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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챠려 준 밥상도 못먹은 쪼다같은 새끼들”
[보수선생전(傳)-9] 죽 쒀서 개 준 87년 대선
뒷북의 달인 | 2012-06-28 18:24: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박종철이 그야말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럼에도 그에 대해 정부가 허위와 독선을 일삼자, 민심은 드디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정부에 대해 ‘참다 참다 못한’ 사람들이 움직인 것이다. 그때가 되어, 전두환 정권은 정신을 차렸을까. 글쎄, 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연일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고, 또 그에 대해 폭력적인 진압이 자행되던 중,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국민들이 끊임없이 요구해 온, ‘대통령 직접선거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내 나라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대통령은 직접선거제가 아니라 간접선거제였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의 핵심 중 하나인 대통령 간선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라는, 이름만 거창한 허수아비들이 우루루 장충체육관에 모여, 하나마나한 투표로 형식적인 대통령 선출을 하는 그런 제도였다.

 뭐? 미국도 대의원을 통한 간접선거제로 대통령을 선출하지 않느냐고?

 한국에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적용시켜야 한다고?

 글쎄, 아래 투표 결과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1972년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 박정희 선출 (투표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
1978년  07월 06일: 제9대 대통령 박정희 선출 (투표 2,578명, 찬성 2,577표, 무효 1표)
1979년 12월  06일: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선출 (투표 2,549명, 찬성 2,465표, 무효 84표)
1980년  08월 27일: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선출 (투표 2,525명, 찬성 2,524표, 무효 1표)

 어떤가? 기가 막히지 않은가? ‘100% 투표 - 100% 찬성’이라는 북녘의 그것과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해 주는 역할을 맡은 뒤, 이듬해 제5공화국 헌법 발효와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해체되었지만, 5공 헌법 하에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전두환과 민정당은 차기 대통령도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뽑을 생각이었다. 4·13 호헌조치는, 이러한 5공헌법을 고수할 터이니, 괜히 대통령 직선제 같은 소리 하지 마라는 거였다.

당연히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이튿날인 14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사들이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한층 더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5월 18일, 그래도 설마설마 하던 박종철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 은폐되었음이 폭로되고, 급기야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자, (7월 5일 사망) 그야말로 ‘뚜껑이 열려 버렸다’.

“아니 그런데, 최루탄은 가스로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물건 아닌가요? 그걸 맞고 죽을 수도 있나?”

 우리 중 가장 어린 멤버가 물었다.

“본데는(본래는) 그렇지. 본데 하늘로 보고 쏴가꼬 터주는 기라요. 그란데 뭐 경찰이 다급해가 그랬는지, 아이모 용심이 나가꼬 ‘그래 함 죽어봐라’ 하고 쐈는지는 몰라도 간혹 사람을 보고 바로 쏘는 경우도 있었다케. 거, 와, 4·19 때도 고등학생 하나가 그래가 안 죽었나. 이때 그 연세대 학생도 비슷한 일이 생긴 기 아일까 싶다. 내사 안 봐서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자니, 이 영감님이 ‘보수선생’이 아니라 ‘진보선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그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나라, 이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지만, 방법이 다르고 시각이 조금 다른 것 뿐이지 않을까.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부산에서도 데모하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 황보영국이라는 이름이었나요?”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출처 : 민주노총 열사추모 홈페이지>

 황보영국. 박종철과 이한열의 이름은 많이들 알지만, 이 청년의 이름은 귀에 설다.

당시 26세의 노동자였던 그는,  2월 7일 박종철 추도집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경찰에 잡혀 영도경찰서로 이송됐다. 난생 처음 경찰에 잡힌 영국은 1주일 가량을 영도경찰서, 남부경찰서 등을 돌며 경찰의 가혹한 억압을 경험하게 됐다. 그 체험이 그를 6월 항쟁의 전면에 서게 만들었다.

경찰의 욕설과 반인권적인 처우도 못 마땅했지만, 무엇보다 영국이 참을 수 없는 건 TV뉴스였다. 화면에선 김만철 일가의 망명 소식만 보도됐다. 당시 전국은 박종철 열사 추도 분위기로 시끄러운 때였다. 분노한 영국은 유치장에서도 자살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폭력정권을 몰아내겠다고 했단다.

청년은 결국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석달 뒤인 5월 17일 오후 4시 47분. 부산 부산진구 부전2동 옛 부산상고 앞, 그러니까 지금의 서면 롯데백화점 앞 복개천 도로에서 영국은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자신의 몸에 라이터로 불을 댕겼다. 영국은 쓰러질 때까지 '민주쟁취,독재타도'를 외쳤다.

인근 주변 식당의 주인과 아주머니들이 세숫대야로 물을 뿌려 불을 끄려 했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백병원으로 실려 가면서도 외쳤고,침상에 누워서도 소리쳤다. 그는 8일 후 5월 25일 새벽 5시에 숨졌다. 정의감에 불타던, 피끓는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안타까운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영국이 죽자 경찰관 서너 명이 병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경찰) 얼굴을 봐서 시킨대로 해달라고 말했다.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강압적인 분위기 탓에 영국의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찰은 영국을 화장해서, 유골을 묻지 말고, 뿌리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아침 영국의 유골은 당감동 화장터에서 소각돼 사라졌다. 임종과 장례는 불과 하루 만에 끝났다.

 경찰의 통제가 심하다 보니 영국의 죽음은 언론이나 재야단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또 유족들도 자식이 죽은 마당에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없다며 나서길 꺼렸다. 영국 말고도 남은 4명의 자식을 봐서 남들이 모르는 게 좋겠다 싶어 가족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렸다. 그러다 보니 정확한 사인 규명도 안 됐고, 추모할 만한 사진이나 기록도 거의 남은 게 없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모두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보수선생이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러고 보이 들은 것도 같고... 신문에서 봤나 싶기도 한데... 그런데 그거 말고도 또 있었을 끼다. 내가 들은 얘기는, 누가 데모하다가 최루탄 때문에 우째되가 어디 높은 데서 떨어지가 죽었다 카는 소리를 들었어."

 선생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태춘일 것이다.

 항쟁이 한창이던 6월 18일 좌천동 시위는 부산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서면 시위대가 범일 고가대로에서 경찰의 저지선에 막히자 시위대는 촛불을, 경찰 진압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이태춘은 경찰이 쏜 최루탄을 온몸에 뒤집어 쓴채 범일 고가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그는 이후, 봉생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으나 엿새 만에 사망했다. 또 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안타깝게 죽었다.


















<6월 27일 이태춘의 장례미사 후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은 노무현. 그 왼쪽은 문재인>

"멀건 사람을 뚜디리 패고, 잡아옇고, 고문을 하고, 엉? 쥑이고.. 이라이 사람들도 눈이 히떡 디비짔어. 멫날 메칠로 데모로 했다꼬. 언제는 비가 억수같이 왔는데도 그 비로 맞고 했다카이. 사람들이 집에도 안 가. 시청앞이며 중앙동이며 국제시장, 미문화원 앞, 부산역, 서면... 뭐 하이튼 사람들이 꽉 찼다꼬. 경찰 병력이 자꼬 늘었다카지만서도 이거는 뭐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이라. 우째 해 볼 수가 없었을끼야."

 선생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6월 10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항쟁은 점점 그 참여가 늘어나, 26일에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을 때에는 그 수가 세배 이상 늘어났다. 6만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해 진압하려 했으나, 노도와 같은 사람들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운이 다했음이 분명한 군사정권은 최후의 발악으로, 마지막 카드인 군 병력 투입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18일 밤 부산 사태를 본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고명승에게 군 출동 준비령을 하달했다. 지역 사단으로 안되면 전방의 부대라도 빼라는 것이었다.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은 철도청에 군 수송 협조를 요청했고 이종구 2군 사령관도 부산과 마산에 출동할 채비를 마친다.

2010년 공개된 「작전명령 제 87-4호」(군사2급비밀) 제하의 비밀 문건에 따르면 11군단장을 부산·경남 지구, 9군단장을 충남북 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이미 사실상 계엄 체제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진행되었다면, 87년의 부산은 80년의 광주와 같은 일을 겪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하지만 천만다행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결정적인 것은 미국정부의 의중이었다고 한다. 당시 주한 미대사 릴리는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여, 작금의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한편, 무력진압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했고, 국내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고립될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계엄령을 포기한다.

마침내, 6월 29일, 집권여당인 민정당의 대표이자, 차기 대통령 후보이고, 전두환의 오랜 친구인 노태우가 사실상의 항복선언인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 자유언론의 창달
-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6·29 선언은 6월 항쟁의 결과 시민들의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끊임없는 불신과 저항으로 궁지에 몰린 집권여당의 대표가 발표한 이 선언으로 인해 헌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제9차 개정헌법이 발의되었다.

제9차 개정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총 유권자의 78.2%(!!!)에 해당하는 20,038,672명이 국민 투표에 참여하고 이 중 93.1%가 찬성하여 수립되었다. 제9차 개정헌법은 형식적으로는 헌법의 개정 절차를 따랐으나 실질적으로는 입헌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을 변경하는 등 헌법의 제정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그때 참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술집이고 식당이고 사람들이 기분이 좋와가꼬 '오늘 하루 꽁짜!' 카는 집들이 많았다꼬. 대~단했지. 참말로."

웃으며 그때 일을 얘기하는 보수선생의 말을 들으니 우리도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시민, 국민, 민중... 아무튼 뭐라 불러도 좋을, 사람들의 승리. 과연 그 기쁨은 얼마나 오래갔을까.

동화책처럼 '그 뒤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지게 됐지만, 정통 민주세력이자 당시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년 10월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독자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면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엉뚱하게도 어부지리격으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참으로 죽쒀서 개준 꼴이 아닐 수 없었다.
















<후보단일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때 김영삼이하고 김대중이가 합작을 몬해가 노태우가 안 됐나. 밥상 다 차리주이끼네 서로 묵을라꼬 싸우다가 밥상 디비뿐기라. 쪼다같은 새끼들."

보수선생의 어조와 눈빛에서 실망과 경멸이 느껴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때가 가장 보수선생 답지 않았고, 우리와 큰 폭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계속)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9&table=back_book&uid=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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