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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격한 기억, 한일 역사 인식 문제의 연원을 살피다 (하) ①
김종익 | 2019-11-01 08:43:2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글에서 동학농민전쟁 진압에 참가했던 일본군 병사의 일기를 발굴하여,일본군의 잔학함을 폭로한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 교수는, 며칠 전 나주에서 열린 동학농민전쟁 학술 대회에서,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학살에 대해 사죄한다고 했다.

한일 간 ‘역사 현격’의 연원을 간토 대지진 - 삼일 만세 운동 - 동학농민전쟁 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필자의 견해는 많은 함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반성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되기 마련이며, 이 되풀이를 풀어갈 실마리를 어떻게 마련할까, 고민하는 필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2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현격한 기억, 한일 역사 인식 문제의 연원을 살피다 (하) ①
- 조선인 학살의 원체험, 몇 개의 ‘전후’를 넘어서 -

와타나베 노부유키渡邊延志
저널리스트. 1955년 후쿠시마 태생.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졸업. 독자적으로 역사 자료의 발굴·해독에 전념. 『가나가와神奈川 기억』, 『GHQ 특별 수사 파일 군사기밀비』, 『허망한 3국 동맹』 등의 저작이 있다.

* 참고 : 글 가운데 (  )는 필자가, [  ]는 역자가 붙인 주석이다. 「  」 기사나 글의 제목 등을, 『  』은 책의 제목 등을 나타낸다.

■ 살의殺意는 왜 발생했을까?

간토 대지진 취재를 시작한 것은 2013년이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발생으로부터 90주년이 되는 해이며, 기획전과 심포지엄이 각지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아직 얼마 안 되어, [간토 대지진이] 어떤 재해였는지, 부흥은 어떻게 진행되고, 교훈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등과 같은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조선인 학살은 ‘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좀 돌아다니는 동안에 의문이 불어났다.
“그런 유언비어를 왜 믿었을까”
“서슴없이 타인을 죽인 것은 왜 그랬을까”

전시를 기획한 학예원이나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연구자들에게, 소박한 의문을 던져 보았다.

그런데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렇다 할 직접적인 원인, 동기는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다. 1919년에 조선에서 있었던 3·1 독립 운동을 언급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비무장 운동이고, 많은 일본인이 희생된 것은 아니다. “일본 지배에 불복한다 + 불령不逞”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일본인은 있었지만, “조선인이 집단으로 습격해 온다”라고 하는 유언비어를 다 같이 믿고, 분별없이 사람을 죽일 것인가. 앞 연재에서 소개한 조선총독부 자료를 떠올리기 바란다. 일본인은 “고양이에 몰린 쥐와 같이” “들개를 때려잡듯이” 조선인을 살해했던 것이다. 납득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오는 이민이 늘어나고 있었던 사실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었다. 1910년에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특별 수요가 발생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싼 임금으로 조선인이 메웠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경기가 침체되어, 일본인 노동자와 일자리를 둘러싼 언쟁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인의 하나이겠지만, 지역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작가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1927~2006년. 소설가. 현장, 증언, 사료를 주도면밀하게 취재하여, 치밀하게 구성한 다채로운 기록 문학, 역사 문학의 장편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는 『간토 대진재関東大震災』[1973년 발표, 그해 기쿠치칸상菊池寛賞 수상] 속에서 “유언비어는, 통상 사소한 사실이 부당하게 과장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지만, 간토 대진재에서 조선인 습격설은 정말 아무런 사실도 없었다는 특이한 성격을 갖는다. 이 사실은 당시 관헌 조사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엄청난 재해에 의해 사람들의 태반이 정신 이상을 겪고 있었던 결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요코하마에서는 학살과 동시에 약탈이 발생했다. 구원의 손이 좀처럼 닿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식료품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요코하마항 일대에 밀집한 창고에서는 비단 등 수출용 상품이 대량으로 탈취당하고 있다. 그런 정신 이상이 있는 것일까.

유언비어 가운데에는 “조선인 빨치산”이라는 말이 보이고, 러시아 혁명에 간여하려고 하여 실패로 끝난 시베리아 파병, 특히 1920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 사건尼港  Nikolaevsk-na-Amure[러시아 극동의 아무르 강 어구에서 40㎞ 상류의 좌측 연안에 있는 항만도시에서 일본이 시베리아 파병 중인 1920년, 빨치산과의 충돌로, 니콜라옙스크나에서 700여명의 일본군 수비대 및 거류민이 살해된 사건]의 영향도 생각할 수 있다. 니콜라옙스크나에서 활동하고 있던 육군 부대 등 700명 이상의 일본인이, 적군赤軍 빨치산의 희생이 되어,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다. 빨치산에는 1,000명가량의 조선인이 가담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어디까지나 주체는 러시아인이다.

몇 가지 요인이 겹치어, 조선인을 위험시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무차별 학살이 야기될까.

■ 동학농민전쟁 - missing link의 단서

석연하지 않은 상태로, 그 후에도 새로운 연구를 두루 살필 양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홋카이도 대학의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 명예 교수의 동학농민전쟁 연구였다. ‘동학당의 난’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던 사람도 많을 것이다. 조선에서 1894년에 시작된 농민 봉기이며, 청일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을 전문으로 하는 일본사 연구자인 이노우에 씨는, 홋카이도 대학이 보관하는 인골人骨의 반환을 이십 몇 년 전에 직접 관여하여, “진도珍島 지방에서 동학 농민 수백 명이 처형되고, 괴수들은 효수되었다. 이 뼈는 그 가운데 하나”라는 쪽지를 발견했다.

어떤 사람인 것일까. 유골은 누구에게 반환하면 되는 것일까. 이노우에 씨는 찾아보았지만, 단서를 잡을 수 없었다.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감춰진 역사가 있다.” 그런 생각에서 이노우에 씨는 동학농민전쟁 연구에 착수했다.

당시 한반도 남쪽에서는 흉작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가 파견하는 관리에 의한 가혹한 정치가 이어져서, 견딜 수 없었던 농민이 전라도에서 들고 일어났다. 결집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민중 종교인 동학이었다. 감당할 수 없게 된 정부는 종주국인 청淸에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자 [청과] 대결하는 일본도 출병했다. 농민과 정부 간에 화의가 성립하지만 일본은 철군하지 않고, 왕궁을 점거하여 정권을 교체시키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새로운 정권에 선언하게 했다. 그리고 8월 1일에 청나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9월에 평양을 함락시키고, 황해 해전에서 승리했다.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토로 들어갔다.

그 사이 주된 전투장은 조선이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민중이 들고 일어났다. 그것이 동학 농민의 재봉기였다. 

자료를 계속 찾던 이노우에 씨는 한 병사가 기록한 종군 일지에 이르렀다. 도쿠시마德島현 안에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독해하여,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한국으로 갔다. 일지에 기록되어 있던 부대의 활동 자취를 답사하고, 지명과 거리, 위치 관계 등을 알아보고, 내용이 정확한 것을 확인했다. 2018년에 일지 전문을, 교토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연구 기요紀要에 발표했다.

『청일 교전 종군 일지』라고 제목을 붙인 일지는 1894년 7월 23일에, “소집 영장, 면사무소에서 송달이다”라고 시작한다. 다음 날 아침 바로 출발하여, 27일에 마쓰야마松山 연병장에 도착하여, 육군 후비後備 제19대대에 편입되었다. 시모노세키에서 포대砲臺 근무를 거쳐, 10월 28일에 “동학당 재기로 말미암아, 토벌대로 한국으로 건너가야 한다”라는 명령을 받는다.

유교와 불교 등을 통합하여 탄생한 동학은, 평등과 상부상조를 설파했다. “곤궁한 자 구제” “탐욕스러운 관리 축출” 등 농민군이 내건 12조의 군율軍律은 동학의 가르침과 민중의 소망을 보여주고 있다. “역자효유逆者曉諭”라는 것도 있다. 불복하는 자는 잘 타이르라는 것이다. 놀랄만한 이상주의이다.

그런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부대의 움직임을 일지에서 찾아본다.

11월 12일에 서울을 출발한다. “충청·전라에 있는 바의 동학도를 진멸鎭滅”이라고 임무를 적고 있다. 마을 마을을 탐색하면서 진군한다. “인가를 포위하고 집집이 탐색한다. 달아나는 자가 있으면, 그 자를 총살한다”라고 적고 있다. 다른 부대가 통과한 자취에서는 “60리 동안, 민가에 사람이 없고, 또 수백 채를 소실시켰다. 또 많은 사체가 길가에 엎어져 있어 개나 조류의 먹이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철저한 초토화 작전을 연상하게 만든다.

해가 바뀌어 1895년이 되자 전투가 격화되었다.

“우리 부대는 서남쪽으로 적을 추격하여, 때려죽인 자가 48명, 부상당한 생포자 10명, 그러나 해가 져서, 두 부대가 함께 개선한다. 부대로 돌아온 뒤, 생포자는 고문하고 나서 불에 태워 죽이다.”

“남문에서 약 5킬로미터 되는 곳에 작은 산이 있다. 사람 뼈가 첩첩이 쌓여 있는데, 실로 산을 만들었다. 문책을 하고 나서, 중죄인을 죽이는데, 날마다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고, 따라서 이곳에 시체로 버려진 자는 680명에 달한다. 악취가 심하고, 땅은 백은처럼 되고, 시체에서 나온 기름이 얼다”

“동학도의 잔당 7명을 잡아 오다. 이들을 성 밖의 밭 가운데 한 줄로 세우고, 총에 착검하여, 호령에 따라 동시 동작으로 그들을 찔러 죽이다. 구경하게 한 한인과 통제하던 병사 등이 더없이 심하게 놀랐다.”

일지에 기록된 것은 처참한 학살의 실태였다. 진압 작전에는 세 개 대대가 투입되고, 농민군 쪽 희생자는 모두 3~5만 명으로 추정된다. 일지를 남긴 병사가 소속된 대대는 660명 정도의 규모라고 생각되는데, 전사자는 한 명뿐이었다. 화승총과 죽창 정도였던 농민군과는, 장비의 수준이 너무나 차이가 났다.

학살이 거듭된 이유는,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자료인 『남부병참감부진중일지南部兵站監部陣中日誌』가 보여주고 있다. 한국 인천에 위치했던 일본군 사령부의 기록이다. 

10월 27일엔 “가와카미川上 병참총감으로부터 전보가 있었다. 동학당에 대한 조치는 엄격하고 심하게 할 것을 요한다. 향후 모두 살육해야 한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병참총감은 청일 전쟁을 위해 설치한 대본영의 직무로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참모차장이 맡고 있었다. 당시 참모총장은 황족으로 가와카미는 실질적인 참모총장이었다.

일지는 출전 직전인 11월 9일에 부대에 전달된 명령 내용도 기재하고 있다.

“동학당 근거지를 조사하여 찾아내고, 이들을 싹 쓸어 없애야 한다.”
“이 화근을 싹 쓸어 없애서 다시 일어나는 후환을 남기지 말 것을 요한다.”

근절하거나 죽이라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은 근대 일본이 조선 민중과 직접 마주친 최초의 장이었다. 그래서 불복하는 민중에 대한 대처로 일본이 선택한 것은, 살육이었다 - ‘은폐된 역사’의 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 학살의 연쇄를 더듬으며

일본인의 눈이 미치지 않는 역사의 존재를, 이노우에 씨의 동학농민전쟁 연구는 가르쳐 준다. 그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마찬가지의 조선인 희생이 이밖에도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선의 비극』은, 영국 신문기자 Frederick Arthur McKenzie[1869~1931년]에 의한 르포르타주이다. 20세기 초반에 취재를 위해 몇 번인가 한반도를 여행한 매켄지가 1908년에 출판한 것으로, 일본 번역은 동양문고東洋文庫에 들어 있다.

1905년 러일 전쟁이 끝나고, 제2차 한일 협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다. 서울에는 총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무비伊藤博文가 총감으로 취임했다. 1907년에는 제3차 한일 협약에 따라 일본은 내정 전반을 장악하고, 한국군을 해산시켰다. 그러자 일본 지배에 저항하는 의병 운동이 본격화했다.

“일본인에 대한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있다. ‘의병’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눈부신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일본군은, 그 지역 전체를 파괴하고, 대규모 대량 살인을 저질러 보복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매켄지는, “어디까지 진실인 것일까”라고 회의적인 생각에서 현지를 방문하려고 작정했다.

서울을 출발하고 눈에 띤 마을들은 “그림처럼 평화로웠다” “그 아름다움과 번영은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다 타버린 촌락, 황폐하기 짝이 없는 마을, 버려진 시골을, 잇달아 통과하면서 여행”하게 된다.

여기서도 일본군은 초토화 작전을 반복하여 펼치고 있었다.
“제발 집을 태우지 말아 주시길. 나는 여기서 죽을 거니까”라고 울며 부탁하는 노인. 풀을 베는 낫을 갈고 있어 ‘반란군’이라고 총살된 젊은이. 그런 증언을 잇달아 적어 둔다.

“이 무리에게는 일본의 강한 기세를 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이 얼마큼 강한가를 깨달아야만 한다.”

서울에서 만난 지도적 지위에 있는 일본인이 한 말을 매켄지는 다시 생각한다.

인구 2, 3천 명이었다고 하는 읍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불상 한 점과 한 채의 관청만 남아 있었다. 이 읍에서 의병의 공격을 받고 퇴각한 일본군은, 증원 부대를 불러들여 탈환하자마자, 본보기 장소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읍 안의 모든 물자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그 무더기에서 피어나는 불꽃을 부채질하며 읍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매켄지는 “이렇게 완전히 파괴되어 있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고 기록한다.

집을 잃은 것 이상으로 조상 대대의 기록이 소실되어 버린 것을 한탄하는 민중의 말도 전한다. “이름도 없다, 치욕에 차서, 떠돌이가 되고 말았다.”

의병과도 직접 만났다. 열여덟 살부터 스물여섯 살가량의 청년들로, 여섯 명이 다섯 종류의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도 쓸 만한 것은 없고, 화승총도 포합되어 있었다.

맥켄지는 의병 장교의 말을 전한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겠지요, 좋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일본의 노예로 살아가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좋아요.”

일본 육군이 정리한 『조선폭도토벌지誌』는, 살해한 의병 수를 17,697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숫자가 얼마큼 실태를 반영한 것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지만, 반면의 일본 쪽 전사자 는 100여 명 정도였다. 여기서도 희생의 격차는 매우 큰데, 그것이 어떻게 기억되고 전승되었던 걸까. 그 격차는 그 이상으로 더욱 큰 것은 아닐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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