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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한인섭의 <가인 김병로>를 읽고
법조계에 제2, 제3의 가인의 출현을 기대한다
정운현 | 2018-03-21 08:46:0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일전에 전주에 놀러 갔다가 시내 덕진공원에 들른 적이 있다. 공원 한 켠에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동상을 만났다. 전북 출신의 훌륭한 법조인 3인을 기려 1999년 11월 건립됐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들을 ‘법조 3성(聖)’이라고 부른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전북 순창),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린 김홍섭(전북 김제) 전 대법원 판사, ‘검찰의 양심’으로 불린 최대교(전북 익산) 전 서울고검장 등이 그 주인공이다.

가인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무료 변론을 한 공로로 법조인으로는 드물게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가톨릭에 귀의한 김 판사는 재판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재판 철학으로 실천한 분으로 유명하다. 또 최대교 고검장은 우리 검찰사에서 ‘대쪽검사’의 상징으로 불린다. (필자는 세 분 가운데 최대교 변호사를 80년대 후반 ‘백범 김구선생 시해사건’ 관련 취재차 서울 새문안길 사무실로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법조 3성’ 동상. 왼쪽부터 김홍섭 판사, 가인 김병로, 최대교 변호사

가인은 법학도(혹은 법조인)는 물론이요, 현대사 연구자라면 흥미를 갖고 탐구할만한 인물이다. 그런 가인을 최근 두툼한 책 한 권을 통해 만나게 됐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한인섭 교수가 펴낸 <가인 김병로>(박영사)가 그것이다. 소포를 뜯어 책을 꺼내는 순간 나는 압도되었다. 맺음말까지 총 24장에 무려 900쪽이 넘었다. 틈틈이 읽는 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7~1964)는 단순한 법조인이 아니다. 법학자, 판사, 변호사, 사법행정가(대법원장), 법전 편찬자 등 다양한 면모를 가진 ‘총체적 법조인’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부록을 합쳐 920쪽에 달하는 책자를 처음 펼쳤을 때 무슨 내용을 이리도 많이 썼을까 싶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가인의 진면목을 조망하자면 이 정도의 볼륨은 불가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년체로 구성된 이 책은 가인의 불우했던 소년시절로부터 시작한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가인이 면암 최익현 휘하의 의병부대를 접촉하고 도왔다는 이력은 상당히 이채롭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훗날 항일변호사로 활동하는 데 하나의 바탕이 됐을 것인데 이는 마치 백범 김구가 동학농민군 접주를 지낸 경력과 유사하다.

한인섭 교수가 펴낸 <가인 김병로> 표지

책을 읽어가면서 처음 접한 경이로움은 가인이 ‘변호사가 되기 위해’ 1년간 판사를 지냈다는 점이다. 당시 판사와 동급인 ‘고등관 8등’ 경성전수학교 교유(교수) 자리를 박차고 판사가 된 것이 겨우(?)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였다니. 흔히 가인의 대표직함을 ‘초대 대법원장’으로 일컫지만 어쩌면 ‘변호사 김병로’가 더 적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것은 가인이 “항일변호사로 활동했다”는 한 줄이 고작이다.  

이 책의 제4장~13장까지는 ‘변호사 김병로’를 살피고 있다. 1920년 4월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를 사직한 가인은 6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그해 12월 변호사로 등록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판사직을 1년만 하고 사표를 내던진 그는 1921년 3월 세칭 ‘대동단 사건’ 항소심부터 항일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춘숙 사건, 보합단 사건, 김상옥 사건, 김시현 사건, 평북 희천사건 등을 잇달아 맡았다. 특히 김상옥 사건 변론과정에서 ‘유조리 최열렬(有條理 最熱烈)’ 변호사로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다. 당시 그는 허헌, 이인 등과 함께 ‘항일변호사 3인방’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김시현 의사사건에서는 3인이 공동변론을 맡기도 했다. 평북 희천사건 변론을 맡아서는 경찰의 피고인 아내 성고문 사건을 밝혀내 폭로하기도 했다.

가인의 항일변호 활동은 경성조선인변호사회 출범과 함께 날개를 달았다. 암태도 소작쟁의와 재일친일파 거두 박춘금의 언론계 인사 폭행사건, 암태도 소작쟁의 사건, 그리고 언론집회 압박 탄핵운동 등에서 빛을 발했다. 이때 결성한 형사공동연구회는 항일변론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변호사 김병로는 마침내 법정에서 나와 사회참여 활동으로 이어졌다. 민족진영의 첫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 결성(1927.2)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으며, 이상재, 허헌에 이어 4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그는 변호사 수입으로 번 돈으로 신간회 재정을 부담하기도 했다.

김상옥 사건 변호 관련 기사(조선일보, 1923.5.14)

1925년 4월 박헌영 등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립하였다. 곧이어 1,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터졌다. 2차의 경우 공판에 회부된 인원이 101명에 달했다. 공판은 모두 48회에 달했는데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최강의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 변론을 주도한 사람은 가인을 비롯해 허헌, 이인, 김태영 등이었다. 재판은 시종 집요한 논전이었으며, 재판부는 공개재판을 거부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이에 대응하는 변호인들의 투쟁수위도 한계선상을 넘나드는 수준이었는데, 급기야 ‘불온한 변론’을 구실로 가인은 ‘정직 6개월’이라는 변호사 징계처분을 받게 됐다.

평탄한 판사의 길을 두고 가인은 왜 변호사가 됐을까? 재산이나 명예는 애초부터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는 “일정(日政)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위하여 도움을 주려고”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그는 꿈에서조차 무죄변론을 받아내는 꿈을 꿀 정도였다. 그는 “입가에 침을 티티 티우면서” 열심히 애국지사들을 변호하였다. 박헌영, 이재유 등 공산주의자들의 변론을 맡으면서 가인은 사상변호사, 좌경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공산주의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매우 희귀한 기회를 가진 인물이었다. 즉, 그는 좌익과 소통이 가능한 진보적 우파지도자였다. ‘동우회 사건’ 변론에서 그는 전원 무죄 판결을 얻어냈다.

그런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가 소속된 형사공동연구회 회원 전원이 변호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1932년 그는 서울에서 창동으로 이사하였다. 3천 평 정도의 땅을 사서 손수 농사를 짓고 양계, 양돈을 하였다. 항심의 기초는 항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립적 경제기반을 갖추었다. 흔히 이 기간 동안 가인은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은거한 걸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저자는 가인이 예전에 비해 활동양은 줄었으나 계속해서 활동해온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당시 창동은 민족지사들의 근거지였는데 나중에는 홍명희, 정인보, 박명환 등이 이곳으로 몰려와 함께 살았다. ‘창동 커뮤니티’는 가인이 닦아놓은 자립기반 덕택에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버텨낼 수 있었다. 두루마기 차림의 가인은 미래의 향방을 읽어내는 선견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애국지사들을 변호하던 한국인 변호사들. 맨앞이 가인 김병로

국내파인 가인은 해방 후 한민당 창당에 관여하였으며 한동안 몸담았다. 그러나 토지개혁 문제를 놓고 한민당이 지나치게 보수성을 드러내자 결국 뛰쳐나왔다. 미군정 시절에는 사법부장을 맡아 일제하의 법령 정비와 법전 편찬 작업을 손수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대법원장에 올랐다. 이승만은 ‘김규식 편’으로 분류된 가인을 내심 그 자리에 앉히고 싶지 않았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초대 법무장관이 된 이인의 역할이 컸다. 이 시기에 가인은 특별한 감투를 하나 더 쓰게 되는데 반민특별재판부장이 그것이다. 이 일로 그는 이승만과 더욱 더 멀어지게 됐다. 특히 그는 일제 때 같이 변론활동을 하던 이승우(나중에 친일로 변절)의 반민재판 때는 인간적 괴로움을 겪기도 했다.

그의 상징어와도 같은 ‘초대 대법원장’ 시절 그는 우리나라 사법의 기초를 확립했다. 고령에 왼쪽 다리를 절단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불식지공의 의지로 거의 혼자서 법전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의 대등한 자리배치는 물론이요,  법률용어의 한글화(특히 한글로 된 ‘증인선서’), 전세권 창안 등은 모두 가인의 사상과 머리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가족법을 놓고 여성계의 이태영 변호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당시로선 그마나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박람강기(博覽强記), 만물박사요, 탁월한 법 해석자였다. 또 청렴강직, 지공무사(至公無私)는 그의 상표와도 같았다. 그는 “사법관으로서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를 떠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또 “판사는 가난해야 해. 판결문을 추운 방에서 손을 혹혹 불어가며 써야 진짜 판결이 나오는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눈만 한번 찔끔 감으면 적산(敵産)을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으나 그는 한 번도 곁눈질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철저했기에 남에게도 그것을 감히 요구할 수 있었다. 

초대 대법원장 시절의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 시절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오만도 비굴도 없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처신했다. 1957년 12월 만 70세로 대법원장 정년퇴임을 하면서 퇴임식을 대법원이 아닌 국회에서 했다. “사법의 창조주”에 대한 국회 차원의 배려와 예우였다고 하겠다. 대법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서도 가인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국가보안법 개정 파동, 경향신문 폐간 사태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평을 내곤 했다. 그는 신문에 기도한 글에서 ‘대한민국은 구가 그 주인인가’라며 이승만 정권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는데 당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쏟아놓는 사람으로는 그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이런 일로 그는 이중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

독재 권력은 말로는 비참하기 마련이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 획책을 두고 그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경고대로 이승만은 4.19혁명 일주일만인 4월 26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법조인들의 사회참여를 위해 ‘자유법조단’을 구성한 그는 무소속으로 7.29 총선 때 고향(전북 순창)에서 출마하였으나 보기 좋게 낙선하였다. 그의 인생에서 첫 패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즐겨 쓰던 고목봉출(古木逢出·고목나무에도 봄이 오면 꽃이 핀다)은 한낱 ‘꿈’에 그치고 말았다. 2공화국에서 그는 정중동의 세월을 보냈다. 그 나름의 근신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를 다시 세상 속으로 불러낸 것은 박정희 일파의 5.16 군사쿠데타였다. 민정이양을 놓고 박정희가 잔꾀를 부리자 야권은 총공세를 폈다. 그때 가인은 군정에 대항하는 민간정치세력의 최고원로이자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1963년, 그는 77세의 나이에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군정 종식과 야권통합,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 등을 위해  민정당 창당 및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야권의 분열로 그같은 열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의 인생에서 정치 역정은 그리 길지 않다. ‘정치인 김병로’는 그와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그가 꿈꾼 것도 아니었다. 시대상황이 그를 정치일선으로 이끈 것일 따름이다. 그는 천생 법률가로 기억될 사람이다.

‘사법부 대통령’ 가인 김병로

가인은 78년 생애를 시대정신을 좇아 숨 가쁘게 내달렸다. 일제하에서는 항일애국지사 변론으로, 해방 공간에서는 사법 분야 건국사업을, 건국 후에는 사법부의 수장을 맡아 한 몫을 다했다. 생애 말년에는 팔자에도 없는 정치인 노릇을 하며 반(反)군정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다종다양한 활동 분야를 저자는 풍부한 자료를 통해 종횡무진 휘젓고 다녔다. 모르긴 해도 자료수집에만도 수년은 족히 걸렸을 듯 싶다. 일제시대부터 나온 신문들을 전부 훑은 것은 기본이요, 가인의 저작을 두루 살피고 목록을 만든 것도 큰 품을 팔았음이 분명하다. 참고문헌이 무려 28쪽에 달한다. 게다가 단순히 사실 나열에 그치지 않고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평을 곁들여 이 책은 가인 일대기라기보다는 평전에 가깝다.

자고로 후학은 선학을 딛고 올라서서 벽돌 한 장을 새로 쌓는 자이다. 이 책도 그러하다. 기자 출신 김진배의 <가인 김병로>, 정치학자 김학준의 <가인 김병로 평전>을 뛰어 넘었다. 김진배의 책은 취재와 가인 생존 시 직접 증언을 듣고 쓴 책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법률가적 면모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또 김학준의 평전은 가인의 삶 중에서 그리 길지 않고 비중도 낮은 정치적 측면을 과도하게 다룬 반면 역시 법률가의 면모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법학도인 저자는 이같은 점을 감안하여 미흡한 점은 채우고 선학의 장점은 되살려 놓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가인의 면모가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흔히 판사, 검사, 변호사를 법조 삼륜(三輪)이라고 부른다. 민주화가 진전된 오늘에도 법조계는 국민적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 줄을 대고 재벌 주변을 기웃거리는 판사, 검사 한 둘이 아니며, 로펌으로 상징되는 변호사 업계는 법률장사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인(街人) 즉, 거리의 사람, 집 없는 사람을 자처한 가인은 평생을 통해 청렴 강직한 법관윤리상을 온몸으로 실천하였다. 사후 반세기가 지났어도 역사의 검증을 견뎌내고 미담이 터져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저자는 가인을 기리는 진정한 기념사업은 동상 같은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의 ‘현재화’라고 썼다. 적절한 지적이다 싶다. 법조계에 제2, 제3의 가인의 출현을 기대한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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