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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홈 > 김종익

패전 ④
김종익 | 2016-03-25 14:04: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세카이』 3월호에 실린 글을 중역한 것이다. 일본어 제목은 ‘負け戰’이다. 그러니까 ‘패배하는 싸움’ ‘지는 전쟁’ ‘패전’ 정도의 의미이다. 나는 ‘패전’으로 옮겼다.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반도, 강대국에게 민족의 운명을 의탁한 한반도, 전쟁 경험이 권력 투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그 도구가 강력하게 현실을 규정하는 한반도, 그 땅에 사는 자들에게 그녀(그녀들)이 묻는다. 너희는 전쟁이 뭔지 아느냐고…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4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패전 -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
1948년 우크라이나 출생. 국립 벨라루스 대학 졸업 후, 저널리스트 길을 걸었다. 민중의 시선에  서서, 전쟁 영웅 신화를 허물어 버리고, 국가의 압박에 계속 저항하며 집필 활동을 이어왔다. 이 글은 2015년 12월 8일, 스톡홀름의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행한 수상 기념 강연을 완역한 것이다. 국내에 번역된 저작으로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세컨드 핸드 타임』『체르노빌 목소리』 등이 있다.


1990~1997년

러시아 문학이 흥미 깊은 점은, 일찍이 저 거대한 국가가 경험한 독특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질문을 받는다. 왜 비극적인 사건만 쓰는 거냐고.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나라에 살지만, 어디에나 ‘붉은’ 사람은 있는 법이다. 같이 그 생활을 했고, 같은 기억을 가진 ‘붉은’ 사람들.

오랫동안 체르노빌 사건은 쓰고 싶지 않았다. 체르노빌에 대해 어떻게 쓰면 좋을 지,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접근을 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한쪽 구석으로 망각된 나의 작은 나라. 이 나라에 대해, 이전에는 세계 그 누구도 거의 물은 적이 없었는데, 그 이름을 갑자기 누구나 입에 올리게 되었고, 우리 벨라루스 사람들은 ‘체르노빌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미지의 것에 접촉했던 것이다. 확실한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공산주의, 민족주의, 신흥 종교 같은 인류를 향한 도전 외에, 거기에 더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는 사실. 그것은 보다 무자비하고 전 세계적이지만, 지금까지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도전이라는 사실이다. 체르노빌 사고 후, 뭔가 빗장이 조금 풀린 듯한 느낌이 든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택시를 타고, 비둘기가 앞 유리창에 부딪쳤을 때, 나이든 운전사가 절망한 듯이 욕설을 퍼부었던 일이다.
“하루에 두세 마리, 새가 떨어져서 죽고 있다고 하는 데도, 신문은 ‘상황은 관리되고 있다’라고는 쓰고 기피한다.”

도시의 공원에서는 낙엽을 그러모아, 교외로 옮겨 버리고 묻었다. 오염된 장소에서 흙을 깎아 내고, 이 흙 또한 묻었다―흙 속에 흙을 묻은 셈이다. 장작도 풀도 파묻었다. 모두 조금 비정상이 된 듯한 표정이었다. 늙은 양봉업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날 아침 마당에 나오자, 뭔가 익숙한 소리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꿀벌이 한 마리도 없었다…. 꿀벌의 날개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거다. 한 마리도 없다! 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다음날도 꿀벌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3일째다. 그 후 겨우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알게 되었다. 원자력 발전소는 바로 근처라고 하는 데,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꿀벌은 알고 있었는데, 우리는 몰랐던 거야.”

신문에 실린 체르노빌 관련 정보에는, 군사 용어만 사용되고 있었다. 폭발, 영웅, 병사, 철수…. 원자력 발전소 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은 KGB로, 스파이나 파괴 분자를 색출하려 했다. 사고는 서방측의 비밀 첩보부가 계획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사회주의 진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따위의 풍문이 퍼졌다. 체르노빌 쪽으로 무기가 옮겨가고, 이어서 군인들이 그리로 향해 갔다. 여느 때처럼 작업은 군사 시스템에 기초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신형 자동소총을 든 군인 모습도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비극적일 뿐이다. 군인이 할 수 있는 일라고 하면, 방사능을 듬뿍 뒤집어쓰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죽은 일이었으니까.
내 눈앞에서 체르노빌 이전의 인간이 ‘체르노빌 사람’으로 변모했다.
방사능이라는 물질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그런 알듯 하면서 알 수 없는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대피 지역 안에 들어갔을 때 빠른 어조로 설명을 받은 것은, ‘꽃을 따서는 안 된다, 풀밭에 앉아서는 안 된다, 우물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었다. 죽음이 도처에 잠재해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죽음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죽음이었다. 새로운 가면을 쓴 죽음. 낯선 외관을 한 죽음이다. 전쟁을 경험한 노인들은 다시 소개하게 되었는데,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해님은 밝게 빛나고 있어…. 포연도 없거니와 가스도 없다. 총격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전쟁인 건가? 피난민이 돼야만 하다니.”

아침이면 너나없이 낚아채듯이 신문을 움켜쥐고는, 바로 실망해서 옆으로 치운다. 스파이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민의 적’이라는 말이 씌어 있지 않다. 스파이도 ‘인민의 적’도 없는 세상이라는 것도 생소하다.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 이어서 체르노빌이 우리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내 경우에는 세계가 확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피 지역 안에서는 내 자신을 벨라루스 사람이라고도, 러시아 사람이라고도, 우크라이나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소멸할 가능성이 있는 생물종인 것처럼 느꼈다. 두 개의 파국이 겹쳤다. 사회적인 파국으로 사회주의라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에 가라앉았고, 우주적 규모의 파국으로 체르노빌이 일어났던 것이다. 제국의 붕괴로 사람들은 불안해졌고, 일상생활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뭐와 교환해 물자를 확보할까, 어떻게 해서 살아남을까, 뭐를 믿어야 좋을까, 어떤 깃발 아래 서면 좋을까, 그렇지 않으면 ‘중요한  사상’없이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하는 걸까. 최후의 과제는 누구에게나 새로운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살았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붉은’ 인간은 수 백 개에 이르는 의문에 직면했고, 혼자서 대처해야만 했다. 자유를 얻은 이 최초의 나날만큼 고독했던 적이 없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일기를 덮도록 하죠.
제국이 붕괴했을 때, 우리 신상에 일어난 것은 뭐였던 것일까요. 예전 같으면 세계는 나뉘어 있었어요. 박해자와 희생자라면 수용소라는. ‘형제들 자매들’이라면 전쟁이라는. 유권자라면 테크놀로지와 현대 세계라는 것과 같은 식으로. 이전 우리의 세계는 거기에 더해 감옥에 보내지는 자와 보내는 자로 나뉘어 있었지만, 지금은 슬라브파와 유럽파로, 민족주의자 곧 배반자와 애국주의자로, 거기에 더해 구매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뉘어 있습니다. 마지막의 ‘구매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뉜다는 것이, 사회주의를 거친 자에게 가장 잔혹한 시련이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모두 평등했을 테니까요. ‘붉은’ 사람은, 부엌에서 꿈꾸었던 ‘자유의 왕국’에 아무리 해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모르는 사이에 분할되고 말았고, ‘붉은’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고, 비굴하고 공격적이고 위험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8) 1941년 7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처음으로 스탈린이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호소한 말이 ‘동지 여러분! 형제들 자매들!’이었다.

러시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들려오는 것은 이런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근대화가 있을 수 있다면, 특별수용소와 총살에 의해서다.”
“러시아인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부자가 되는 일을 두려워하기조차 한다. 그럼 도대체 뭐를 바라고 있는 걸까. 희망은 언제든 하나. 타인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자신보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여기서는 정직한 인간 따위가 나타날 리가 없다. 성자는 있지만.”
“채찍질하지 않는 세대 따위는 찾아오거나 하지 않는다, 러시아인이라는 존재는 자유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용감한 코사크와 채찍이다.”
“러시아어로 중요한 말이라고 하면 두 개가 있다. 전쟁과 감옥이다. 도둑질하고, 좀 흥청거리고, 투옥되고…나와서, 다시 투옥된다.”
“러시아의 생활은 고통으로 가득찬 형편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혼은 고양되고, 자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깨닫는다. 더러운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혼은 보다 큰 여유를 가지는 거다….”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기에는 힘도 없거니와 열광도 없다. 기세도 없다. 러시아인에게는 등줄기가 얼어붙는 듯한 사상이 필요한 거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생활은, 혼란과 가건물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공산주의는 죽지 않고, 시체가 아직 살아 있다.”

굳이 말하자면, 1990년대에 찾아온 모처럼의 기회를 우리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가, 강한 나라인 건지, 아니면 착실한 삶이 가능한 훌륭한 나라인 건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앞의 ‘강한 나라’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러시아 사람이 우크라이나 사람과 싸우고 있습니다. 형제와 싸우고 있는 겁니다. 저는 아버지가 벨라루스 사람, 어머니가 우크라이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많습니다. 러시아 비행기가 시리아를 폭격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시대’는 ‘공포의 시대’로 교체되고, 시간이 역행하고 말았습니다. ‘낡은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붉은’ 사람의 역사를 마지막까지 완결할 자신이 없습니다….  

제게는 집이 세 개 있습니다. 벨라루스에 있는 제 땅은 아버지 고향으로, 제가 이제까지 살아온 곳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어머니 고향으로,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러시아 문화 없이는 지금 존재하는 제 자신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제에게는 사랑스러운 집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이 시대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 같습니다. <끝>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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