰리부대 병사였던 바나드 심슨은 훗날, “그 날 미라이에서 나 혼자 죽인 사람은 25명 정도였다. 여자건 남자건 가릴 것 없이 총으로도 죽였고 목도 잘랐고 머리가죽도 벗겼고 손도 잘랐고 혀도 잘랐다...나는 그냥 죽였을 뿐이다. 내 안에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임무는 성공리에 수행된 것으로 사령부에 보고되었지만 학살 소문은 널리 퍼져 나갔다. DNS 통신사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가 진상을 폭로하고 나섰다. 마지못해 진상조사에 착수한 미 육군은 모든 사안을 비밀에 붙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미국의 자작극, 통킹만 사건]

우리의 비극 천안함 사건은 흔히 메인호 폭발사건에 비유된다. 이것은 1898년 쿠바의 아바나 항(港)에 정박 중인 미국 군함 메인호가 원인불명으로 폭파하여 260명의 승무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대 스페인 전쟁을 벌임으로써 제국주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천안함 사건은 현재 진행 중인 ‘미완의 통킹만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1년 6월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베트남정책 결정 과정’과 ‘통킹만 사건의 명령과 통제에 관한 연구’를 3일 동안 요약, 연재했다. 이것은 국방성 관할 랜드연구소 전 연구원 대니얼 엘즈버그로부터 입수된 1급 비밀문서로서 로버트 맥나마라가 1968년 국방장관직을 사임하기 전에 지시를 내려 만든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 사본을 <뉴욕타임스>에 넘겨 준 대니얼 엘즈버그는 한때 헌병대에 복무하면서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었는데 랜드연구소 연구원으로서 베트남에 관해 알게 되면서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했다.

이 보고서에는 트루먼 행정부 시절 이래의 정치적 기만과 노골적인 거짓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 정부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CIA의 사주로 베트남의 고 딘 디엠 수상이 실각하고 처형되기 전에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서 본국으로 보낸 전문이었다.

이 전문에 따르면 놀랍게도 통킹만 의회 결의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이미 초안이 잡혀 있었다. 결국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 참전에 명분으로 삼은 통킹만 사건이 CIA의 조작이었음을 유력하게 방증하는 자료였다.

(참고) 통킹만 사건 : 1964년 베트남 동쪽 통킹만에서 일어난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군 구축함의 해상 전투 사건. 미국이 베트남전쟁 개입을 공개적으로 강화한 계기로 삼은 사건이다. 미국 측에 따르면,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통킹만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구축함(매독스 호 Destroyer USS Maddox DD-731)을 향해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미 구축함은 즉각 대응하여 1척을 격침하고 2척에는 타격을 가하였다. 주변에서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던 항공모함(타이콘디로거 호 USS Ticonderoga CV-14)도 가세하여 함재기들이 공세를 펼쳤고 함대 구축함(터너죠이 호 USS Turner Joy DD-951)도 공격에 가세하였다.

미국은 이 해상전투를 빌미로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다. 당시 미국은 통킹만 전투 이전에도 베트남전에 개입하고 있었다. 8월 7일 미국 하원은 만장일치로 '통킹만 결의안'을 채택하여 베트남전 개입을 본격화하였다.

미국은 북베트남을 대대적으로 폭격했고 해병대를 상륙시켰다. 1971년 미 국방부 펜타곤보고서에 의하면 이 전투는 미국 측이 베트남전 개입을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도 1995년 회고록에서 이 전투가 미국의 자작극이었음을 고백했다.
- 이상 두산백과사전 참조

[파리평화회담, 춘계(부활절) 대공세 그리고 통일]

1972년 닉슨은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여 베트남전에서의 추가 철군을 발표했다. 대신 그는 파리평화회담 성사에 관심을 두었다. 미 안보담당 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 정부 정치국원인 레득토는 1969년 이래 비밀리에 접촉해 왔지만 양자의 입장차는 확연했다.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군 외 모든 군대의 철수를 내세우며 남베트남에 대한 북베트남 정부의 개입 중단과 독립된 국가로서의 남베트남 총선거를 주장했다.

반면에 북베트남은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포함한 인민혁명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이것은 베트남을 하나의 국가로 여기는 북베트남 측으로서는 정당한 요구였지만 미국은 이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북베트남 정부는 협상보다는 무력 해결 쪽으로 기울었다. 초치민의 후배인 레두안을 비롯한 하노이 지도자들은 혁명에 의한 통일이 가능하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1972년 3월 지압 장군은 이른바 춘계 대공세, 일명 부활절 공세를 감행했다. 12만 명의 북베트남군이 소련제 탱크와 대포를 동원하여 휴전선을 넘었다.

이에 맞서 미국은 북폭을 재개하고 하이퐁 항구를 봉쇄했다. 이것은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6만 5,000명의 미군을 보호하기 위한 예방조치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결국 하노이 지도자들은 미군 철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우치게 되었다.

1973년 1월 27일 레득토는 미국의 명분을 살려주되 실질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는 평화협상조약에 미국을 서명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조약은 사이공 정부, 하노이 정부를 각각 인정하면서 동시에 남베트남 인민혁명정부(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도 인정하는 유연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기실 이것은 미국이 사이공 정부를 버린 조치에 불과했다.

명분만 그럴 듯한 이 평화조약의 체결로 헨리 키신저와 레득토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헨리 키신저는 수상한 반면 레득토는 조국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수상을 거부했다.

아무튼 이 조약에 따라 미군과 동맹군은 1973년 3월 말 시점으로 전원 베트남에서 떠났다. 한국군은 2,500명을 남겨 두었다가 1975년 남베트남이 공산화되기 직전에 마저 철수했다. 당연히 남베트남의 민심 불안은 증폭되었고 경제 상태까지 악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 8월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퇴임하게 되자 남베트남의 티에우는 강력한 후견인을 잃어 버렸다.

미국의 재개입이 불가능함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1975년 1월부터 다시 사이공 정부군에 대한 전면전에 돌입했다. 미국의 지원이 끊기자 사이공 정부에서는 반 티에우 세력이 점증되었다. 하노이 지도자들도 놀랄 정도로 사이공 정부군은 응전도 제대로 못 하면서 너무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하노이 지도자들은 일정을 당겨 5월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사이공을 함락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4월부터 마지막 최대 공세인 호찌민 작전이 전개되었다. 3월 19일 꽝찌 시가 함락되었고, 25일에는 후에가 함락됐으며, 3월 29일에는 중부 최대 도시 겸 남베트남 제2 도시 다낭마저 후퇴하는 사이공 정부군과 피난민이 뒤섞이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사이공은 공포에 질렸고 벌써부터 미군 비행기는 사이공 정부의 주요 관리와 가족들을 피난시키기 시작했다.

4월 21일 남베트남 티에우 대통령직 사임, 부통령 찐 반 흐엉 승계, 찐 반 흐엉은 북베트남과 협상을 시도하다가 닷새 만인 4월 26일 온건파 즈 엉 반민에게 대통령직을 위임한다. 그리고 즈 엉 반민 역시 협상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마침내 1975년 4월의 끝인 30일, 수도 사이공마저 함락됨으로써 남베트남 공화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베트남 전 인민은 민족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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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민폐  2017년12월31일 18시06분    
우리이니 마음대로하소서

이리 말함 갑수옹 가라사데 문꼴 ,빠 ,노빠 대가리 남주고 사는 맹목적 추종 꼭두각시
취급을한다 .
근디 막상 갑수옹은
남의것이 좋아보이는 그 놀부 심보 모택동 호치민등은 찬양해 마지 않는 이율배반은
어찌 이해해야하남
우리이니 총들고 직접 안싸워서 저들과 비교자체가 아니되남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우리가 이땅 주인 주권자라는 자각 사회전반에 확산 뿌리내려 우리하나될때
민족통일은
한걸음 더 다가갈것
(50) (-31)
 [2/2]   민폐  2017년12월31일 19시51분    
이젠 그놈의 썩다못해 문들어빠진 이빨삼치기 논쟁보다 힘을 하나로 모아야

남북통일
일제잔제 청산의 당위성을 그 아무리외쳐보아야

위원회에서
개성공단 박양 초법 일방적 결저의 폐혜
위안부 이면계약 불가역적 판단 청와대 일방적 결정 폐혜을 발표하엿다
현실은
자한당, 국당,바당 국회 과반 170여석 넘어 조중동 종편 찌라시들 나라 미래,경제는
어찌하냐고 물고 뜯고 난리가 법썩인 현실

문재인 가진것이라고는 불알 두쪽 뿐이데
여기에서 조차
전교조는 전교조대로
민노총은 민노총대로
이놈은 이런연유로
저놈은 저놈은 저런연유로
갈라지고
찢껴졎다
지금까지의 우리네 모습 역사 엿다

이역사 또다시 다람쥐 챗바퀴 돌자구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돼지 쌔끼도 아니구

2018년 새해에는 더욱 우리 하나되어야
(41)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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