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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격한 기억, 한일 역사 인식 문제의 연원을 살피다 (하) ②
조선인 학살의 원체험, 몇 개의 ‘전후’를 넘어서
김종익 | 2019-11-01 12:46:3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글에서 동학농민전쟁 진압에 참가했던 일본군 병사의 일기를 발굴하여,일본군의 잔학함을 폭로한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 교수는, 며칠 전 나주에서 열린 동학농민전쟁 학술 대회에서,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학살에 대해 사죄한다고 했다.

한일 간 ‘역사 현격’의 연원을 간토 대지진 - 삼일 만세 운동 - 동학농민전쟁 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필자의 견해는 많은 함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반성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되기 마련이며, 이 되풀이를 풀어갈 실마리를 어떻게 마련할까, 고민하는 필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2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현격한 기억, 한일 역사 인식 문제의 연원을 살피다 (하) ②
- 조선인 학살의 원체험, 몇 개의 ‘전후’를 넘어서 -

와타나베 노부유키渡邊延志
저널리스트. 1955년 후쿠시마 태생.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독자적으로 역사 자료의 발굴·해독에 전념. 『가나가와神奈川 기억』, 『GHQ 특별 수사 파일 군사기밀비』, 『허망한 3국 동맹』 등의 저작이 있다.

* 참고 : 글 가운데 (  )는 필자가, [  ]는 역자가 붙인 주석이다. 「  」 기사나 글의 제목 등을, 『  』은 책의 제목 등을 나타낸다.

■ 독립 운동 봉쇄로

그 후, 1919년에 3·1 독립 운동을 맞이한다. 이 운동에 관한 흥미 깊은 자료를 올해 우연히 만났다.

도쿄 국립공문서관에서, 내각서기관실 자료철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 표제는 이러했다.

『조선 소요 사건에 대한 선인의 언설에 관한 건』

 우치다 코사이内田康哉[1865~1936년] 외상가 하라 다카시原敬[1856~1921년] 수상에게 보낸 문서로, 1919년 5월 5일자가 있다. 첫 쪽에는 수결이 있는데, 조사해 보았더니 하라 다카시 수결이었다.

상세한 내용을 검토하려 해도 붓으로 쓴 글씨筆文字에는 자신이 없어서, 요코하마시 역사박물관 부관장 이노우에 오사무井上攻 씨께 부탁을 드렸다. 바쁘신 와중에 며칠 만에 모두 독해해 주셨다.

3·1 독립 운동이 일어난 원인과 배경에 관해 안동安東 영사가 조선인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정리해 제출한 보고서를, 우치다 외상이 하라 다카시 수상에게 전송한 것이었다. 안동은 조중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의 중국 쪽, 오늘날의 랴오닝성 단둥丹東이다.

내용이 조목별로 써서 기재되어 있다. 요약하면
▶ 태도가 거만한 일본인 관리가 많고, 조선인은 겉으로 따르고 있어도 항상 강한 반감을 품고 있다
▶ 조선인에 대한 총독부 압박은 끝이 없는 상태이며,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는 것은 그 증명이다
▶ 총독부는 일본 유학 경험자를 직원으로 채용하기는커녕, 유학생을 집요하게 감시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독립 운동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 조선인 관리는 급여가 낮아서 살기가 힘들다. 그 때문에 근무 태도도 나쁘고, 일반 조선인이 일본에 반감을 품는 원인이 된다

- 등을 지적하며,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큰일이 된다고 제언하는 것이다.     

내용도 만만하지 않은 거지만, 이 문서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날짜이다. 안동 영사가 이야기를 들은 것은 3월 말. 그것을 외상에게 보고로 정리한 것은 4월 4일로, 그날 도쿄에서는 육군 6개 대대와 헌병의 증파를 각료회의에서 결정한다. 운동이 확대되어, 현지 병력만으로는 수습이 안 되게 되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 마지막 부분에 영사는 “우측 내용은 한 개인의 담화입니다만, 일단 핵심을 파악하는 관찰로 생각하게 되어, 이 점을 보고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右は一個人の談話に候共, 一應肯綮に當れる觀察とも思考せられ候に付, 御參考迄此段及申報候”라고 기록한다. ‘긍계肯綮’란 ‘사물의 급소’라는 의미로, 외상에 보고해야 할 중요한 정보라고 영사가 판단했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운동이 시작되고 한 달이 경과하고도, 일본이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같은 4월 4일, 하라 다카시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번 사건 진압에 대한 총독의 의견을 묻고자 말을 전했는데, 총독의 대답에 각별한 의견은 없고, 다만 증병 및 헌병 증파를 바란다는 데 지나지 않아서, 정말이지 무책無策인 모양이지만, 본건에 대한 정부의 조치로서는 단호한 조치를 필요로 한다.”

‘無策’이라고 하라 다카시가 평한 조선 총독은 육군 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년]이다. 하세가와는 한일 병합 전 지위는 한국주차군사령관이며, 의병 진압 책임자였다. 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억누르는 수법은, 체험으로 보아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거라는 연상을 하게 만든다.

조선인의 의도나 배경을 파악하지 않고 일본은 병력을 증강했던 것이다. 교회에 불을 질러,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학살한 제암리 사건은 4월 15일에 발생한다.

4월 말에는 운동은 누그러들었지만, 외상 우치다 코사이가 수상 하라 다카시에게 보고를 보낸 것은 5월 5일이었다. 이 단계에서도 현지로부터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라 다카시는 대강 훑어보고 수결을 했던 것이리라.

육군은 이해 9월, 『조선소요경과개요朝鮮騷擾經過槪要』라고 제목을 붙인 보고서를 정리한다.
“불령한 조선인이 모든 허구 사실을 내세워 민심을 선동했던” 것이 원인으로, 운동의 중심이 된 천도교에 대해서는, “종교로서의 가치가 없고, 교주 등 간부의 정치적 야심하에 조직된 단체에 지나지 않고, 미신이 많은 국민성을 이용하여 어리석은 남녀를 미혹하고” 있다고 한다. 들고 일어난 조선 민중을 진지하게 대면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 ‘자경단’과 재향군인회

동학 농민, 의병, 그리고 3·1 독립 운동. 조선에서 학살을 반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모습이 부상했다. 그것은 간토 대지진과 어떻게 연결될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학살의 중심이 된 자경단이다.
“엄청난 재해로 사람들 대부분이 정신 이상을 겪고 있던 결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간토 대진재関東大震災』에 쓴 요시무라 아키라는, 거기에 이어서 “그리고, 그 이상異常 심리에서, 각 읍과 마을에서 조선인 습격에 대비하는 자경단이라는 조직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라고 기술한다.

자경단에 대한 이런 것이 일반적 인식이리라. 하지만 자경단은 간토 지방에서 3,000개 이상이라고 간주된다. 그 정도 개수의 조직이, 그렇게 간단히 조직되고 기능하는 것일까.

이 의문에 답해 준 사람이 있었다.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연구해 온 히구치 유이치樋口雄一 씨로, 자경단의 기본적인 틀은 1918년 쌀 소동을 계기로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한다.

시베리아 출병 때문에 쌀값이 급등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각지에서 연쇄적으로 들고 일어난 쌀 소동의 참가자는 전국에서 70만 명 이상이라고 여겨진다. 다이쇼大正[1912~1926년] 시기의 자유주의·민주주의 풍조 아래 사회주의 사상도 보급되고 있었다. 그런 사태를 염려하고 두려워하여, 경찰을 관할하는 내무 관료들이 ‘민중의 경찰’을 만들어 내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구치 씨의 연구에 따르면, 자경단, 자위단, 자경조합, 안전회 등 명칭은 다양했지만, 가나가와神奈川현[간토 지방 서남부 위치]의 경우는 지진 재해 전년부터, 경찰이 호소하여 조직 만들기가 활발해지고 있었다. 재해 방지, 화재 경비, 방범, 비적 단속 등 경찰 활동을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지진 재해가 발생한 해 봄 단계에서, 어느 한 경찰서 관내에서만 327개 조직이 결정되고 있다고 신문이 보도한다고 한다.

자경단의 중심이 된 것은 재향군인회였다. 오늘날에는 퇴역 병사들의 친목 단체와 같은 정도로 이미지화되기 쉽지만, 어엿한 군 조직의 일부였다.

제국재향군인회가 결정된 것은 1910년. 러일 전쟁의 교훈으로, 현역병인 상비군만으로는 이후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사실을 통감한 육군의 발안이었다. 당시 병역兵役은 스무 살에 징병 검사를 받고, 현역으로 3년을 복역하면, 그 후에 4년여의 예비역, 나아가 10년의 후비역後備役이 있으며, 그동안은 연습과 점호 등 군사적 의무가 부과되고 있었다. 그러한 병역 기간의 국민을 감시, 감독할 목적을 가지고, 지방 조직을 촘촘하게 설치했다.

재향군인회 입장에서도 쌀 소동은 커다란 전기였다. 전국에서 검사의 처분을 받은 사람은 8,18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재향 군인이 990명을 차지했다. 자경단에서 또 하나 핵이 되는 청년 단원 처분자도 868명에 달했다. 치안을 담당하는 쪽에서 보면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재향 군인이 쌀 소동에 들고 일어난 배경은 메이지 이후 병역 제도를 더듬어 가면 보인다. 메이지 전반, 병역을 기피하는 풍조는 사회에 강하여, 병역 면제의 다양한 특례가 있었다. 돈을 납부하면 됐던 시기도 있으며, 병역을 떠맡은 존재는 기본적으로 가난한 집의 둘째와 셋째 아들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병역에 나간 것이어서, 사회로 돌아와도 경제적으로는 약자이기에, 쌀값이 오르면 생활에 쪼들린 사람은 많았던 것이다.

여기서 동학농민전쟁 종군 일지를 떠올려 보자. 일지를 남긴 병사는 후비대대, 그러니까 후비역 병사를 모은 부대 소속이었다. 그 대대에서 단 한 명의 전사자는 소작인의 둘째 아들로 서른여섯 살이었다는 사실이 이노우에 가쓰오 씨의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이러한 사람들이 병사로 동원되어 학살의 최전선에 서고, 귀향하자마자 재향군인으로 병역 부과를 받고, 나아가 자경단으로 조직되었다는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간토 대지진에서 가장 일찍 학살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요코하마 출신 병사는 동학 농민 진압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청일 전쟁에서는 뤼순旅順 공략 전투에 동원되었다. 이곳도 또한 처참한 민중 학살 현장으로 유명하다. 간토 대지진은 청일 전쟁으로부터 29년 후이며, 재향군인회에도 자경단에도, 청일 전쟁 경험자가 조직의 간부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요코하마에서는 상당수의 중국인도 살해되었다. 중학교에서는 교련용 총이 대량으로 반출되었는데, 병역 경험자 입장에서는 가장 익숙한 무기이며, 실탄이 없어도 총검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분명 몸으로 알고 있었던 바이다.

작가 사토미 돈里見弴[1888~1983년. 요코하마 출신 소설가]은 자전적 소설 『안죠가安城家의 형제』 안에서, 지진 재해 후에 재향군인이 자경단과 함께 지역의 집들을 방문하여, 오스기 사카에大杉榮[1885~1923년. 사회운동가. 간토 대지진 때, 아내와 함께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등에게 학살되었다]를 학살한 아마카스 마시히코甘粕正彦[1891~1945년. 육군 군인. 육군 헌병 대위 시절에 아마카스甘粕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단기 복역 후, 일본을 떠나 만주로 건너가서, 관동군 특무 공작을 행하며, 만주국 건설에 일익을 담당했다. 종전 직후, 독을 복용하고 자살. 아마카스 사건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시히코 등이 오스키 사카에 부부 등을 학살한 사건. 조선인 학살 사건 등과 함께 계엄령하의 불법 탄압 사건 가운데 하나] 헌병 대위의 감형을 구하는 서명을 모으는 모습을 묘사한다. 근위병이 군모에 카키색 외투의 군복 차림을 적는다.

그것은 실제 체험이었다고 하며, 에세이 안에서 “가족이 와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든가, 바로 성가셔서, 싫지 않으면 당신이 써 주는 정도라면 상관없어, 라고 하고 말았어요, 그 비겁함에, 나중에 무척 고민한 것도 잊히지 않습니다”라고 토로한다.
당시의 재향 군인과 자경단의 모습을 전한다. 

■ 몇 개의 ‘전후’가 망각한 것

“왜 유언비어를 믿었을까?”
“왜 간단하게 사람을 죽였을까?”
부풀어 오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새로운 연구와 자료를 탐색하는 동안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결부되어, 조선인이 습격해 온다, 그러니까 일본인에게 보복을 하자고 결심하여 이상하지 않은 배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선인을 거리낌 없이 죽인다는 경험이 사회에 축적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점, 자경단은 사전에 조직되어 있고, 그 핵심이 된 재향군인회가, 그런 경험을 가장 직접적으로 획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점, 경찰이 거의 기능을 상실한 지진 재해 직후, 그들이 ‘민중 경찰’이라는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역사는 왜 일본인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던 것일까.

지진 재해 4년 후에 도쿄에서 태어난 요시무라 아키라가 『간토 대진재関東大震災』를 완성한 것은 지진 재해로부터 반세기 후가 되는 1973년이었다.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들었던 체험담, 개중에서도 “인심의 혼란에 전율한” 것이 집필의 동기였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 혼란의 원인을 ‘정신 이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요시무라 부모 세대라면, 학살의 배경에 있던 사회적인 사정을 몰랐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떠오르는 것은 요코하마에서 발견되는 초등학생들의 작문이다. 지진 재해로부터 3~6개월 정도 경과하고 나서 쓰인 것인 듯한 데, 유언비어가 거짓이었던 것을 언급한 것은 없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리라.

너무나 많은 민중이 가해자였다. 누가 가해자인지 지역 사회는 알고 있기 마련이다. 잘못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면, 없었던 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조선과 중국에서 한 병사들의 경험 가운데 처참한 실태는 일본 국내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메이지와 다이쇼 전장에 한하지 않고, 쇼와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좀 더 이야기하면 전후 사회도 바뀌지 않았다. 15년 정도 전, 일본과 중국 사이에 역사 인식을 둘러싼 불화가 표면화되었을 때, 중국인 연구자에게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전후, 일본 교직원조합은 “제자들을 다시 전장에 보내지 말라”는 것을 평화 교육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전에 “전장에서 무슨 짓을 했던가”를 제자들에게 왜 따지지 않았던 것일까. 일본인이 지니고 있는 것은, 그냥 나쁜 짓을 했다고 하는 이미지밖에 없다고.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자세이다. 동학농민전쟁 연구에서 이노우에 씨가 고생한 것은, 실마리가 되는 기록이 없는 것이었다. 육군이 정리한 전사戰史에도 기재가 없다. 종군 일지를 남긴 병사의 대대에서 단 한 명이었던 전사자가 사망한 것은 청나라 군대와의 전투로 기록되어 있었다. 농민군과의 전투 그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발견한 안동 영사의 보고인 경우에도, 들어 있던 것은 『採余公文』이라는 철이었다. 앞 연재에서 말한 대로, 내각서기관실 공문서는, 영구, 10년, 1년으로 보존 기간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는데, 『採余公文』은 1년짜리 보관 철이었다. 본래라면 1년에 폐기되기 마련인 철 속에 끼어들어, 이 문서는 공교롭게 오늘까지 전래된 것이다. 이해의 문서철은 세 종류가 함께 남아 있었는데, 모두 넘겨보았지만, 3·1 독립 운동에 관한 문서는 이 한 점밖에 찾을 수 없었다. 정권 입장에서 중대한 일이며, 수상에게 보고가 달리 없을 리 없다. 지진 재해 때 학살에 관한 문서가 그랬듯이, 조직적으로 처분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라 다카시의 일기는 3월 11일에 조선총독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 훈령을 보낸 것을 기록한다.

“이번 사건은 내외에 대해 매우 경미한 문제로 만드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하여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기하라. 단 외국인은 가장 본 건에 대해 주목하고 있을진대 잔혹하고 철저한 비평을 초래하지 말 것을 충분히 주의를 바란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일본은 열강의 지위를 획득하려고 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시선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비판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경미한 문제’로 조치할 필요가 있었다.

3·1 독립 운동을 둘러싸고는, 외국 신문에서는 비판적인 보도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잔학한 행위 따위는 없었던 게 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도 정부의 설명을 믿었다.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1861~1930년]는 그해 8월, 미국인 앞으로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미국인이 문제로 삼는 잔학 사건의 대부분은, 하찮은 날조(그것을 꾸며낸 것이 신문기자인지 선교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에 불과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은 오셔서, 우리를 올바르게 심판하시겠지요. 아아, 신문지가 범하고 있는 죄여!”

오늘의 일본인이 품은 역사상은, 이러한 우치무라의 인식에서 어디까지 자유로울 것인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고 박근혜 대통령의 말에 놀랐던 것은 2013년이었다. 내가 이 취재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지만, 그로부터 6년, 소박한 의문을 추적하는 동안, 가해자로서 일본의 자세가 어렴풋하지만 보이기 시작하자, “역사를 직시하는 자세를”이라고 하는 한국의 호소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일본과의 불화는 심화될 뿐이다. 한국이 주장하는 역사가 기괴하다고 지적하는 책이 일본에는 넘치고, 서로 이해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 라는 목소리도 강해질 뿐이다. 정치의 도구가 되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더듬어 보면,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둘러싼 현격한 연원은 생각하기보다 깊은 곳에 있는 듯하다. 그 틈이 간단하게 메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를,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여기며 품고 있는 역사상의 정체와 내력을 자문한다. 그런 것에서 시작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끝>

현격한 기억, 한일 역사 인식 문제의 연원을 살피다 (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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