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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의 실체는 친일, 그들이 말한 독립이란?
[조선역사 에세이] - 50 나는 서재필이 이완용보다 싫다
김갑수 | 2017-01-03 13:55:0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독립협회의 실체는 친일, 그들이 말한 독립이란?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50

급진개화파 변란이었던 갑신정변의 뒤를 이은 것은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의 실체는 우리의 통념과는 많이 다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독립협회의 간부라는 사람들의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립협회는 고문에 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부회장 윤치호 (나중에 회장됨), 위원장에 이완용 등이었다. 회장단 중에서 이완용과 윤치호는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친일파였다. 안경수 (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이토의 밀정 배정자를 맡긴 이)는 1898년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 양위 음모를 꾸민 사람이다.

이 밖의 위원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친일 단체 정우회의 총재를 지냈던 김종한, 미국 유학 출신으로 총독부 남작 겸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상호, 을사오적 이근택의 동생이면서 총독부 남작인 이근호 등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간부와 위원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이상재, 주시경밖에는 없다.

1898년 독립신문의 논설에는, ‘이토 히로부미 씨는 당금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되어 있다.

그들이 말하는 독립은 조선의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는 음모를 독립이라고 포장하여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서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요릿집 국취루에서 환송 잔치를 열어 주었다. 이토는 그 날 윤치호에게서 받은 선물에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는 답례로 자신의 사진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그가 윤치호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형 은찻잔이었는데, 거기에는 새로 지은 독립문이 부조되어 있었다.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독립신문은 1896년 10월 10일자 논설에서, 조선의 인민에게 '무명옷을 버리고 모직과 비단옷을 입고, 김치와 밥을 버리고 소고기와 빵을 먹으라'고 권유했다. 우리는 이런 논설에서 무개념의 극치를 읽는다. 이런 무개념은 무조건적인 서양 추종에서 나온 것이며, 이 시점의 서양 추종이란 곧 일본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독립협회를 비판 공격하고 나선 단체가 있었다. 도약소였다. 도약소에 참여한 유림들은 전국적으로 반개화 상소 운동을 벌였다. 도약소는 독립협회의 혁파를 요구하고 나섰다. 양측은 팽팽하게 맞서며 상호 고소고발전까지 벌였다.

그러나 도약소는 외세의 강요로 해체되었다. 오늘의 한국인은 자자한 독립협회의 명성은 들어 익히 알고 있지만 도약소는 아예 존재 사실 자체도 모른다. 우리가 배워온 역사라는 게 어떤 것인지 그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나는 서재필이 이완용보다 싫다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극동에서 다 꺼져가고 있는 약소국 조선에 가면 할 일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소국의 왕에게 독립신문을 만들어 나라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야 열강의 침략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왕은 그가 강대국 미국인이란 점을 감안했다. 그래서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했다.

약소국의 왕은 그에게 신문사 건물을 장만해 주고 창업자금 4,400원을 따로 주었다. 그리고 미국인의 연봉으로 3.500원 정도를 약속해 주었다. 당시 소 한 마리 가격이 20원 ~ 40원일 때였으니 소 100마리 값이 넘는 연봉이었다. 그는 신문사 창업 자금 중 1,400원으로 자기 저택을 구입했다.

갑신정변이라는 이름의 친일 쿠데타에 실패한 후, 목숨을 부지하려고 군함을 얻어 타 일본에 갔고, 일본에서도 겨우 뱃삯을 장만하여 미국에 갔던 기억이 격세지감으로 느껴졌다. 그는 미국에서 접시를 닦으며 워싱턴 대학에 다닐 때의 일도 떠올려 보았다.

마침내 그는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일약 그는 약소국의 지도자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약소국의 말과 글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소국에 와서 단 한 번도 약소국의 말이나 글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18년 동안 성장한 그 나라의 언어를 정말로 잊은 것이라면 그는 기억 상실증 환자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병자는 아니었다.

약소국의 왕은 화가 치밀었다. 그 미국인이 독립이라는 위장을 쓰고 교묘히 일본 편을 들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조정을 공격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주관하는 협회는 친일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왕은 추방령을 내렸다. 미국인은 갑신정변 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그의 하수인들이 출국을 만류했다. 그는 영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는 약소국의 조정을 협박했다. 아직 계약 기간이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임금 2만 8,800원과 미국행 여비 600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했다. 아니면 미국 정부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약소국의 조정은 그의 요구를 전부 들어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일본인들을 따로 만났다. 그는 그동안 독립신문이 일본을 많이 도왔으니 도의상 일본 측에서 신문을 매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독립신문의 매각 교섭은 귀국 시일이 촉박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훗날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면서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그는 회의가 시작될 때에 미국 국가를 부르게 했으며, 의장 취임사에서, “만일 대회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의장직을 사임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먼 훗날 그 약소국이 독립을 얻게 되자, 80세가 넘은 그는 다시 약소국에 들어와 기웃거린다. 인천에 도착한 그는 “조선은 비누 하나도 만들지 못하는 나라”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그 나라의 국사를 좌지우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약소국에는 그의 똥속을 알고 있는 이승만이라는 노회한 사람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승만과 불화를 겪는다. 그는 친미 인사인 장덕수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어느 날 그는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는 성명을 내고 다시 자기 나라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서대문 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그는 오른 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있다. 동상 아래에는 그 미국인을 기리는 명문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 조국의 자주 독립과 민주 개화운동의 위대한 용장이며 우리 민간 신문의 신조인 독립신문의 창간 은인에 관한 공적을 간추려 명문에 대신한다. -

일단 ‘민간신문의 신조’란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명문에 대신한다’는 말이 어법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신문들은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이라 하여 하루 쉰다.

대한민국의 최대 일간지 조선일보는 1996년 서재필 일대기를 다룬 특집 기사를 대대적으로 게재하면서 그에 대한 전시회까지 열어 붐을 조성하려고 했다. 미국 워싱턴 D.C 한국총영사관에도 2008년 그의 동상이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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