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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조선 국적 제4회 - 생살을 찢는 아픔
박종명 - 하
김종익 | 2015-11-19 12:35:5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사상으로서의 조선 국적 제4회 - 생살을 찢는 아픔
박종명 - 하


조선인 학교에 대한 탄압

한신(오사카 시와 고베 시) 교육 투쟁으로부터 67년째인 2015년 4월 22일, 당시의 데모 코스를 박종명과 함께 걸었다. 오테마에大手前(오사카 시 중앙구의 약칭) 교차점에서 우에마치수지上町筋(오사카 시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달리는 도로의 통칭)를 따라 남쪽으로 나아가면, 오른쪽에 오사카 부청府廳 건물이 보인다. 왼쪽에 펼쳐지는 녹지에서는,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속에 여성이 유모차를 밀고, 젊은 남녀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다. 박朴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여러분. 느긋하시네요.”

1948년 4월 23일, 이 부근은 학교 폐쇄령 철회를 요구하는 조선인들로 뒤덮였었다. ‘그때’의 광경이 뇌리에 되살아났던 것일까, 잠시 침묵하며, 박朴이 중얼거렸다.
“화가 치미는 기억이네요…”     
낮부터 진행된 교섭은 저녁 무렵에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부지사는 청사에서 달아났고, 부청과 그 주변에는 항의자만 남았다. 한쪽에서 관헌이 진압에 나섰다. 무장 경찰이 우에마치수지의 남쪽과 북쪽에 집결하여, 데모대를 가운데 두고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경찰에 따지고 들자, 그들은 가슴 높이로 수평을 유지하던 경찰봉을 얼굴을 노리고 쑥 내밀었다. 구호를 합창하는 소리와 성난 목소리가 난무하고, 여기저기서 무장 경찰과 실랑이가 일어났다. 
꿈쩍도 하지 않는 동포에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가 호소했다.
“아이들을 위해 모두 조용히 철수해라, 일단 철수한 다음 다시 교섭하자.”
많은 동포가 부청 앞을 떠났지만,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한 패가 해산한 것은 오후 10시가 지나서였다. 데모 참가자 179명이 소요죄로 체포되었고, 부상자는 병원에 실려 갔던 사람만 16명에 달했다. 경찰 측도 3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조선인을 조선인으로 키울 권리를 요구했을 뿐인데…폭도로 취급되어 진압되었다. 지도자는 원통한 마음으로 해산을 지시했다고 생각해요…”
그 3일 후인 26일의 교섭에서는 데모대에 소방차가 물을 뿌리고, 경찰의 수평 사격으로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사살되었다. 당시의 체험은 지금도 때때로 꿈속에서 본다.
“몸 상태가 좀 나쁠 때라든가 하면요. 꽤 자주 가위에 눌려 있는 것 같아서 아내가 깨워서 일어나는 겁니다.”

빼앗긴 민족성을 회복한다. 달리 말하면 탈식민주의, 반 인종주의의 문맥에서 태어난 조선인학교에 대한 탄압은, ‘전후’ 일본에서 조선인 차별의 재편이었다. 이 흐름은, 오늘의 조선학교의 고교 무상화 배제로 연결된다.
존엄을 요구하는 투쟁을 ‘폭동’이라는 두 글자를 뒤집어씌워서, 그 투쟁에 스며있는 ‘간절한 소망’을 은폐한 것은 미디어였다. ‘조선인 폭도’ ‘공산당의 선동’ ‘일본의 법률에 따라라’. 점령군 견해에 의거한 제목의 다수는, 사건의 ‘과격함’만을 부각시켰다―9·11 후, ‘테러’라는 말로, 부시 미국 대통령이 말하는 ‘우리 편’에 가담하여, 억압받는 자들의 ‘진실’을 은폐했듯이. 아사히신문은 호외로 ‘비상사태’를 선동했고, 요미우리신문은 “조선인 여러분에게 반성을 소망한다”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광범위한 반대 운동으로 이 때의 탄압은 견디었지만, 다음해인 1949년 9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단체등규제령으로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되었고, 거의 모든 조선인학교가 폐쇄로 내몰렸다.


독방의 나날

엄청난 좌절이었지만, 바로 작은 운동단체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 단체들은 연합단체로 변모했다.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이다. 조선 반도에서는, 남북 대립이 마침내 전쟁으로 치닫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감시, 관리는 보다 가열되었다. 이 무렵, 박朴은 체포되었다. 조선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 배포가 점령 정책 위반으로 추궁을 당했던 것이다.
취조실에 들어가자, 책상 맞은편에 담당관이 앉아 있었다. 그 오른편에는 통역이 있었다.
“점령 정책 위반을 인정하세요!”
고압적인 태도로 호통을 치는 담당관에게, 박朴은 거칠게 말했다. 
“평화 헌법이 있는 일본에서 폭격기가 조선으로 가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점령 정책이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다!”
승강이질이 계속되자 담당관은 일어서서 느닷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두 명의 미군 병사가 대신 방으로 들어왔다.
“‘손발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라고 명령을 받았던 거죠. 저도 ‘개도 아닌데!’라며 거절했어요. 그러자 한 사람이 나를 겨드랑이로 껴안듯이 내리누르는 거예요, 네 발로 기는 모습이 된 거지요.”
다른 한 사람이 뒤쪽으로 돌아가서, 군화의 끝으로 박朴의 항문을 차기 시작했다. 차일 때마다 뭔가가 뚫고 지나가는 듯한 심한 통증이 엄습했고, 전신이 저렸다.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알았다.
정신이 들었는데 침대 위였다.
“새하얀 침대였어요. 엉덩이의 상처도 응급 처치가 되어 있었고요. 옆에는 피투성이였을 내 옷이 세탁이 완료되어 있었어요.”
일주일도 안 되어 상처는 아물었다. 그러자 또 지난 번 그 담당관에게 호출된다. 취조는 아니었다. ‘점령 정책 위반’의 죄상을 인정할지 말지였다. 거부하면 또 발로 걷어차였다.
“서너 번은 되풀이 되었지요.”

지금도 서서 강연을 하면, 한 시간 반만 되면 장이 항문으로 비어져 나온다.
“지독하게 아파요, 강연이 끝나면 화장실로 가서 거둬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고문만이 아니었다. 거듭 들었던 것은 한국으로의 강제 송환이다.
“그 무렵은 ‘강제 송환’이 으름장이었다. 당시 한국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은, 사실상의 사형이었어요.”
실제로 그래서 ‘전향’했던 사람도 있었다.     
끝까지 거부한 박朴을 기다라고 있던 것은 군사 재판이었다. 변호사도 붙었지만, 군사 재판에서 ‘피고’의 권리 따위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판결은 점령 정책 위반으로 중노동 1년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부과되지 않았고, 하루 대강 30분의 운동 이외에는 독방에 감금되는 ‘감금형’이었다.
“시시한 체험이었어요. 그런데요 배운 것은 많았어요.”
다다미 두 장 반 크기의 독방에서 독서에 몰두했다, 성서, 철학책, 역사책―.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은,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레지스탕스들의 모습이었다.
“체포되면 사형, 강제수용소, 가족에게도 화가 미치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저항을 계속해요. 나 나름으로 말하면 ‘신념’이란 정합적 논리로 견디어 낸 강인한 자기주장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지고, 인간이 존엄성을 갖춘 존재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어필한다. 그것이 신념인 것이라고. 나는 거기까지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삶의 방식에 가까이 갈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정치범들에게서 본 것도 ‘신념’이었다.
“하루 몇 장 지급되는 화장지를 떼어 놓는 거죠, 거기에 잔글씨로 빽빽이 뉴스를 써서, 형무소 지부 뉴스를 만들어 정보를 돌려요. 결국은 말이죠, 강한 의지로 견디어 내면서, 어떤 일을 실현하는 방법론을 정성껏 생각하면, 제약성은 많이 있어도 일정 부분은 실현 가능하게 되는 거지요.”
약 1년 후, 형무소 문을 나왔다. 마중 나온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박朴을 껴안고, 눈물로 목소리가 막힌 채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한국으로의 강제 송환도 있을 수 있었다. 영원한 이별도 각오했던 아들과의 재회였다.
“어머니의 눈물은, 불량 생활에서 발을 뺀 후 처음이었어요. 어머니를 울게 만든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고요.”


‘민주 혁명’의 내실

바로 운동의 제1선에 복귀했다. 일본 공산당은 무장 투쟁을 내세웠고, 그 최전선을 조선인이 떠맡고 있었다.
“나는 후회는 하지 않아요. 하지만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요,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암울한 시대였어요.”
박朴이 말했던 것은, 1952년 6월의 ‘히라카타枚方 사건’이다. 고마쓰小松제작소에 불하될 예정이었던 구 오사카 포병 병창인 히라카타제조소에서, 미군용 포탄 제조 재개가 계획되고 있었던 것에 대한 항의 행동이다.
현재의 히라카타공원 근처에서 반대 집회가 기획되었는데,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집회와 그 후의 데모로 관헌을 유인하고, 공장에 잠입한 행동대가 포탄 제조 펌프를 폭파한다. 극히 일부만 아는 ‘진정한 목적’이었다. 박朴은 계획을 몰랐지만, 지부 청년의 동원 요청을 하러 온 활동가에게 불온한 공기를 헤아리고, 청년들에게 철저히 하라고 당부했었다고 한다.
“‘절대로 구호를 외치는 것 이외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화염병 따위를 던져서는 안 된다’고.”
계획도 엉성했다. 어쩐 일인지 집회 전날에 행동대가 공장에 침입했다(당국에 계획이 누설되어서 강행했다는 설도 있다). 폭탄 두 발을 장치했지만, 자동 계기 유리 한 장을 깼을 뿐이다. 나머지 한 발은 불발이었다. 데모에서는 불하와 관련된 지역 유지의 집에 데모대의 누군가가 화염병을 던져서 작은 화재가 일어나, 형사 사건으로 번졌다. 총 98명이 체포되어, 65명이 기소되었다.

이 시기의 ‘소요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조선인 가운데는, 국적을 한국으로 변경하고 출옥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강제 송환 회피를 위한 ‘전향’이었지만, 공판 기록을 검증한 박朴은 분노를 표출한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까지 마구 지껄이고, 전혀 관계없는 10대 소년과 소녀가 체포될 만한 진술을 한 인물도 있었어요. 그런 바보가 대부분이었어요.”
“전시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책적으로 초지일관하고 있는 것은 공산당이지요.”
그런 전제를 하고 나서 박朴은 말했다.
“그런데 가장 위험한 곳, 가장 힘든 일은 조선인이 담당했어요. 뭐랄까 불문율처럼. 일본인은 후방에서 지시하는 거예요. 우리는 얼굴 없는 숫자에 지나지 않았어요. 식민지 시대부터 변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1)를 보세요.”
나카노의 시 「비 내리는 시나가와品川 역」의 일이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신辛과 김金, 이李에게 불러준 이별의 노래는, 이런 말로 맺어진다.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후위 방패 전위 방패
안녕
보복의 환희로 울고 웃는 그 날까지

“나카노 시게하루처럼 감성이 풍부한 사람조차, 자신의 시에서 조선인 당원에 대한 이런 호칭은 뭘까 궁금합니다. 그는 내 내면에서는 공산당 양심의 정점입니다. 그런 사람마저 이 정도입니다.”
언제나 일본인은 ‘호소하는 측’이었다. 일본의 민주화야말로, 자이니치의 상황을 개선하는 길이며, 그것이 안 되면 자이니치의 힘은 결집할 수 없고, 조국 지원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최우선은 일본의 민주 혁명이다 ― 그것이 공산당의 기본 방침이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역사적인 비대칭성을 주목하지 않고 그에 앞서 주장되는 ‘민주 혁명’은, 박朴에게는 공허한 것이었다.
“일본의 여러분은요, 단적으로 말하면 민족이라고는 전혀 몰라요. 일본의 여러분은 존재 자체가 민족입니다. 더 이상 되물을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그런데 조선인은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 나는 조선 민족인 것이다. 조선 민족이란 뭔가. 그 조선 민족이 일본 공산당원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일본의 여러분은 다르다. 일본 민족이란 것은 뭔가를 생각하는 일 자체가 이상할 정도로 일본 민족인 것입니다.” 

공산당은 1955년, 무장 투쟁 노선을 비판하고, 전환을 표명했다. 그러나 조선인의 희생은 복원할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전전부터 1955년까지는 재일 조선인을 당원으로 받아들이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어떤 행동을 취하게 하여, 막대한 희생을 냈어요. 방침을 바꿨다면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만…”


교사 생활

한편, 그 조금 전 박朴에게 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어느 모임에서 연설을 마친 후, 가만히 듣고 있던 나이가 지긋한 동포가 중얼거렸다.
“우리말도 하지 못하면서 ‘지도’라고? 민족 운동의 리더가 그래도 되는 건가?”라고.
“충격이었어요. 일상 회화는 할 수 있었지만, 나의 생각을 상세하게 말해야 할 단계가 되면 일본말이 튀어나와요. 신경은 쓰고 있었지만요.”

박朴은 아버지 친구가 교장을 맡고 있던 조선소학교에 몇 번이나 찾아가서 교사를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조선어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건가?’라고 몇 번이나 문전 축객을 당했어요. 하지만 저도 필사적이었어요.”
교장이 끈기에 진 것은 얼마 후의 일이다. 채용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어를 확실히 배울 것”   
 박朴은 말한다.
“이런 동기로 내 교사 생활은 시작되었어요.”

일에 익숙해진 무렵, 한덕수韓德銖(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의장)를 처음 만났다. ‘당’에 휘둘렸던 통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위광으로 진행된, 일본 공산당 지도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직결로의 노선 전환이었다. 납득하지 못한 활동가도 많았다.
“(한덕수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전하고 있었지요. 그 자리는 일본 공산당 민족대책부파가 많아서, 혼자 외롭게 앉아 있는 셈이었죠. 나는 노선 전환 찬성이었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몇 번인가 질문을 했고요, 그는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어요.”
이런 엇박자는 그 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박朴이 오사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교육 부서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한덕수가 오사카에 왔다. 당시 교육 부장은 전 민족대책부의 간부였다.
“운동회가 있어서 교장 선생이 점심에 인사를 했었지만, 며칠 전에 있었던 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를 언급하지 않았어요. 한덕수 의장은 화를 냈거든요, 책임자인 교육 부장을 당연히 불렀습니다만 점심 식사 중인가 행방을 알 수 없었어요. 이 때문에 의장이 더욱 격노했어요. 연단에 올라가 발끈해서 연설하고, 최고인민회의의 내용을 설명한 후, ‘조국이 신뢰해서 맡긴 직무인데 그대는 뭔가!’라든가 교장을 맹렬히 비판했어요. ‘운동회 종료 후, 바로 오사카 본부의 활동가 회의를 소집한다. 이것은 의장 명령이다!’라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본부에 지부의 부장 이상의 간부가 소집되었다. 체면을 잃은 교육 부장은 거기에도 나오지 않았다.
“의장이 활동가들에게 말하는 거예요. ‘교육 부장은 교장을 사전에 지도해서 최고인민회의의 일을 말하도록 하지도 않고, 중요한 때에 자리에도 없고, 이곳에도 없어!’라고. 그리고 나서 ‘애당초 오사카는!’이라고.”
나중에는 바로 이 때라는 듯이 공격했다.
“‘반조국적, 반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적, 반민족적이다’라고까지 하는 겁니다. 회의장은 썰렁해졌어요. 그렇게 되면 이제 노선 전환 반대파는 질식하여, 오사카도 바뀌어 버리는 것이고요, 주도권 싸움인 거죠. 슬프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결정 다음해, 박朴은 오사카로 복귀되었다. 노선 전환 반대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오사카시립니시이마자토西今里중학교로 부임했다. 조선학교 일제 폐쇄의 대체 수단으로 개설된 이른바 ‘공립민족학교’였다.
“교사의 60% 정도는 민족대책부파였어요.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조직은 화덕 속의 밤을 주우라(火中の栗を拾う)2)고 시켰어요. ‘거기는 민족대책부파가 강하니까 조심하고 분발하라’고”

역자 보충
[오사카시립니시이마자토중학교大阪市立西今里中学校]
1948년 10월 19일, 조선학교폐쇄령으로 오사카 지역 조선인 학교가 폐쇄된다.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민족 교육(조선어 등)은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조건으로’ 1950년 4월에 오사카시립혼죠本庄중학교 니시이마자토분교로 개설되었다. 준비 기간을 거쳐 1950년 7월부터 수업을 재개했다. 1951년 5월에는 분교에서 독립학교가 되어 명칭을 오사카시립니시이마자토중학교(니시이마자토조선중학교)로 정했다.
1961년 시점의 오사카 시 자료에는, 학교 명은 ‘오사카시립니시이마자토중학교(오사카시립혼죠중학교 니시이마자토분교)’라고 병칭되어 있다. 오사카 시는 시의 교직원을 배치하는 등 독립학교로 취급하고 있었지만, 교직원의 급여를 부담하는 오사카 시는 기존 학교의 분교로 취급하고 있었다. 또 니시이마자토중학교 육성회의 재정 부담으로 학교 독자로 고용하는 조선인 교직원도 재직하고 있었다.
니시이마자토학교의 성격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공립민족학교로서 취급했다’고 하는 견해와 ‘일본학교의 분교 입학으로, 조선학교 폐쇄령에 수반하는 반항과 혼란의 방지를 도모했다’고 하는 견해 등, 연구자 간에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1959년에는 북조선으로의 귀국 실현 등을 배경으로 ‘북조선으로의 귀국 준비를 위한 민족 교육’이 활발하게 되었다. 여기에 수반하여 니시이마자토중학교에도 입학·전입학 희망자가 급증하여, 학교 시설의 과밀화를 초래했다.
또한 재일 조선인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재일 조선인 운동의 내용도 변화했다. 그 영향으로 니시이마자토중학교에 관해서도 북조선으로의 귀국 준비를 전제로 한 민족 교육의 흐름이 주류를 이루었고, 자주학교로 전환하는 편이 적절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히가시나라東成지부와 니시이마자토중학교 육성회 등 관계자들은 1960년 9월, 자주학교로의 전환 이행을 오사카 시교육위원회에 신청했다. 준비 기간을 거쳐, 오사카시립이마자토중학교는 1961년 8월 31일자로 폐교되었고, 폐교 시점에서 재직하고 있던 일본인 교사는 오사카 시교육위원 사무국과 다른 오사카 시립학교로 이동했다.
또 1961년 9월 1일자로, 니시이마자토중학교의 교육 실천과 교지校地를 재단법인(나중에 학교법인으로 변경) 오사카 조선학원이 계승하여, 니시이마자토중학교를 이관·개편하는 형태로 나카中오사카조선초중급학교가 발족했다. 이관과 동시에 초급부도 병설했다. 또 과밀화를 해소하기 위해, 1961년 9월에는 이 학교에서 분리하는 형태로 히가시東오사카조선중급학교가 개교했다.
2006년에는 중급부를 폐지했다. 여기에 수반하여 나카오사카조선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오사카 시유지에 있는 약 5,000평방미터의 땅은, 대략 반세기에 걸쳐서 무상 이용해 왔는데, 오사카 시와 학교법인 오사카조선학원 간에 이루어진 유상화 협의가 성과 없이 끝났고, 2012년 12월에 오사카 시에 의한 오사카 지방법원에 제소가 이루어졌다. 2014년 여름 무렵부터 오사카 조선학원은, 화해 협의에 응하고 있으며, 2015년 5월, 오사카 시와의 협의로 매매 계약에 응한다고 밝혔다.

극도로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 영접을 받았다.
“나이가 지긋한 분이 대부분이었어요. ‘자네는 의장의 스파이잖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얼마 안 되어 교무 주임이 되었지만, ‘주임 앞에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말라’ 뭐 그런 분위기였어요.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요. 나는 어쨌든 교사들을 향해 ‘민족주의로 가고 싶습니다. 편협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어떻게 걸어왔던가. 민족의 일원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유연하게 가르칩시다’라고 호소했어요.”   

귀국 열기가 높아지고, 학생 수도 불어나는 추세였어요. 최전성기는 학생 수가 1,600명 이상이었다. 교정에 조립식 건물을 지어서 수업을 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전성기로 접어드는 시기, 좀 더 민족 교육을 철저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강해져서, 1961년 자주학교를 만드는 쪽으로 방침을 바꿨다. 거기에 매듭을 지은 후, 박朴은 교단을 떠나 본부에 전임이 되었다. 그 후 재일조선인사회과학자협회 오사카 지부에 전임이 되어, 역사학에 몰두한다.
“교단에서 학문의 길로”
그렇게 말하자 일언지하에 부정했다.
“아니 나는 학문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교사 시절에요. 수학여행으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라든가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 가는 것을 보고, 민족 교육인데, 이러면 안 되는 것이라고. 조선과 관련이 있는 곳을 들렀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연구해서 확정해야만 했어요. 오히려 실천적인 요청이었지요.”
긴키近畿 지방(교토와 오사카 일대)을 중심으로 도래인渡來人의 유적을 찾아다녔다.
“그 덕분에 일본 열도의 도래인 관련 유적은 이제 거의 여기(머리)에 들어왔어요.”
그 성과가 『조선에서 온 이주민 유적』 『고대 오사카를 여행하다』 『나라奈良 속의 조선』 등 다수의 저서로 결실을 맺었다. 

1970년부터는 대학에서 교편도 잡게 되었다. 강좌는 종축縱軸의 역사에 자이니치의 현재 상태를 연계했다. 그것도 교사 시절의 경험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매우 슬프고 약해서, 눈앞의 현실은 바로 볼 수 있는 데, 왜 그런 것일까라는 경과를 모른다. 예를 들면 조선 마을입니다. 대개가 교통편이 엉망인 나쁜 장소의 판잣집입니다. 실업 상태의 사람과 날품팔이도 많아요. 대낮에 양지에서 젊은이들이 빈둥거리는 모습을 보면, ‘저놈들은 게으른 놈들이기 때문에 저렇게 더러운 곳에 살 수밖에 없어’라고 생각해 버리죠. 이래서는 안 됩니다. 역사와 현재를 고려한 다음에, 부당한 차별이라는 근거를 이론화하여, 바꿔 가려는 노력의 확산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살을 찢는 아픔

본격적으로 역사학에 몰두하기 시작한 박朴은, 커다란 갈등을 껴안는다.
“조선에서 1950년대까지의 역사를 보면, 박헌영의 숙청이라든가 하는 오류도 있지만, 김일성은 매우 뛰어난 정치 지도자라고 생각해요.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항상 우리 민족에 따라다녔던 사대주의를 부정한다고 한 것. 자주성, 민족 자결입니다. 거기에 해방 후, 친일파 추방과 농지 개혁 등과 같은 일을 몇 년 동안 해 버렸잖아요. 그런데 1960년대 이후, 역사를 공부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따를 수 없는 부분이 생겨납니다.”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었던 박朴 자신, 때로는 예전의 제자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나는 솔직하게 그 때는 이런 입장으로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지금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옳다면 앞으로도 기탄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합니다. 또한 부끄러운 생각을 표하고 사죄하여, 용서해주든지 말든지를 묻지 말자고.”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변화와 자신의 생각과의 괴리도 솔직하게 이야기해 왔다. 그리하여 자신을 총괄하고, 표현하는 자세를 ‘처세가 서툰 사람’이라고 하는 젊은이도 있지만, 박朴은 말한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거죠.”
이 신념은 민족 운동에 뛰어든 이후, ‘그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몇 명이나 봐 왔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약한 부분이 있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해요. 특히 사상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심하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생각해요. 사상을 바꾼다고 하는 것은요, 옷을 갈아입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그것은 생살을 찢는 아픔을 수반하는 행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차근차근 결심하여, 변하기 전의 자신을 냉철하게 들여다보아야 하고, 정확히 표현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그런 맑고 훌륭한 인간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각해야 할 것은 정확히 생각하는 존재이고 싶습니다. 그 폭이 흔들리거나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하더라도 말입니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북조선으로 ‘귀국’했다. 사실 박朴은 조선에 있는 두 개의 주권 국가의 어느 쪽에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
“지금도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한국은 죽기 전에 한번, 선조의 성묘를 해야 하지 않나라고는 생각하지만요.”
그러나 국적이 조선이기 때문에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계속했다.
“나는, 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어요. 보면 폭발해 버리지 않을까하는 예감이 강해요. (내 맘대로) 이동하거나 일을 선택하거나, 주장하거나 하겠죠. 인간에게 일상의 존재방식이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보장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내 내면에서는 그것이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 같아요. 문자로서 표현된 이념이 숭고한 만큼, 현실과의 격차는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죠.”

― 당신에게 조국이란?

“나는 첫째가 민족입니다. 남인가 북인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인가 재일거류민단인가가 아니고, 민족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싶다고 젊은이들에게 말해 왔어요. 그 민족이 보다 좋은 상태로 살아가기 위해 나라를 형성한다, 그 이념을 실제로 운영하고 전개하기 위해 정부가 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아직까지도 반공이 국시로, 이념으로서 표현되고 있는 부분은 문제가 있다. 실제로 군사 독재 정권이 계속되었지만, 청년들이 엄청난 피를 흘리고, 그 몇 만 명의 희생 위에, 민중의 힘이,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서 기본적으로 정착시켰어요. 결국 한국에 있는 우리 민족의 상당 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이란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바로 이 점에서, 민중의 생각을 실현하는 나라로 밀어붙여 갔던 것이지요. 이것은 굉장해요. 지금의 정부는 철저하게 비판하지만요.”

― 지금도 국적을 조선으로 유지하는 것은.

“조선 국적인가 한국 국적인가를 선택하라고 내몰리는 국면이 있으면, 그러면 당연히 생각해야겠죠. 예를 들면 한일 조약이 발효되어,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에 의해 영주권 문제가 있었는데, ‘한국 국적으로 바꾸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어서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습니다’라고 ― 삼분의 이 정도 거짓말이었지만요. 그 때, 조선 반도 전체 가운데 남에 국한된 범위로서의 한국을 선택할까요. 반쪽일 뿐인 북의 공화국 거기를 선택할까라고. 내가 살아온 조선이란 뭐냐? 고조선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통일체로서의 조선. 지역의 통일성, 언어의 통일성, 경제의 통일성, 문화의 통일성. 그 일체로서의 존재. 그러한 존재로서의 ‘조선’이야말로, 조선 반도 전체를, 역사적으로 표현하고, 고려 시대부터라고 하더라도 1,000년 가까이를 통일적인 지역으로서 존속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의 조선이 있고, 나는 조선인으로 태어나, 조선인으로 살아왔고, 조선인으로서의 나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죽고 싶다. 내면을 바꾸는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선생님 완고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같은 말을 하지만요. ‘나는 그것이 나의 가장 유연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 거지요.”


1)1902~1979년. 소설가, 시인, 평론가. 1931년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검거되어 1934년에 전향했다. 전후 다시 일본 공산당에 들어갔으며, 또 『신일본문학』의 창간에 참가했다. 히라노 겐平野謙(1907~1978년), 아라 마사히토荒正人(1913~1979년) 들과 함께 ‘정치와 문학 논쟁’을 일으키고, 전후 문학을 확립시켰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1964년에는 일본 공산당과 정치 이론으로 대립을 해 제명되었다. 가미야마 시게오神山茂夫(1905~1974년)와 함께 『일본 공산당 비판』을 냈다.

2)이 말은, 17세기 프랑스 시인 라퐁텐이 『이솝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은 우화로, 교활한 원숭이에게 부추김을 받은 고양이가 화덕 속에서 구워지고 있는 밤을 주웠지만, 밤은 원숭이가 먹어 버리고 고양이는 화상만 입었다는 이야기에서 생겨난 프랑스의 속담이다.


<세카이> 11월호 연재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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