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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성탄 전야에 만난 야르무크 난민 캠프
시리아 최악의 장소 야르무크 난민 캠프
장유근 | 2015-12-25 09:33:0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시리아 최악의 장소 야르무크 난민 캠프
-2015년 성탄 전야에 만난 야르무크 난민 캠프- 

어떻게 야르무크 난민 캠프는 시리아 최악의 장소가 되었을까
How Yarmouk refugee camp became the worst place in Syria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의 야르무크는 한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안전한 피난처였다. 하지만 봉쇄를 당한 지금, 고립된 주민들에게 야르무크는 음식도, 물도, 탈출의 희망도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Yarmouk, near the centre of Damascus, prospered as a safe haven for Palestinians. Under siege, it is now a prison for its remaining residents, who survive on little food and water, with no hope of escape

-더 가디언(The Guardian), 2015년 3월 5일 기사

Palestinian refugees in Yarmouk, Damascus, queueing for food. Photograph: AP (다마스쿠스에 있는 야르무크 난민 캠프에서 배급을 기다리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행열. 사진제공: AP통신)

메시아를 영접하기 위한 인파들일까…?!
 
놀랍게도 폐허속에 등장한 수 많은 군중들은 팔레스타인 난민 행렬의 모습이다. 2015년 성탄 전야에 난민인권센터로부터 전송된 사진 한장을 통해 지구별에 살고있는 인간들의 두 얼굴을 만나게 됐다. 난민 행렬속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시리아 내 최대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이자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에 위치한 야르무크에 정부와 반정부 단체가 식량 공급을 허용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이 가득한 폐허 속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굶주린 배를 채워줄 빵 한 조각 때문에 폐허로 변한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줄 빵조각은 턱 없이 부족했다. 구호 식량은 겨우 몇 백 가구들이 먹을 양밖에 되지 않았다. 실망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메시아가 아니라 빵 한 조각이었을까. 난민인권센터로부터 전해진 기사를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2015년 성탄 전야를 맞이하는 지구별 한 쪽에서는 한 성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 시리아 최악의 장소 야르무크 난민 캠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On 18 January 2014, barely five miles from the centre of Damascus – with President Bashar al‑Assad’s office complex visible in the distance – a small crowd of desperate people emerged from a seemingly uninhabited wasteland of bomb-shattered buildings. News had spread throughout Yarmouk, a district of the capital that is home to Syria’s largest community of Palestinians, that the government and rebel groups had agreed to allow a delivery of food, briefly opening a crack in a year-long siege that had starved the area’s civilians and caused dozens of deaths.
 
2014년 1월 18일, 수도 다마스쿠스 중심부에서 겨우 5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는, 바르샤 알 아사드(Bashar al-Assad) 시리아 대통령의 집무실이 보일 정도로 수도와 가까운 지역에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이 가득한 폐허 속에서 나타났다. 시리아 내 최대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이자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에 위치한 야르무크에 정부와 반정부 단체가 식량 공급을 허용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로써 일 년간 많은 주민들을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게 했던 봉쇄에 틈이 생겼다.
 
새로 도착한 구호 물품을 받기 위해 난민 캠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가족 중 가장 힘센 사람들을 보냈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파는 아침부터 먼지를 일으키며 거리로 몰려들었다. 구호물품을 전달해주는 구호 요원들은 영양실조로 몸이 몹시 수척해져 넘어져도 일어설 힘이 없던 한 여성을 상기했다. 그 여성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 광경은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구호 요원들 중 일부는 다마스쿠스에 위치한 본부로 돌아가 트라우마 상담을 받아야만 했다.
 
구호 식량은 겨우 몇 백 가구들이 먹을 양밖에 되지 않았다. 실망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다. 그러나 중동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 Relief and Works Agency; UNRWA)의 관계자들은 이번 구호가 선례가 되기를 바랐다. 이들은 과도한 관심이 시리아 정부를 자극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구호 계획을 미리 알리지 않았으며, 안보 상의 이유로 무산될 수도 있었던 구호활동을 지켜보도록 기자들을 초청하는 것을 주저했다. 4일 전, 구호물자 수송대 가까이에서 박격포 폭탄이 터져 수송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구호물품 조달을 성공적으로 마친 1월 18일 이후 UNRWA 관계자들은 신중히 행동하는 것도 더 이상 최선의 방책이 아니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1월 31일, 야르무크로 식량을 공급하는 수송대는 현지 사진가를 동행했고, 이 사진가는 파괴된 건물이 가득한 폐허 속에서 거리로 밀려나오는 대규모 인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 사진은 곧 시리아 내전의 상징이 되었다. 봉쇄당한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UNRWA는 #LetUsThrough라는 소셜 미디어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세계적으로 세간의 이목을 많이 끄는 옥외 광고판 두 곳에 이 사진을 게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 사용자 수백만 명에게 마우스 클릭을 통해 탄원하도록 하는 캠페인이었다. 뉴욕 타임 스퀘어, 도쿄 시부야에서 사람들은 큰 스크린 앞에 서서 셀카를 찍었고, 이 사진들은 연대의 표시로 야르무크에 전송되었다.
 
이것이 바로 야르무크 캠프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방법이었다.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Diaspora)에게 안전한 피난처로 고안되었던 난민 캠프가 지금은 지구상 최악의 장소가 되었다. 수개월 동안 전기도, 물도, 음식도 없었다. 여전히 심각한 것은 응급 의료사건이나 브로커에게 돈을 내고 많은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캠프를 떠나거나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야르무크를 시리아의 가자(Gaza)라고 말한다. 그러나 봉쇄 공격이 대대적으로 가해지고 있는 현재의 야르무크는 훨씬 더 절망적이다. 야르무크는 탈출구 없는 감옥이다.
 
하지만 이러한 악명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2014년 7월 가자지구가 이스라엘 군으로부터 폭격을 당해 전 세계 언론들이 대학살 보도에 달려들자 야르무크 난민캠프는 잊혀졌다. 2014년 1월 UNRWA가 협상을 통해 얻은 봉쇄 해제조치는 한해 동안 단속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식량 공급만 131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종종 필요한 식량의 절반도 채 안 되는 양만이 전달되었다가 12월 6일부터 다시 폐쇄되었다. UNRWA는 지난 12주 동안 식량을 전혀 공급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과 출산 중에 목숨을 잃는 여성들에 대한 소식을 매번 접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확인된 바는 없다”고 크리스 건네스(Chris Gunness) UNRWA 대변인은 밝혔다. 사무소을 몇 군데나 차려놓은 가자와는 달리 UNRWA는 야르무크에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하페즈 알-아사드. 사진 제공: 엔릭 마르티/AP통신)

시리아 내전이 발생한 지 4년째로 접어들면서 다른 도시와 마을의 사람들도 오랜 봉쇄로 고통을 받고 있다. 대개는 알-아사드 정부군에 의해 자행되고 있지만, 알레포(Aleppo) 북서쪽에 위치한 두 시아파 마을 누불(Nubul)과 자흐라(Zahra)처럼 반정부군에 의해 봉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야르무크 봉쇄가 특히나 두드러지는 이유는, 1만 8천 명으로 예상되는, 많은 시민들 뿐만 아니라, 야르무크의 정치적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다. 시리아를 30년 동안이나 통치했고, 지난 2000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준 하페즈 알-아사드(Hafez al-Assad) 시리아 전 대통령은 자국을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 “저항의 축”의 핵심으로 선전했다. 이는 그가 팔레스타인인 권리의 최고 옹호자처럼 보이도록 만들었고, 중동의 다른 어떤 지역에서 보다 시리아 내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힘쓰는 지도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반정부 무장단체의 지배를 받다가 정부군의 포격을 받는 야르무크 난민들은 현재 가자에서보다 훨씬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는 바샤르 알-아사드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역할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되었다.
 
***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기 전, 야르무크는 15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사람들이 여전히 야르무크를 “캠프”라고 부르긴 하지만, 1957년에 난민캠프가 세워지자마자 텐트는 튼튼한 집으로 교체되었다. 그 결과 야르무크는 다마스쿠스의 또 다른 지구(district)가 되었다. 야르무크는 시리아 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용한 최대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65만 시리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시리아 기반 팔레스타인 인권단체의 공동 설립자인 니달 비타리(Nidal Bitari)는 지난 2011년 말 아사드 정권 보안기관의 지명수배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밝힌 뒤 시리아를 떠났다. 하지만 야르무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대부분처럼 그는 폭동이 일어나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어 했다. 니달 비타리가 2013년에 출간된 책에서 야르무크의 최근 정치적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했듯이, 시리아 내 팔레스타인인들은 다른 어떤 아랍 국가보다도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았다. 법적으로 시리아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시민권과 투표권을 제외하고 시리아 주민들이 갖는 모든 권리와 혜택을 갖는다. 이들은 시민과 같은 지위를 누리며, 시리아의 학교와 대학에 다닐 수 있다. 이들의 숫자가 시리아 주민들의 숫자에 비해 매우 적기 때문에(2% 미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위협적 존재로 보지 않으며, 직업, 교육, 결혼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과 시리아인들 간 통합의 정도는 다른 아랍 국가들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다.
 
“야르무크 난민들이 가자지구에서보다 훨씬 더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이 되었다.”
 
2003년 3월, 야르무크를 처음 방문했을 당시 야르무크는 막 시작됐던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다른 아랍권 국가들이 미국의 정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를 조용히 지지했던 반면, 시리아 국영 방송은 맹렬하게 비난했다. 야르무크 난민캠프에 거주하는 젊은 팔레스타인인 수십 명은 미국과 싸우기 위해 이라크로 넘어갔으며, 종종 가족에게 말하지 않고 사라지기도 했다.
 
나는 어느 한 좁은 뒷골목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날은 이삼(Issam)이라는 젊은 청년을 애도한 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이삼은 이라크로 건너가기 전 처음으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랍 6개국에서 온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다마스쿠스에서 버스를 탄 이 팔레스타인 청년은 사촌 두 명과 함께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 아버지한테 전했다. 이후 6일 간은 조용히 지나갔으며, 이 청년의 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이라크 전쟁에 관한 TV보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청년의 사촌 중 한 명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삼이 바그다드(Baghdad)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건 지 채 5 시간도 안되어 이삼은 미군 헬리콥터가 퍼부은 총격에 사망했다. 버스 3대에 나눠 타고 가던 비무장 청년들 13명도 목숨을 잃었다. 이삼의 사촌은 경미한 부상을 입고 탈출했다.
 
2011년 3월, 시리아인들이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에 항의하며 들고 일어나자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있던 시리아 내 팔레스타인인들을 동요시킬 것 같은 징후가 보였다.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시리아 보안 기관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고 있었고, 시리아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비타리 대표에 따르면,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야르무크를 구속하기 시작한 계기는 반군 때문이라기보다 시리아 정부 때문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시킨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나크바의 날(Nakba Day) 행사를 준비하던 2011년 5월, 아사드 정권의 대표들은 골란(Golan) 고원에 위치한 이스라엘 국경에서 시위를 벌일 계획을 알리기 시작했다.
 
비타리와 그의 친구들은 시리아 정권이 내부 봉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고 싶어 하는 것을 의심하고, 이를 경계했다. 그는 야르무크에서 “팔레스타인 청년 연합”을 결성해 야르무크 캠프에 관계된 결정을 내리고자 했으며, 이 연합에는 팔레스타인 정당 대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연합의 첫 번째 회의는 나크바의 날 시위에 대한 것이었는데, 대다수는 참석을 거부했다. 하지만 나크바의 날이 되자 정부는 아침부터 버스를 제공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버스에 탔다. 국경지역에서 시리아군은 버스가 경계선을 통과하도록 했고, 일부 시위자들은 이스라엘 영토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는 울타리에 올라갔다. 이에 이스라엘군은 최루가스와 실탄을 사용했고, 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한 달 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랍 군 패배시킨 것을 기념하는 나크사의 날(Naksa Day)이 되자, 시리아 안보기관이 보낸 자동차는 야르무크 주민들 약 50명을 국경으로 실어 보냈으며, 수백 명의 다른 청년들도 이에 동참했다. 시리아 국영 방송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촬영했다. 다시 한 번 더 사람들은 울타리에 올랐고, 이번에는 이스라엘 군의 총격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 12명은 야르무크 출신이었다고 니달 비타리는 전했다.
 
비록 총격을 가한 것은 이스라엘군이었지만 “유혈사태를 멈추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팔레스타인 단체들에 대한 분노가 더 심했다”고 비타리는 밝혔다. 다음 날 3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자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분노한 조문객들은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총사령부(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General Command; PFLP-GC)의 본부를 둘러쌌다. 오슬로 협정을 거부한 아흐메드 지브릴(Ahmed Jibril)이 이끄는 소규모 단체인 PFLP-GC는 시리아 정권을 확고히 지지하였으며, 많은 주민들은 PFLP-GC를 캠프 내의 시리아 정권 기관으로 보았다. PFLP-GC 보안 요원이 14살 소년을 총으로 쏴 죽이자 사람들은 건물을 급습해서 불을 질렀다. 지브릴은 시리아군의 도움으로 구조되었다.
 
이 사건은 바샤르 알-아사드를 당혹하게 했고, 시리아 내 반정부 단체들로 하여금 야르무크를 대통령에 대한 폭동의 잠재적지지 기반으로 보도록 했다. 쐐기모양으로 꼭지점이 다마스쿠스 중심부를 가리키고 있는 야르무크의 지정학적 위치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야르무크는 시리아에서 빈곤한 두 교외 구역인 알 하자르 알 아쓰와드(al Hajjar al Aswad)와 타다몬(Tadamon)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데, 이 지역들은 이미 반정부군이 장악한 곳이었다. 야르무크의 남쪽은 트인 시골지역으로 반정부군이 장악하기 쉬운 곳이었다.
 
니달 비타리와 그의 친구들은 야르무크가 여전히 중립을 지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저항과 반란의 위협이 커지게 되면서 동요한 시리아 정부는 PFLP-GC에 무기를 들고 행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비타리와 그의 친구들은 놀랐다. 이러한 단계적 권한 확대로 인해 당시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받았던 주요 반군단체 자유시리아군(FSA)은 알-아사드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야르무크 캠프에 들어와 이 지역을 점령하려고 했다. 팔레스타인 청년 연합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 단체는 해체되었다. 야르무크가 무장한 분쟁지역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민간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시리아 대부분의 지역에서도 이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
 
야무르크는 다마스쿠스에서 10년 이상 살았으나 현재는 망명중인 하마스 무장그룹 지도자 칼레드 마샬(Khaled Meshaal)이 지난 2012년 2월 카타르로 간 이후 자유시리아군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상(prize)이었다. 칼레드 마샬은 반정부 폭동을 규탄하라는 시리아 정부의 간청에 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무장 반군의 주요 재정적 후원자중 하나였던 카타르의 초대에 응했다. 이는 “저항의 축”의 지도자인 아사드 대통령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었다.
 
2012년 12월, 자유시리아군과 알 카에다 지부인 알 누스라 전선(Jabhat al Nusra)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아사드 정권을 몰락시키기 위해 전면공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야르무크는 수도 다마스쿠스로 가기 위한 관문이었으며 아사드 정권이 통제력을 잃은 다마스쿠스의 다른 어떤 외곽 지역보다도 수도와 가까웠다. 시리아 공군기가 야르무크에 폭격을 가했을 때인 12월 16일, 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었는데, 나중에 시리아 정부는 야르무크에 폭격을 가한 것이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자유시리아군과 알 누스라 전선의 여단에서는 야르무크 캠프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리아 정부는 포탄을 퍼부어 야르무크 지역에 있는 건물 대부분은 잔해로 변했다.

A girl receives soup from Kafaf, a charitable foundation, in Yarmouk Photograph: Reuters (야르무크에서 한 소녀가 자선단체인 카파프(Kafaf)로부터 스프를 받고 있다. 사진 제공: 로이터 통신)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팔레스타인 주요 단체 PFLP-GC는 며칠 뒤 야르무크에서 달아났다. 일부 사람들은 완전한 통제권을 쥔 반군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민간인 수백만 명도 떠났다. 야르무크에 거주하던 시리아인들은 주로 다마스쿠스 중심부나 다른 도시에 사는 친척, 친구들의 집으로 피난가거나 아예 레바논이나 요르단으로 떠났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시리아 내에서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피난을 떠났다. 비록 다마스쿠스를 장악하려는 반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오늘날 야르무크만큼은 반군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약 1만 8천명의 민간인들이 여전히 야르무크에 살고 있으며 이 중 1천명에서 4천 명 정도는 시리아인인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야르무크가 대부분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명백하다.
 
아사드 정부는 야무크에서의 패배에 대한 대가로 야르무크를 봉쇄했다. 폭리가 심각하긴 했지만 두 세달 동안은 시골 지역과 남부 지방에서 식량은 반입할 수 있었다. 2013년 7월 아사드 정부는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고, 야르무크에 대한 봉쇄는 거의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야르무크 내부에서는 반정부군과 알 누스라 전선 간의 교전이 발생했고, 알 누스라 전선은 이슬람 법정(Sharia courts)에 세워졌다. 야르무크 내부 민간인의 고통을 덜기 위한 돌발적인 시도들도 감행되었다. 2013년 봄, 마흐무드 압바스(Mahumoud Abbas) 팔레스타인 대통령은 150,000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서안 지구(West Bank)나 가자로 이주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2013년 11월, 압바스는 반군과 시리아 정부의 정전과 인도주의적 구호에 관해 논의하기 위한 팀을 다마스쿠스에 파견했다. 그 계획은 집을 잃은 민간인들과 구호 물품의 이동을 위한 안전 경로를 확보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어떤 협정도 아직 성사되지 못했다.
 
2014년 9월, 야무크 외곽에 있는 한 공동주택에서 PFPL-GC 지도자 중 한 명인 아부 아크람(Abu Akram)을 만났다. 1994년 레바논에서 야르무크로 이주한 키가 크고 늙은 그는 한 팔을 버팀목에 의지한 채 서 있었다. 그는 실패한 정전 협상에 참여했었는데, 그 실패를 이슬람교도들의 탓이라 비난했다. 아사드 정권에 적극 협력했고 거칠며 실전에서 단련된 그는 정부군의 봉쇄를 옹호하면서도 어떤 당황스러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UNRWA로부터 야르무크 내부로 들어온 식량이 반군 군사들의 손에 들어가거나, 그들이 암시장에서 판매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봉쇄는 합법적인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장 단체들이 시민들로부터 식량을 뺏어가는 것을 봤을 뿐만 아니라, 야르무크를 위해 보급된 원조 물자가 담긴 상자를 가까운 거리에서 판매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2014년 초 봉쇄 수위를 완화하려는 결정도 비판했다. 아부 아크람은 “포위를 약화시키려 한 것은 실수에요 만약 우리가 한 주 더 봉쇄를 유지했다면, 굶주림으로 하여금 그들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
 
봉쇄의 야만적인 본성은 수 천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 목적은 고립된 민간인들을 기아에 시달리게 해 굴복하게 하고, 항복하게 하려는 것이다. 반면, 무장 세력은 포위군들이 포로들을 말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해, 민간인들이 계속해서 야르무크에 남아있기를 원한다. 21세기 현재에도, 똑같은 전략이 야르무크 뿐만 아니라 시리아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
 
봉쇄 전략은 검문소에서 봉쇄된 지역의 출입 승인서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수익성 높은 사업을 운영하도록 전쟁 경제를 부채질하는 격이다. 그들은 사람과 식량을 밀수하도록 조장하고, 캠프의 일부 시장 물가를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하도록 부추긴다. 2014년 9월 야르무크 북쪽 출입구에 방문했을 때는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시리아 정부군이 길 한가운데 야자수 무리 사이에 세워진 초록색 지구본 기념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바티카(Batikha)-“수박” 광장으로 알려진 교차로 부근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대부분의 창문이 깨진 5층짜리 두 빌딩 사이에 있는 좁은 골목이 야르무크로 들어가는 유일한 경로였다. 근처에 있는 골목들은 행인들을 반군 저격수들의 시야를 방해하기 위해 건물 옥상 사이에 메달아 놓은 큰 흰 천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히잡을 쓴 젊은 여성가 입구 근처에 서 있었고, 그 여성과 남성 일행이 검문소를 담당하는 관리와 대화하며 울고 있었다. 절망적인 분위기로 끝난 것 같은 얼마간의 대화 후 여자와 그는 결국 돌아갔다. 보아하니 둘은 방침을 바꾸어 검문소 관리를 설득할지 또는 포기하고 떠날지 이리저리 방황하며 논쟁하는 것 같았다.

Palestine refugees in Yarmouk queue for food distributed by UNRWA. Photograph: HOPD/AP (UNRWA에서 배급되는 식량을 위해 줄을 서는 야르무크 내 팔레스타인 난민들. 사진제공: HOPD/AP통신)

림 부캐(Reem Buaqaee)라는 이 여성은 본인이 궁지에 빠졌다고 말했다. 그녀는 3개월 전 그녀의 세 딸과 함께 야르무크를 떠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큰 딸은 임신 중이었고, 영양실조로 빈혈이 심각하여 아기를 유산할 위협에 놓여있었다. 나머지 두 딸 역시 건강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캠프를 떠나는 것은 가족이 흩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임신한 큰 딸의 남편뿐만 아니라, 림의 남편과 16살 먹은 아들은 캠프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는 반군 단체들이 남자와 소년들을 캠프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부군이 캠프에 무력으로 진입해 장악하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캠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반군 세력에게 있어 변질로 간주되었다.
 
부캐의 첫 딸은 무사히 출산했고, 다른 두 딸은 건강을 되찾았으므로 부캐는 다시 딸들과 야무크 캠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녀는 봉쇄 중인 감옥, 야르무크에서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살지, 아니면 야르무크 밖에서 자유롭지만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할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날 부캐는 캠프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녀의 요청이 받아들여 졌는지 확인하러 캠프 입구에 갔지만, 검문소 담당자는 부캐와 세 딸 그리고 손녀를 캠프 안으로 들려 보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집은 검문소에서 100미터 밖에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다음날, 다마스쿠스의 두마르(Dummar) 지역에 있는 과도하게 사람들로 빽빽한 공동주택에서 부캐를 만났다. 이 곳은 먼 친척이 그녀와 세 딸에게 임시 거처로 제공한 집이었다. 두려움이 배어있는 무거운 분위기는 야르무크에 대한 대화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 것은 UNRWA 관계자들부터 야르무크 거주자들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봉쇄 공격과 정전 협상의 와해, 그리고 탈출 불가능성에 대해 아사드 정권과 반군 세력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들의 가족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해야 한다. 만약 UNRWA 관계자들은 어느 한쪽이나 다른 한쪽에 의해 오해의 소지를 살 수 있는 말을 해 야르무크로 들어가는 최소한의 접근 방법을 잃을까 염려하고 있다. 캠프를 떠나 다마스쿠스의 여러 지역으로 갔지만 정기적으로 가족과 연락하는 거주자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들은 사람들이 캠프 내부 아사드 정권과 반군 양쪽으로부터 보복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하며 자신들이 언급되길 거부했다.
 
“사람들은 열병을 앓았어요. 관절과 뼈가 뻣뻣해지는 것 기분이 들었고 둘째 딸은 아픈데 어떤 약도 없었어요.”
 
부캐는 여성들이 출산 중에 사망하고, 유아들이 영양부족으로 죽는 봉쇄의 공포를 망설임 없이 묘사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떤 분노도, 흥분도 없이 사실들에 대한 차분한 회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빵을 살수가 없어요. 가장 최악일 때는 쌀 1키로그램에 12,000 시리아 파운드(41영국 파운드)에 달했어요. 지금은 다마스쿠스에서 100 시리아 파운드인 것이 그곳에서는 800 시리아 파운드에요. 이곳에서 100 시리아 파운드에 살 수 있는 토마토는 그곳에서 900 시리아 파운드나 나갔어요. 식량 재고도 어느 정도 있었어요. 하지만 재고가 바닥이 날 때면 야생 식물들을 먹곤 했어요. 야생 작물을 채집해 요리해서 먹었죠. 당분 부족으로 모든 가정에서는 간염에 걸렸었어요. 식수는 더러웠고, 사람들은 열병을 앓았어요. 관절과 뼈가 뻣뻣해지는 것 같았어요. 제 둘째 딸은 부르셀라병에 걸렸고, 약이라곤 그 어디에도 없었어요.” 2013년 10월에는 얼마나 상황이 나빴는지, 야르무크에서 가장 큰 모스크의 이맘은 사람들에게 고양이와 개, 당나귀를 잡아먹는 것을 허락한다는 파트와(fatwa)를 공포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작년 1월의 봉쇄 완화는 제한적이었고 불안정했다. UNRWA의 식량 보급은 차량 폭발과 저격으로 자주 차단되었다. 그 누구도 누가 발포했는지, 왜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부캐는 한 사고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 사고는 3월 23일에 일어났어요. 어떤 차량 한 대가 폭발했을 때, 저는 식량 보급 상자를 받고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29명이 사고로 죽었죠. 사위도 식량 보급 상자를 옮기는 것을 위해 근처에 있다가 포탄 파편에 맞아 현재는 걸을 수가 없어요. 사위가 회복하려면 3개월에서 4개월 정도가 걸릴 거에요.”
 
UN 직원이 말하길 2014년 내내 공급 물품의 양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모자라더라도 아사드 정권과 반정부군 모두 인도적 공급 물자 일부를 캠프 내에 반입하길 원했다. UNRWA는 매일 야르무크에 교전이 있었는지 확인하곤 했다. 종종 UNRWA의 트럭은 다마스쿠스 중심부에 있는 창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고, 때로는 호송 차량들이 출발했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돌아와야 했다. 한 유엔 관계자는 “우리가 야르무크로 접근하는 방법을 확보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들이 우리에게 원조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UNRWA는 지금까지 캠프에 들어가 그들의 필요를 파악할 수 없었다. 지난해 초, 굶주려가는 군중들을 생생히 목격한 이후, UNRWA는 매달 한 번 식량 보급 상자를 수거하기 위해 야무르크 변두리의 황무지를 넘어갈 수 있도록 허락된 사람들과 함께 더 치밀한 프로세스를 개발했다. 각 상자는 쌀 5키로그램, 설탕 5키로그램, 렌즈콩 5키로그램, 기름 5리터, 가루 우유 5키로그램, 할바(꿀로 만든 터키식 과자) 1키로그램, 파스타면 1.5키로그램, 캔으로 된 런천 미트 200그램이 담겨 있다. 이 상자는 10일 동안 8인 가족이 먹을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리아의 다른 지역에는 UNRWA에서 현금을 제공해 사람들이 나머지 한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야르무크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지원이 불가능하다.
 
의약품을 공급하는 것은 시리아 정부가 부상당한 반군 군인에게 전달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굉장히 민감한 문제이다. 초기에 시리아 정부는 탈수증 치료용 소금과 기본적인 진통제만 허가해 주었지만, 끝내 UNRWA는 식량 배급 지점에서 이동식 건강 크리닉을 운영해 당뇨와 고혈압뿐만 아니라 전염성 질병과 다른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치료제를 보급하고 있다. 2014년 불특정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40%의 환자가 장티푸스에 걸린 것을 발견했다.
 
봉쇄에 의해 교육은 매우 악영향을 받아 왔다. 캠프 내부에 있는 거주자에 따르면, 야르무크 내 28개 학교가 모두 폐교했고, 자원 봉사 교사들은 모스크의 지하를 포함한 안전한 십여 곳에서 비공식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전기의 부족은 어린 학생들이 숙제를 자가발전기를 통해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도 그들의 부모가 자가발전기 연료를 감당할 수 있을 경우이고, 그렇지 않으면 촛불에 의지해야 했다. “사정은 가자보다 훨씬 안 좋아요”라고 UN 직원은 말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항상 자존감, 희망 그리고 회복력이 있었어요. 하지만 4년간의 전쟁 후 지금은 포기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은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죠.”
 
***
 
야르무크에 대한 봉쇄 철회와 정전을 위해 이루어진 가장 최근의 시도는 작년 6월 캠프 내부 무장 단체와 몇몇 시민 대표들이 아사드 정부의 13 대표와 만나 새로운 안전 유지군 창립한 뒤 무장 세력이 야르무크 캠프를 떠나도록 합의하는 협정이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아직까지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니달 비타리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서 그는 전화와 스카이프로 야르무크에 있는 친구들과 매일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작년 6월 정전 협정이 실행되도록 뉴욕 UN 본부에서 서구 정부에 로비를 하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협정이 와해되도록 만든 알 누스라 전선의 지지자들을 포함해 서방 국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정전 협정이 프랑스, 영국, 미국의 의도를 거슬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서구 정부의 기본 방침은 망명 중인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전 협정이 아사드 정권에게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다. 이전에 야르무크에서 살았던 탈라 알랸(Talal Alyan)이 최근에 쓴 글에 의하면, 야르무크의 60퍼센트 정도를 장악하고 있는 알 누스라 전선은 노래를 금지하고, 여성들이 베일을 착용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부캐는 이후 설령 봉쇄 지역으로 돌아가는 결정이더라도 야르무크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정부군과 함께 캠프의 북쪽 입구를 통제하는 팔레스타인 정권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그녀는 비공식적인 경로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아사드 정권의 중요한 기관 중 하나인 공군에 있는 친구가 부캐와 그녀의 딸이 캠프로 가는 검문소을 건널 수 있도록 야르무크의 남쪽으로 가는 마을 베잇 사헴(Beit Sahem)에 있는 정부 검문소의 담당자에게 연락해 설득했다. 캠프 내부에는 2014년 9월에 일어난 교전으로 수도관이 파열되어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식수가 공급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미처리된 지하수와 한 개짜리 우물에 의존해야 했다.
 
봉쇄의 두려움이 더욱 커지는 것은 야르무크 전역에 드리워 있는 이슬람국가(IS)의 그림자이다. 비타리에 따르면 IS가 지난해 칼리프의 승계를 선포했을 때, 야르무크 내부의 알 누스라 전선 군인의 일부는 IS에 충성하고, 정전 협정을 지지하는 그 어느 누구라도 살해한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IS는 아직 야르무크 내에 전력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타리에 따르면 그들은 근처 외곽에 있으면서 언제든지 야무크 캠프에 들어가겠다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니달 비타리는 우울한 망명 생활을 보내고 있다. 9월 미국이 시리아에 있는 목표들을 공격하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그는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오바마가 야르무크 내 IS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을 공격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나는 여기 워싱턴에서 오바마가 다마스쿠스를 폭격하기 원한다고 말하는 시리아국가연합-서구의 지지를 받는 반정부 세력-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요. 이건 반정부 세력이 힘센 동맹이 있다고 아사드 정권에 경고하는, 정치적인 조치가 될 것입니다. 나는 시리아국가연합 사람들에게 폭격은 많은 수의 사망자를 초래할 것이고, 야르무크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그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을 전했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이의제기는 시리아 정부의 잔혹한 봉쇄를 비난하지만서도, 연합군의 공중 폭격은 더 큰 인도적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비타리의 분석에 따르면 12월 초 전면적인 봉쇄를 재개한 것은 야르무크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절망적이게 만들어, 그들이 반정부 단체를 압력해 아사드 정권이 요구하는 조건하에 휴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아사드 정권의 전술이었다. 그 조건은 지난해 아사드 정부가 홈스(Homs)와 다마스쿠스 외곽 무아드하미야(Muadhamiya)에서 성취한 반정부 세력의 항복과 비슷할 것인데, 무장 단체들은 무기를 버리고, 고문 또는 죽음의 위험이 있는 신문조사를 받는 것이었다.
 
봉쇄에도 불구하고, 비타리는 어떤 면에서는 남겨진 사람들보다 국경을 넘어 도망 온 사람들이 더 좋지 않을 수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들과 조부모님들로부터 모든 것을 잃어가며 그들의 나라를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을 때 그들의 고통, 낙바(Nekba)에 대해 많이 들었어요.” 비타리는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님들은 시리아에서 그들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그리고 그들이 만든 것은 파괴되었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 3세대들 또한 타국에서 무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 것을 겪고 있어요.”라고 적었다.

글: Johnathan Steele
원문링크: http://www.theguardian.com/news/2015/mar/05/how-yarmouk-refugee-camp-became-worst-place-syria
 
번역(http://nancen.org/1370): 김문성, 박지수 (난민인권센터 통번역 자원활동가)
감수: 류은지, 모요셉(난민인권센터 상근활동가)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5&table=dream_jang&uid=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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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모비드엔젤  2015년12월25일 12시29분    
내용이 너무 길다
(165)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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