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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저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를 읽고
일왕 부자 폭살을 꿈꾼 한 남자의 치열하고 뜨거운 삶과 사랑
정운현 | 2017-06-28 14:02: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일제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흔히 ‘불령선인(不逞鮮人)’, 일본말로는 ‘후테이센진’이라고 불렀다. ‘불령(不逞)’이란 원한이나 불만을 품고 제 멋대로 행동하거나 도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불령선인’이란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조선인을 지칭한 말이다. 여성의 경우 ‘센조(鮮女)’라고 불렀다.

당시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크게 두 부류였다. 일제의 천황제와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사람, 또 하나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전자였다면 그 가운데서도 사회주의 계열에 속했던 사람들은 후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여 남다른 성과를 내온 소설가 안재성의 근작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인문서원)는 이 둘을 아우른 역작으로 보인다.

▲안재성 저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 표지

박열(朴烈, 1902~1974). 수많은 독립운동가 가운데 그의 이름은 그리 익숙하지 않다. 일제 패망 후 아키다형무소 문을 나설 때까지 무려 22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돼 북에서 생을 마친 탓으로 한동안 금기의 인물로 통했다. 해방 후 그가 남한에서 뿌리를 내렸다면 지금 그는 현충원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의 사후 15년 뒤인 1989년 한국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했다. 이어 2001년 (사)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2012년에는 고향인 경북 문경에 박열의사기념관이 개관했으나 아직도 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박열은 ‘불온한 조선인’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대의 수재들이 다니던 경성고보 사범과 재학시절부터 반골기질을 드러냈다.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학비가 궁했던 그는 자본가, 자본주의에 대해 증오심을 드러냈다. 학교에서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는 세뇌교육을 시키자 ‘국가(國歌)’를 ‘곡가(穀價)’로 읽으며 ‘반역적 기분’을 만족시키며 살았노라고 추억한 바 있다. 심지어 1차 대전 때 참전하는 일본군대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일본군 망세(亡歲)’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괴짜라면 괴짜요, ‘시대의 반항아’였던 셈이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학교를 뛰쳐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후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만세세위를 벌였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적지(敵地) 한가운데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에서 신문배달, 공장 직공, 인력거꾼 등 궂은일을 하면서 고학을 시작한 그는 당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던 반제국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에 공감하여 일본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한편으로는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21년 11월 박열은 원종린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망라한 ‘흑도회’를 결성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다. 이 무렵 그는 평생 동지이자 반려자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던 가네코는 박열이 지은 ‘개새끼’란 시를 읽고 그에 단번에 빠져들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이듬해 두 사람은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黑濤)>를 창간하고 항일세력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했다. 이 무렵부터 두 사람은 ‘불령선인’의 지도자급으로 통하는 ‘요시찰 조선인 갑호(甲號) 해당자’로 지목돼 일경의 감시와 미행에 시달렸다.

1923년 4월, 박열은 기존의 흑우회와는 별도로 조선인 15명, 일본인 6명 등 총 21명으로 구성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단체 이름부터가 불온한 것이었다. 그에게 비극이 찾아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듬해 1923년 9월 1일, 관동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 화근이었다. 일제는 조선인 대학살의 비난여론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는데 당시 일경이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불령사’ 멤버들이 그 대상이었다.

그해 10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해 불령사 멤버 16명이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두 사람은 황태자 결혼식 때 천황가 사람들에게 폭탄을 투척키로 모의한 혐의로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대역죄는 1심 판결로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다. 변호인은 당대의 인권변호사로 한국인들에게도 큰 도움을 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였다. 박열은 후세 변호사를 통해 법정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설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과 왕의(王衣)를 착용케 해줄 것.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
셋째, 법정용어는 조선말만 쓰겠다.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일 것.

이같은 박열의 요구는 일부 받아들여졌다. 세간의 주목을 끈 재판이었던 때문이다. 공판 당일 박열은 단정한 흰색 한복 차림으로 법정에 섰고, 가네코 역시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받쳐 입고 머리까지 조선식으로 쪽을 지었다. 박열은 검사와 변호사의 질문에도 조선말로 대답하였다. 재판장은 박열을 피고라고 부르지 않고 ‘그대’ 또는 ‘그편’이라고 불렀고, 박열은 재판장을 향해 ‘군’ 또는 ‘그편’이라고 불렀다. 재판장이 박열에게 물었다.

“직업은?”
“조서에 쓴 그대로다.”
“그래서는 모르겠다. 답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불령업이라고 하지.”

주소와 직업을 묻는 재판장의 물음에 가네코도 박열과 똑같이 응수했다.
“주거지는 어디인가?”
“도쿄 감옥이다.”
“직업은 무엇인가?”
“현재에 있는 것들을 때려 부숴버리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말 그대로 부창부수였다. 재판에서 박열은 1시간에 걸쳐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천황이란 국가라는 강도단의 두목이다. 약탈회사의 우상이며 신단이다. 나는 법률이나 재판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형법 73조에 해당하는지 그건 알 바가 아니다. 그것은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재판을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1927.1.21)

일제는 재판과정에서 수차례에 걸쳐 회유했지만 ‘여전사’ 가네코는 결코 응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가네코는 박열을 더욱 열렬히 사랑했다. 그의 사상과 뜨거운 정열, 아니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가네코는 박열과 함께 죽기를 소원했다.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그의 모든 결점과 과실을 넘어 사랑한다….. 재판관에게 말해 둔다.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둘이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박열에게 말해 둔다. 혹시 판결이 어긋나서 당신만 사형선고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반드시 같이 죽을 것이요, 당신 홀로 죽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1926년 3월, 재판에서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선고된 순간, 가네코 후미코가 먼저 소리쳐 외쳤다.
“만세!”
박열은 웃음을 띤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려거든 죽여라. 그러나 나의 정신이야 어찌 할 수 있겠는가?”

4월 5일 두 사람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를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감옥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일본 정부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데 대해 분개한 때문이었다. 그해 7월 23일 가네코는 삼노끈으로 목을 매 옥중에서 끝내 자결했다.

재판과정에서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마치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가네코의 시신은 임시로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곡절 끝에 그해 11월 남편 박열의 고향인 문경 팔령산 기슭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다. 가네코의 죽음 후 ‘옥중임신설’과 함께 타살설이 나도는 등 한 마디로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가네코였다.

▲남쪽에 알려진 박열의 마지막 모습. 1968년 67세 때로 추정된다.

박열은 해방 두 달여 뒤인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21세에 투옥돼 무려 22년 2개월, 날수로는 8천일의 옥살이 끝에 자유를 되찾았다. 당시만 해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최장기수였다. 수감 시절 무정부주의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박열은 석방된 후 반공주의 노선을 천명하였다. 그해 10월 일본에서 우파성향의 교민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을 결성하여 단장에 취임했다.

1949년 5월 귀국한 그는 이듬해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는데 이후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리고는 1974년 1월 17일 그가 73세로 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남한에 전해졌다. 추도식에는 당시 육군 중위로 근무하고 있던 아들 박영일(27세) 등 유가족과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의 묘소는 평양 교외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마련돼 있다. 북으로 간 인물들 가운데 그는 드물게 남과 북 모두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박열에 대한 연구는 전고(前考)가 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펴낸 <박열 평전>(가락기획, 1996)과 김인덕 박사가 펴낸 <박열>(역사공간, 2013)이 그것이다. 앞서 나온 두 권이 학술적으로 접근했다면 안재성의 책은 각주나 미주, 참고문헌 하나 없이 펴낸 스토리텔링 식이다. 소설가답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도 팩트 고증은 더없이 충실해 학술서 못지않은 품격을 갖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때마침 이준익 감독이 박열 의사의 삶을 영화로 만든 <박열>이 오늘(28일) 개봉된다고 하니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근래 화제가 됐던 영화 ‘암살’과 ‘밀정’에 이어 또다시 일대 흥행을 기대한다.

▲이준익 감독이 만든 영화 ‘박열’ 포스터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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