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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8회(최종회) 上
단절 없는 계승
김종익 | 2020-05-22 08:50:2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8회, 최종회
- 단절 없는 계승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글은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의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1940년 10월 26일, 육군성은 일본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와 통상 문제를 둘러싼 교섭에, 군의관 소좌(소령) 후카다 마스오深田益男를 수행원으로 파견한다고 외무성에 전달했다. 미국, 영국 등과의 전쟁에 대비해 현지 위생 상황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남방 각지로 군의관들이 속속 파견되었는데,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담당했던 인물이 후카다였다. 실제 파견은 다음 해였던 것 같다. 주1)

귀국한 후카다는, 1941년 7월 26일, 현지는 이슬람교도가 많고 정조 관념이 강하기 때문에, 병사들이 강간을 범해 일본군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하며, “반둥 그 밖에 성병이 많으므로, 촌장에게 배당해 엄격한 검미檢黴 검사하에 위안소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주2) 검미란 성병 검사를 말한다. 촌장에게 배당하는 것은 위안부를 할 여성의 인원수라는 것은 문맥상 명백하다.

■ 촌장 루트

전쟁 준비 목적으로 공식적 명령을 받고 조사한 군의관이, 지역의 유력자를 부려 위안부를 모집할 것을 제창한 것이다. 점령해 일본군이 절대적인 힘을 갖는 상황을 만들어내면, 촌장에게 명령하는 것만으로 여성들을 확실하게 모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고 생각된다. 강제성을 띨 가능성을, 후카다가 명확하게 또는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었던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권 의식이나 민주주의가 충분하게 정착하지 않은 시대의 지역 사회의 상황을 고려하면, 의사에 반해 끌려 나오는 여성이 속출하는 사태를 유발할지 모를 위험한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후카다의 아이디어가 육군 안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던가를 드러내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는 일본군이 루손섬과 민다나오섬, 말레이반도에서 지방의 유력자를 통해 여성을 모은 사례를 소개한다. 주3) 결과적으로 촌장 루트는 기능했던 듯하다. 군인과 경찰관이 민가에 신발을 신은 채 밀고 들어가 강제로 연행하는 치졸한 방법을 쓴 것은 물론, 군사력에 기댄 지배 구도를 잘 이용하면 충분히 모을 수 있었던 경우가 있었다. 주4)

포르투갈령이었던 티모르섬의 의료 사무원 루이 안토니오 누메스 로드리게스는, 1942년 2월 일본군에게 점령된 후, 일본인이 추장을 협박, 여성들을 매춘 시설로 보내도록 강요했다고, 전후 연합군 군대에 증언하고, 그 선서 진술서가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제출되었다. 점령 직후 상황을 이야기하는 중의 증언이며, 여기서 말하는 일본인은 군인이라고 생각된다.주5) 협박을 수반하고 있으며, 강제의 요소를 강하게 띤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진술서에서는 협박, 강요 후에 일어난 일이 확실하게 적혀 있지 않고, 여성들이 일본 병사들의 상대가 되도록 강제를 당했는가는 불명이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안 지난 1937년 12월, 대본영은 중국 남부 연안을 점령하는 작전을 직전에 중지하고, 제11사단(善通寺)와 타이완 군인 일부 등으로 이루어진 제5군에게 타이완에서 대기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어느 부대의 전후 전우회지에 따르면, 기분이 고조된 병사들이 강간 등의 범죄로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위안소를 만들게 되며, 많은 농가에 가옥을 넘기게 하고, 목수에게 밤낮없이 고치게 했다. 젊은 여성을 약 300명 모을 수 있었다.

여자는 진즈어주新竹州·타이중주台中州 · 타이난주台南州 가오슝주高雄州의 많은 창녀를 급거 반강제적으로 그러모은 일본 현지인·조선인·타이완인 여자들이었다. 당시 일본은 경찰국가였기에, 경찰, 헌병이 말하는 것은 지상 명령으로 놀라울 만큼 빨리 이루어졌다. 주6)

관헌이 업자를 통해 매춘 여성들을 강제로 모았다고 생각된다. 촌장 루트란 별도의 유형이다. 매춘 여성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허용된다는 도리는 아니다. 바로 앞 연재에서 본 중국 류저우의 중국인 여성들을 모은 위안소와 다른 형태의 ‘반강제’이다.

■ 빈번한 폭력

여성의 존엄을 짓밟는 것은 모은 쪽만이 아니다. 많은 위안부가 폭력에 휘둘렸다. 바로 앞 연재에서 본 중국 우한 위안소에서 송신도에게 행해진 폭력도 무시무시했다.

마쓰노 세이야松野誠也[1974년 사이타마埼玉현 태생. 메이지대학 박사. 일본 현대사. 15년 전쟁 기간의 일본을 대상으로, 전쟁 실태 검토와 전쟁 체험이 갖는 의미 등을 고찰하는 입장에서 주로 군사 분야에 관한 여러 문제 연구]는, 1937년 7월~1941년 12월, 중국의 육군 위안소에서 상관에 대한 폭력과 군인끼리 폭행, 싸움, 위안부에 대한 폭력 등이 빈발해 군기·풍기가 현저하게 문란해진 사실을, 군 기록을 토대로 상세하게 논했다.주7) 죽음의 공포 속에 장기간 전쟁터에 구속되어, 마음이 황폐해진 군인·군무원들은, 술에 취해 빈번하게 여성들을 때렸다. 사건이 발각되어도, 처분은 가벼웠다. 기록이 존재하는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마쓰노는 본다.

1992~1993년에 일본 정부가 모은 자료를 중심으로 편집한 『정부 조사 ‘종군 위안부’ 관계 자료집성②』에는 1941년 11월~1942년 4월에 중국 중부지역에서 군인이 위안부를 구타하거나, 발포해 상처를 입혔다거나 하는 경우가 적어도 10건이 있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입막음

헌병이었던 야마다 사다무山田定는 제116사단(교토)에 배속되었던 무렵의 잔인한 체험을 널리 알려진 저서 『헌병 일기憲兵日記』(1982년)에서 고백한다. 사단은 1944년 10월부터 중국 후난성 바오칭寶慶(현재 사오양邵陽)에 주둔했다. 현병대 책임자였던 야마다는 사단의 고급 부관이 반년 정도 전에 주둔했던 웨저우岳州(현재의 웨양岳陽)에서 친해진 중국인 위안부를 데리고 와서, 다른 군조軍曹[중사]가 그 여성을 감금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사실인 듯했다. 군인들의 책임이 흐지부지되는 한편, 야마다는 사단 중추의 정보를 접하고 부대의 치부를 아는 여성을 풀어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하에게 가까운 산에서 죽이고 묻어주도록 명했다. 몇 시간 후 실행했다는 요지의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주8)

야마다는 후기에서, 전 헌병들 단체와 출판사에서 이 체험을 쓰는 것에 수반될 반향을 예상하고 충고해 망설인 끝에 쓰겠다고 결심했던 의도를 설명한다.

죄도 없고 저항할 힘도 없는 부녀자를 죽인다는 결정을 한 나 자신, 그 상황에서 몹시 고민하고, 전쟁이 끝나고 30여 년 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따금 생각이 나고, 가슴 속에 쓴 것이 걸려 아픈 듯한 기분을 견디어 왔다. [생략] 내가 굳이 이 사건을 진실 그대로 적어 두는 것은, 이처럼 전쟁이라는 것은 개인의 감정이나 윤리관 같은 것을 초월한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르짖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전쟁이 지닌 본연의 비정함, 잔혹함을 일반인들도 알아주셨으면 싶어서이다.

바오칭의 116사단에서는 다른 문제도 발생했다. 보병 제133연대에서 경리를 담당했던 야마모토 시게루山本茂가, 1945년 1월 무렵 위안소 설치 명령을 받았을 때의 사건을 기록한다. 준비 명령을 받은 부하가 이틀 후, 몇 명의 중국인 여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사로잡은 물소를 거리로 끌고 가 여성들과 교환한 것을 알고, 야마모토는 부하들을 구타했다. 야마모토가 분노한 것은, 멋대로 물소를 포획한 것인지, 인신매매를 저지른 행위인지, 두 가지 모두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위안소는 방침대로 개설되고, 대성황이었다고 하기 때문에, 부하들의 문제적 행위에 대해 충분한 수사와 피해자 구제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주9)

유린 기록은 끝이 없다. 이미 보았던 사기성을 띤 모집 방법과 부정 경리도 여성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이다. 여성들의 행동에 자유가 제약된 사례, 폐업 허가제와 위약금이 포함된 구속성 높은 군 규칙도 확인된다. 주10) 공창제라는 방침에 비추어도 인권 침해 정도가 심각하다. 이러한 상황을 낳은 전제로, 일본 현지와 식민지의 공창 및 사창의 여성들도 비참한 상황이었던 점은, 이미 말한 대로이다.

■ 난징의 교훈

육군 회계 장교들의 잡지인 『陸軍主計團記事』 제379호 부록에, 1941년 2월에 후쿠시마현, 야마가타현에서 행한 연습의 모양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연습은 전쟁 초기의 경리 담당자의 업무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적국 수도를 점령한 직후 군의 경리부장이 행해야 할 것을 묻는 설문에서, 참고로, 「난징 공략에 수반한 군 경리부의 조치 경과 개요」라는 표가 제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12, 22 이후, 부원을 참제3과 상하이 출장소에 있는 진출 상인 지정 및 위안 시설 등 특별 임무에 복무하게 한다” “1, 1 위안소 개업(2戶)”라는 기술이 있다. 주11)

이것은 중일 전쟁에서 난징 공략 후인 1937년 12월 22일 이후, 상하이 파견군 경리부가 부원을 상하이에 있던 참모부 제3과 출장소에 출장을 보내, 난징으로 진출시킬 상인 지정과 위안소 준비를 담당하게 하고, 1938년 1월 1일에 위안소 두 채를 개업하기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파견군 참모장 이이누마 마모루飯沼守, 참모 부장副長 우에무라 요시미치上村利道의 난징 공략 전후 일기에 위안소 준비에 관한 기술이 있는 것이 알려져 있다.주12) 이러한 참모 측의 움직임과 경리부 쪽 움직임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파견군이 조직적으로 난징에 위안소를 설치한 것은 분명하다. 경리부장 네기시 간지根岸莞爾는, 육군이 처음 위안소를 만든 1932년의 제1차 상하이 사변에 파견된 제14사단의 경리부장이며, 중국 동북 지방을 전전轉戰한 사단이 위안소 설치로 움직인 시기도 경리부장직에 계속 있었다. 노하우를 숙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이 잡지가 발행된 1941년 10월 1일이라는 시기이다. 군의관 후카다 마스오의 보고와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등과의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위안소를 준비할 군인들 입장에서 많이 참고가 되지 않았을까.

■ 면면히 계승

교훈을 전한 기록이 이 외에도 몇 개나 남아 있다. 연재 첫 회에서 보았듯이 다가올 미래의 전쟁을 응시한 문제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듯하다. 먼저 중일 전쟁 초기 사례를 보도록 하자.

회계 대좌[대령] 이시하라石原는, 1937년 10월의 『陸軍主計團記事』 제332호에, 「만주사변 경험에서 얻은 야전 경리 근무상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해, “군이 한 지역을 점거하자마자, 바로 뒤쫓아 이주해 오는 일본인 상인, 그 중에서도 매춘업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은 영업할 가옥 차입 등에 관해 지식이 없는 소유자를 상대로 종종 부조리한 요구를 감히 하고, 나아가 군의 위신에도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경우가 없지도 않다”고 밝혔다. 매춘업자가 전쟁지의 주민에게 “부조리한 요구”를 한 사실은 이제까지 거의 알려지기 않았다. 이시하라는 “경리관이 미리 주의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시하라의 기사가 실린 다음 달, 육군성은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을 정리했다. 육군 최초의 위안소인 상하이 오락장과, 중국 동북 지방의 관동군 성병 대책을 상세히 기록한 것임은 이미 기술해 온 그대로이다.

다음 해 1938년 8월에 편집된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八卷』은 교훈, 제언의 집대성이다. 2등 군의관 佐藤淡香은 “엄밀히 검사하면 대부분 화류병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낭자군의 취업 허가 불허 및 치료 독려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후카다 마스오深田益男는, 진저우錦州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접객부의 성병 검사를 영사관, 경찰의 감독하에 이루어졌던 일, 중국인 매춘 여성을 군이 조사한 바, 80% 넘게 성병 보균자였던 사실을 보고했다. 후카다는 앞에서 보았듯이 태평양 전쟁 전에 ‘촌장 루트’를 제창한 인물이다. 만주사변 무렵부터 성병 대책에 내몰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요시자와 다케오義澤武夫는, 여성용 성병 검사 기구를 지참하고 출정한 선배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수습 군의관 오야 젠세쓰大矢全節는 “오락장을 개설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가급적 빠른 시기에 이것을 실시해, 적지에서 황군의 위신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라고 호소했다. 설치가 늦어져 일본군의 이미지에 손상을 끼친 사례가 있었던 것일까.

1등 군의관 야구치 가오루矢口馨는 병사가 성병에 걸리면 고향의 촌장과 초등학교 교장, 가족에 통지하는 것을 시행한 바, 성병에 걸리는 사람이 격감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여행지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오래 머물지도 않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라는 심리를 간파한 교묘한 대책이다. 다만, 야구치가 문제 삼은 것은 성병에 걸리는 것이며, 매춘 그 자체는 아니다.

■ 대미 전쟁을 주목하며

태평양 전쟁 개전 전에 교훈을 전한 사례도, 앞에서 본 연습 자료에 그치지 않는다.

육군경리학교 연구부는 1941년 9월에 정리한 책자 『중국 사변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경리 근무 참고 제3편支那事變ノ經驗ニ基ク經理勤務ノ參考 第三編』에서, “위안 오락 시설은 특히 중앙부와의 관계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계획해 실시의 시기가 지연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의를 촉구했다.주13) 이토록 신중히 일을 진행해야 할 위안 오락 시설은, 위안소 이외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책자에서는 부대에 출입하는 상인의 행적이나 평판에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지도한다.

회계 소좌[소령] 시미즈 이치로淸水一郞가 같은 시기에 편집한 『陸軍主計團記事』제378호 부록 「초급 작전 급양 백제初級作戰給養百題」는, 경리 담당자가 작전을 위해 준비해야 할 사항의 하나로 위안소 설치를 들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주14) 더욱이 우한 공략 때의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는 “요리점조합 음식점을 만들게 하고, 특무기관, 헌병, 영사관 및 병참사령부로 하여금 인정 가격에 의한 판매 및 위생 사항 단속을 하게 할 것”이라고 기술한다. 군 위안소라고 한정하지 않았지만, 점령지에서 업자를 조직화하고, 군과 영사관이 연대해 통제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계속>

주1) 陸上自衛隊衛生學敎 『大東亞戰爭陸軍衛生史 卷一』 98쪽
주2) 舊內閣官房內閣外政審議室 『いわゆる從軍慰安婦問題の調査結果について』「金原節三業務日誌摘錄」(1993년 8월 4일) 6쪽, 吉見義明 『從軍慰安婦
』 58쪽
주3) 앞 『從軍慰安婦』 122쪽
주4) 하타 이쿠히코秦郁彦[1932년생. 역사학자]은 『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昭和史の謎を追う 下』(1999년) 안에서, 1941년 7월 무렵 육군이 ‘관동군 특종 연습’이라고 칭하며 중국 동북 지방에 70만 명이라고 이야기되는 병력을 보낼 때, 많은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로 투입된 것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여성들을 모으도록 의뢰받고, 조선총독부에서 “도지사→군수→면장의 루트로 할당을 밑으로 내렸다고 한다”고 한 다음, “실제로 인선하는 면장과 파출소 순사는, 농촌 사회에서는 절대적이라고 할 만한 발언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낭자들은 일말의 불안을 품었지만, 면장과 순사가 말하는 것이니까 틀림없을 것이다, 라고 일할 각오를 정하고” 응모했다. 실상은 확실히 “반은 권유하고, 반은 강제”(『天皇の軍隊と朝鮮人慰安婦』 金一勉)가 되었다고 생각된다고 기술한다.
주5) 『東京裁判―性暴力關係資料』 內海愛子ら編, 232쪽
주6) 『あ 戰友 台灣步兵第一聯隊第一中隊史 』 台灣步兵第一聯隊第一中隊·湖口會, 79·84쪽, 『日本軍性奴隸制を裁く 2000年女性國際戰犯法廷の記錄 第三卷』「台灣植民地支配と台灣人‘慰安婦’」
주7) 『商學論纂』「陸軍慰安所における軍紀·風紀についての一考察」 松野誠也(中央大學商學硏究會編)第五八卷第五·六號
주8) 『憲兵日記』山田定, 185쪽
주9) 『十誠』第10號 「或る追憶」山本茂
주10) 『政府調査 ‘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②』「森川部隊特種慰安業務規定」, 『政府調査 ‘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③』「慰安所規定送付ノ件」「軍政規定集 第三號」
주11) 『陸軍主計團記事』「第十五回陸軍主計團本部野外作業記事」 제379호 부록 98쪽
주12) 『南京戰史資料集Ⅰ』「飯沼守日記」, 183·162쪽, 『南京戰史資料集Ⅱ』「上村利道日記」, 271쪽
주13) 『支那事變ノ經驗ニ基ク經理勤務ノ參考(第三編)』(防衛省防衛硏究所センター所藏)
주14) 『日本軍の慰安所政策について』永井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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