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 CMS후원
2018.04.23 18:45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세계  |  미디어  |  칼럼  |  서팡게시판  |  여행게시판
 
칼럼홈 > 김갑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27
김갑수 | 2017-12-11 14:30:4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러시아 현대사’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①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해체된 것은 1991년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이 날 고르바초프가 사임하고 러시아가 독립했다. 이로써 사회주의 연방 소련은 붕괴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많은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진보 지식인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유구무언이었다.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존 M 톰슨, 사회평론, 2004)의 저자는, “이솝 우화와 달리 소련의 이야기에는 어떤 교훈도 없다”고 했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왜 1917년의 눈부신 이상은 실현되지 않은 것인지,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라는 혁명의 꿈은 왜 악몽으로 변해버렸는지, 아무도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답은 어디에 있는가? 소련이 붕괴하고 4반세기가 지난 오늘 중국과 베트남과 조선에 그들의 엷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중국, 베트남 조선과 소련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에 그 답이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인지?

20세기 러시아 역사처럼 파란만장과 우여곡절로 점철된 현대사도 없을 것이다. 『20세기 러시아 현대사』가 깨알 같은 활자로 776쪽이나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을 기본으로 하되 5,6권의 관련 서적을 추가하여 러시아 현대사를 최소한으로 압축해 보고자 한다. 최소 10회 이상의 글을 올려야 할 것 같다.

러시아가 우리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미국과 중국 다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우리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20세기 들어 러시아에서 전개된 두 차례의 대변혁, 즉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특히 중요하다. 게다가 러시아가 개입한 러일전쟁과 2차세계대전과 냉전체제와 6.25 전쟁 등은 우리의 역사와도 밀접히 관련된다.

우리는 러시아의 정치와 역사 외에도 문학과 음악에 대한 관심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근세 이전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뒤져 있던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은 18세기가 지나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명실 공히 인류 최고 수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은 1차적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한 러시아’에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소련이라는 국가의 성격이다. 사실 레닌 사후 소련은 대내적으로는 사회주의였을지 몰라도 대외적으로는 이전 러시아 제국이 지녔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이는 마치 구미제국이 대내적으로는 데모크라시를 실천했는지 몰라도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악성을 견지한 역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세기 초반 러일전쟁 때 러시아가 미국, 일본과 담합하여 자국의 이권을 취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 독점을 용인한 사례를 우리는 선명히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러시아는 1945년 조선(북) 정권의 수립과 분단 그리고 이후 최소 15년 이상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러시아는 1990년 수교 이후 한-소간 경제협력과 인적, 물적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우리의 가까운 이웃으로 개방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은 우리에게 일정한 동경심을 자극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나는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과 무소르스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같은 음악가들에 대해서도 조금씩이나마 언급하려 한다.

동서로 1만 킬로, 남북으로 4,000킬로에 걸쳐 유라시아 대륙의 40%를 점하고 있는 러시아는 ‘거대한 대지’의 나라이다. 러시아의 영토는 남북을 합친 면적의 100배, 중국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넓다. 이 광활한 영토에 비해 러시아의 문화 수준은 근세 이전까지 열세였다.

고구려가 만주 벌판을 경영하고 백제가 황해를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할 무렵 러시아는 부족 단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의 남북조시대, 즉 신라와 발해 시대 무렵에야 러시아는 최초의 국가다운 국가 키예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고려시대 때에서야 최초의 기록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러시아는 19세기 들어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러시아는 문학, 음악뿐 아니라 회화, 무용, 연극, 오페라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이런 문화적 성장의 비결을 밝히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 든다.

또한 우리는 러시아의 ‘프라브다’와 ‘볼랴’의 꿈을 공유할 수가 있다. 프라브다는 진실, 진리, 볼랴는 자유, 의지의 뜻을 지닌다. 우리는 프라브다와 볼랴를 동시에 실현하고자 한 러시아 인민들의 미완의 희망에 연민과 공감을 갖는다.


소련과 러시아는 어떻게 다른가 ②

러시아에 국가다운 국가가 세워진 것은 9세기 때의 일이다. 이전의 러시아 땅은 여러 이민족이 번갈아가면서 들어와 지배했다. 전설적인 러시아 역사를 담고 있는 『원초연대기-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는 12세기 초 한 수도사의 의해 쓰였는데, 이에 따르면 노르만 족의 일파인 바랴기(바이킹)가 슬라브 인의 요청으로 러시아 땅에 내려와 키예프 루시를 건설했고 이로부터 러시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 땅에도 일찍부터 신석기와 토기와 청동기를 사용하는 농경문화가 형성되었다. 다만 기록상으로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다. 고대 러시아에 형성된 최초의 문명은 스키타이 문명인데 그들의 주체는 이란계 유목민과 그리스-이란 문화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AD 4~9세기 남러시아는 아시아 계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러시아의 대지는 크게 보아 북의 삼림지대와 남의 초원지대로 구분된다. 슬라브 인들은 언제나 남쪽의 광활한 초원지대에 마음이 끌렸다. 초원지대는 경관이 아름다웠고 땅이 기름졌다. 소설가 고골은 <타라스 불바>에서 남쪽 초원지대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그 무렵 러시아 남부는 온통 푸른 잎으로 덮인 처녀지였다. 야생의 잡초가 끝없이 물결치는 토지는 한 번도 쟁기로 찍힌 일이 없다. 그곳에 숨어사는 말떼들이 높이 자란 풀들을 짓밟으며 지나간 자국이 군데군데 보일 뿐이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슬라브 인들이 이 초원지대를 동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비교적 강성했던 11세기 전후의 키예프 루시 시대를 제외하고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초원지대의 주재자는 아시아 계 유목민족이었다.

러시아 국가 체제의 원형은 동슬라브 인이 주체가 된 ‘루시의 나라’였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키예프였기 때문에 ‘키예프 러시아’라고도 부른다. 이 키예프 러시아가 몰락한 후 짧은 기간의 블라디미르 대공국 시대를 거쳐 모스크바 대공국이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동슬라브 인은 모스크바 중심의 대러시아 인, 키예프 중심의 소러시아 인, 서부 벨루시아 인의 셋으로 갈라졌다.

이후 더욱 강성해진 모스크바 대공국은 16세기부터 시베리아로 진출하면서 17세기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면서 대제국의 기반을 닦았다. 이때까지 러시아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루시’라는 옛 이름으로 국명을 사용했다.

‘러시아’가 정식 국명으로 채택된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때 제국이 형성되면서부터였다. 백, 청, 적의 삼색기가 국기로 사용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제 러시아 제국은 유럽 방면의 발트 지방과 우크라이나, 아시아 방면의 시베리아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은 급속도로 확장되어 핀란드와 폴란드의 일부, 중앙아시아, 극동 연해주 지방을 복속시켰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 제국은 19세기 말부터 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최대의 판도를 이룩했다.

러시아 제국은 1917년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10월혁명 후 러시아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를 기화로 핀란드, 폴란드, 발트 3국이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다. 1922년 러시아 공산당이 지도하는 4개의 소비에트 공화국, 즉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자카프카스 연방의 대표들이 모여 국명에서 러시아를 빼버리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곧 소련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역설적으로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여 중앙아시아를 소비에트로 만들었고 극동공화국을 병합했으며 1940년에는 발트 3국마저 병합했다. 또한 소련은 루마니아 령 베사라비아까지 점령하여 총 15개의 공화국 연방으로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과거의 러시아 제국 최대 판도에서 폴란드와 핀란드를 제외한 광막한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계승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소련은 1980년대 말 페레스토로이카가 진행되는 중에 1991년 쿠데타와 대중봉기로 연방이 해체되었다. 발트 3국이 제일 먼저 분리해 나갔고 이후 나머지 11개국이 연쇄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면서 느슨한 형태의 독립국가 공동체(CIS)로 대체되었다.

물론 대내외적으로 소련을 계승한 것은 지금의 러시아연방공화국이다. 지금의 러시아는 옛 소련 영토의 80%,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국기는 혁명 전 러시아 제국의 삼색기를 사용한다. 지금 러시아연방공화국의 영토는 17세기 모스크바 대공국이 지배하던 땅에다 동 시베리아와 극동 연해주 지방을 합친 영역이다.

결국 오늘의 러시아는 루시 ⤍ 러시아제국 ⤍ 소련 ⤍ 러시아연방공화국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소련에서 러시아로 단일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연방공화국 인구의 20%는 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러시아 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만도 20개가 넘는다. 여전히 러시아는 소련에 버금가는 다민족 연방국가이다.


‘차르’, 폭군의 나라 러시아 ③

‘뇌제(雷帝)’는 러시아 황제 이반 4세의 별명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함께 들어 있다. 벼락처럼 두려운 황제이자 번개처럼 위광이 빛나는 황제라는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뇌제에는 아무래도 앞의 뜻의 더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뇌제를 영어로 하면 ‘Ivan the Terrible’, 즉 ‘공포의 이반’이 된다. 요컨대 그는 폭군이라는 것이다.

이반 4세는 1533년 겨우 세 살의 나이로 보위에 올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다 읽었다고 한다. 두 귀족 가문이 번갈아가며 섭정한 끝에 이반이 17세가 되어 친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공개석상에서는 이반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사적으로는 백안시했다.

심지어 귀족들은 이반에게 음식과 옷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방자한 태도로 하인 다루듯이 했다. 이런 가운데 이반은 귀족들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면서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1547년 그는 17세가 되어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이전의 군왕 칭호인 ‘대공’ 대신 ‘차르’(로마 황제 카이제르와 같은 말)라는 칭호를 공식으로 채택했다.

이반 4세는 귀족들을 향하여 포문을 열었다. 그는 전국회의를 소집하여 대귀족의 횡포를 비난하고 개혁 의지를 천명했다. 그는 중앙 귀족을 견제하면서 사족을 양성했다. 그는 군사력을 증강하여 볼가강변으로 진출하여 카잔 한국을 점령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이반은 수많은 정벌에서 성공했지만 날이 갈수록 사족이 늘어나 더욱 많은 토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때마침 1560년 왕비가 죽었는데, 이반은 귀족들이 독살한 것으로 믿었다. 공포정치는 이때부터 더욱 살기를 띠게 되었다. 그는 대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토지를 몰수했으며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족만을 우대하면서 혹독한 전제권력을 휘둘렀다.

이반은 왕비를 죽인 귀족들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수많은 귀족들을 재판도 없이 죽였다. 피를 말리는 공포정치가 계속되었다. 이즈음 리보니아 전쟁에 스웨덴, 리투아니아, 핀란드가 가세하면서 러시아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대귀족 쿠르푸스키가 리투아니아로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반은 쿠르푸스키에게 15년 동안이나 협박편지를 보냈다.

이반은 권모술수적인 잠적 소동을 연출하면서 중앙 귀족들의 움직임을 체크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이반은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을 황제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차르의 군대를 따로 양성하여 그들에게 과분한 특권을 주었다. 차르의 군대는 수없이 많은 테러를 자행했다. 이반은 자기에게 충고한 대주교 필리프를 감금했다가 살해하기도 했다.

1570년 차르의 군대는 노브고로트에 몰려가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도시 주민 1만 5,000명을 학살했다. 이것은 전체 주민의 반이 넘는 숫자였다. 그해 여름에는 역시 스파이 혐의로 모스크바 귀족과 시민 100여 명을 붉은광장에서 공개처형했다. 대규모의 테러가 계속되던 중, 1571년 크림 한국의 군대가 쳐들어 와 모스크바 시민 10만 명을 죽이는 참극이 빚어졌다. 모스크바 강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수많은 시민이 노예로 끌려갔다.

이반의 권력도 누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이상 증세를 나타냈다. 이반은 30세 황태자를 지팡이로 때려 죽였다. 설상가상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러시아에 압력을 가해 왔다. 이반은 이에 굴복하여 스웨덴과 불리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협정으로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와 발트 연안을 포기해야 했다. 리보니아 전쟁은 성과도 없이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국토만 황폐화된 채 끝맺었다.

1584년 이반 뇌제는 며칠 동안 궁 안을 울부짖으며 헤매다가 죽었다. 후세에 소련에서 그의 시체를 검시했는데 독살로 판명 났다고 한다. 이반 뇌제는 러시아 역사상 최악의 군주다. 오늘날 ‘차르’는 폭군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차르는 이반 말고도 여럿이 더 있으며 크게 보아 소련의 스탈린 역시 차르의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시베리아라는 ‘지표’에 대하여 ④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과 비교된다. 사실 ‘개척’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이 두 개척의 역사에는 무수한 침공과 약탈이 은폐되어 있다. 다만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은 미국의 서부 개척에 비해 그 속도가 훨씬 빨랐고 약탈이나 학살은 적은 편이었다. 러시아는 미국처럼 원주민에게 배타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구사했다.

시베리아는 워낙 넓어서 ‘대지’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시베리아는 대지라기보다는 ’지구의 표면‘ 중 일부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이다. 시베리아에는 산맥다운 산맥이 없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우랄산맥의 평균 고도는 채 500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시베리아는 더욱 ‘광막한 지표’처럼 느껴진다. 16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의 무대는 우랄산맥 서쪽에 한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때까지는 시베리아에 러시아의 영역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우랄산맥을 서에서 동으로 넘으면 시베리아인데 이 땅의 넓이는 이전 러시아 제국 영토의 두 배가 넘는다. 이 넓은 지표에 아주 듬성듬성 소수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1579년 카자흐의 한 소규모 부대가 우랄산맥을 넘었다. 그로부터 러시아 인이 5000킬로가 넘는 동쪽 끝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하는 데 채 70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 없는 땅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껏 해야 부족 수십 개가 있었고 시비르 한국 등 몇 개 부족을 제외하고는 아예 저항도 하지 않았다.

시베리아 진출의 선봉대는 카자흐 부대였다. 원래 카자흐란 러시아 변경에 거주하던 기마전사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귀족, 지주의 탄압에 몰려 변경지방으로 탈출한 농민들도 이에 섞이게 되었다. 그들의 주업은 수렵과 어로 그리고 약탈이었다.

카자흐 부대의 수장은 에르마크 대장이었다. 그는 스토로가노프 가문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시베리아 정벌에 나섰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배경에는 러시아의 차르 이반 4세가 있었다. 카자흐 부대가 시비르 한국의 수도 시비리를 함락시킨 것은 1579년이었다. 카자흐 부대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장 이르마크가 기습을 당해 전사한 후 러시아는 정규군을 보내 시베리아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그들은 1630년 레나 강을 건넜고 1639년에는 태평양에 다다랐다. 동쪽 끝에 이른 러시아 인은 아무르 강(흑룡강 지류)에 이르러 중국인과 충돌한다. 이후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중러 국경선이 그어졌다.

초기 시베리아 최대의 관심사는 모피였다. 그곳에는 담비, 비버, 족제비들이 무수히 많았다. 얼마 안 가 금과 은이 발견되면서 광물자원이 관심을 받게 되었고 완만한 속도로 농경지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러시아 인은 원주민에게 대체로 우호적으로 대했다. 원주민들은 모피 세금을 바치는 대신 각종 편의와 보호를 받았다.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원주민에게는 러시아 인과 동등한 대우를 해 주었다. 물론 러시아 인의 전횡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주 계급이 따로 없었던 데다 도망 공간이 무한정해서 원주민이 농노 신세로 전락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시베리아는 이민이 대폭 증가했고 적극적인 개발정책이 받쳐주면서 크게 발전했다. 이에 따라 오늘의 시베리아 사회는 우랄산맥 서쪽의 유럽러시아보다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귀족 천국 농민 지옥’의 러시아 ⑤

조국전쟁과 <전쟁과 평화>

1584년 이반 뇌제 사후 러시아는 극도의 동요와 혼란에 빠진다. 가렴주구와 테러, 기근과 질병에 못이긴 농민들은 남부와 동부로 대거 도주해 갔다. 그러자 농민을 토지에 묶어두기 위한 이주 금지령이 발동되어 발이 묶인 농민들은 농사짓는 노예, 즉 농노의 신세로 전락해 갔다.

러시아는 한동안 반란과 폭압정치의 악순환이 반복되다가 1613년 전국회의가 소집되어 미하일 로마노프를 차르로 선출하게 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노들의 삶이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의 농노는 매매, 증여, 저당의 대상이 되는 데다 국가에 대해서는 납세, 징병의 의무까지 졌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폭압적인 전제정치도 여전해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고 농노들이 대거 반란 전쟁에 가담했다.

러시아는 18세기 초반 표트로 황제의 출현으로 다시 안정을 되찾고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른바 제정 러시아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는 ‘귀족 천국, 농민 지옥’의 나라였다.

한편 프랑스 혁명(1789년) 이후의 소용돌이 속에서 1804년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을 장중에 넣기 위해 정복 전쟁에 몰두했다. 1805년 프랑스 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맞붙은 아우스테를리츠 대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서 나폴레옹 군은 오·러 연합군을 궤멸시키면서 유럽 패권의 기반을 닦았다. 러시아는 프랑스의 대륙 봉쇄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와 화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1810년 영국과 무역 재개를 선언하며 프랑스와의 일전을 각오한다. 드디어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침공해왔다. 전체 병력이 2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러시아 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그런데 러시아 군은 후퇴하면서 고육지책으로 초토화 작전을 썼다. 집과 가축과 식량을 모두 불태워 나폴레옹 군이 기식할 곳을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그 해 8월 말 모스크바 근교 보로디노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새로 임명된 러시아 사령관 쿠투조프 군대는 혈전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양군 각각 5만이 넘는 병력 손실을 입었다. 나폴레옹 군도 치명적인 타격을 당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1세는 모스크바를 초토화시키고 후퇴하는 작전을 썼다.

9월 초 남은 11만의 나폴레옹 군은 텅 빈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날 밤 갑자기 수십 군데에서 불길이 올라 모스크바는 4일 만에 거의 폐허로 변했다. 먹을 것도 없고 잠잘 곳도 없는 프랑스 군은 혹한 속에서 급속도로 사기가 떨어졌다.

1개월 만에 나폴레옹은 퇴각을 결정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군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를 탈주했을 때 남은 병력은 고작 3만이었다. 러시아 군은 프랑스 군을 집요하게 추격했다. 끝내 러시아 군은 프랑스 군을 따라 1814년 3월 파리에 입성한다. 전황이 180도로 역전된 것이다. 결과 나폴레옹은 실각하여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고 알렉산드로 1세의 대 유럽 발언권이 부쩍 커지게 되었다.

러시아 인들은 1812년의 프랑스 군 격퇴전쟁을 ‘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러시아 인의 민족의식은 한껏 고양되었다. 러시아의 예술가들은 조국전쟁을 기리는 작품들을 양산했다. 차이콥스키의 기악곡 <1812년 서곡>이 작곡되었고, 톨스토이의 세계적인 대작 <전쟁과 평화>가 집필되었다.

<1812년 서곡>은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을 만나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이 두 개의 국가(國歌), 즉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와 러시아 국가의 각축으로 표현되었으며, 결국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프랑스 악단이나 지휘자가 이 곡을 녹음한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한다. 마라톤 전쟁에서 패한 이란(페르시아)에 마라톤 선수가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전쟁과 평화>는 톨스토이가 창작을 위해 데카브리스트(1825년의 12월 혁명)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 혁명의 주체가 1812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에 맞서 싸운 세대의 후손들임을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 혁명보다 그것의 원인이었던 1812년의 조국전쟁을 다루기로 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국전쟁은 1805년에 있었던 아우스테를리츠 대접전, 즉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군대와 맞서 싸우다 패전한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1805년에서 시작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전쟁과 평화>는 1805년에서 1820년까지를 다루고 혁명은 미완으로 남겨 놓았다.

<전쟁과 평화>에서 데카브리스트의 부모 세대가 되는 주인공들은 안드레이, 피예르, 니콜라이 등이다. 특히 작가는 피예르의 사상을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피예르는 <전쟁과 평화>에서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도덕적 완성의 길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리고 죽은 안드레이의 아들인 니콜루쉬카가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로 성장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은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은 1805년의 시기를, 제2권은 1806년부터 1812년 조국전쟁 전야까지의 시기를, 제3권과 제4권은 1812년 조국전쟁을, 에필로그는 1813년에서 1820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소설에는 역사상의 실제 인물인 나폴레옹,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I세, 러시아 총사령관 쿠투조프,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라스토프친 백작 등이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데카브리스트’와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 ⑥

‘조국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격퇴한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국내정치를 일임 받은 전 육군장관 아락체예프는 수구적인 반동정치로 일관하여 러시아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유럽 원정에서 자유 분위기를 체험하고 돌아온 젊은 장교와 일부 귀족들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 수구적인 반동정치를 끝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들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입헌제 또는 공화정을 실현하기 위한 거사에 착수했다. 유명한 ‘데카브리스트(12월이라는 뜻)’가 바로 그것이었다.

1825년 11월 19일 신비주의에 탐닉하여 흑해 연안의 요양지에 가 있던 알렉산드르 1세가 급서했다.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3주 동안 황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로 인해 혼란이 빚어진 틈을 타 그들은 봉기하기로 했다. 황제 자리는 우여곡절 끝에 알렉산드르의 둘째 동생 니콜라이에게 주어지도록 결정되었다.

젊은 혁명 장교들은 일단 3개 연대를 동원하여 이것을 6개 연대로 늘려 군사행동에 돌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신임황제 니콜라이를 체포하고 정부기관을 장악한 다음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혁명 공정을 짰지만 이 공정은 처음 단계부터 차질을 빚고 말았다. 이견이 속출하여 완전 합의에 이르지 못한 데다 한 장교의 배신으로 거사 계획이 탄로 났던 것이다.

“어차피 죽을 것이니 앉아서 당하느니보다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다가 죽자.”
“우린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것이다.”

젊은 혁명가들은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에 집결했다. 소수의 다른 군대와 민간인이 합류했다. 그들은 전제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 주장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하려 했다. 이 사이에 벌써 수만 명의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했다.

신임 황제는 일단 대주교를 보내 반란군을 설득했다. 하지만 혁명군은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무에 나선 장군이 민간인의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이윽고 황제 니콜라이는 발포 명령을 내렸고 거사는 한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황제는 반란 관련자 600명을 체포하여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20명을 시베리아에 유배했다.

시 / 시베리아에 보낸다

시베리아의 광산 저 깊숙한 곳에서
의연히 견디어 주게
참혹한 그대들의 노동도
드높은 사색의 노력도 헛되지 않을 것이네
불우하지만 지조 높은 연인도
어두운 지하에 숨어 있는 희망도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나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은 오게 될 것이네
사랑과 우정은 그대들이 있는 곳까지
암울한 철문을 넘어 다다를 것이네
그대들 고역의 동굴에
내 자유의 목소리가 다다르듯이
무거운 쇠사슬에 떨어지고
감옥은 무너질 것이네 그리고 자유가
기꺼이 그대들을 입구에서 맞이하고
동지들도 그대들에게 검을 돌려줄 것이네

이것은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1799~1837)이 쓴 시이다. 나는 재작년 시베리아에 갔을 때 안내를 맡은 한인 2세 여대생에게 러시아 인민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는 예상대로 푸쉬킨이라고 답했다. 푸쉬킨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보다 단연 우위에 있다.

푸쉬킨은 러시아의 문어와 구어를 일치시킨 작가이다. 그의 언어는 단순하고 적확하다. 요컨대 그는 ‘말하듯이 글을 쓴’ 작가였다. 그는 운문과 산문, 시와 소설, 서정과 서사를 가리지 않고 창작하여 다양한 장르에서 괄목할 만한 대작들을 남겼다. 그의 최고 유명 대표작은 장편 서사시 <예브게니 오네긴>인데, 차이콥스키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져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공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차이콥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 등 오페라가 모두 푸쉬킨의 서사시, 운문소설, 희곡 등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게다가 푸쉬킨은 자유의 신봉자였다. 그는 10대 소년 시절부터 전제황제를 비판하고 자유와 평등을 예찬하는 시들을 발표했다. 그러다 그는 19세의 나이에 쓴 시 <자유> 때문에 남부 캅카스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때문에 그는 데카브리스트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의 문학적 역량을 주목한 황제가 그를 불러 데카브리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유배 가지 않고 페테르부르크에 있었더라면 가담했을 것’이라고 당차게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푸쉬킨의 시가 있다. (옛날 이발소 같은 데에 붙어 있던 시인데, 시인이 26세 때 쓴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534 









      



모바일 기기에서도 댓글 작성이 가능하도록 보완하였습니다. (현재 아이폰 기기까지 테스트 완료하였습니다.)


닉네임  비밀번호  004168  (스팸등록방지:빨간숫자만입력)

                                                 
She-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
                                                 
조중동, 한국당, 아베 저주 넘어, ...
                                                 
김상곤 교육부총리님 왜 그러세요?
                                                 
문베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준 드...
                                                 
왜 당신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시나...
                                                 
공기업 적자, 정치인-자본-관료의 ...
                                                 
북 “핵실험장 폐쇄, ICBM 시험발...
                                                 
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
                                                 
천안함 좌초한 곳에 ‘암초’가 있...
                                                 
한진의 세 자녀 아버지가 재단이사...
                                                 
KBS 추적60분, 이시형 마약 의혹 ...
                                                 
박원순은 왜 ‘김경수 멋있다’는 ...
                                                 
천안함의 진실을 지킨 사람들과 박...
                                                 
시리고 아픈 땅, 제주
                                                 
눈 가리고 아웅
                                                 
누가 글로벌 인재인가?
                                                 
유권자, 즉 국민이 ‘단일화’를 ...
                                                 
[기고] KAL858기 사건의 진실을 위...
                                                 
“근혜를 보면 그 아부지를 생각한...
                                                 
[오영수 시] 시든다는 것은
40706 이북의 ‘3대 세습’은 나쁜 것일...
12176 [성명서] 천안함사건 진실규명을 ...
7165 갑판병 김용현, “물에 대해서는 ...
7000 이재용은 왜 석방됐을까? 적폐 사...
6251 천안함사건 진실규명 범시민사회공...
5443 민주평화당 20석만 되면.. ‘안철...
5039 정상회담 제안, 역사의 대세 막을 ...
4928 [논평] 청와대는 내일이라도 천안...
4756 MB의 비참한 말년, 결국은 그 스스...
4362 눈 가리고 아웅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3 진미파라곤930호 (주)민진미디어 | 발행.편집:신상철 | 등록번호: 서울 아01961 | 발행일: 2012.02.15 |
이메일: poweroftruth@daum.net | 사업자번호: 107-87-60009 | 대표전화: 02-761-1678 | 팩스: 02-6442-0472 | 통신판매: 2012-서울영등포-0188호
회사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고/사업제휴문의 | 기사제보 | 칼럼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