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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최악의 사대주의자 김옥균과 갑신정변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
김갑수 | 2016-12-28 12:23:3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조선 역사 최악의 사대주의자 김옥균과 갑신정변(1)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46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에 힘입어 개화 세력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1880년 조선 조정은 일본에 3차 수신사절단을 파견했다. 정사 박영효,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이하 37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에는 김옥균이라는 수행원이 있었다. 그는 서른 두 살의 야심 찬 청년이었다.

김옥균은 요코하마에서 도쿄까지 타고 간 일본의 철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일본어도 조금 할 줄 알았고 일본 사정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른바 지일파였다. 그가 수신사 일행에 낄 수 있었던 것은 고종과 민씨 세력의 추천 때문이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

이런 김옥균의 말은 학생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아주 감미롭게 들렸다. 그는 게이오기주쿠 학원장 겸 시사신보사의 주필인 후쿠자와 유키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는 것은 일단 이용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김옥균은 몰랐다. 후쿠자와는 세속적이고 예민한 논설로써 일본 문화계의 실세로 있는 위인(爲人)이었다.

그는 김옥균을 많은 일본인에게 소개했다. 일본의 저명인들은 김옥균에게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이 보기에 김옥균은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무엇보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실학에 심취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김옥균을 추앙한다고 말했고 김옥균은 그것을 믿었다. 그들은 김옥균의 용모와 인품까지를 칭찬했다.

후쿠자와는 김옥균 등의 조선 개화파를 이용해 일본의 국위를 선양함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떨쳐 보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인들에게 인쇄기와 활자를 기증했다. 한국 최초의 신문이라 말해지는 한성순보는 이렇게 해서 발간된 것이었다. 사후에 후쿠자와는 조선에 신문을 보급한 문화인으로 자신의 이력을 치장했다.

후쿠자와의 지원으로 김옥균은 외무대신 이노우에와의 회동에 성공했다. 사실 김옥균의 애초 관심은 이노우에에 있었다. 그는 일본의 후원으로 조선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싶다는 심경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털끝 하나라도 썩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김옥균은 다산 정약용의 말을 자기 말로 만들어 사용했다. 이노우에는 김옥균을 ‘한국의 지사’라고 치켜 올렸다. 수신사 일행이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떠났지만 김옥균은 일본에 남았다. 김옥균은 이노우에에게, “조선의 개혁은 완만히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하루바삐 수구파를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 김옥균의 입에서 나온 말에는 이노우에조차도 놀랐다. 김옥균은 대량의 총포와 탄약을 대여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남의 나라 정쟁에 무기를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옥균을 그런 큰 그릇으로까지는 여기지 않았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무기를 조달하려는 계획을 일단 단념했다. 그 대신 그는 돈을 요구했다. 터무니없이 큰 금액이었다. 그가 메이지 정부에 요구한 액수는 300만 엔이었는데, 그것은 조선 조정의 연간 조세액에 맞먹는 금액이었고 일본 정부 예산의 10분의 1에 달하는 것이었다.

아무 소득 없이 조선에 돌아온 김옥균은 이조참의에서 한직으로 밀려났다. 다만 별입시의 자격은 박탈되지 않았다. 별입시란 왕궁에 출입하며 국왕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는 특권을 활용하여 고종을 만나 차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조선의 조정은 재정이 바닥나 있는 상태였다.

김옥균은 고종의 위임장을 가지고 다시 일본에 갔다. 그러나 러시아를 의식한 일본 정부는 차관에 대해 무웅답으로 일관했다.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차관 애기만 나오면 말을 돌렸다. 차관 교섭에 실패하고 돌아온 김옥균은 궁지에 몰렸다. 개화파는 힘을 잃어갔다. 맨 먼저 등을 돌린 것은 민영익이었다. 민영익의 이탈로 개화파는 더욱 위축되었다.


조선 역사 최악의 사대주의자 김옥균과 갑신정변(2)
경우궁 정원의 피비린내가 일주일 넘게 가시지 않았다

1884년 베트남에서 발발한 청불전쟁으로 청의 병력 반이 조선에서 철수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해져 가던 청의 세력이었는데 병력까지 반감한 것이었다. 이에 편승하여 일본은 김옥균을 다시 이용하기로 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김옥균과 박영효를 부추겼다. 정변을 감행하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언질을 준 것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을 또 믿었다. “간신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가 할 테니 관군의 반격이 있을 경우 그것은 일본이 막아줘야 합니다.” 그들은 거사 날짜를 한성우정총국의 개국식이 있는 12월 4일로 합의했다. 당연히 개국식에는 조정의 주요 대신들은 물론 외국의 외교관들이 거의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신병을 이유로 불참을 통고했다.

공식 개국 행사가 끝나고 축하연이 시작될 무렵 달이 떠올랐다. 김옥균은 초초한 낯빛으로 경복궁 쪽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각본대로라면 대궐에서 불길이 올라야 했다. 그러면 놀란 대신들이 대궐로 달려갈 테고, 그때 매복시켜 놓은 자객들이 그들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길은 오르지 않았고, 얼마 후 부하가 달려와 방화에 실패했음을 알렸다.

김옥균은 즉각 우정국 옆의 민가에 불을 놓으라고 명령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을 타고 불길은 삽시에 우정국 건물로 옮겨 붙었다. 불길에 놀란 민영익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자객이 그의 얼굴을 비롯한 10여 군데에 자상을 입혔다. 민영익은 기어서 우정국 건물로 들어갔다.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을 보자 건물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건물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김옥균의 수구파 노상 살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서둘러 고종을 알현했다. 아직 우정국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김옥균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청군이 반란을 일으켜 창덕궁으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신하시옵소서.”

고종은 경우궁으로 급히 옮겨갔다. “이제 할 수 없사옵니다. 일군에게 경호를 의뢰하겠습니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종이를 꺼내 ‘일사래위(日使來衛)’를 쓴 후 왕의 서명을 요구했다. 순간 고종은 부쩍 의심이 일었지만 할 수 없이 서명하고 말았다. 왕이 서명한 일사래위는 일종의 출병 의뢰서였다. 출병 의뢰서를 접수한 일본군은 경우궁에 가서 고종을 굳게 지켰다.

김옥균은 우정국에 있는 대신들에게 알렸다. 국왕은 경우궁에 있으며, 모든 신료들은 그리 들라는 어명이 내렸노라고 했다. 신료들은 하나 둘씩 드문드문 도착했다. 김옥균은 궁문 앞에서 들어가는 신료들의 신분증명서를 확인하도록 했다. 그는 수구파 대신들만을 들여보냈다. 문 안에는 신복모 등 7명의 자객이 어둠 속에서 칼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사관생도들로서 김옥균을 추종하던 10대 소년들이었다.

후영사 윤태준, 전영사 한규직, 좌영사 이조연 등 3인의 군부 요인이 칼에 쓰러져 헛간으로 던져졌다. 다음으로는 민비 세력인 민대호와 조영하가 희생되었다. 결국 수구파는 누구 하나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피비린내가 경우궁 정원에서 일주일 넘게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김옥균 일당은 다음 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신내각을 발표했다. 박영효는 군사령관 겸 한성판윤에, 김옥균 자신은 재정을 장악할 수 있는 호조판서에 취임했다. 그러나 속은 것을 안 민비의 반격이 있었다. 민비는 막무가내 창덕궁으로 옮겨가서, 전 우의정 심순택을 청의 병영으로 보냈다.

심순택은 청의 원세새 등을 만나 왕과 왕비의 구출을 요청했다. 청군은 즉각 출동했고 일본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청과의 전쟁 준비를 막 시작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당장은 전쟁할 의사가 없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군사들에게 철수를 명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패주하는 일본 군사에 섞여 일본 공사관을 거쳐 인천으로 도망쳤다. 일본에 가는 군함을 타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군함을 타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이른바 갑신정변 3일천하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조선 역사 최악의 사대주의자 김옥균과 갑신정변(3)

사대주의자의 말로는 이토록 처참했다

일본에 간 서재필 등은 겨우 뱃삯을 마련하여 미국으로 갔다. 무익한 외교 분쟁을 꺼린 일본은 김옥균을 연금했다. 그를 칭찬하고 심지어는 추앙한다던 일본인 누구도 김옥균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후쿠자와도 그리고 이노우에도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2년 후 김옥균은 삿보로의 외딴 섬으로 옮겨졌다.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다가 겨우 기력을 찾았다. 이어 그는 결막염에 걸렸다. 일본 정부는 이 귀찮은 인간을 손대지 않고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한편 일본은 갑신정변을 빌미삼아 조선과 한성조약을 맺었다. 중국과는 천진조약을 체결했다. 이 두 조약은 일본에 엄청난 이권을 안겼다. 모두가 김옥균의 덕택이라고 일본인들은 말했다.

김옥균은 유폐 생활에서 벗어나 도쿄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가 혁명의 꿈을 포기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쯤에서 그는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을 터이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무모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있었다. 마침 오사카에서 온 안경수라는 한국인이 지독히도 요염하게 생긴 소녀를 데리고 김옥균에게 나타났다. 무슨 이유인지 김옥균은 소녀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보인다. 그는 소녀를 자기 숙소에 묵게 하면서 한문과 붓글씨를 가르쳤다. 그는 여느 남자와는 달리 소녀의 성적 매력에 관심을 나타내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김옥균은 그렇게 해야 소녀를 자기 수중에 제대로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녀는 김옥균이 짜증스러웠다. 그녀에게 붓글씨 같은 것을 가르쳐 줄 남자는 김옥균 말고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녀는 도움을 받은 만큼 응당 대가를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소녀의 몸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소녀가 원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권력이나 아니면 돈을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얼마 더 참으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마침내 김옥균은 그녀를 예쁘게 치장시키더니 도쿄의 유서 깊은 주택가에 있는 어느 저택으로 데려갔다. 김옥균은 소녀를 옆에 앉히고 50세가 다 되어 보이는 수염 난 일본인과 바둑을 두었다. 그날로 소녀는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수염 난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였고 그 한국인 소녀는 배정자였다. 이토는 그녀를 양녀로 삼아 곁에 두었다. 젊은 여자를 첩으로 삼는 일본인들의 방법이 그런 것이었다.

조선 통감의 꿈이 있었던 이토는 배정자를 먼저 조선의 조정에 보내 분위기를 염탐케 하였다. 김옥균도 배정자에게 몇 가지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배정자는 이토의 지시 사항은 열과 성을 다하여 수행했지만 김옥균의 지령은 받은 날로 잊어먹었다.

배정자가 만난 남자 중에는 김옥균 같은 유형이 의외로 많았다. 여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돈이나 권력인데, 쥐뿔도 없으면서 교양이나 지식으로 자기를 엮으려 하는 남자들을 그녀는 많이 겪었던 것이었다. 배정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것은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김옥균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 같은 것이 없었다. 김옥균은 그렇게 일본인 동첩에게까지 이용당하고서도 여전히 자기는 비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바로 이때 김옥균에게 한 장의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청의 실력자 이홍장의 양자 이경방이 보낸 것이었다. 이경방은 일본 주재 공사로 재직한 적이 있어서 김옥균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김옥균은 역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은 있었노라고 흡족해 했다. 그는 초청자인 이경방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어서 청에 가서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 자신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조선에 복귀하고 싶었다.

김옥균은 안내인 격으로 따라 붙은 홍종우, 청 공사관 관리 오보인 등과 함께 상해 행 사이쿄마루에 승선했다. 상해에 도착한 그들은 미국 치외법권 지역에 있는 동화여관에 투숙했다. 김옥균과 홍종우는 나란히 방을 잡았다.

아침이 되자 홍종우는 김옥균의 방문을 밀어 보았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고 침대에 앉아 안약을 넣고 있던 김옥균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홍종우는 품 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는 김옥균의 가슴을 정확히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듬 해 봄 진달래가 보라색으로 산을 물들이고 있는 서울 양화진 형장에서는 김옥균의 시신에 대한 육시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몸통은 한강의 물고기에게 던져졌고 그의 머리와 다리는 형장에서 얼마간 햇볕을 쪼이게 한 다음 ‘모반대역죄인옥균’이라고 쓴 휘장을 날리며 조선 8도를 순회했다. 이것은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불과 11년 전의 일이었다. 악성 사대주의자의 말로는 이토록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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