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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감정과 양심적 일본인
정운현 | 2017-10-17 14:46:3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흔히 일본을 두고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은 나름의 역사적 연원이 있다고 하겠다. 신라시대 이후 수 백 차례에 걸친 왜구의 노략질과 한반도 침략이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7년, 가깝게는 일제강점 35년이 그것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이 기억하는 것은 일제 강점 35년간의 피압박의 역사다. 일제는 무자비한 통치로 일관했고 그 상흔은 지금도 한반도 곳곳에, 그리고 한국인들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그 대표적인 증인인데 이로 인한 양국 간의 갈등은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일본 우익세력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마치 ‘자발적 매춘’인양 호도하고 있는데 이들은 국제사회의 따가운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전부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적지 않다. 군국주의 하에서 자행된 침략전쟁에 대해 피해 당사자들에게 사과하고 진상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개인이나 소규모 연구모임, 일부 정치인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우익들이 틀어대는 확성기 소리에 묻히고 만다. 수년 전에 필자가 경험한 사례 등 두 경우를 간략히 소개한다.

1.
90년대 초반, 당시 나는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친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오고 있던 나는 당시 한국외국어대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던 박창희 교수와 인연이 닿았다. 일본 유학파인 박 교수는 학생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나가노(長野) 지역에서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접하게 됐다. 그 후 박 교수는 실태조사를 위해 나가노를 방문했다. 일제 말기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본토 결전을 앞두고 군 최고 지휘부인 대본영(大本營)을 도쿄에서 나가노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 장소는 나가노의 마쓰시로(松代) 지역. 이곳은 암산(岩山)이어서 미군의 비행기 공격을 피하기에 좋은 곳이어서 결정됐다고 했다. 일본군은 암산 세 곳에 수평으로 된 대형 지하호를 파 이곳에 일황과 그 가족, 그리고 대본영 지휘부를 옮겨올 작정이었다. 지하호를 파기 위해 조선인 2천 명 가량이 동원되었는데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그들 가운데 절반가량인 천 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했다.

마쓰시로 지하호 입구의 안내판과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이런 사실은 일본이 패전한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비밀로 묻혀 있다가 90년대 들어 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마쓰시로 지역의 뜻있는 주민들은 ‘마쓰시로 지하호 조사연구회’를 결성하여 조선인 희생자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관련기록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에는 벤쿄카이(勉强會), 겐큐카이(硏究會) 등의 각종 연구 소모임이 많다) 연구회 사람들과 접촉한 박 교수는 이들의 요청으로 한국 측 ‘마쓰시로 지하호 조사연구회’를 꾸리고는 자신이 회장을 맡았다.

회원이래야 박 교수의 제자 몇 사람이 고작이었다. 그 무렵 박 교수를 알게 된 나는 박 교수의 요청으로 이 모임의 총무를 맡게 됐다. 그로부터 얼마 뒤 일본 측 연구회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당시 일본 사회당에서 마쓰시로 지하호 현장조사를 나올 계획이라며 한국 측 연구회에서 사람을 파견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회장을 맡고 있던 박 교수는 총무인 나와 같이 동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출국 전날 박 교수 아들이 큰 수술을 하는 바람에 결국 나 혼자 가게 됐다.

예정대로 사회당 의원 3~4명이 현장조사를 나왔는데 일본기자들도 여러 명 취재를 나왔었다. 나는 일본 측 연구회의 안내로 사회당 의원들과 함께 지하호 두 곳을 둘러보았는데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장에 다다랐을 때 한 사회당 의원이 헌화했다. 나는 그곳에서 일황과 일본 의회, 그리고 일본인에게 보내는 세 통의 호소문을 낭독했다. 이 내용은 이튿날로 몇몇 일본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일 한국 특파원 가운데 현장취재를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쓰시로 지하호 내부. 이런 동굴이 세 개나 남아 있다

지하호 인근에 있던 위안소 건물

이튿날 일본 측 연구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지하호 인근에 위안소 건물이 남아 있다고 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그 건물도 둘러보았는데 오는 길에 더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당시 겨울이어서 도로변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어떤 회원이 말하길 “삽으로 1미터만 파면 조선인 유골이 나온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아 “한번 파보자”고 했더니 “지금은 땅이 얼어서 어렵다”고 했다.

연구회 멤버들은 지역 학교의 교사, 공무원, 자영업자 등 소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마쓰시로 지하호 관련 자료수집과 증언채취, 위안소 보존운동, 언론홍보 활동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얼마 뒤 한국 측 회장인 박창희 교수가 모종의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일본 측 연구회와 교류가 끊어졌다. 이후 한국에서 미쓰시로 지하호에 대한 현장조사 등은 없었던 걸로 안다. 연구회와 단절되면서 그들의 소식조차 알 길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2.
일본군 성노예와 달리 일본 군수공장 등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사람들은 흔히 ‘근로정신대’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남자는 물론 어린 소녀들도 포함됐다. 지난 9월 14일 광주시는 일본 미쓰비시 기업에 강제 동원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31년째 활동해 온 일본인 2명에게 명예시민증을 주었다. 주인공은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다카하시 마코토(高橋 信·75) 공동대표와 고이데 유타카(小出 裕·76) 사무국장이다.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은 항공기 생산을 위한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12∼14세의 조선인 소녀들에게 ‘일본에 가면 여학교에 들어가 2년 만에 졸업할 수 있다’, ‘월급도 준다’ 등의 거짓말로 속여 일본으로 데려가 혹사시켰다. 나고야는 대표적 공업도시로 태평양전쟁 당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서는 당시 진주만 폭격 당시 사용된 ‘제로센’ 전투기 생산을 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는 노동력 확보를 위해 1944년 5월경 광주전남, 대전충남 지역에서 10대 소녀 300여 명을 강제로 데려갔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대원들이 신사참배를 마치고 깃방을 들고 줄지어 행군하고 있는 모습

이 소녀들은 17개월간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나 미쓰비시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1945년 가을에 빈손으로 귀국했다. 이후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정부도 이들의 보상 문제에 대해 나서기는커녕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이 일에 앞장선 것은 일본의 민간인들이었다. 당시 근로정신대 소녀들과 같은 나이인 14세의 딸을 둔 다카하시 대표는 ‘만약 내 딸이 같은 피해를 당한다면 아버지로서 어떨까’라는 생각에 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게 됐다고 한다.

1988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진상규명에 나섰다. 그해 12월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옛 미쓰비시 공장 터에 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웠고, 1998년 11월에는 소송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고야 소송지원회’ 결성을 주도했다. 이듬해 3월 1일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청구소송 제기해 재판이 진행되는 10년(1999∼2008년) 동안 피해 할머니들의 소송비와 항공료, 체류비 일체를 지원하였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오른쪽 네번째)이 지난 14일 ‘제7회 세계인권도시포럼’ 개회식에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오른쪽 세 번째) 등에게 명예광주시민증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광주광역시 제공)

그러나 10여 년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끝내 패소하고 말았다. 사법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길이 모두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2007년 7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금요일 나고야에서 미쓰비시 본사가 있는 도쿄까지(왕복 720㎞) 이동해 미쓰비시의 진심 어린 사죄와 자발적 배상을 촉구하는 시위(‘금요행동’)를 387회째 계속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요시위’를 연상케 한다.

명예 광주시민증을 받은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 “가해국의 시민으로서 불합리·부조리를 간과할 수 없었다.”며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드리는 것은 우리들의 책무하고 생각하고 승리할 때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동족도 아닌 한국인 피해자들을 위해 30년 넘게 활동해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일본 우익들로부터 “너희가 일본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 한국이 좋으면 한국에 가서 살아라.”는 조롱까지 받았다고 한다. 민족을 뛰어 넘은 그들의 인간애에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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