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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4회
낭자군娘子軍, 그리고
김종익 | 2019-11-06 12:59:3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침략자 일본이 식민지에 이식한 매춘 제도의 민 낯을 드러내며, 이 악습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고발한다.

결국 식민지(조선, 중국, 타이완)에서 ‘자본주의적 기업 경영’의 일종으로 매춘업을 영위했던 일본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지탱시킨 근간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역자 주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4
- 낭자군娘子軍, 그리고 -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글은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의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 (   )는 필자 주, [  ]는 역자 주이다.

아키타秋田현립도서관에서 『보병 제17연대 만주 사변 출동 기념 사진첩(작전편)』을 넘기고 있는데, 이상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1931년 9월에 시작된 만주 사변에 출동한 그 지방 부대의 움직임을 기록한 사진집이다. 중국 동북 지방이라고 생각되는 어딘가, 건물 옆 세탁장 같은 장소에 여성 여섯 명이 있다. 그 가운데 일본 옷을 입고 서 있는 한 명의 여성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군복 같은 옷을 입고 옆에 선 남성에게 인사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여성들은, 바로 옆에서 뭔가를 빨기도 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사진 오른쪽 아래에 ‘낭자군娘子軍’이라고 있다. ‘죠시군’으로 읽는다.  ‘로시군’으로도 읽는다. 의미는 ‘여성들’. 현재 표현이라면, ‘여성진女性陣’이라는 표현이 가까울까.

이 사진첩에 수록되었다는 것은, 육군 제8사단(히로사키弘前)에 소속되어 만주 사변에 파견된 보병 제17연대(아키타秋田)와, 뭔가 관계가 있던 여성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설명은 없다. 발행 연월일은 눈에 띄지 않고, 연대장 나가세 부헤이長瀨武平가 1933년 6월 15일자의 서문을 보낸다.

만주 사변 무렵의 책이나 군의 자료를 읽고 있노라면, 이 낭자군이라는 말을 자주 만난다. 여성들만의 부대가 있었을 리는 없다. ‘낭자군娘子群’라고 쓰는 필자도 있다. 엄밀하게 정의를 지어서 사용된 말은 아닌 것 같다. 문맥에서, 일본군이 지배하에 둔 지역에 들어가는 요리점의 기생이나 작부, 음식점의 여성 종업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인 경우도, 조선인인 경우도 있다.

연재 2, 3회째에서 봐 온 일본과 일본 세력하의 매매춘 실태에 비추어 보면, 범죄와 기만투성이가 된 비인도적인 구조 속에서, 가난 때문에, 빚에 속박되어, 매춘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여성들이 상당 정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중일 전쟁 이후, 군 위안부를 ‘낭자군娘子軍’으로 표현한 예가 있는데, 만주 사변 시기에 거기까지의 함의가 정착되어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낭자군娘子軍이라는 말의 어딘가 적극적인 반향과 정반대로, 어둡고,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진의 배경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 타다피タダピー

일본이 중국 동북 지방에 만든 괴뢰 국가 만주국의 매매춘에 대해 살펴보자.

만주국 치안부 경무사라는 조직이 1942년에 펴낸 『滿洲國警察史』에 따르면, 예전부터 중국인 사이에 매춘 여성의 인신매매가 널리 이루어지고 있었던 외에, 1932년 3월 건국 전후에 [만주에]체류하고 있던 일본인 사이에, 식민지 돈벌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하여, 성 풍속 단속상 문제가 많았다. 건국 후, 1936~1937년에 관련 법령을 정비했지만, 적어도 그 사이는, “기녀의 대부분은 인신매매에 의한 거래에 맡겨지고, 기루의 주인은 만족할 줄 모르는 착취 수단을 강행하는 것을 일삼고, 노예화된 기녀들은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 또는 자살하는 사람 등이 속출하여, 마치 지옥을 방불케 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주1)   

만주 사변과 겹치는 시기에 대한 기술이다. 연재 3회째에서, 외무성이 1930년의 조사에서 동북 지방을 포함한 중국에서 매춘을 강제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비참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을 봤는데, 그 후도 사태는 개선되지 않았던 듯하다.

다만, 『滿洲國警察史』의 기술이, 일본군에 추수하여 이동하는 업자와 여성들을 포함한 것인지 여부를, 이 자료의 문면에서 간파하기는 어렵다.

만주국 수도경찰청의 경찰관이었던 이토 시케루伊藤茂는, 일본이, 조선인, 중국인 풍속업자들이 각자 만든 조합의 비밀 장부에, 동료에 의한 부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후 회상 속에서 밝히고 있다.

“‘금품 갈취’와 ‘공짜피タダピー’는 상세하게 기입되어 있으며, ‘그 남자가’라고 놀란 적도 간혹 있으며, 더러운 내밀한 일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주2) 
  
‘피ピー’란, 매춘을 강요당하는 여성이나 매춘방을 의미하는 은어로, 전쟁터에서는 위안부나 위안소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만주국 경찰관이, 단속 대상인 성 풍속업자의 지배하에 있는 여성들과, 돈을 지급하지 않고 섹스를 했던 기록을 봤다는 의미이다. 당한 업자는 조합장에게 청구해 보전을 받았다고 한다. 1932년에 경찰관이 되어, 3년차 이후라는 것인데, 1930년 후반 무렵의 사건으로 보인다. 예전 동료들에게 노출되는 문집 속의 기술이어서, 완전히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일본 현지와 조선에 막상막하로, 만주국에서도, 경찰관 가운데 매춘업자와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다.

후지나가 다케시藤永壯에 따르면, 중국 동북 지방에 일본 매매춘 구조가 도입된 것은, 1904~1905년의 러일 전쟁이 계기였다고 한다. 많은 일본인 여성들이 끌려가서, 매춘을 강요당했다. 러시아에 승리하고 조차권을 얻은 랴오둥 반도, 남만주철도(만철) 연선, 그 밖의 지역으로도, 일본은 공창 제도를 중심으로 한 매매춘 구조를 확산시켜 갔다. 기생, 작부의 매춘도 일본 현지와 마찬가지로 묵인했다. 국가 체면을 걱정하여, 매춘을 시키는 것이 명백한 창기라는 통명을 작부로, 유곽을 요리점으로 고쳐서 바꿔 불렀다. 많은 여성들이 속거나, 유혹에 넘어가거나 하여 끌려갔다. 조선인 여성들도 끌려갔다. 러일 전쟁 시기, 일본군은 다양한 형태로 매춘방 운영에 관여하고, 거기에 중국인 여성들도 있었다. 후지나가는 러일 전쟁 시기에 군이 관여한 매춘방을 “일본군 위안소의 원형prototype”으로 평가하며, “공창 제도 완성에 따라 ‘만주’에 정착한 ‘매춘업’은 전시 체제하에서 쉽게 ‘위안부’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고 분석한다. 주3)

만주 사변 발발 후 약 한 달 반 후, 일본 식민지였던 조선 평양의 일본인 유곽 경영자 딸, 다다 사야코多田さや子는 처음 기독교 강연을 듣고, 신의 가르침에 눈떴다. 아버지에게 “이 장사를 그만두기를 바란다”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던 1993년 6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일본 침략 전쟁에 인신 공양으로 강제된 종군 위안부, 조선의 자매 분들에게, 가해국 사람으로서 나는 낯을 들 수 없는 심정이다. 일본 현지의 공창 제도, 그 발상이 전쟁터로 보내졌다.”주4)    

그렇다면, 만주 사변으로 일본군이 진출한 중국 동북 지방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던가, 살펴보자.

■ 치치하얼齊齊哈爾 소동

만주 사변 발발로부터 약 두 달 후인 1931년 11월 19일, 육군 제2사단(센다이仙台)이 중국 동북 지방 북부의 주요 도시인 치치하얼을 점령했다. 12월 초, 8사단 안에서 뽑아낸 17연대 제3대대 등 네 개 대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혼성 제4여단이 도착하여 교대했다. [제2사단과 혼성 제4여단 가운데] 어느 쪽이 있던 때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점령 직후 치치하얼에서 낭자군을 둘러싼 소동이 발생했다.

만철 사원으로 관동군 촉탁이었단 야마구치 쥬지山口重次에 따르면, 관동군 참모 아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가, 대도시 하얼빈에서 열한 명의 기생을 치치하얼로 보냈다. 병사들에게 군기를 준수하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며, 군의 특무기관장에게 관리시켰다고 한다. 주5) 

펑톈 총영사관의 외교관 모리시마 모리토森島守人는, 하얼빈에서 치치하얼로 낭자군을 보낸 것은, 하얼빈 총영사 오하시 쥬이치大橋忠一이며, 군 주둔을 내다본 조치였다고 기록한다. 게다가, 이 파송에 대해 치치하얼 영사 시미즈 야오이치淸水八百一가, 풍기가 어지러워진다고 하여 여성들을 일단 되돌려 보내서, 오하시가 다시 보내는 소란이 있었다고 밝힌다. 주6)  오하시는 1940년에 외무차관, 전후는 자민당 중의원 의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연재 1회째에서, 나중에 중일 전쟁에서 일본 현지로부터 중국으로 위안부 송출에 이의를 제기한 외무성 다바타田畑의 의견서를 소개했는데, 군인의 욕정 발산에 협력적인 외교관과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외교관의 대립이, 만주 사변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던 듯하다. 

치치하얼 상황은, 일본 현지에서 1932년 4월에 발행된 잡지 『범죄공론犯罪公論 낭자군 출정娘子軍出征 4월 특집호四月特輯號』에 게재되었다. 오사카의 신문기자 마쓰이 신고松井眞五가 「낭자군 출정 - 어느 종군 기자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인 기사 속에, “치치하얼 점거 후, 군에 이어 입성한 것은 아마쿠사天草[아마쿠사는, 구마모토현熊本県 남서부의 크고 작은 약 110개로 이루어진 섬들을 말한다] 출신 낭자군이다”라고 쓴다. 검열 영향일까, 많은 복자伏字[인쇄물에서 내용을 밝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비운 자리에 ‘○’, ‘×’ 따위의 표를 찍음]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판독할 수 있는 부분의 기술에서, 치치하얼 등 각지에 매춘을 강요당하는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여성들이 파송된 것을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주7) 마쓰이는, 여러 명의 군인을 상대하게 하여 몸이 견디지 못한다고 호소하는 조선인 여성과, 소개업자에 넘어가 전방 부근에 들어와, 역시 군인 상대로 건강이 유지되지 않아 돌아가고 싶다고 한탄하는 여성의 말도 전한다.

1932년 9월, 주계主計 장교들의 잡지가, ‘3RO’라고 밝힌 인물에 의한 치치하얼 상황 보고를 게재했다.    

“사단이 오거나, 여단이 들어와서, 젊은 피가 끓어 넘치는 청년 사관들은 정력을 쏟을 곳이 없는 상태, 차차 조선 미인이 오거나, 하시哈市에서 또 일본 미인이 왔다.”주8)   

하시哈市란 한자로 哈爾浜[浜은 ‘濱’ 오기로 추정된다]라고 쓴 하얼빈이다. 일고여덟 명의 일본인 여성은 인기가 대단하여, 이틀 전부터 예약해야만 했다고 한다. 3RO는 시기를 명시하지 않지만, 적혀 있는 상황에서, 역시 점령 직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누구의 조정이었는지 제쳐 놓고, 치치하얼에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들이 파송된 것은 틀림없다. 연재 3회째에서 다뤘던 것처럼, 만주 사변이 시작되기 바로 전해, 치치하얼 영사 시미즈는, 매춘 여성은 일본인 한 명, 조선인 스물일곱 명이라고 보고했다. 이 여성들과는 별도의 여성들이 점령 후에 파송되었다고 생각된다.

혼성 제4여단 위생반은, 치치하얼에 있던 1931년 12월 3일부터 1932년 4월 19일까지 사이에, 성병 예방약인 수은연고水銀軟膏를 250그램, 같은 약인 이은고二銀膏와 성비고星秘膏를 총 473개 소비했다고 보고한다. 주9) 어떤 여성들을 상대로 한 것인가는 안 적혀 있다. 치치하얼의 매춘업자 지배하에 있는 여성들이 포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星秘膏는, 육군이 만주 사변 중에 개발한 크림 형태의 약으로, 용량 3그램짜리 튜브에 들어 있었다. 성교 후, 남성이 방뇨하고 씻은 성기에 발라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주10) 각 부대는 일인당 한 달에 두 개 등으로 정해 지급했다. 이 시기는 종래의 水銀軟膏와 二銀膏도 사용되고 있었다.

관동군은 1932년 1월 16일, 二銀膏 2만 개를 보내도록 육군 중앙에 요청했다. 주11) 원래 중국 동북 지방에 있던 부대에 더해, 혼성 제4여단처럼, 일본 현지와 조선에서 잇달아 부대가 투입되고 있었다. 만주 사변 발발로부터 4개월. 섹스를 하러 달려가는 병사가 다수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한 조치이다.       

■ 사단장의 일기

「TAGE BUCH」라고 제목을 붙인 두 권의 대학 노트가 있다. 주12) 필자는 만주 사변 당시, 제14사단(우쓰노미야宇都宮) 사단장이었던 마쓰키 나오스케松木直亮이다. 독일 주재 경험이 있는 마쓰키는, ‘일기’를 의미하는 독일어 제목을 붙인 노트에, 보병 제2 (미토水戶), 제59 (우쓰미노야), 제15 (다카사키高崎), 제50 (마쓰모토松本)의 각 연대를 이끌고, 상하이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전투를 한 나날을 극명하게 기록했다. 중국 동북 지방에서는 주로 치치하얼에 사령부를 두었다. 부제는 「상하이 및 만주 사변 종군 일지」이다. 이 일지와 군의 기록을 의지하여, 14사단 병사들의 성性을 둘러싼 움직임을 살펴본다. 

1932년 2월 23일, 14사단에 동원 명령이 내렸다. 목적지는 1월에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시작되고 있던 상하이. 사단 주력은 3월 10일에 상륙하여, 상하이 서쪽 난샹南翔의 경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미 대규모 전투는 수습되어 있었다. 마쓰키는 이날, 상하이 육군 부대를 총괄하는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에 가서,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으로부터 군기·풍기를 엄격하게 단속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난샹의 상황에 대해, “오카무라岡村 참모의 말에 따르면, 지난 9일 밤, 난샹에 일본 여성 8명이 침입했다고”라고 적고 있다. 주13) 14사단 담당 지역에 바로 일본인 여성이 잠입했다고 하여,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가 주의를 촉구한 것이라고 한다.

14사단은 다음 날인 11일, 참모장 오쿠시 게이키치大串敬吉을 대장으로 하는 수비지구위생위원회를 설치해 성병 예방에 착수하고, 군의부장 오시오 요이치大鹽洋一는 병사들을 사창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주14)   

중국인 소녀 강간 사건을 시작으로 한 불상사가 잇따르고, 성병에 걸린 병사가 속출한 일에 속을 끓인 상하이 파견군이, 해군을 모방하여, 1932년 4월초에 ‘娛樂場’이라는 이름의 육군 최초의 위안소를 설치한 것은, 연재 첫 회에서 본 그대로이다.

14사단에서도 성병 환자가 잇따랐다. 1932년 4월 7일, 50연대 제1대대의 일등병이 급성 임독성부고환염急性淋毒性副睾丸炎과 만성임독성요도염慢性淋毒性尿道炎, 다른 일등병이 급성임독성요도염急性淋毒性尿道炎으로 보고되고, 23일에 예비역 일등병이 성병연성하감性病軟性下疳[연쇄상 구균에 의한 성병의 하나]이 의심되고, 24일 대대 본부 특무병이 매독 초기 증상인 경성하감硬性下疳[매독 제1기에 ‘주로 음부에 콩알 만한 딱딱한 응어리가 생기고 그것이 터져서 생긴 궤양]으로, 각각  입원했다. 주15)  4월 하순, 14사단은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이동하여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쓰키는 28일, 15연대의 임독성요도염 한 명, 59연대의 제2기 매독성임독梅毒性淋毒 세 명, 같은 급성임독성요도염과 연성하감 한 명, 총 다섯 명을 상하이 의료기관에 놔두고 간다고,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에게 보고한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 파견된 육군 부대에서, 사변 종식까지 성병으로 입원한 새로운 환자는 257명이다. 부대별로는 14사단이 110명으로 가장 많은 43%를 점하고 있다. 발발 초기에 투입된 9사단의 배에 가깝다. 100명을 넘은 것은 14사단뿐이었다. 주17)

■ 독자적으로 ‘유곽 규정’

14사단은 1932년 5월 상순에 중국 동북 지방으로 전선을 옮겨 관동군 사령관 혼죠 시게루本庄繁 예하에 배속되었다. 사단 사령부는, 하얼빈을 거쳐, 5월말에 하얼빈 북쪽 약 100킬로 거리의 수이화綏化에 도착하여, 각 부대를 주변에 배치했다.

경비가 중심이었던 상하이와는 상황이 일변하여, 14사단은 마구산馬古山이 이끄는 반만 항일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우쓰노미야宇都宮를 출발한 후, 상하이에서 세 번밖에 전투를 경험하지 않았는데, 중국 동북 지방에 오고 나서 1932년 7월 20일까지 45회로 늘었다. 상하이에서는 전사 5명, 전상 16명이었던 것이, 전사 42명과 전상 129명으로 급증했다. 주18)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평정을 되찾은 지역에는, 곧장 군을 표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진출했다. 하얼빈에 가까운 후란呼蘭의 50연대 제1대대는, 1932년 7월 17일의 진중일지에, 후란에 들어간 일본인들이 약 50명에 달해서, 명단을 작성하도록 명령했다고 기록한다. 주19) 성별과 직종은 불명이다.

마쓰키는 이러한 시기에 병사들의 성욕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1932년 7월 24일의 일지에, 후하이呼海 철도 연안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재했다.

“우리 군이 후하이선線 작전을 위해 북진하여, 후하이 철도 운전을 개시하고, 보통 여객의 편승을 허가해 준 이후, 후란, 수이화, 하이룬海倫 등에, 일본 여성 진출자가 빠르게 증가하여, 대략 스무 명을 넘는 데 이르렀다. 이들 각 지역에는 중국 유곽 같은 것도 있지만, 설비가 불완전하거나 위생 시설마저 소홀한 곳도, 이번, 일본, 조선 여성으로 영업하는 유곽영업단속규정을 제정하여, 이것을 수이화에서 실시하고, 중국 유곽에 대해서는 중국 관헌과 협의하여, 규정하고, 준비하는 설비를 하여, 장교 이하 여기에 출입하는 것을 허가하기로 한다. 그리고 오는 27일부터 실시하기로 한다[생략] 일본인, 조선인 각 50명■준비하고 있다고. 그 밖에 각 지역은 각 지역 수비대장이 각각 규정을 마련하여 실시해야 할 것이다.”

요금은, 여성이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한 시간 1엔(장교 2엔), 심야 0시 이후는 일본인 3엔, 조선인 2엔 50전, 하룻밤이면 일본인 5엔, 조선인 4엔. 유곽이라고는 하지만, 일본 현지의 창기단속규칙에 기초한 정식적인 유곽은 아니다. 군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점령 직후 지역에서, 군의 사정에 따라, 군이 정한 규정에 기초하여, 군인을 손님으로 하는 매춘 영업과 군인 이용을 인정하고, 요금도 정해져 있다. 14사단이 있던 상하이에서 개설된 오락장 구조와 골격은 마찬가지로, 사실상 군 위안소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이 각각 50명씩으로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종래, 자료로 확인된 중국 동북 지방 군 위안소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933년 4월의 핑취안平泉이라고 간주되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오래된 위안소라는 게 된다. 수이화 이외의 지역에도, 각지 책임자에게 권한을 주어, 마찬가지 대책을 강구할 것을 사단장 자격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지 관헌에 마찬가지 준비를 시키고, 군인의 출입을 인정할 방침을 내세우고 있던 것이 주목된다. 거기에는 중국인 여성이 일본 군인의 매춘에 응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풀이된다.

수이화로 들어간 업자와 여성들 가운데는, 신규로 개업한 업자와 여성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한편, 기존의 매춘업자와 여성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여성에 대한 심각한 인권 침해가 횡행하고 있었던 일본·조선·만주의 매매춘의 구조적 문제가 그대로 반입되었을 우려가 있는데, 군이 선도역이 됨으로써, 폐해가 해소, 완화되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술은, 마쓰키의 일지에 보이지 않는다.

1932년 9월 5일, 마쓰키는, 수이화에 있던 소집병이 조선인 작부와 총으로 정사하는 사건이 전날 발생했다고 보고를 받았다. 병사는 유서를 남기고, 동료들에게 빌린 총을 사용했다고 한다. 연대장이 병사의 죽음을 공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마쓰키는 ‘군기 파괴의 근저를 만든다’고 분노의 말을 남기고 있지만, 조선인 여성과 유족에 관한 언급은 없다. 주20)  유곽으로 칭하여 준비한 위안소 여성이었는지 여부는 불명하다.

■ 하루 열 번 이상 상대하며

14사단 공식 기록에 수이화 시설을 직접 언급한 기술은 찾을 수 없다. 사단 군의부장은 1932년 9월 9일에 성병 예방을 지시하는 가운데, 오락장으로 칭한 위안소를 만든 상하이 파견군과 마찬가지로 ‘접객부’라는 말을 썼다. 나아가 하루 수십 명 이상을 상대하는 접객부가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여성들이 가혹한 상황에 처한 것을 알 수 있다. 콘돔 가운데 불량품이 있어서, 사용 전에 입김을 불어넣거나, 당겨서 팽팽하게 하거나 하여, 파손이 없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까지 지도했다. 이때 콘돔은 주보酒保라고 불리는 군매점에서 판매했다. 주21) 

1932년 9월 하순 사령부가 치치하얼로 옮긴 후, 대신하여 수이화에 들어온 50연대 1대대는, 진중 일지 안에 주요 시설이 기입된 시가지 겨냥도를 수록하고, ‘음식점’과 ‘유곽’ 등의 단속을 담당하는 병사의 이름을 기입했다. 유곽을 표시하는 붉은 ‘●’가, 색이 바랜 것을 포함하여 40개 정도가 있다. 여관 등은 담당자 혼자서 복수의 시설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유곽만은 전원이 담당한다고 기입한 글이 있다. 주22) 신중하게 대응해야 할 곳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50연대 제1대대의 같은 진중 일지에는, 수이화로 옮기기 직전인 1932년 9월 1일, 당시 있었던 후란呼蘭에서 세 번째 매독 검사檢黴, 바로 병사들의 섹스 상대를 하는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했다는 기술이 있다. 7월 하순의 사단 명령을 받고, 이 대대에서도 대책 마련에 나서, 이날이 세 번째였다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는다. 군과 경찰에 의한 성병 검사는 일주일에서 열흘에 한 번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치치하얼로 이동한 14사단 사령부는 성병 대책을 더욱 강화했다. 새로운 참모장인 이노 쇼자부로飯野庄三郞는 1932년 10월 8일, 예방 대책을 태만하게 하여 감염된 병사를 처벌함과 함께, 감염시킨 여성이 있는 요정과 유곽을 “얼마간 금지 가옥으로 할 것”이라는 방침을 정하고 통첩을 냈다. 주23)  업자와 여성을 지배하에 둔 것을 알 수 있다. 상하이의 「군오락장단속규칙」에는, 여성과의 이익 배분과 대우에 문제가 있는 업자의 영업을 정지시키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노의 통첩에는 그런 조항은 없다. 단속에 즈음하여 중시하는 강조점이 달라졌다고 생각되어, 흥미진진하다. 더구나 상하이 규칙에는 무엇으로 문제라고 판단할 것인가가 적혀 있지 않았다. 일본 현지의 경찰 예를 굳이 보지 않아도, 이러한 추상적인 규칙에 실효성이 있을지 여부는 의심스럽다.    

마쓰키는 다음 해 1933년 8월에 하타 슌로쿠畑俊六에게 사단장 직위를 넘겨주고, 사단은 1934년 5월에 일본 현지로 귀환했다.

마쓰키가 사단을 떠난 직후인 1933년 10월 말, 만주 국내의 조선인 상황을 외무성이 정리했다. 치치하얼 영사관 관내의 항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황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에는 대부분 조선인 요리점 영업자를 볼 수 있다. 이들 업자는 오로지 군인을 고객으로 영업을 하고 있으며, 조선인 상업 가운데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있다.”

이 시기 치치하얼의 조선인 풍속업계는, 대부분 일본 군인용이었다고 생각된다.

야마가타 출신의 쓰치야 요시오土屋芳雄가 보조 헌병으로 치치하얼에 배속된 것은 마쓰키가 떠난 다음 달. 이윽고 정식 헌병이 되어, 쓰치야는 패전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여기서 보냈다. 14사단 다음에도 잇달아 부대가 교체되었다. 쓰치야가 남긴 이야기이다.

“치치하얼에는, 군 전속 위안소가 세 곳이 있었다. 다만, 위안소 문에는, 위안소라면 너무 노골적이어서 ‘군 오락소’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주24)

시기는 불명이다. 쓰치야는 군의에 의한 위안부들의 성병 검사에 입회했다. 한 곳의 위안소에 일본인 위안부, 두 곳에 조선인 위안부가 있어, 하루에 수십 명의 병사를 상대하게 했다. “그녀들은, 거의 쉴 수 없었다. 폐인이 되기까지, 남자를 배에 올려놓고, 결국에는 방출되었다. 자살하는 여성도 가끔 있었다”고 한다.

쓰치야는, 군인들이, 유곽이 집중되어 있는 환락가 ‘용안리永安里’에도 출입하기도 하여, 헌병과 경찰이 공동으로 정기적으로 출입 조사를 했다고 기술한다. 여성들은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가불금에 얽매여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경우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육군성은 1932년에 『만주사변육군위생사』 편찬을 시작했다. 제1~9권이 편찬되고, 1934~1936년의 사건을 기록한 속집續輯도 만들어졌다. 주25) 9권에 수록된 색인에 따르면, 속집에 ‘치치하얼 군 오락장’에 관한 기술이 있다. 쓰치야가 말하는 ‘군 오락소’라고 생각된다. 다른 권에도 위안소 관련 기술이 있는 것 같다. 현재, 도서관 등에서 1, 2, 7권과 속집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秘’로 분류된 이 세 권과 속집만이 행방불명이다. 모든 권이 공개되면, 실태 해명에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다음 회는, 종래, 중국 동북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위안소를 책임지고 있었다고 사료되어 온 부대의 기록을 본다.

주1) 滿洲國 治安部 警察司 『滿洲國 警察史』(復刻板), 604쪽
주2) 『滿洲首都警察廳  想出の記』, 59쪽
주3) 藤永壯, 『産硏叢書八  快樂と規制 <近代における娛樂の行方』, 「日露戰爭と日本による‘滿洲’への公娼制度移植」
주4) 多田さや子, 『岩波講座 近代日本と植民地 月報八』「植民地時代の遊廓に育って - 從軍慰安婦に思う」,  2쪽
주5) 山口重次, 『滿洲建國と民族協和思想の原点』, 104쪽
주6) 森島守人, 『陰謀·暗殺·軍刀』, 66쪽
주7) 松井眞吾, 『犯罪公論』, 「娘子軍出征 - ある從軍記者の話」, 第二卷 第四號, 224쪽
주8) 『陸軍主計團記事』 제271호, 396쪽
주9)『昭和七年度 業務詳報 第八師團衛生班(混成第4旅團衛生班)』(陸上自衛隊衛生學校醫學情報史料室·彰古館所藏)
주10)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 836쪽
주11)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四卷』, 532쪽
주12) 松下直亮, 『TAGE BUCH I 上海及び滿洲事變從軍日誌』『TAGE BUCH Ⅱ 上海及び滿洲事變從軍日誌』(以下, 『松下日誌』, 防衛省防衛硏究所戰史硏究センター所藏)
주13) 『松下日誌』
주14)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四卷』, 182쪽
주15) 『陣中日誌 昭七·三·二一·四·三0』(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以下. ‘アジア歷’)
주16) 『昭和七·五·一九~七·五·二0「滿受大日記(普)其11  二/二』, 「派遣地衛生機關に殘置人員の件報告」, (アジア歷)
주17)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 834쪽
주18) 『松下日誌』
주19) 『步兵第五十連隊 第一大隊陣中日誌 第一 ~ 第四號  昭七·五·七 ~ 七·八·三一』(アジア歷)
주20) 『松下日誌』
주21)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 822쪽
주22) 步兵第五十連隊 第一大隊陣中日誌 第五 ~ 第八號  昭七·九·一 ~ 七·一二·三一』(アジア歷)
주23)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六卷』, 822쪽
주24) 長岡純夫, 『われ地獄へ墮ちん - 土屋芳雄憲兵少尉の自分史』, 47쪽
주25) 『滿洲事變陸軍衛生史 第九卷』,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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