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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송신도宋神道의 인생담 ②
전장과 위안소라는 극한을 살아낸 재일 여성
김종익 | 2018-03-08 13:09:3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이 글은 『세카이』 2018년 3월호에 게재된 「宋神道の人生譚 - 戰場と‘慰安所’の極限を生き拔いた在日女性」을 옮긴 것이다.
본문의, ( )는 필자, [ ]는 역자의 주석이다. 중국의 지명은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 옮겼다. 본문에서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홑낫표(「 」)는, 작은따옴표(‘ ’)와 로 옮겼다. 또 대화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홑낫표(「 」)는, 큰따옴표(“ ”)로 옮겼다.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졸업. 30여 년간 ‘위안부’ 문제에 전념하며,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라 부린 전장의 소녀』 『할머니의 노래唄 - 재일 여성의 전중·전후』 등의 저서가 있다.

잔혹한 위안소의 날들

군인과 접할 때, 가장 무서웠던 것은, 말이 안 통하는 것이었다. 군인은 반드시 칼을 소지하고 있었다. 전술한 전 군인에 따르면, 비무장으로는 절대 외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언제 적군이나 항일 게릴라에게 습격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닌 필리핀의 마스바테섬 경비대의 1942년 8월의 군인 구락부 규정이었지만, “복장은 약식 복장으로 칼을 착용하고 각반을 신는다”고 의무화되어 있다. 군인 구락부는 바로 위안소다.

우창은 일본군의 대규모적인 병참이 되었다. 전선으로 향하는 부대, 전선에서 돌아온 부대가 탄약과 군량과 말먹이를 보충하고, 휴식을 취했다.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는 거칠었고, 사소한 일에도 칼을 뽑았다. 칼부림 사태는 일상 다반사였다. 말을 알면 작은 방에서 대치한 병사가 뭐를 생각하는지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을 모르니까 처음부터 칼을 빼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공포에 떨었다.

위안소에서 도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뼈저리게 느꼈을 때, 송 씨는 일본어를 필사적으로 외웠다. 가까운 위안소에서 크레졸 원액을 화장실에서 마신 자살자가 발견되어, 대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그 사람은 훌륭해요. 죽을 의지가 있는 걸요. 나는 죽을 기개가 없었어요.”
송 씨는 자살자도 나오는 위안소에서 살아남으려고 했다.
“죽으면 담뱃재와 마찬가지 존재가 된다고. 살아 있으면 맛난 것도 먹을 수 있기도 하고.”
통과 부대가 우창에 도착하면, 70명 정도의 병사를 상대했다. 하루에 그렇게 많이 상대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틀림없다. 성냥개비가 있으면 성냥개비로 세었기 때문에 틀림없다”고, 손바닥 위에 봉긋하게 솟은 작은 개비의 산 모양을 몸짓으로 보여주었다.
“그냥 군인을 배 위에 올려놓고, 기척조차 하지 않으면 되는 걸요. 아랫도리에서 불이 나요.”
세계관 근처에는 대화관大和館, 수관壽館 등, 몇 채나 되는 위안소가 나란히 있었다.

외출은 금지되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 위안소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위문하러 갈 때뿐. 우한 대학이 육군 병원이 되어, 중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송 씨는 몇 번인가 위문하러 가서, 세탁과 부상병의 상처 소독 등을 했다. 총탄을 맞은 상처에 파리가 꾀고, 심한 경우는 구더기가 끓었다. 그런 환자는 도울 수 없었다. 대화 상대가 되기도 했다. “좋다”고 하며 손을 놓지 않는 병사도 있었다. 일본 본토에서 위문단이 온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영화 상연과 공연을 한 적도 있었다. 노래가 특기인 송 씨는 공연에서 상품인 축음기와 재봉틀을 획득했다. 위안소 여성들도 공연을 열었다. 무대가 없었기 때문에 천막으로 둘러친 곳에 거적 같은 것을 깔았고, 축음기로 반복해 들었던 레코드에서 기억한 쓸쓸한 선율의 군가를 송 씨는 늘 불렀다. 병사의 심정을 가사로 만든 노래다. 흰 잠옷 차림으로 무리를 이룬 부상병이 눈물을 글썽이며 열심히 듣고 있었다.

위안소에서 태어난 아기

우창의 세계관에서 한커우 해군 위안소로 옮긴 것은, 임신 8개월가량 되었을 때였다. 한커우 위안소에서는 잡일을 했다. 아이는 무사히 낳았다. 산파가 목욕을 시키자, 아이는 물속에서 작은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재미있었어. 좋은 거야”
아무리 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았다.
기저귀와 배내옷은 직접 바느질해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위안소에서 아이는 키울 수 없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조선 여성에게 태어나자 바로 맡겼다.

그런데 맡은 여성은 며칠이 지나서 “너무 울고 또 울어서 키울 수 없다”며 도로 데리고 왔다. 송 씨는 수유를 할 수 없어 옆구리가 아플 만큼 불은 젖은 아이에게 물리고, “이 아이는 장난감이 아니니까, 귀엽다고 데리고 가고, 운다고 도로 데리고 오는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미음이든 설탕물이든 만들어서 키워 달라”고 가슴이 찢어지는 마음으로 부탁하고, 억지로 아이를 여성에게 맡겼다.

그 후 잠시 몸을 추스르고, 웨저우岳州로 옮겼다. 웨저우는 작은 읍이다. 송 씨는 웨저우에서도 임신했다. 이 위안소의 주인도 고 씨였다. 고 씨는 위안소에 있던 여성을 아내로 삼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송 씨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삼을 작정이었었다.

임신 7개월째인 어느 날, 배가 차가워지더니 이어서 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방의 안쪽 자물쇠를 걸고 누웠다. 아이는 한쪽 발부터 나왔다. 가는 다리를 신중히 잡아당겼지만, 더 이상 나머지 발도 몸도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옆에 있던 주먹밥을 먹고, 힘을 주었다. 긴 시간이 걸려서, 겨우 몸에 탯줄을 감고 나왔다. 태반을 남기면 생명에 지장이 있다는 지식은 있었다. 지그시 탯줄을 당겼다. 태반은 쑥 나왔지만, 포도색을 한 해삼 같은 아이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그 아이를 위안소 뒷산 기슭에 직접 묻었다.
자신의 아이로 삼을 작정이었던 고 씨는 낙담했다.
웨저우는 위안소 수가 부족했다. 군의 지시에 따라 일본 병사로 현지에서 만기가 된 야마모토山本 씨가 위안소 주인이 되었다. 고 씨는 나중에 한커우에서 공습을 받아 죽었다고 들었다. 야마모토 씨는 고 씨처럼 ‘위안부’에 무리한 말은 하지 않았다.

부대에 딸려 전선으로

웨저우에서 여러 번 토벌에 나가는 부대를 따라 종군했다. 몇 군데 위안소 경험을 쌓은 ‘위안부’가 선발되어, 세정용 세면기와 소독액을 휴대하고 부대를 따라 작전지로 향했다.
“나는 전선만 돌아다녔어요. 정말로 총알이 날아다니는 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상태였던 걸요. 철모를 쓰고, 몸뻬를 입고, 군대 뒤에 착 들러붙어서. 전선 쪽으로 가면 거의 신발을 벗는 일은 없어요. 언제 적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으니. 적에게 끌려가면, 그야말로 죽여 버릴지, 돌려보낼지 알 수 없으니까요.”
부대가 두 명가량 병사를 남기고 ‘토벌’에 나가면, ‘위안부’도 총을 가지고 망을 섰다. 조선 여성이 둘이 끌려가버린 일이 있다. 그 후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주인과 회계는 위안소에 남았다. 가장 경험이 많은 ‘위안부’가 운영을 도왔다. 목적지에 빈집이나 참호가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물이 있는 가까이에 야영을 하거나, 참호를 파기도 해 병사도 여성들도 기거했다. 사람 하나 누울 만큼 구덩이를 파고 천막을 치면, 거기가 ‘위안’하는 곳이 되었다.

“목욕탕이 없으니까 병사가 드럼통을 지고 다녔어요. 드럼통 목욕으로 사타구니가 헐어서, 피가 줄줄 나와요. 세균이 침입해 부어요. 그래서 드럼통 목욕탕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창안長安에 갔을 때 일이다. 참호에서 ‘위안’ 중에 총탄이 날아왔다. 송 씨는 일각이라도 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총탄이 머리 위를 스치고 가는 바람에, 병사는 “나는 여기서 죽어도 만족한다”고 하며, 송 씨의 몸을 놓지 않았다.

“겨울은 싫어요. 눈이 내리니까. 알몸이잖아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어요. 음핵이 얼어버릴 만큼 추웠어요. 일을 끝낸 후 바로 토벌하러 가야만 해서 떠나가는 거지요. 우리도 누워 있을 수만 없었어요. 세탁을 하거나 해야지.”
피 뭍은 군복을 찬물로 빨았다. 아무리 빨아도 피는 빠지지 않았다.
일본군의 시설이 폭격당하면, 헌병이 움직이고, 중국인이 체포되었다. 폭격에 앞서 정찰기가 날아와서, 공격 목표를 촬영해 갔지만, 일본군은 민간의 중국인을 스파이로 만들어 처형한 것이다. 송 씨 등에게 “재미있는 것을 보여 준다”고 그 장면에 끌려갔다. 깊게 판 구덩이 옆에서 눈을 가린 중국인이 목을 잘렸다,

“군도였기 때문에 잘 베어졌어요. ‘얍’하면 머리가 떨어지고, 그 놈이 발로 차 날려서 구덩이로. 그런데 돌아오면 연회를 하는 거야. 살인을 한 후는 마시며 이봐, 이봐, 라고 「노래하는 아이」를 부르거나. 잔혹한 짓이지요.”
송 씨의 몸에는 위안소에서 당한 상처가 몇 개나 남아 있다. 왼쪽 귀가 난청인 것은, 회계에게도 군인에게도 두들겨 맞은 결과다. 좌우, 어느 쪽 손인지 깜빡했지만, 엄지와 검지 사이를 면도칼로 잘린 상흔이 있었다. 허벅지 아래 부분에는 찔린 상처, 그리고 옆구리에는 10cm남짓 칼로 베인 상처가 남아 있었다.

“버릇이 나쁜 사람이 있어요.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며 난폭하게 굴고, 한 남자 좋아한다고 흉기, 번쩍하고 비수를 꺼내서 베는 거예요. 상처는 크고 깊었어요. 피는 그다지 나오지 않고. 흰 살이 오싹하리만치 깊게 베인 거야. 흰 천을 감고 신음했다. 그런데도 병사를 상대하고.”
웨저우에서 잉산應山으로 옮겼을 때, 같은 위안소에 있던 도시코는 몸 상태가 악화되어, 단골 병사를 끊었다. 그러자 병사는 칼을 뽑아 난동을 부린 끝에 창으로 큰 돌을 던졌다. 그 돌이 배에 맞아서 복막염을 일으키고, 이질에도 걸려서 사망했다.

“가엾기 그지없었어요. 둔부에서 피가 나는 데. 죽은 여자를 불 태웠지만, 좀처럼 타지 않았어요. 나무에 불을 지르고, 그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몇 시간이나 불을 때서 태울 수 있었어요. 불에 탄 유골을 산에 묻었어요. 조선에서도 말이야, 텔레비전에서 듣고 있자면, 몇 십 년이나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 있는 동안에 만나고 싶다고. 그 사람의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잖아요. 이런 죽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닐까요.”
대구에서 온 ‘위안부’는 병사와 동반자살을 했다.

“그 사람, 수류탄이 있었으니까. 그걸로 죽은 거예요. 나는 그렇게 해서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나는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도망치며 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 무서운 사람인 거라고요.”
병사의 유골은 태워서 고향을 돌아갔지만, 여성의 시체는 그 상태로 묻히고, 사망 통지조차 친족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위안소에서 짝사랑을 했던 군인이 있었다. 나고야 출신으로 3사단의 스즈키鈴木 소위다.

“그 남자는 말이야, 도리어 나를 사로잡았다니까. 나도 다른 병사를 받고 싶지 않은 거야. 주인에게 야단을 맞았지.”
송 씨는 스즈키 소위의 아이를 가졌다. 스즈키 소위 쪽이 일찍 눈치를 채고, 당번병에게 복숭아와 귤 통조림을 보냈다. 첫 번째로 먹고 싶었던 바로 그 통조림이다.
“아이를 낳아서 봤더니 쏙 빼닮은 거 있지. 수도 없이 많이 해도 아는 거야.”
아이는 중국인에게 맡기고, 바로 셴닝咸寧 위안소로 옮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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