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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패망시킨 전범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조선역사 에세이] 47조선침략전쟁의 전범 5개국은 일-미-영-프-러 순
김갑수 | 2016-12-29 13:47:1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조선을 패망시킨 전범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47


제국주의는 다른 민족을 침략한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와 대립되고, 전제정치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대립된다. 그런데 유럽의 열강과 일본은 자국민에게는 자유를 누리게 하고 민족주의를 강화하면서 다른 민족에게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억압했는데, 이 이중성이 곧 제국주의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란 ‘주의’라고도 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국제강도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의 발달을 산업혁명으로 연결시킨 유럽 국가들은 예전에 없던 생산의 과잉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제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생산자는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게 되었는데, 시장을 찾고 보니 그곳에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서구 열강이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군사력이 약하고 빼먹을 게 많은 나라 순서로 침략하기 시작한 것이 이른바 ‘식민지’였다. 그리고 식민지를 갖고 있는 나라를 제국이라고 했다. 게다가 식민지에서는 노예와 여자까지 얻을 수 있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위 체제 확립을 이룬 영국은 19세기 중엽 이미 자기네 영토보다 75배를 넘는 50개 이상의 식민지를 경영했다. 그들은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 전역에 걸쳐 통상권을 지배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들은 ‘대영제국의 영토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더욱 황당한 말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거였다. 물론 이 말은 그들이 얼마나 인도를 황홀히 여겼는지를 역설적으로 짐작케 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인도를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그들의 강도 근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다.

이런 영국도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독일, 미국, 프랑스 등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유럽과 미 대륙은 바야흐로 자본주의 강국끼리의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18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유럽의 경제 불황은 이런 각축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종주국 영국은 광범위한 식민지의 결속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에즈 운하 주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인도 지배를 강화했으며 영연방 자치령을 본국과 결합하려 하였다. 한편 불황이 장기화되자 유럽의 제국들은 더 많은 식민지를 얻으려 하는 과정에서 빈번한 분쟁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880년부터 30여 년 동안 아프리카를 나눠 먹는 과정에서, 외교적 대립과 군사적 충돌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1898년 영국의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와 프랑스의 대령이 통솔하는 군대는 수단의 나일 계곡에 있는 파쇼다에서 일촉즉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교차점에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들은 금세 야합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모로코를 각각 먹는다는 것으로 묵계가 이루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일이 모로코에서 프랑스에 시비를 걸었다. 추악한 이전투구가 전개되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지역 전쟁도 결국 식민지 분할 전쟁이었다. 남의 나라, 남의 영토를 놓고, 선점한 제국과 우리에게 부스러기라도 떼어 달라는 후발 제국이 벌이는 분쟁과 대립은 하나같이 더러운 싸움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럽의 제국들은 식민지 경영의 명분으로, 대상국의 질서 유지와 문명 혜택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약탈과 학살로 나타났다. 예컨대 벨기에의 군인은 고무 채집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콩고 주민의 팔 다리를 잘랐다. 이런 일들은 식민지 침략과 지배 과정에서 어디서든 예외 없이 빈번히 나타났다.

영국은 금과 다이아몬드가 새로이 발견된 땅을 빼앗으려고 보어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보어인 게릴라들은 무섭게 저항하며 영국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보어인을 우습게 안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할퀸 것이었다. 그러자 영국은 보어인 섬멸 작전을 무자비하게 펼쳤다.

영국은 인구 50만, 병력 7만인 나라에 45만 명의 정규군을 투입하여 모든 전답과 가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비전투원이 대다수인 보어인 21만 명을 집단 수용소에 넣었다. 시설과 대우가 최악이었던 이 수용소에서는 불과 열 달이 안 되어 2만 구의 시체가 처리되었다.

이제 제국주의의 배후에는 과잉 생산자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그림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대 금융자본가와 무기산업자들이었다. 전자는 금융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손쉽게 전환하기 위하여, 후자는 매출의 지속과 확대를 위하여 극우주의자들과 결탁, 유착했다.

1910년 조선 망국 이후 시점을 기준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20개국 전후, 독일과 스페인과 러시아는 10여 개국,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가 5개국 정도의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 밖에 이태리, 포르투칼,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일본 등이 제국주의 열강에 합세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일본은 비서구권에서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조선침략전쟁의 전범 5개국은 일-미-영-프-러 순

조선의 19세기는 망국으로 치달은 계절이었다. 1811년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가 쓰시마에 다녀오는 것으로 전통적 방식에 의한 조일관계는 끝났다. 이로부터 일본은 조선으로부터의 수혜자에서 조선에 대한 가해자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다.

1816년 영국 해군 대위 바질 홀이 조선의 서해안을 조사하고 조선 군민과 접촉했다. 바질 홀은 유구 해역도 탐사하고 영국에 돌아가서 『조선 서부와 대유구 섬 발견 항해기』를 출간한다. 서양인들이 아시아를 ‘발견’의 감각으로 접근한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1845년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라고 하는 김대건은 프랑스 주교 페레올 등과 함께 비밀리에 조선에 잠입했다. 그는 프랑스인의 서해 입국로를 탐색하러 황해도에 갔다가 체포되었다. 나는 아직도 김대건 따위를 순교성자로 기억하며 동상까지 모셔 놓고 있는 한국 가톨릭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이 없다.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의 바다는 고요의 바다에서 전쟁의 바다로 돌변했다. 서양 함선들이 노골적으로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함선과 상선들이 조선 해안으로 대거 밀어닥친 것은 1863년 고종 즉위 이후부터였다. 먼저 미국 제너럴셔먼호의 난동과 독일계 유대상인 오페르트 일당의 도굴 만행이 자행되었다.

급기야 프랑스 해군과 미국 해군의 조선 침략이 벌어져 조선은 일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866년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인근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다가 평안감사 박규수가 지휘한 조선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같은 해인 1866년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도에 침범했다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에게 기습당해 퇴각했다. 이른바 병인양요였다. 이때 프랑스군은 조선의 규장각 도서 등을 대량 훔쳐갔는데 아직도 반환하지 않고 있다. 사실 루브르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장물박물관’이라고 해야 적합하다.

미국은 1871년 조선을 재침략했다. 아시아함대 사령관 J.로저스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남양만에 도착한 후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했다. 미군은 조선에 자기들의 탐측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강화도 해협에 두 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침범을 경고하고 즉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조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광성진으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일단 경고용 포격을 가하였고 이에 미군은 잠시 물러났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군의 경고용 포격을 빌미로 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해 왔다.

이를 조선정부가 거부하자 미군은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00명으로 강화도의 초지진을 무력 점령하고, 이어서 덕진진 ·광성진까지 차례로 점령하였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이른바 신미양요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이 근대무기를 앞세운 프랑스와 미국의 무력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조선 민중의 저항 의지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도발했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무단 침입하여 초지진을 공격하고 영종도의 영종섬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일본 해군은 연이어 해로 연구를 한답시고 강화해협에 함선을 보내 선제포격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이토 히로부미의 기획 작품이었다.

다음 해인 1876년 끝내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최초의 대외통상조약이 강제로 집행된 불평등조약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몰락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4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굴복한 후 서구열강 5개국으로부터 동시다발적 침략을 받고 있었던 청나라도 더 이상 조선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만한 처지에 있지 못했다.

조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두 차례의 전쟁이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이 그것이다. 20세기 초 조선의 바다에서 터진 러일전쟁은 조선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개되었다. 전쟁은 1904년 춘궁기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여순 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함대를 기습했다. 대한제국은 허울뿐인 영세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아마겟돈’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 조정을 협박하여 이른바 한일의정서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이것으로 일본은 한국에서 군사기지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반도에서의 외국군 주둔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110년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다.

일본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을 강행했다. 협약서에 서명을 마친 일본공사 하야시는 한국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의 수염을 장난삼아 한 번 건드려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로써 한국은 사사건건 일본이 임명한 고문들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905년 을사년 7, 8, 9월은 조선의 멸망이 브레이크도 없이 가속된 시간이었다. 제국주의 미국과 영국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엄청난 전비를 지원했다. 미영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서의 정치적 우월권을 인정해 주었다. ‘우리는 다른 곳을 마음껏 먹고 있을 테니 너희 일본은 조선반도를 독식하라’는 식이었다.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차기 대통령)와 일본 수상 카스라 사이에 음습한 밀약이 맺어졌다. 영국은 을사년 8월에 이른바 영일동맹이란 것으로 일본과 교합했다. 을사년 9월에는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포츠머스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 우려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이권을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다.

구미 열강의 보증과 러시아의 기권을 얻어낸 일본이 급기야 조선 침탈을 거의 완료한 결정적인 사건은 을사늑약의 체결이었다. 그 해 11월 18일에 체결된 이 조약으로써 조선 정부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는 어떠한 조약도 타국과 맺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조선통감부를 설치했다. 외교권의 박탈은 사실상 주권 상실을 의미했다. 그리고 통감부의 설치는 통치권의 찬탈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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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보스코프스키  2017년1월23일 08시45분    
아우슈비츠(그리고 야세노바츠)를 처단한 서구인들이 문서에서 지적한 영국의 야만적 수용, 학살 행위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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