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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③
김종익 | 2019-07-08 09:32:4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제주 4·3’의 진실을 향한 불굴의 투쟁, 허구로 현실을 기록해 온 43년,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이 『화산도』의 후편인 「해저에서海の底から」에서의 연재(2016. 10월~2019. 04월. 『世界』)를 끝내고 한 인터뷰 기사입니다.

작가의 말 가운데 “『화산도』에서 묘사한 역사 인식은, 현재 한국 역사가들의 인식보다도 선행” “해방 공간의 해방은 이제부터 커다란 과제”라는 말에 움찔하게 된다. 더욱이 “한국에서도 4·3 사건을 쓴 작가들은 있어요. 그 가운데 걸작도 있지만, 저에게 말하라고 하면, 김빠진 것이 많다”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90대 중반의 연세에 여전히 벼리를 쥔 채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는” 공동체를 꿈꾸는, 43년간 응축된 비명 같기도 하고, 호소 같기도 하고, 예언 같기도 한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3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인터뷰어
세키 마사노리關正則

인터뷰이
김석범

□ 이야기를 묘사하는 관점에 대해  

- 『화산도』는 남승지의 시점으로 시작됩니다. 산에 들어가 게릴라 생활을 행하는 남승지와 소파에 앉아 허무적 시각에서 4·3 사건을 계속 바라보는 이방근의 대비에 의해 이야기가 묘사된다고, 많은 독자는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점차 남승지보다 이방근의 존재가 커져 가고 있어요. 이것은 처음부터 의도하시고 있었던 거겠지요.

김석범
전후 문학에서 말하는 ‘신의 관점’이라는 것이 있어요. 사르트르는 신의 관점을 배척하고 있어요. 그러나 저는, 신의 관점이란 작가의 관점이라고 여겨요.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해요. 개개 인물의 관점에서 보면, 전체 소설은 절대로 쓸 수 없어요. 개인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동시에 전체의 관점으로도 본다, 그런 관점이 필요한 것이지요. 조감鳥瞰이 없으면, 벌레의 눈과 개개의 눈만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장편의 경우 그것이 중요합니다.

 [참고] 사물을 볼 때 사용하는 세 개의 눈

虫の目(부분 파악)
- 겹눈, 즉 ‘가까이서’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보는 것. 
鳥の目(전체 파악)
-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며 전체를 둘러보며’ 보는 것.
魚の目(흐름 파악)
- 조류의 흐름과 干潮 滿潮라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

한편, 신의 관점에서 보아도, 개개 인물이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 개개인이, 자신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에 따라서, 세계가 또한 보이는 거지요. 큰 소설이라는 것은, 다양한 등장인물을 모아서 그들의 관점에서 만들어 가는 것을 하지 않으면, 전체가 보이지 않아요.

『화산도』는 이른바 신의 관점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부분은 이방근의 관점이지요. 이방근이 주인공이 되어 다양한 인물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승지와 이방근이 만났을 때, 누군가의 관점으로 해 버리면, 한쪽에 편향된 관점으로밖에 쓸 수 없게 되어 버려요. 그러나 제 경우는, 두 사람의 관점을 동시에 쓰고 있어요.

□ 일본어로 쓴다는 것

- 김 선생이, 1951년 봄, 대마도에 가시기 전에 교토대학에 제출한 「예술과 이데올로기」라는 졸업 논문을 읽었습니다(『김석범 평론집』제1권에 수록). 거기에는, 예술·문학도 사회와 역사로부터 규정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술·문학은 사회와 역사를 마주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한 보편성과 영원성을 획득해야만 한다는 것이 논해지고 있습니다. 김석범 문학의 본질을 자신이 예언하는 듯한 논문으로, 그 일관성에 대단히 놀랐습니다.

김석범
예를 들면, 일본어에도 조선에도, 각각이 지닌 표상이 있어요. 예를 들면 ‘石’이라는 말. 이것은 일본어로는 ‘이시イシ’이고, 조선어로는 ‘돌’이라고 해요. 각각 자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개념으로는 모두 같은 ‘石’으로, stone이든가 뭐든가로 번역하면 통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표상으로 파악한 경우, 그렇게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같은 ‘石’이라는 의미에도, 조선어에서 ‘돌’이라고 할 때, 그 표상은, 바위와 돌담이며, 제주도인 것입니다. 제주도는 돌의 섬이니까요. 그러나 일본어에서 ‘石’이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주변에 굴러다니는 보통의 石이라는 이미지입니다. 그러한 차이가 있는 거예요. 그 일본어가 지니고 있는 주술 같은 굴레를 해체하여, 저는 상상력으로 소설을 만들어내 가고, 거기에는 언어의 표상 방면이 사용되기도 하고, 거기에는 보편성이 있는 겁니다. 그 보편성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작품 세계가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작가 자체도 자유가 되는 겁니다. 구속을 받지 않는, 주체적인 자유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방법론이 없는 재일 작가들의 대다수는, 그 나름 일본어에 상당히 다가갑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는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은 두려워했던 거지요. 이것은 일본어 문학에서도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 문학은 커지지 않습니다. ‘일본어 문학’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의 표현이 아니지만, 일본어, 일본 민족, 일본국, 그것이 삼위일체인 것이 일본 문학이에요. 일본 문단은, 재일 작가가 쓰는 것에 대해서도, 일본인이 쓴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어요. 특히 전후는 그랬었지요. 동정적으로 보는 거지요. 더욱이 상위 문학, 하위 문학과 같은 말투까지 공공연하게 해 왔어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왜 일본어로 쓰는가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어요. 그것은 무엇을 위해 예술을 하는가라는 것, 애당초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으로도 이어지는 것이었어요.

일본의 사소설처럼, 좁은 방 안의 이야기를 써도, 보편성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저의 세계와는 다릅니다. 전후 작가의 대부분은 그랬지만, 모두 각각 커다란 주제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모두 세계에 대치해 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물론 자신이라는 개인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설령 자기 신변의 것이라도, 자신 안의 보편성을 묘사하면 괜찮아요.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개개의 체험을 사회와 분리해서 쓰는 듯한 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그것은 저에게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문예지에는 쓰기도 했지만, 일본 문학에는 거리가 있었던 거지요.

문학이 갖는 보편성이란, 언어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세계의 언어가 영어로 통일되어, 영어로 문학을 썼다고 해도, 그것은 보편성이 아니기도 하고, 그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제가 일본어로 4·3 사건을 쓸 때, 거기에는 언어의 구속이 분명 있는 거지요. 언어와 작품 사회의 분열이라는 현상은, 일본 작가에게는 발생하지 않아요. 재일 작가에게도, 일본어의 영향은 대단히 크지만, 일본어의 벽을 어떻게 하여 무너뜨리는가, 또는 극복하는가, 라는 것은 커다란 주제가 됩니다. 일본어가 지닌 소리와 형태와, 일본어가 지닌, 전통적인 언어의 정감과 표상이 반드시 수반되어 오기 때문에, 그것이 작가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 작가에게는 일본적인 것으로, 일본의 전통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조선인 작가의 경우, 거꾸로 자유와 주체를 빼앗아 갑니다.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의 주술 같은 굴레를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 게릴라가 적의 무기를 자신의 무기로 삼아 싸우는 듯한 것입니다. 일본어에 의지하면서, 일본어를 극복한다는 것. 뭐를 극복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문학 언어로 극복한다, 그러니까 보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설이며,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에 의해 허구를 만들어내는 거죠. 간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화산도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 만들어냈던 것일까. 그것은 제가 일본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거지요. 저는 스스로 방법론을 찾아서, 그러고 나서 썼던 겁니다. 그 방법론이 없으면 이토록 방대한 것은 쓸 수 없어요. 큰 소설은 방법론이 없으면 쓸 수 없어요. 생각이 떠오른 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또 역사 인식에 있어서도, 실제 역사의 흐름, 이제야 겨우 표면에 나온 것도 포함하여, 그 필연성과도 맞아야 해요. 제 경우는, 『화산도』에서 묘사한 역사 인식은, 현재 한국의 역사가들의 인식보다도 선행하고 있어요. 지금 문재인 정권이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이미 『화산도』에서 묘사해 온 거예요. 결코 전문적인 것은 쓰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해방 공간’의 해방”은 이제부터 커다란 과제인 거지요.

-일본의 패전, 조선의 해방에 의해 열린 ‘해방 공간’은, 분단과 냉전 속에 일그러지고 갇혀 버렸던 거지만, 그 ‘해방 공간’을 다시 한 번 ‘해방’시켜야만 한다는 거지요. 곤란한 길이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김 선생이 문학으로 제시하셨던 “‘해방 공간’의 해방”이라는 방향성이, 역사와 정치에서도, 가까스로 결실을 맺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김석범
저는 장수해서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4·3 사건을 둘러싼 현재의 상황을 볼 수도 없었고, 『해저에서』도 쓸 수 없었어요.

사르트르는 아니지만, 세계에 굶주려서 죽어 가는 어린이들을 앞에 두고 문학이 뭐를 할 수 있을까요. 문학에는 현실의 힘이 없다고 하지만, 문학, 예술의 기능과 정치와 사회의 기능은 다르고요, 문학은 문학, 예술은 예술로서 자립하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20세기는, 그때까지의 시대와 달라서, 문학도 세계적인, 보편적인 것이 되어 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문학도 커다란 관점에 서야만 한다는 거지요. 소설, 특히 장편인 경우는, 세계를 파악하지 않으면 개체도 파악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 세계를 묘사하는 데, 개체를 통해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체를 존중한 것에서가 아니면, 보편성은 얻을 수 없어요.

개인적인 소설을 쓰는 경우에도, 내부에 세계성을 갖는 것이지요. 자신이 쓰고 있는 자신의 개별 세계를 초월한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세계를 묘사한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묘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화산도』도, 모든 세계의 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주도의 사건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보는 방식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확대됩니다. 개개 인간들의 존재가, 전체를 만들고 있고, 개개 인간들 가운데, 전체인 우주가 들어 있어요.

자기 개인의 생각만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에서 사물을 응시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순 일이 있어도 양보할 수 없는, 정당하다고 믿는 것이 있는 경우, 철저하게 자신을 관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지배하는 듯한 방식으로 관철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방근의 신조는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바로 이것은 자유인 것이라는 거죠. 그것은 평등의 정신이기도 하고요. 자유롭고 평등한 정신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 오늘 긴 시간에 걸쳐 감사했습니다.<끝>

- 『世界』, 2019. 07월호에서 -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①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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