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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6회
확대, 깊어지는 어둠
김종익 | 2020-02-14 12:25:3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침략자 일본이 식민지에 이식한 매춘 제도의 민 낯을 드러내며, 이 악습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고발한다.

결국 식민지(조선, 중국, 타이완)에서 ‘자본주의적 기업 경영’의 일종으로 매춘업을 영위했던 일본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지탱시킨 근간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역자 주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6회
- 확대, 깊어지는 어둠 -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글은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의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 본문 가운데 (  )는 필자의, [   ]는 역자의 주석이다.
   이 글은,  『世界』2020년 1월호에 게재되었다.

1937년 7월 7일에 중국 베이징 교외에서 중일 군사 충돌이 일어나 전면 전쟁에 이르렀다.

육군은 1937년 7월 27일, 제5(히로시마), 제6(구마모토熊本), 제10(히메지姬路) 세 개 사단을 허베이華北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만주사변 발발 때의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가 이끄는 5사단에서는, 군의관부장 사이토 간조齋藤干城가 그 이틀 후, 각 부대에 성병 예방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했다. 주1) 5사단이 11월에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을 점령하자, 병사들의 매춘을 기대한 매춘업자와 여성들이 찾아왔다.

“톈진, 베이징, 스좌좡石家莊, 다퉁大同, 장자커우張家口 방면에서, 이른바 제일선 진출을 기다리며 와서 사는 상당히 많은 일본인이 있다. [이곳에] 진출한 이들 일본인 가운데 많은 사람은, 군대를 상대로 하는 음식점, ‘카페’, 요릿집, 여관 기타 접객업자 및 예기, 작부, 여급 등 특수 부녀자가 태반을 점하고[생략]” 주2)

육군 특무기관과 헌병이, 아편을 밀매하는 일본인들을 포함해 이들 ‘제일선 진출 대기 일본인’을 단속했다고 한다.

이 무렵, 일본군이 점령한 허베이 각지에 매춘업자와 여성들이 들어오고, 5사단이 속한 북중국 방면군方面軍[area army. 전략ㆍ전술상으로 중요한 일정한 방향이나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부대. 방면군의 위에는 총군總軍이 있다]의 군의관부 등이 대응에 내몰렸다. 만주사변 시기의 중국 동북 지방이나 상하이와 마찬가지 사태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 군인에 의한 민간인 살해와 강간, 약탈도 잇따라, 군은 불상사 방지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성병 확대는 전력 저하를 초래한다. 북중국 방면군은 1938년 3월 30일, 톈진에 성병전문병원을 개설하고, 심한 매독과 임질, 무른궤양 등에 걸린 군인들을 모아서 입원시키고, 치료했다. 방면군 자료에 따르면, 이 병원은 “국방의 영속이라는 견지에 따라, 실전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그 역할에 대해, “미래를 위해 성병에 관한 조사 연구 자료 수집에 노력한다”고 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는, 각 부대에 배속된 군의관과 전장에 설치된 병원이 성병의 잦은 발생으로 힘에 부쳤다기보다, 다음 전쟁을 위한 연구 이유가 강조되고 있지만, 다음 해 9월 무렵 정리되었다고 여겨지는 자료에 따르면, 개설 이후 환자가 누계 9,000명을 초과하고 있어, 주3) 상당수의 병사들이 심한 성병에 걸려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오락소 → 위안 설비 → 위안소  

중일전쟁 초기에 허베이에 투입되어, 중부 중국華中으로 옮긴 독립공성중포병獨立攻城重砲兵 제2대대의 진중일지를 통해 ‘위안소’라는 말에 대해 보도록 하자.주4) 만주사변 시기에, 해군은 이미 위안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주5) 육군 쪽 자료에 [위안소가] 나오는 것은, 중일전쟁 이후이다.

대대에 동원 명령이 내려진 것은 5사단 등과 같은 1937년 7월 27일. 대대장 육군 소좌 만나미 시토미万波蔀는 출발 전인 8월 4일, “화류병에 걸려 송환되는 일 따위의 불명예는 없도록”이라고 훈시했다. 화류병은 성병이다. 10월 17일, 베이징 주변에 있던 대대는 중부 중국으로 돌려지게 되었다. 21일, 머지않아 떠나는 허베이 주둔 지역에, 전란을 피해 피난하고 있던 젊은 여성을 포함한 주민들이 돌아온 일을 맞아, “부대 밖 주둔의 끝 무렵에 불명예스러운 일이 없도록 주의를 환기한다”고 불상사 방지 지시가 나왔다. 부대 상층부가 병사의 규율 해이와 성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하이에서 중일 양군이 교전 상태에 들어간 것은 1937년 8월 13일이었다. 육군은 곧바로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를 사령관으로 한 상하이 파견군을 편성, 상하이로 보냈다. 중일전쟁의 중심은 10월까지 상하이 방면으로 이동, 양군이 격렬한 전투를 반복해 펼쳤다. 11월에 들어서자, 상하이 파견군과 제10군으로 이루어진 중부 중국 방면군이 편성되어, 마쓰이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9월 29일까지 전사자 누계는 허베이에서 2,300명, 상하이 방면 2,528명. 상하이 방면에서는 11월 8일까지 9,115명으로 급증했다. 일본군은 난징을 목표로 삼아, 12월 13일에 점령했다.

상하이와 난징 위안소, 위안부의 비참한 실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저작이 세상에 나왔다. 육군이 본격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이 1937년부터 1938년. 부대가 중국 중부에 투입된 것은 이러한 타이밍이었다.

대대는, 상하이와 난징의 중간 부근에 있는 창저우常州에 있던 1937년 12월 29일, 진중일지에 “오락소를 머지않아 병참에서 준비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병참은 작전 부대에 물자 보급 등을 하는 군 기관을 가리킨다. ‘오락소’라는 말은, 1932년 제1차 상하이사변에서 당시 상하이 파견군이 설치한 ‘오락장’이라는 말과 엇비슷하고, 파견군 예하에 있던 당시의 9사단 참모 우에무라 요시미치上村利道가 수첩에 ‘오락장’을 ‘오락소’로 적은 것은, 연재 첫 회에서 본 대로이다.

1938년 1월 20일의 대대 진중일지에, “위안 설비는 병참이 경영하는 것, 또 군 직할 부대가 경영하는 것 두 곳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위안 설비’는 12월 29일에 예고된 ‘오락소’로 보이고, 병참이 준비만이 아니라 경영까지 손을 대고, 부대가 경영하는 것도 있었다는 기술이지만, ‘경영’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대대의 제2중대는 1938년 1월 26일, “병창 창부娼婦 가운데, 검사에 합격시키는 자는 합격표(나무패)를 소지하게 함에 따라, 주의할 것”, 2월 1일에 “오락소의 일당日當 결정대로 표시한다{생략} 예방약 星秘膏를 지급하는 것도, 절대적이 아니므로 주의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병사들의 매춘에 응하는 여성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병참 창부’라는 말은 쉽게 알 수 있지만, 널리 정착된 것은 아닌 듯하다.

대대가 난징에 파견한 부대는 1938년 2월 14일의 진중일지에, 정해진 외출 시간을 일탈해 ‘위안소’에 죽치고 있는 따위를 한 일등병이 처벌된 것을 기록하고, 창저우 제2중대는 ‘위안소’ 사용 시간이 변경되었다고 기록했다. 3월에 대대가 정한 「창저우주둔동안내무규정常州駐屯間內務規定」도, 「위안소사용규정」에 한 장을 할애하는 데, 이 부대에서는 이 무렵부터 ‘위안소’라는 말이 정착해 갔다고 생각된다. 후술하듯이, 1937년 12월 ~1938년 3월 외무성과 육군의 자료에도 ‘군 위안소’라는 말이 등장하며, 이 무렵부터 ‘위안소’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게 되었던 듯하다. 한편, 대대 내무규정에서는, 위안소에서 병사들의 섹스 상대를 하는 여성을 ‘女’ ‘영업자’로 표기해 호칭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역겨운 사건도 발생했다. 제2중대는 1938년 1월 26일 진중일지에, “어제, 아홉 살 여아에 폭행을 한 자가 있다. 조사 결과 이 여아는 화류병에 감염되었다. 이 일을 거울삼아, 각 부대 화류병 환자에 주의할 것”라고 기록하고, 다음 날, “강간하는 것을 목격하면, 즉시 총살 처분에 부친다”고 기록한다. 일본군은 규율을 내세우지만, 소녀를 지킬 수 없었다. 연재 첫 회에서 본, 제1차 상하이사변에서 육군이 위안소를 만드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된 중국인 소녀 강간 사건을 상기하시라.

제1차 상하이사변 당시 9사단 참모 우에무라는, 중일전쟁 초기에 상하이 파견군 참모부장으로 두 번 중국에 있었다. 제2대대가 오락소 설치 전망을 적기 하루 전인 1937년 12월 28일, 우에무라는, 군대의 불상사가 많을 것과 함께, ‘난징 위안소 개설’에 대해 검토한 것을 일기에 적었다. 주6) 같은 날, 육군 중앙은 파견군 요청을 바탕으로 콘돔 100만 개를 보내는 안을 결정했다. 주7) 바로 앞 연재에서 보듯이, 만주사변 중에 육군이 보낸 콘돔은 60만 개였다. 중일전쟁 초기 상하이 방면에서는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군인의 성교 횟수가 상정되고 있었다.

○ 제휴 플레이 도항 통제

육군은 중국에서 새로 점령한 지역에 일본 민간인이 출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점령 지역의 치안과 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통제 대상에는 위안소를 경영하는 업자와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 포함된다. 만주사변의 러허 침공 후 8사단이 일본인 출입과 영업을 통제한 것은 바로 앞 연재에서 본 그대로지만, 4년 후 중일전쟁에서는, 일본 정부의 관계기관이 제휴해, 보다 조직적으로 중국으로의 도항을 통제한 것을 자료에 의해 확인할 수 있다. 

중일전쟁 초기 일본인의 중국 도항 통제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다음의 자료가 알려져 있다.
① 1937년 8월 25일, 조선총독부에서 도지사, 육군성 군무국장 앞 「북중국으로 무직 불량분자 유입 저지 단속에 관한 건」주8)
② 1937년 8월 31일, 외무차관으로부터 경시총감, 지방장관, 간토주청關東州廳장관 앞 「불량분자 중국 도항 단속에 관한 건」주9)
③ 1938년 2월 23일, 내무성 경보국장으로부터 청부현廳府縣장관 앞 통첩 「중국 도항 부녀자 단속에 관한 건」주10)
④ 1938년 3월 4일, 육군성 부관으로부터 북중국 방면군·중부 중국 파견군 참모장 앞 통첩안案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주11)

①은, 조선에서 허베이로 가는 자를 “정말로 부득이 하여 필요한 자”로 한정하고, 경찰서장이 신분증명서를 발급한다는 것으로, 조선군과 관동군으로부터의 연락에 의한 것이었다.
②는, 중국으로 도항하려고 하는 민간인은 경찰서장으로부터 신분증명서 발급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으로, 같은 내용이 척무성의 연락에 기초해 3일 후에 조선총독부에서 각 도지사에 주지시켰다.주12)
③은, 상하이 방면에서 위안부를 하는 여성을 일본 현지에서 송출하려고 하는 업자들이 1938년 1월~2월에 각지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안 내무성이 낸 것으로, 이미 일본 현지에서 매춘을 강요당하고 있는 스물한 살 이상의 여성에게 한해 중국행을 당분간 묵인하는 것으로, 인신매매와 유괴 피해자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②에 기초해 신분증명서를 발급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내무성으로부터 통고받은 외무성은 재중국공관장에서 통지하고, ‘출出’과 ‘입入り’ 양면에서 규칙이 공유되었다. ③에 육군이 보조를 맞춘 것이라고 보이는 ④는, 여성의 모집을 군이 통제하고, 각지의 헌병과 경찰과 잘 제휴해 군의 위신을 손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연재 2회째에서 보듯이, 주로 1930년대 내무성과 경찰의 많은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매매춘 시스템은 인신매매를 수반하고, 유괴가 포함된 범죄투성이며, 매춘 여성들은 종종 ‘노예’로 표현되었다. 경보국장 도미타 겐지富田健治 이름의 ③은 구조적으로 무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④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1946년생. 역사학자. 일본 근현대사 전공]가 방위청(당시) 방위연구소에서 발견해, 위안부 문제가 커다란 문제가 되기 시작한 1992년에 공표되어, 위안소에 대한 군 관여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을 모은 자료이다.

①~④와 관계가 깊은 자료가, 『外務省警察史』(복각판, 不二出版) 등에 수록되어 있다. 순서에 따라 보도록 하자.

중일전쟁 발발로부터 약 한 달 후인 1937년 8월 11일, 재톈진영사관 산하이관 분관 경찰은,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의 지시에 근거해 「정거장근무수칙사항停車場勤務心得」을 정하고, 산하이관역에서 허베이로 향하는 일본인 승객 단속을 시작했다. 매일 순사 한 명을 산하이관역에 배치해 일본인 승객에게 카드를 나누어주고 성명과 나이, 직업, 행선지, 목적을 적게 했다. 명확한 목적이 없는 상태로 막연하게 넘어오는 자나, 부정하게 돈을 벌려고 하는 자들의 중국 입국을 막을 목적이었다. 조선어 통역을 붙이게 되어 있어, 단속 대상에 일본어를 모르는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주13) ①에 앞서, 일본 정부가 개전 직후부터 일본인의 중국 도항을 통제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①과 같은 날, 관동군 사령부를 겸한 재만주국 대사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가, 만주국 안의 각 공관장에게, 중국 방면으로 가고자 하는 자에 대해서는, 주소지 경찰서장에게 신청해 증명을 받게 한다고 지시했다. 군의 연락이 단속 강화 계기였다. 우에다는 외무대신 히로타에게, 본래라면 사전에 대신의 양해를 득해야만 하지만, 관계기관과 제휴해 급하게 대응해야만 해,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보고했다. 주14) 외무성 규칙보다도 군의 논리를 우선한 것이다. 1932년의 제1차 상하이사변에서 9사단이 위안소 설치로 움직였던 것을 연재 첫 회에서 보았는데, 우에다는 당시의 사단장이다. 점령지 사정에 정통해 있었던 것이다.

①의 이틀 후, 재톈진 총영사 호리우치 간조堀內干城가, 베이징, 산하이관 등의 영사관 경찰에, 만주국이나 조선으로 가서 돌아오려고 하는 허베이 체류 일본인 가운데, 요주의 인물들을 제외하고 여행증명서를 발행하도록 지시했다. 반대로, 만주국이나 조선에서 허베이로 들어오려고 하는 자 가운데, 만주국 단속 기관 발행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은 자의 중국 입국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첨기되어 있다. 주15)

그리고 사흘 후에 나온 것이 ②이다.

나아가, 1937년 9월 8~9일, 외무성은 톈진의 호리우치, 경시총감 사이토 이쓰키齋藤樹와 지방청 장관들에게, 중국 체류 일본인이 일단 일본 현지로 돌아가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경우, 재중국공관이 신분증명서를 발급하기로 한다고 전달하고, 그런 내용을 내무, 육군, 해군 각 성에 연락했다. 주16)

1937년 8월 하순 ~ 9월 상순의 이런 움직임들을 정리하면, 만주국, 조선, 일본 현지와 중국과의 사이의 일본인 왕래에 관해, 외무, 내무, 육군, 해군 각 성, 조선총독부 등이 보조를 맞추어 증명서 구조를 채용해 관리하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 통제의 한계

일본 정부 차원에서 씨름한 중국 도항 통제는, 반석 같은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1937년 9월 22일, 재톈진총영사관은, 단속망을 피해 잠입하는 자가 적지 않아 주의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주17) 10월 15일, 재톈진총영사관 산하이관분관 경찰은, 증명서 매매와 빌려주기 및 빌리기, 개찬, 혼잡으로 헷갈려 단속을 피하는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중국에 들어오려고 기도하는 자가 있다고 기록한다. 전날에는, 재만주대사관 경무부 현병 소령 등이 톈진영사관을 방문, 허베이에 있는 총영사관·영사관의 경찰을 총괄하는 경찰부장 오에 아키라大江晃 등과 ‘만주중국경찰연락회의’를 열고, ‘특수 부녀자 중국 입국 단속 건’을 협의했다. 주18) 협의 내용은 불명이지만, 이 시기 이미, 만주국에서, 또는 만주국을 경유해 매춘업자가 여성들을 데리고 허베이로 들어가 단속이 필요한 상태가 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중부 중국의 전황 변화와 동반해, 외무성은 상하이 등 양쯔강 연안 각지에서 일본 현지 등에 일시 피난하고 있던, 여성을 포함한 일본인의 중국 도항 규칙을 완화하고, 재도항을 허가하기로 결정해 차관 호리우치 겐스케堀內謙介가 1937년 11월 20일에 육해군과 일본 현지 경찰 등에 연락했다. 주19) 조선에서도 같은 취지의 지시가 척무, 외무 두 성에서의 연락에 기초해 9일 후에 총독부에서 각 도 경찰부장에게 내려졌다. 주20) 일본군이 난징으로 향해 진격해 가는 것에 맞추어, 점령지에서 군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확보할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일본군의 난징 입장식 나흘 후인 1937년 12월 21일, 재상하이총영사관 경찰서장으로부터 나가사키長崎현 나가사키 해상경찰서장 앞으로, 일본인의 상하이 도항을 둘러싼 협력 요청이 있었다. 그 내용은, 영사관과 육군의 파견기관이 협의해 최전선 각지에 군 위안소를 설치하기로 되어, 이미 여성 모집을 위해 일본 현지와 조선을 돌아다니는 자가 있으며, 앞으로도 동일한 사태가 생각되기에, 편의를 도모하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주21) 나가사키 해상경찰서에 기대한 것은, 주로, 일본 현지에서 모집된 여성들과 업자가 나가사키에서 상하이행 배에 승선하는 것을 인정하고 [승선 허가를] 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일본 현지와 조선에서 여성을 모집하며 돌아다니는 자의 동향은, 앞에서 본 제휴 플레이에 가담한 각 기관이 상정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중일전쟁 발발에 수반해 일본 현지로 피난해 있던 상하이의 해군 위안소가 11월 무렵에 복귀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주22) 이것은 11월 20일 도항 규제 완화와의 관련을 생각할 수 있다.

③, ④의 위치 부여와 거기에 이르는 경위에 대해서는 나가이 가즈永井和[1951년생. 역사학자. 교토타치바나京都橘 대학 교수]가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주23) 특히, ③은 내무성이 위안소와 군 관계를 은폐하려고 한 것이라는 지적은 명쾌하다.

③의 이틀 전인 1938년 2월 21일, 톈진 경찰부장 오에는, 훈시 중에 중국으로 도항하는 일본인의 신분증명서 제도의 효과를 지적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단속망을 벗어나 중국으로 들어오는 자, 그 수를 추정할 수 없다. 또한, 증명서 소지자라 할지라도, 혹은 이것을 전매, 대여, 사취 등의 수단으로, 기명인과 꼭 일치하지 않아, 도리어 불량자의 중국 입국을 용이하게 하는 기현상조차 있다[생략]” 주24)

통제 규칙은 여전히  ‘유명무실한 것’이었던 듯하다. 오에의 훈시에서는, 단속을 빠져나가 중국에 들어오는 ‘불량자’에 위안소 업자와 위안부들이 포함되었는지 아닌지가 명백하지 않지만, 연재 5회에서 다룬 만주사변 시기의 매춘 여성들의 통제 회피와 통하는 것이 있다. 이어서 오에의 훈시 직후에 나온 위안부 관련 ③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믿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한 것을 보도록 하자.

○ 속아서 전쟁터로

1938년 5월 10일,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는, 베이징, 난징, 상하이 등 중국의 10곳에 있는 일본 공관의 장에게, ③에 따른 각지의 상황을, 관련 부처의 의향을 감안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각지의 혼란이 일본 현지로 전달되어, 내무성이 ③의 운용을 조절하려고 한 것이 배경에 있다. 각지에 주둔하는 일본군 부대가, 당연, 관계 부처에 포함된다고 생각된다. 7월까지 7곳이 보고했다. 주25) 연재 첫 회에서 본, 일본 현지에서의 위안부 송출에 이의를 주창하는 외무부의 다바타田畑 의견서는 이들 보고가 수록된 문서에 포함되어 있다.

재난징총영사 하나와 요시타카花輪義敬의 보고는 충격적이다. 군인 상대 매춘업자의 동향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영사관 방면 진출은 군부 방면보다 하루 늦기 때문에, 자연 병참부 혹은 군 특무부 등 각 방면에서 수시 허가 또는 시설을 만들기 위해, 현재는 상당한 장애에 봉착해, 실제로 일본 현지 부모로부터 수사 의뢰, 또는 본인 혹은 부모로부터, 이러한 더러운 직업 불승낙에 의한 귀향 조처 의뢰 등이 쇄도하는 상황[생략]”

군이 제멋대로 한 행동 결과, 매춘을 하게 되는 것을 모르고 따라 온 여성이 귀국을 청원하러 오거나, 일본 현지의 가족이 행방을 찾아 달라고 요구하러 오거나 하는 혼란이 생긴다는 것이다. ②~④ 위반에 그치지 않고, 범죄라고 할 수 있는 차원이다. 재베이징 총영사 호리우치 간조도 실태를 모르고 도항해 온 여성이 있는 사실을 보고했다.

재산하이관 부영사 사사키 다카요시佐佐木高義는, 술자리 접대 일을 할 요량으로 따라 온 여성이 매춘을 강요당하는 것에 더해, ③을 빠져나간 교묘한 수법을 보고한다. 허우허厚和(현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요릿집을 운영하는 일본인 남성이, 후쿠오카현 요시이吉井 경찰서가 발행한 신분증명서를 가진 여성 11명을 인솔해 출두했는데, 스물한 살 이상의 5명은 예기, 작부, 스물한 살 미만 6명은 여성 종업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정상적인 신분증명서였기에 통과를 인정했는데, 남성의 업태로 보아 매춘을 시킬 의혹이 있다고 보고, 뒷날, 헌병대에 연락해 조사해 달라고 한 바, 아니나 다를까, 여성 종업원이어야 할 6명 전원이 작부였다고 한다. 매춘을 강제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사키는, 직업을 사칭해 신분증명서 발급을 받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경보국장 훈령 이행 불철저가 될 낌새도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업자와 여성들의 권력 관계를 고려하면, 업자가 주도해 위장 공작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요시이 경찰서 담당자가 멍청하게 대응해 간파할 수 없었던 것일까, 보고도 못 본 척한 것일까.

사사키는 이밖에도, 베이징으로 가는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旭川市 요릿집 업주가, 아사히카와 경찰서 발급 신분증명서를 소지한 스물한 살 미만의 예기 3명을 데리고 출두했는데, 매춘 목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상적인 신분증명서를 가지고 있기에 통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례가 있었다고 보고한다.

그런데, 난징의 하나와 요시타카, 베이징의 호리우치 간조, 산하이관의 사사키 다카요시는, 피해자인 여성들의 안부와, 보호를 시도했던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문제를 알아채고 있지만, 전원을 구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외교관으로서의 책임이  추궁 당한다. 사사키는 일본 현지 여성의 도항 제한을 언급하지만, 조선인 여성이 증가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기술은 전무하다.

○ 군용차로 이동

재지푸之罘(현 옌타이煙台) 영사 나가오카 한로쿠長岡半六는, 일본인 13명, 조선인 4명 외, 중국인 매춘 여성 약 60명이 일본 해군 군인의 매춘에 응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이 여성들은 위안부로 보인다. 연재 3회째에서, 일본 외무성이, 중국에서 매춘을 강요당하는 중국인 여성에 대한 유괴와 상해 등 범죄의 횡행을 1930년 시점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기술했지만, 나가오카의 보고는, 일본군 관리하에서, 일본 해군 군인의 섹스 상대를 강요당하고 있는 중국인 매춘 여성들의 경우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재지난齊南 총영사 아리노 마나부有野學는, 일본군의 지난 진출에 수반해,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인 기생·작부가 1938년 5월 말 시점에 438명에 달해, 중일전쟁 전의 열 배 가까이 불어났다고 보고했다. 쉬저우徐州 작전을 위해, 4월까지 지난에 매춘 여성 500명을 모아 놓고, 쉬저우 점령 후에 투입할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 70%는 중국 동북 지방과 허베이에서, 30%가 일본 현지에서 온 여성들이었다. 점령 직후의 지역에서 군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상정되어 있어, 기본적으로 군 위안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쉬저우 점령 후, 총영사관은 군과 협의해, 5월 하순, 여성 186명을 군용차에 편승시켜 쉬저우 방면으로 보냈다. 업자와 여성들이 자력으로 점령지로 향한 것이 아니라, 총영사관이 절차를 밟고, 군이 이동 수단을 제공하고 있어, 오히려 위안소 전개를 주도한 경우일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쉬저우 공략을 내다보고 몰래 쉬저우 주변으로 간 여성들이 약 300명 있었다고 한다.

쉬저우에 있었던 육군 병사는, 중국 동북 지방에 있었던 조선인 매춘 업자와 50명 남짓의 여성들이, 부대를 쫓아 트럭을 타고 쉬저우로 진출해, 신춘관新春館, 화월루花月樓, 송학루松鶴樓, 삼월루三月樓라고 하는 요릿집을 꾸리고, 한때, ‘군 지정 위안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고, 전후, 전우에게 증언한다. 주26) 총영사 아리노가 보고한 상황과 유사하다.

외무성 요약에 따르면, 1937년 9월~1938년 4월에 중국으로 건너간 일본인은, 허베이 방면 94,667명, 상하이 방면 33,389명이다. 같은 시기에 허베이로 들어간 일본인의 직업은, 합계가 70,436명으로 앞의 숫자와 일치하지 않지만, 기생·작부가 3,769명에 이르렀다. 산하이관의 직업 위장 경우를 고려하면, 매춘 여성은 더 많았을 것이다. 위안부로 군인 상대를 강요당한 여성들이 상당 비율 차지한다고 생각된다.

○ ‘일본인 멸시는 어쩔 수 없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상하이로 보낸 파견원은, 1938년 10월 말 현재, 중부 중국에 있는 조선인 여성 약 2,830명 가운데 작부가 약 1,000명을 차지한다고 보고한다. “황군 위안소 경영자는 중부 중국 방면에만 약 100여 명(작부 약 1,000명?)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고도 기술하며, 중부 중국의 조선인 작부 거의 전원을 일본군 위안부로 간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 별로 보면, 상하이에 206명, 난징, 쑤저우蘇州 등에 약 100명, 그 밖의 지역에 약 700명이었다. 주27) 이밖에 일본인과 중국인 위안부가 있었던 것이다.

경시청 전 특고형사는, 소집되어 파견된 중부 중국에서, 1938년 3월 28일, 경시청의 경찰관들로 만들어진 자경회 잡지에, “반도의 여자가 말하는 떠듬거리는 일본말을 반기며 듣는다”는 노래를 투고했다. 여성의 신원은 알 수 없지만, 전쟁터의 병사들이 가까운 조선인 여성을 향한 시선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현지의 전 동료들에게도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전 형사는 그 후 전사했다고 한다. 주28)

난징에 파견된 가나가와神奈川현 전 경찰관이 1938년 10월 27일자로 일본으로 부친 편지도 동료들의 잡지에 소개되었다. 군 위안부라고는 한정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매춘 여성이 다수 있다고 하며, 여성들에 대한 멸시를 드러내면서, “통탄스럽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묻고 있다.

“전쟁에는 있기 마련인 일이지만, 저희는 베어 버리고 싶을 만큼 의문을 느낍니다. [생략] 기타 이런저런 점에서 생각하면, 배일排日은 당연하고, 반일反日은 자연스럽고, 일본 멸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러니, 우리는 이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 듭니다. 허, 참 일본은 이런 나라겠지요.” 주29)

주1) 『衛生に関する指示綴 昭和一二年~一六年』「出動部隊衛生部員に与ふる指示」(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以下. ‘アジア歷’)
주2)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三三卷, 186쪽
주3) 『北支軍兵站監部行動詳報 昭和一二年九月一日~一三年七月七日』(アジア歷), 『北支那方面軍衛生業務資料』(防衛省 防衛硏究所戰史硏究センター. 以下, ‘防衛硏’. 所藏)
주4) 『獨立攻城重砲兵第二大隊陣中日誌 昭和一二年七月二七日~一二年九七月三0日』等 (防衛硏 所藏)
주5) 『上海ニ於ケル外出員心得』, 上海海軍特別陸戰隊(防衛硏 所藏)
주6) 「上村利道日記」, 『南京戰史資料集Ⅱ』, 270쪽
주7) 『衛生防毒品追送に關する件』, 『支受大日記(密)其八』(アジア歷)
주8) 「高等外事月報 第一號」, 『十五年戰爭極祕資料集 六』(以下, ‘高等外事月報’), 37쪽
주9) 『政府 調査 ‘從軍慰安婦’ 關係資料集成①』, 3쪽
주10) 『渡支邦人取締狀況·不良分子ノ渡支取締方ニ關スル件』(國立公文書館所藏)
주11) 『政府 調査 ‘從軍慰安婦’ 關係資料集成②』, 3쪽
주12) 「高等外事月報」, 35쪽
주13)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三七卷, 130쪽
주14)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九卷, 323쪽
주15)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二九卷, 211쪽
주16)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二九卷, 223쪽, 「支那渡航取扱手續に關する件」『密大日記 第六冊 昭和 一二年』(アジア歷)
주17)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三四卷, 459쪽
주18)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二九卷, 237쪽
주19) 前揭 「支那渡航取扱手續に關する件」
주20) 「高等外事月報」, 38쪽
주21) 「時局利用婦女誘拐被疑事件ニ關スル件」『政府 調査 ‘從軍慰安婦’ 關係資料集成①』, 27쪽
주22)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四三卷, 133쪽
주23) 永井和, 「軍·警察史料からみた日本陸軍の慰安所システム」『‘慰安婦’問題を/から考える』
주24)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三一卷, 60쪽
주25) 今田眞人, 『極秘文書と慰安婦强制連行』, 283쪽
주26) 岸本淸夫,「つくられた ‘從軍慰安婦’」『北陸戰友』第一八號(1992년 11월), 徐州日本商工會議所 『躍進徐州』(1941년판), 156쪽
주27) 『在上海朝鮮總督府派遣員報告(昭和十三年度)』 (山口縣文書館所藏, 國文學硏究資料館が寫しを所藏)
주28) 『自警』第二二八號, 67쪽
주29) 警察協會神奈川支部 『警友』, 1938년 12월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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