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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5회
중국 북쪽에 주둔한 부대의 위험한 통제
김종익 | 2020-02-12 10:29:2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침략자 일본이 식민지에 이식한 매춘 제도의 민 낯을 드러내며, 이 악습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고발한다.

결국 식민지(조선, 중국, 타이완)에서 ‘자본주의적 기업 경영’의 일종으로 매춘업을 영위했던 일본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지탱시킨 근간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역자 주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5회
- 중국 북쪽에 주둔한 부대의 위험한 통제 -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글은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의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 본문 가운데 (  )는 필자의, [   ]는 역자의 주석이다.
   이 글은,  『世界』2020년 1월호에 게재되었다.

1932년 9월 19일, 육군 제7사단(아사히카와旭川)에 혼성 제14여단을 편성해 관동군에 파견하라고 명령이 내렸다. 만주 사변 발발 후 1년. 일본은 이해 3월에 중국 동북 지방에 수립한 괴뢰국가 만주국과 4일 전에 일만日滿의정서를 체결하고, 군대 주둔을 인정하도록 했다. 핫토리 헤이지로服部兵次郞를 여단장으로 삼아, 7사단에 소속된 부대 가운데 추출된 부대로 편성된 여단은, 시민의 전송을 받으며 9월 중에 홋카이도를 출발, 10월에 만주국에 도착,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 예하로 들어갔다. 주1)

무토를 보좌하는 참보부장은 이해 1월에 시작된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육군 최초의 위안소를 만들었다고 자인하는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이다. 연재 첫 회에서 보았듯이, 이미 이 시기에 육군 내부에서는 상하이에서 육군이 위안소를 만든 것에 찬반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중국 동북 지방으로 옮긴 제14사단에서는 7월에 쑤이화綏化에서 사실상 위안소 설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바로 앞의 연재에서 보았다.

14여단 의료 전반을 담당하는 사령부 전속 이등 군의관 주임 나가노 모토하루中野織治는 마흔여섯. 1910년에 임관되어, 1929년부터 7사단 군의관부에 재적했다. 주2) 종래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여겨져 온 군 위안부에 관련되게 된다.

동정童貞을 자극하지 마라

14여단의 각 부대는 1932년 10월, 펑톈奉天에 집결했다. 펑톈 동쪽의 항일 무장 세력 소탕을 명령받고, 전투를 거듭했다. 여단 주력은 17일 퉁화通化에 입성했다. 나가노는 바로 다음날, 매춘업자가 있는 지역에 병사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각 부대가 성병 예방에 주의하도록 지시한 것을 기록했다. 10월 하순, 각 부대에 병사들의 성기 조사를 시켰다. 주3) 병사들이 모종의 방법으로 섹스를 하고 성병에 감염될 걱정을 불식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초 토벌 작전을 끝낸 여단은, 1932년 11월, 펑톈 북동에 집결했다. 나가노는 11월 8일, 작전이 장기화되면 성병에 걸릴 사람이 나온다고 하여, 병사들에게 금욕을 지도하지만, 성욕을 참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적극적 예방법’을 확실하게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주4)

‘적극적 예방법’이란 뭘까. 『滿洲事變陸軍衛生史』에 따르면,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상하이 파견 군의관부장 다가와 세이산로田川精三郞는, 성병 예방약 二銀膏와 聖秘膏, 콘돔 사용, 성교 후 성기 소독 등을 그렇게 부른다. 주5) 위안소 설치를 포함해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든다’는 표현을 하는 군 간부도 있었다. 주6) 여기서 말하는 ‘적극적’이라는 말에는, 여성과 업자 쪽을 대상으로 한 대책에서 한 발 들어가, 위안소 설치와 병사 쪽 예방책을 강구한다는 사정이 있다. 

나가노가 지시한 적극적 예방법에도, 二銀膏를 병사 일인당 한 달에 두 개씩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二銀膏 비용이 관동군 전체로 거액에 이른다고 하여, 절약을 호소했다. 대책이 오히려 병사들의 성욕을 자극하고 만 것에 대한 염려도 엿볼 수 있다.

“적극적 예방법 실시와 관련해서는, 우리 홋카이도 건아 가운데는 약 반수 이상의 동정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들을 도발시키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시키기를 바란다.”

여단은 1932년 11월 하순, 앞의 연재에서 다뤘던 마쓰키 나오스케松木直亮의 14사단 지휘하에 들어가 중국 동북 지방의 북부 작전에 편입되었다. 12월 5~6일, 소련과의 국경에 가까운 하이라얼海拉尔, 만저우리满洲里에 도착하자마자, 여단 담당자는 현병대장과 그 지방 경찰관과 함께, 중국인과 러시아인의 유곽을 시찰하고, 매춘 여성들에게 매주 1회, 성병 검사를 할 것을 결정했다. 각 유곽에서 여성의 이름과 나이를 적은 검사표를 제출하게 하고, 검사 날짜와 담당한 나가노 이하 5명의 군의관 소견을 기입해 여성에게 지참하게 하여, 손님에게 제시하게 했다. 중국인, 러시아인 모두 40% 전후가 성병이라, 군이 치료하기로 했다. 주7) 군 위안소와 위안부라고 할 수 있을까 미묘하지만, 군 관여 정도가 늘어난 것은 알 수 있다.

여단은 하이라얼에서 해를 넘긴다. 1933년 1월 5일의 진중일지에, “매춘부를 안고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병사”가 있다고 하며, 군기·풍기에 주의하도록 각 부대에 지시했다는 기술이 보인다. 주8) 상층부는 규율의 해이에 고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1933년 1월 하순, 여단은 펑톈 주변으로 이동하고, 이틀 후에는 주둔 규정을 정했다. 부대마다 외출을 인정하는 요일을 정하고, 귀대한 병사들의 국부 소독을 군의관들이 행할 것을 규정했다. 주9) 여단 군의관 나가노는 1933년 2월, 펑톈의 남만주철도병원이 한 매춘 여성 성병 검사 결과를 살폈다. 일본인 기생·작부가 413명, 조선인 작부가 203명 있고, 검사를 받은 여성 약 20%가 성병이었다. 매춘업소의 감염 예방은 불충분하다고 여기고, 병사들에게, 여성에게 검사 결과 제시를 요구하고, 성병에 걸린 여성과 섹스를 피하고, 二銀膏와 콘돔을 꼭 사용하도록 호소하고, 귀대 후 검사와 소독을 철저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주10)

여단은 이동한 곳곳마다 상황에 대응해 대책을 강구하며, 노하우를 축적해 갔다고 여겨진다. 바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러일전쟁 기간에 중국 동북 지방에 매매춘 구조를 도입하는 데, 군이 깊게 관여했다. 러일전쟁 후에도 여성 인권을 짓밟는 구조를 만연시켰다. 나가노가 병사들의 성병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의 복선이다.

‘혼란’ 속의 ‘에로 상품’

14여단이 향하는 중국 동북 지방의 남서부로 눈을 돌린다. 조선에 있던 제19, 20사단 주11)을 모체로 한 혼성 제38, 39여단, 20사단 사령부가 만주사변에 파견되어, 1932년 1월 3일 진저우錦州를 점령했다. 20사단장 무로 겐지室兼次가 지휘했다.

39여단 3등 주계정主計正 니시타니 규다로西谷久太郞는 1932년 4월에 인쇄된 주계 장교들 잡지에 진저우 상황을 보고한다. 영사관 조사에서 일본인이 이미 1,200~1,300명에 달하고, 여성과 어린이가 약 30%를 차지한다고 한다. 요릿집 27집, 카페를 포함한 음식점 16집 등 100집 남짓한 업자가 진출해 있으며, 니시타니는 “에로 상품은 압도적 꼴”이라고 표현했다. 삼등 주계 스기우라 긴다로杉浦金太郞도 같은 잡지 같은 호에, 진저우 침공 후 “열흘이 안 된 사이”에, “일본 조선 요릿집이 줄을 이었다”고 전했다. 주12) 무로 겐지가 이끄는 부대가 진저우에 들어온 직후에 군인을 노리는 일본인과 조선인 매춘업자와 여성들이 진출한 것을 알 수 있다.

니시타니와 스기우라의 보고가 활자로 되는 1932년 4월, 8사단이 일본 현지에서 투입되어, 진저우에서 20사단과 교체했다. 8사단 위생반 2등 군의관 노베 마고토野邊誠 등은, 진저우와, 진저우와 펑톈 사이의 다후산打虎山에 활동 거점을 설치하고, 일본인과 조선인 기생·작부의 성병 검사에 착수했다 주13). 매춘부라고 하지만, 일본 현지의 「매춘부 단속 규칙」에 기초로 한 것은 아니다. 기생, 창기, 창부, 작부라고 구별해 쓰지만, 어디까지 엄밀하게 구분된 말씨였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군의관에 의한 성병 검사 대상인 점에서, 군인의 섹스 상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진저우에서도 다후산에서도, 20사단으로부터 인계를 받고 곧바로 성병 검사에 착수하고 있으며, 군인 상대 매춘은 점령 직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9월까지 두 곳에서 총계 2,559명을 검사했는데, 성병 감염 여성이 13~16%였다고 한다.

점령 직후 진저우에 들어간 일본 정부 고위 관리가 있었다. 조선 경찰의 최고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이케다 기요시池田淸이다. 1932년 2월, 펑톈에서 관동군 사령관 혼죠 시게루本庄繁를 위문한 후, 진저우로 무로 겐지를 방문해 노고를 위로하고, 식사를 대접받았다, 귀로에 길목에 ‘무사시야武藏屋’ 따위의 상호를 단 요릿집이 늘어서 있는 것을 목격하고, “여군입니다”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이들이 재빨리 달려와 주었다”고 설명을 받았다. ‘여군’은 바로 앞 연재에서 본 낭자군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인과 일본 현지 출신자가 각각 80명 씩 있었다고 한다. 주14)

군인들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이케다가 본 여성들 가운데 군인의 매춘에 응하는 여성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진저우에서의 체험을 기록한 1934년 10월의 조선경찰협회의 경찰용 잡지 『警務彙報』 기사 가운데, 이케다는 여성들의 일의 내용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이 연재 3회째에서 보았듯이, 당시, 조선총독부 경찰관 강습소 교수 마스다 미치요시增田道義가, 같은 『警務彙報』에서, 기생·창기와 작부의 비참한 실태를 고발하는 연재를 하는 데, 역시 군인의 매춘을 정면에서 논하지는 않는다. 공공연하게 비판하기 어려운 세계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 무렵 조선의 일본 현지 출신 경찰관 70% 가까이는 군 출신자였다고 하니까, 이케다의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많은 부하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관동군 참모부는 1932년 7월, 만주국 건설을 목표로 정리한 내부 자료 가운데, 항일 세력이 “일본군 부대가 강간했다든가, 한다든가, 허위 선전을 해 양민을 미혹시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실제로 일본 군인들에 의한 강간이 발생하면, 군의 명예를 손상한다고 하여, 적에게 꼬투리를 잡힐 틈을 주지 않도록 주의 환기를 한다. 주15). 다음해 1933년 1월 관동군의 정리에 의하면, 간토슈關東州[랴오닝성 랴오닝 반도 남쪽에 있었던 일본 조차지]와 남만주철도 부속지 이외의 만주국 전체에서,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의 매춘 여성 9,971명에 성병 검사를 한 바, 성병에 걸린 여성이 30%를 차지했다. 주16)

관동군 입장에서, 병사에 의한 강간과 병사의 성병을 막아야 할 상황이, 중국 동북 지방에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8사단 보병 제4여단이 진저우 남서의 산하이관山海關을 점령한 것은, 1933년 1월 3일. 스즈키 요시유키鈴木美通가 지휘하고, 일부가 혼성 제4여단으로 치치하얼에서 성병 대책을 경험하고, 지난해 4월에 8사단으로 돌아온 부대이다. 산하이관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어 발해만을 면한, 중국 동북 지방과 허베이의 경계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일본 외무성 경찰부 다카하시 다케지高橋武次는 1933년 1월 24일, 산하이관의 일본인 상황에 대해, “만주국 방면에서 요릿집, 음식점 등 기타 군 관련 영업을 할 작정으로, 혼란할 때, 한밑천 잡으려고 들어온 자가 상당수 있다”고 보고했다. 점령 전에 산하이관에 있던 조선인 여성은 16명, 그 가운데 11명은 요릿집에 고용된 작부였다. 점령 후, 요릿집 네 집이 진저우 방면에서 진출하고, 작부는 19명 증원되었다. 일본 현지인도 진저우 방면에서 요릿집이 네 집, 음식점이 세 집 진출해 늘어난 여성 6명 전원이 기생·작부·여급이었다. “일본군 주둔에 따라, 상당히 번창하는 것 같다”는 상황이었다. 주17)

2주 이내에 개업하라

진저우와 산하이관을 제압한 관동군은 러허성熱河省 침공을 획책한다. 중국, 소련과의 사이에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것 등이 군의 노림수였다. 주18) 만주사변 발발 이후, 최대 규모의 작전이 된다. 일본 정부는 국제연맹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러허 침공의 옳고 그름을 둘러싸고 동요하지만, 군부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된다. 일본이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위험한 군사 행동에, 8사단과 14여단은 편입되어 간다.

1933년 2월 17일, 작전 개시 명령이 내렸다. 14여단은 8사단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14여단의 나가노는 2월 11일에 관동군 군의관부장 이토 겐조伊藤賢三로부터 러허 작전을 위해 지시를 받은 다음, 16일에 여단 군의관들을 모아, 각 부대는 군에서 교부하는 二銀膏 두 달분을 휴대할 것, 콘돔도 각 부대가 충분히 준비해 휴대할 것을 지시했다. 이 시점에서, 二銀膏는 군에서 교부하지만, 콘돔은 각 부대의 책임으로 조달하게 되고 있었던 듯하다. 보병 제25, 26, 28연대에 二銀膏를 1,300개씩, 야전포병 제7연대에 650개, 여단 사령부에 100개 교부한다. 주19)

8사단과 14여단은 진격을 개시해, 1933년 3월 초에 주요 거점 링위안凌源, 핑취안平泉, 청더承德를 잇달아 점령했다. 만리장성의 일부를 함락하고, 그 후에도 단속적으로 전투가 이어졌다.

새로운 점령지에서는 치안 유지와 질서 확립이 과제가 된다. 8사단이 1933년 3월 22일, 러허성 경비 구역 안에서의 일본인 거주와 영업을 단속하는 규칙을 참모장 이름으로 정했다. 진저우에 둔 병참부가 일본인의 출입을 단속하고, 거주, 영업을 하려고 하는 자는, 입경 허가 서류 외에, 본적지, 이전 주소, 이름, 나이, 업종과 가족·동거인 이름, 나이 등을 기입한 원서를, 헌병대를 통해 사단 참모장에게 내고, 영업 허가를 받으면 2주 이내에 개업해야 했다. 이동에도 신청이 필요했다. 업종별로 한층 자세한 규칙이 있었던 듯하다. 치안이 안정되고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면, 단속을 영사관 경찰로 이관하는 것도 정해져 있었다. 주20)

규칙이 어디까지 기능했는가 알 수 없지만, 일본인 업자들을 주도면밀하게 통제하려고 한 것이다. 규칙 가운데 요식업자라는 말이 있는데, 매춘업자와 여성들도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2주 이내 개업을 의무화하는 점이 흥미를 끈다. 외무성 경찰 다카하시와 39여단 니시타니가 말하는 ‘혼란 속’의 ‘에로 상품’을, 손님으로 그저 기대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제도로 준비한 것이다.

인육人肉시장[창녀가 몸을 파는 곳]  

14여단 사령부의 『衛生業務旬報』 등을 바탕으로, 러허 침공 후 움직임을 보도록 하자. 주로 사령부 전속 군의관인 나가노 이름으로 10일마다 정리된 기록이다.

핑취안에 있었던 나가노는, 1933년 3월 27일, 현지 부대에 ‘중국 유곽’이 서너 집 있고 ‘창기’가 스무 명 정도 있는데, 불결하고 성병 환자가 많은 듯하다, 고 하여, 출입을 금지했다고 기록했다. 이 무렵, 여단 사령부와 보병 제26연대 두 명이 성병으로 입원했다.

일본인과 조선인 ‘창기’ 서른여덟 명을 핑취안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고, 1933년 4월 16일, 관동군과 14여단의 군의관이 성병 검사를 했다. 내역은 일본인 기생 한 명, 일본인 작부 두 명, 조선인 기생 두 명, 조선인 작부 서른세 명. 성병 보균자로 판명된 네 명은 전원 조선인 작부였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1946년생. 역사학자. 일본 근현대사 전공]는 이 여성들이 있는 시설에 대해, “사실상 군 위안부인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 주21) 여성들의 존재는 공문서인 『衛生業務旬報』에 명기되어 있는데, 업자들과 함께, 개업을 위한 정식 수속으로 핑취안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풍속을 단속하는 경찰에서는 예기와 작부를 ‘창기’로 총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매춘을 하는 여성 = 창기’ 라는 잡박한 이해였던 것이다. 군이 매춘 여성들에게 기대한 것은, 군인에게 성병을 옮기지 않고 섹스 상대가 되고, 그럼으로써 군인에 의한 민간인 여성 강간을 줄이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며, 호칭은 중요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핑취안에서 1933년 4월 23일 두 번째 성병 검사를 받은 여성은 마흔네 명이 되었다. 늘어난 여섯 명의 내역은 일본인 기생 한 명, 일본인 작부 세 명, 조선인 기생 한 명, 조선인 작부 한 명. 닷새 후, 여단은 「예창기작부건강진단실시요령藝倡妓酌婦健康診斷實施要領」을 정했다. 예창기·작부를 대상으로, 군의관에 의한 성병 검사를 매주 1회 이상 행하고, 군의관은 건강진단부에 기록함과 동시에, 여성들이 소지한 건강진단수검표에 결과를 기입하고, 손님의 요구에 응해 제시하게 하는 것을 규정했다. ‘군대 방역상의 필요에 따른 실시’이며, 병사들의 섹스 상대가 되는 여성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인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실시한다”고 있는 것은, 검사 자체가 여성에게 정신적 고통을 줄 염려를 여단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실시요령」에는, 참고 법규로, 일본 현지의 창기단속규칙 가운데, 경찰 명부에 등록되어 있지 않는 자의 장사 금지와 건강진단규정이 첨부되어 있는데, 폐업과 창기의 통신, 면접 등 자유에 관한 규정이 생략되었다. 별도 규칙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성매매 세계에서는, 단속 당국이 어떤 방침을 내걸든지, 범죄와 기만이 쉽게 만연한다. 이제까지 보아온 그대로이다.

「실시요령」을 정한 이틀 후인 1933년 4월 30일, 여단은 핑취안의 일본인과 조선인 매춘 여성 전원을 모아서 성병 예방 강의를 하고, 각 매춘업소를 헌병이 순찰했다. 8사단 군의관 노베는 그 다음날, 핑취안에 들어가 여단의 나가노를 방문했다. 노베는 당시 서른일곱 살. 만주사변 전에는 7사단의 대대에 있었다. 같은 시기에 7사단 군의관부에 있던 나가노는, ‘위로’와 미소 띤 얼굴로 노베를 맞으며, 무사함을 기뻐했다. 이날, 노베는 “들으니 벌써 오늘쯤, 낭자군 진영도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고 써서 남긴다. 주22) 나가노 등이 준비한 위안소가 5월 1일에 개업했던 거라고 생각된다.

노베는 다음날 밤, 동료들을 밤거리로 불러냈다. 동료는 “가시죠. 벌써 세 달이나 여자 얼굴을 뵙지 못한 거니까요”라고 두말없이 응했다. 상호가 쓰인 사방등을 매단 네 집 가운데 한 집에 들어간 노베 일행은 놀라서 숨을 죽였다.

“나는 여기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략]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그러모은 창녀가 몸을 파는 곳이다. 여자는 이 집에만 열두세 명이나 될 것이다. 열 일고여덟에서 스무 살 전후로, 일본 옷을 입고, 좀 사투리는 있지만, 능란한 일본어를 말한다. 한 시간 노는 데 병사 1엔 50전, 하사관 2엔, 장교 3엔 등이라고 규칙을 정한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문도 없는 방의 한편에는, 흰 이불 한 장이 쳐져 있고, [그 앞쪽에] 다섯 명 열 명의 병사가 오글거리고 있었다.‘기다려요’, 이불 안쪽에서 아리따운 젊은 여성의 새된 목소리가 나기에, 잠깐 그 흰 막의 끝을 젖히고 보았더니, 한 명의 병사가 봉당으로 내려와 팬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이 침상[본문은 ‘炕’이다. 炕은, 중국 황허 강 이북에서 쓰이는 가옥 난방 장치이다. 중국 북부 및 동북부에서 겨울철 난방 시설로 쓰이는 데, 실내의 한쪽에 벽돌을 쌓아 방 한쪽을 덥게 하는 것으로 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온돌과 비슷하다]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붉은색의 두꺼운 이불이 깔린 채로 하고 있어, 어둠 속의 그녀는 저쪽 방향에서, 허리 부근을 xxxx하고 있었다. [생략] 어느 방이든 모든 방이 이럴 듯하다. [생략] 전투에 강한 용사는 여기서도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 초대받지 않고 모두, 여성의 육체로 돌격하는 거다. ‘여기도 전쟁이구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내일을 알 수 없는 목숨인 거니까’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침상은 온돌 같은 거라고 생각된다. 밀착하고 있던 병사들이 여성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욕을 폭발시키고 있는 것을 처음 보고, 노베는 동요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철수했다고 한다. 북쪽 부대가 모색으로 시작한 성병 대책의 하나의 종착점이, 위안소라는 비인간적인 ‘인육시장’이었다.

다만, 노베는 동료들과 “잘 관찰하고 왔구만”이라며 웃으며 숙소로 돌아가고 있으며, 어디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분명하지 않다. 노베는 핑취안에 일본인 여성 시설도 있었던 사실, 청더에도 이런 시설이 몇 집 만들어져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다.

청더로 돌아온 노베는 1933년 5월 6일, 동료의 위로회에 얼굴을 내민다. 접대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노베가 일찍이 진저우에서 성병 검사를 했던, 낯익은 일본인 기생과 조선인 여성들이었다. 주23)

이 무렵, 러허의 군인 상대 장사를 둘러싼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다. 군인 상대 카페를 열고 돈을 벌려고, 업자들이, 1933년 3월 하순, 시즈오카현의 열아홉 살 작부를, 만주에 가면 빚을 바로 갚는다 따위로 유혹하고 유괴해 데리고 왔다. 5월, 다른 요릿집에서 일하기 위해, 같은 시즈오카의 열여섯 살과 스물일곱 살의 작부를 속여서 데리고 오려고 했다. 현지의 소개업자가 협력했다. 목적지는 모두 러허 작전으로 8사단이 점령한 링위안. 업자들은 적발되고,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주24) 시즈오카 사건으로 알려지는 이 국외 유괴·동 미수 사건은, 전쟁터의 성이 범죄와 표리 관계에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일본 현지와 식민지 매매춘에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체질이다.

대책 불비를 토로

1933년 5월 3일, 14여단 주력은 제6사단장의 지휘하로 이동하게 되었다.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징 동쪽의 샤뎬夏店 부근에 도달한 5월 20일까지 열흘 동안, 새로운 성병 환자가 한 명 나왔다. 23일에는 星秘膏 11,000개, 콘돔 8,016개가 도착해 각 부대에 분배했다. 1930년부터 군무에 종사하고, 만주사변에 따라 [근무가] 연장되었던 병사들 약 1,300명이 귀환을 명받자, 여단 사령부는 28일, 귀환 도중에 매춘을 해 성병에 걸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하며 주의를 촉구하고, 군의관 나가노는 콘돔과 星秘膏를 넉넉하게 지참하도록 지시했다.

1933년 5월 31일에 탕구塘沽 정전 협정이 체결된 후, 여단은 산하이관으로 이동했다. 여단은 중국인 유곽에 병사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각 부대가 해금을 요구하기 때문에, 매춘 여성의 성병 검사를 엄격하게 행하기로 하고, 7월 16일부터 허가했다.

나가노도 전쟁터를 떠날 때가 왔다. 1933년 7월 29일, 산하이관 여단 사령부에서 열린 의무관과 약제관 회의에서, 나가노는 출정 이후의 나날을 회고했다. 그 사이, 142명이 사망했다. 나가노는, 성병 환자가 47명에 그쳤지만, 주둔 태세에 들어가 감염 기회가 늘어남으로써, 적극적 예방책을 확실하게 행할 것을 호소하고 나서, 이렇게 경종을 울렸다.

“성병에 걸린 매춘부의 휴업에 관한 단속을 충분히 행하지 않는 관계로, 또는 성명을 변경하고, 또는 영업장소를 옮기고, 계속 영업하는 사람이 있다고 듣는다. 또한 검사도 육안 검사뿐이기 때문에, 성병에 걸리지 않은 매춘부는 꼭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은 명료[생략]”

성병으로 판명된 여성이 위장 공작을 해 매춘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사실이라면, 군이 업자와 여성 신원을 파악해 통제하는 방침이, 사실은 기능하지 않았다는 게 된다. 수속과 이동을 매춘 여성이 자력으로 해내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적어도 업자가, 주도 또는 협력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성병 검사에 이르러서는, 간과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자인하고 있다. 군인의 성을 통제하는 방도를 준비했지만, 모두 액면 그대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이별의 말이었다.

콘돔 60만 개

새로운 14여단 사령부 전속 군의관 다카사키 히데히코高崎英彦는 부임하자마자 1933년 8월 중순, 산하이관의 매춘 여성 검사 상황과 매춘업소 감염 대책을 따져본 결과, 중국인 여성은 성병 치료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 한편,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이 늘어서 병사들의 수요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며, 중국인 매춘 시설에 병사들의 출입을 원래처럼 다시 금지했다. 일본인, 조선인 매춘업자와 여성들은 일본군 부대 이동 등에 동반해 이동하고, 산하이관 여성의 인원수도 늘 변동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933년 중에 산하이관에서 개업한 일본인 요릿집은 39, 폐업 9, 연말 시점에서 32집이었다. 전년 말에 제로였던 일본인 기생은 1933년 말에 32명, 12명 있었던 작부는 104명으로 급증했다. 주25) 같은 시기, 러허성 8사단 경비 구역 내 일본인은 3,851명, 조선인 641명. 일본 현지 출신자는 군을 목표로 한 업자가 대부분이고, 조선인 대부분은 요릿집 관련자였다. 주26)

1934년 2월, 14여단은 홋카이도로 귀환했다. 도중에 성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각 부대는 콘돔과 二銀膏를 배분하고, 위생반은 도중에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 콘돔과 二銀膏를 지참했다. 주27) 관동군은 1934년 4월, 8사단이 치료 중인 환자 37명을 현지 의료기관에 두고 귀환한다고, 육군성에 보고했다. 부상 병명별로 가장 많았던 것이 성병 5명이었다. 주28)

14여단과 8사단이 경비하던 지역을 새로 인계받은 부대는, 14여단의 모체인 7사단. 1934년 6월, 이미 성병 환자가 20명이 나오고, “적극 소극 두 방면으로 적극 예방에 노력해 가고 있다”고 보고한다. 주29)

광대한 중국 동북 지방에 투입된 일본의 많은 군인은, 각지에 위안소를 포함한 성병 대책에 내몰렸다. 만주사변 중에 육군이 행선지로 보낸 二銀膏와 星秘膏는 1,163,265개, 콘돔 606,953개.주30) 다 사용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찔한 숫자이다.

다음 회는 많은 위안소가 만들어진 중일전쟁에 초점을 둔다.

주1) 『新旭川市史衛 第四卷·通史四』, 211쪽
주2) 『陸軍現役將校同相當官 實役停年名簿 昭和六. 九 調』(防衛省 防衛硏究所戰史硏究センター. 以下, ‘防衛硏’. 所藏)
주3) 『衛生業務旬報』, 混成第一四旅團司令部(國立公文書館所藏)
주4) 同前
주5)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 830쪽
주6) 『岡部直三郞大將の日記』, 23쪽
주7)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 825쪽
주8) 『混成第一四旅團 陣中日誌 昭八. 一 . 一~八. 一 三』(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以下. ‘アジア歷’)
주9) 同前
주10)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 826쪽
주11) 金富子と金榮は『植民地遊廓 日本の軍隊と朝鮮半島』(2018年)애서, 조선의 식민지화와 유곽 이식, 19, 20 두 사단 사령부와 각 부대 등이 배치된 도시에서 유곽과 군, 지역 사회의 관계를 밝혔다.
주12) 『陸軍主計團記事』, 267호 54, 133쪽
주13) 『昭和七年度 業務詳報 第八師團衛生班(混成第四旅團衛生班)』(陸上自衛隊衛生學校醫學情報史料室·彰古館所藏)
주14) 『警察彙報』, 朝鮮警察協會, 342호 7쪽
주15)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八卷』, 190쪽
주16)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三卷』, 132쪽
주17)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三七卷, 26쪽
주18) 加藤陽子 『滿洲事變から中日戰爭へ  シリーズ日本近現代史 ⑤』, 164쪽
주19) 『衛生業務旬報』
주20)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一二卷, 239쪽
주21) 吉見義明, 『從軍慰安婦』, 19쪽
주22) 野邊誠, 「轉戰手記(10)」『軍醫團雜誌』, 272호(1936년 1월), 127쪽
주23) 野邊誠, 「轉戰手記」『軍醫團雜誌』, 272호(1936년 1월), 279쪽
주24) 『大審院刑事判例集 第一四卷 上,』, 625쪽
주25)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三七卷, 49쪽
주26) 「熱河省に於ける日本人の發展槪況(昭和八年一二月末に於ける)」『山海關事件に就て 昭八. 一. 二0』(アジア歷)
주27) 『步兵第二五·二六連隊 衛生槪況書 昭和九年』(アジア歷)
주28) 「歸還に際し衛生機關に殘置せしものの件」『昭和九年 ‘陸滿密綴 第七號’ 自, 昭和九年四月二0日 至 昭和九年五月三日』(アジア歷)
주29) 「昭和九年六月二二日 衛生槪況書 第七師團」『第七師團關係 衛生槪況書 昭和九年』(アジア歷)
주30)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 8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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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지나다  2020년2월12일 11시17분    
옛날 조선시대 이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매춘이 있었을까?
매춘이라...

실은 흔히들 알고있는 기생이라는 존재는
매춘부가 아니라 오늘날의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 중에 뛰어난 기생은
오늘날 가장 유명한 연예인 보다도 더 유명세를 탔다.
황진이, 이매창, 장녹수
그리고 진주의 의기 논개 등등
이들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가히 오늘날의 톱 탈렌트 못지 않은 유명세를 누렸다.

그리고 주막집의 주모, 작부가 있고...
그들은 술 마시다가 눈이 맞아 놀아난거지
오늘날의 매춘굴처럼 돈 내고 몸 팔고 그런 형태는 아니었다고 보는데

왜놈들은
지덜 국민을 개돼지 취급을 했으므로
남녀의 교합도 주인으로서 의무감을 가지고 했던 것 같다.
계란을 생산하는 양계장에
알 낳는 효율을 올리기 위해
닭장 속에 수컷 한두마리를 넣듯이
그렇게 매춘굴을 관리한 거 같다.
(4) (-2)
 [2/2]   불초자  2020년2월15일 23시49분    
이 일본 분의 연재 기사를 간추려 본다면,
매춘은 어느 나라에도 있었지만, 정부가 나서서 이를 제도화하고, 심지어 남의 나라와 민족에까지 이식하려 한 일본은 그 잔학성과 특수성에 있어 전대미문의 경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 조선을 비롯한 피해국의 여성들을 집단으로 유린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은 있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① 일본 외무성에서 자국군대를 위해 자국의 매춘제도를 은밀히 다른 나라들에 이식할 정도로 작업이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 이 연재의 첫번째 골자이고,
② 이런 신호를 받은 일본의 매춘업자들이 자국은 물론 조선과 중국, 대만의 피해국들의 여성들을 인신매매 등의 수법을 써서 준비시켰다는 것이 두번째 골자이며,
③일본 군대는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 업자들을 통해 피해국들의 여성들을 탈취해왔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그 규모가 늘어나게 되면서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부대 내에 여성을 집단으로 범하는 장소들을 자체적으로 운영해왔다는 것이 세번째(완성된) 골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친일세력들은,
일본정부와 군부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두번째 부분만을 확대해 여론을 왜곡해왔습니다.
일본의 매춘업자들과 인신매매단들이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그 부근에서 거주하면서서 접대를 해온 일상의 영업행위가 '위안부'로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가 바라봐야할 곳은, 첫번째(일본정부)와 세번째(일본군부)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본정부가 포문을 열고, 군부가 그 성노예제를 완성한 것이 더 역사의 진실에 부합합니다.
전쟁범죄이며, 일국의 인간사냥이 그 본질임을 저들에게 똑똑히 말해주어야 합니다.
'위안부'가 아니라 '성 노예'였음을 저들에게 똑똑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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