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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서의 조선 국적 제3회
나라를 갖지 못한다는 것의 의미
김종익 | 2015-11-16 12:27:4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사상으로서의 조선 국적 제3회 - 나라를 갖지 못한다는 것의 의미
박종명朴鐘鳴 - 상

나카무라 이루손中村一成


(역자 주)
박종명
1928년 전라남도 광주 출생. 1952년, 간사이關西대학 문학부 졸업, 이후 교육 관련 단체 및 연구 단체에서 일했다. 그 후 간사이학원 대학 강사, 민족 도서관 금수錦繡 문고 고문, 오사카 시 외국 국적 주민 시책 지식인회의 위원 등을 지냈다. 전공은 조선 고대사, 한일 관계사.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살고 있는 자이니치 조선인의 역사, 사회, 문화에 대해, 한일 교류사를 개관하는 것에 더해, 그 사회 형성, 법적 지위, 사회적 문제들, 민족 교육 등의 주제를 오늘의 시점에서 검증하는 작업을 한다.
저서에는, 『나라奈良 속의 조선 - 발로 아는 조선과 일본 역사』(2000년), 『시가滋賀 속의 조선 - 발로 아는 조선과 일본 역사』(2003년), 『자이니치 조선인의 역사와 문화』(2006년) 등이 있다.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나서, 박종명은 찻집에 나타났다. 그는 조선 고대사, 한․일 관계사가 전문인 역사 연구자이다. 한국에서 온, 손자 또래의 젊은 손님들과의 이야기가 달아올라, 약속 시간을 깜빡했다고 한다. 학생들로부터 ‘신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초연한 정취의 소유자.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고 나자, 미소를 띠고 말문을 열었다.
“야, 한국의 젊은이는 상당히 직설적으로 말을 하시더라고. ‘선생님은 조선 국적입니까. 그러면 빨갱이겠네요?’라고 묻는 거예요.”
나도(필자 - 역자)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 뭐라고 답변하셨어요?
“‘내가 이해하는 범위에서 말하면 빨갱이죠. 그런데 빨갱이야말로 양심적입니다’라고(하하)“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의 청년 조직에서 운동을 시작해, 민족학교 교사를 거쳐, 조선총련과 그 산하 학술 단체에서 활동해 왔다. 경력으로 치면 틀림없이 조총련계 인사이지만, 박朴은 그런 호칭을 완곡하게 거부한다.
“예전에 한국에서 온 분으로부터 ‘선생은 조총련계시네요’라는 질문을 받고 말했어요. ‘총련’을 빼 주세요. 나는 조선계입니다, 라고. 아니 나는 지금도 기본적으로는 조총련을 지지해요. 그런 전제에서 나는 조선계입니다.“

― 그건 조선 국적을 견지하는 자세에도 상통하고 있습니까?
“나는 먼저 민족을 전제로 합니다.1) 그 위에서 민족이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나라가 있고, 그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정부가 있겠지요.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으로서, 조선 민족의 일원으로서, 내게 뭐가 가장 정상적인 삶의 방식인가를 생각해 온 셈입니다. 조선 국적은 그 결과이겠죠.”


마음이 죽어 있었던 소년 시절

박종명은, 1928년, 식민지 시기 조선의 전라남도에서 태어났다. 독립 운동으로 관헌官憲에게 감시를 받아서, 식민지 본국인 일본으로 도망친 아버지를 뒤따라, 어머니와 형 세 사람이 오사카로 찾아왔다. 그 때가 다섯 살 때였다.
‘식민지 출신자’라는 의미를 뼈저리게 알게 된 곳은, 그 세대의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학교’였다.
“그 당시는 차별 의식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 교사가 하층 계급 마을의 아이에게 ‘이봐 병신’2)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지. 더군다나 조선인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고. 조선인을 싫어하는 담임이 있었는데 말이야, 어느 때인가, ‘일본인의 성姓은 두 글자가 보통인데, 조선인은 한 글자로 안 좋아’3)라고 하면서, ‘이봐 박종朴鐘’이라고… ‘이봐 쵸센チョーセン’이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낫지.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셈이지요.. ‘너는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마’라고 매일 통지를 받는 듯했어요.”
이때의 울분이야말로, 박朴의 민족 교육에 대한 그지없는 사랑의 원점이리라.

300명이 넘는 초등학교에서, 성적은 항상 3등에서 5등 안에 들었다. 진학을 희망했다. 내신서와 면접으로 진학할 수 있었지만, 교사가 내신서 작성을 거절했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이사가 잦다는 둥 떠벌이며, ‘내신서를 써도 떨어진다’고.”
 박朴보다 성적 등급이 낮은 급우가 오히려 박朴보다 좋은 학교에 응시하여, 잇달아 합격했다.   
“아버지는 ‘조선인은 어지간한 일은 참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차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밀고의 시대’였어요. 만약 내가 밖에서 그런 말을 하면 큰일 납니다. 아버지의 배려였지요.”

어쩔 수 없이 다니기 시작한 중학교에는, 박朴과 같은 이유일까, 꽤 많은 동포가 있었다.
“모두의 체험을 들어보면, 내 실감이 확대되는 거예요.”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차별당하고, 지역의 소년단에서도 눈엣가시 취급을 당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인 것. 조선인인 한, 같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래서…좌절하고 말았던 거지요4)…”

학교를 빼먹고, 가까운 제방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고, 도시락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열흘이 지나자, 가까운 번화가를 헤매게 되었다. 비슷한 놈들이 눈에 띄어서, 함께 행동했다.
“모두 무일푼이었기 때문에, 돈이 있어 보이는 놈에게 트집을 잡아서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서 돈을 우려냈다. ‘강도짓’이라고 할 수 있는데5), 그런 짓만 했습니다.”
다른 패들과의 싸움 사태沙汰도 반복되었다. 
“우선 맨손이냐 무기냐를 결정하는 거지요. 무기는 대부분 곤봉이나 잭나이프였어요. 가장 무서운 것은, 집단의 대표가 일 대 일로 붙을 때입니다. 집단의 체면과 패거리의 눈이 있기 때문에 끝장을 보고 말아요.”

박朴도 한 번, 서로 칼부림을 했다. 상대와 마주 서자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몸이 저절로 떨렸어요. TV나 영화처럼 냉정한 것은 거짓말이지요.”
서로 견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어느 순간에 박朴이 쓰러졌다. 덤벼드는 상대에게 오른손을 내질렀지만, 손에 칼은 없었다.
“그때,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상대를 죽었을지도 몰라요.”
넓적다리에 예리한 아픔을 느꼈지만, 정신이 들어보니 자세를 바꾸어서 상대를 깔고 앉아서, 정신없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러자 상대가 ‘졌다’고 해서 끝났던 거지만, (아래를) 보니 바지가 피투성이였어요. 동료가 지혈약과 붕대, 팬티와 바지를 어딘가에서 조달해 왔어요. 한동안 부모에게 감추느라 고생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역시 싸움질이었다.
“티격태격하다보면 틀림없이 ‘센코鮮公6)’ ‘쵸센’ ‘일본에 있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잖아’라든가. 싸움도 일 대 삼이든가 심할 때는 한 명 대 열 명이든가. 하지만 당시는 전망도 없으니까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어요. 상대가 많을 때는, 중심인물을 확실하게 겨냥해, 그놈이 항복할 때까지 철저하게 혼내주었지요. 그런 짓을 한 달, 한 달 반 정도 계속하자, ‘저 녀석은 상대하지 마’ ‘골치 아프니까 엮이지 마’라고 되어서, 표면상으로는 누구도 공개적으로 맞서 오지 않게 되었어요.”
충고해 주는 동포도 있었지만, 바뀌지 않았다.
“싸움을 하게 되면 이유가 뭐든 모두 내가 나쁜 놈으로 되었어요. 전시 상황이니까 학교에 배치된 장교가 있었는데, 나만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두들겨 맞았어요. 그래서 더욱 더 번화가로 가서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는 거지요.”

중학교 2학년부터 거의 3년 동안, 싸움질로 지새웠다.
“심리적으로는 10년이나 20년에도 필적하는 세월이었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스스로도 한심했어요. 낮에는 강한 척해도 밤에 이불 속에 들어가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어요.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마음이 죽어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잠시 침묵한 후, 말꼬리를 길게 끄는 독특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이봐요, 나카무라 씨, 인간에게 뭐가 가장 두렵다고 생각해요. 나는요, 전망이 없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상태는, 지독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거칠고 피폐하게 만들고 말거든요.”
차별은 사람에게서 이 세상에 살아갈 전망, 그러니까 최저한의 사회에 대한 신뢰 감각마저 빼앗아 버린다.

행실은 부모가 알게 된다.
“아버지가 나를 호되게 나무라자, 어머니가 몹시 울었어요. 그것을 계기로 개과천선했으면 좋으련만,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까 암담함을 극복할 수 없었어요.”
눈물이 흘러내려서, 말을 잇지 못한다.
“…어쨌든 나는, 어머니를 울게 만든 일은 지금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린 마음에 아로새겨진 것은, 나라를 갖지 못한 민족에 관한 의미였다.
“그래서 나는 젊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어요. ‘설령 분단되어 있어도, 나라가 있는 것은 굉장하다. 하물며 통일되면….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고.”

그렇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던 아버지는 인망이 두터워서, 박朴의 집에는 다양한 청년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인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투성이 형님’이랍니다. 가끔 찾아오면, 이를 왕창 남겨 놓고 가는 거죠(하하).”
청년은 일본의 패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결집을 호소하고 있었다.


해방

천황이 패전을 선언하는 방송은 군수 공장에서 들었다. 불량소년이었던 박朴이라고 해서 ‘황국 신민의 의무’와 무관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학생 동원에 끌려 다니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들었지만 잘 몰랐어요. 주위도 살풍경한 분위기였고.”
아버지는 동네에 있는 작은 공장을 그만두고, 조직 활동에 몰두했다.
“아버지의 분주함은 이전과 비교가 안 되었어요. 집에 계셔도 꼭 뭔가를 쓰거나 읽고 계셨고, 일단락되면 바로 나가셨지요. 한밤중인 두 시 세 시도 아랑곳하지 않으셨어요. 집에서 15분가량 걸리는 곳에 사무실이 생겼는데 말이야, 어머니가 전하는 말 심부름을 가면7), 많은 동포 청년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어쨌든 독립하기 위한 활동을 하는 모양이라는 것은 알았어요. 나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마련이지요.”
조선인 학교도 새로 생기기 시작했다.
“소개疏開를 갔던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거나, 공습으로 여기저기 집이 비어 있었어요. 그 비어 있는 방 대여섯 개를 빌려서 교육을 시작했어요. 일본의 모든 사람이 먹고 입을 것이 없고, 할 일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사무실도 학교도 만든 거지요. 엄청났다고 생각해요.”

해방 후의 생계는 어머니와 형, 그리고 박朴이 떠맡았다.
“배급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어요. 쌀이며 잡곡을 사러 생산지로 갔어요.8) 미에三重라든가 시가滋賀의 오지 쪽, 먼 곳으로는 아키타秋田에도 갔어요. 그때는 형님이 표를 어디선가 입수해 와서, 아침 9시에 완행열차로 밤중에 목적지에 도착했어요.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농가를 돌아다니며 사서, 형님과 내가 각각 60킬로, 어깨가 빠질 것 같았는데도 짊어져요, 마치 귀성 혼잡 같은 초만원 열차에 짐과 자신을 쑤셔 넣어서, 가지고 돌아와서 사는 동네에서 파는 거지요.”
해방 직후, 생계를 지탱한 사람은, 손재주가 좋고 장사하는 재주가 있는 형이었다. 
“패전 후는 미군 부대에서 가축 사료인 옥수수가 흘러 나왔어요. 그대로는 먹을 수 없으니까 맷돌질을 해서9), 체로 걸러 설탕을 섞어요. 네모난 상자에 칸막이를 넣고, 전극電極. electrode을 달고, (칸에다) 옥수수 가루를 채우고 전기를 넣어요. 카스텔라가 완성됩니다. 그러면 암시장에 가지고 가서 팔아요. 이웃 사람들이 ‘형님은 요령이 좋네, 너와는 다르네’라고 했어요. 형님은 엿도 만들었어요. 직접 틀을 짜고, 향료를 친구의 집에서 마련해 와서10), 따듯하게 데워서 녹이고, 막대를 꽂아서 식히면 ‘뚝’11)하고 떨어져요. 형님은 전지電池와 변압기도 만들었어요. 비누도 만들었고. 그건 마구(본문은 ‘めちゃくちゃ12)’) 팔렸어요. 여러 가지를 했어요. 나는 단순한 조력꾼이었고(하하).”

순환선에서 몇 개 역의 일정한 범위에는, 양석일의 『밤을 걸고夜を賭けて』13)의 무대가 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군수 공장, 오사카 포병 병창이 있던 곳이다. 희소 금속의 보고였지만, 거기는 피했다고 한다.
“거기는 주변 사람이 세력권으로 하고 있었죠. 예를 갖추었는데 한패로 끼워 주지 않자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꾀를 부려서 승부를 내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동포 안에서도 살기 위한 투쟁은 격렬해졌던 것 같다.


전기轉機  
 

한편 박朴은 아직 ‘불량배 생활’과는 결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기는 1946년 벽두였다.
“실제로, ‘슬슬 발을 빼야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던 무렵이었어요.. 아버지를 존경해 사무실을 드나들고 있던 청년과 만났어요.. 그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쯤은 내로라하는 야쿠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거죠. 어느 날, 호출됐어요. 늘 집에 와서, 아버지를 깍듯이 대하던 사람인데, 왜 그런지 모르지만14) 이 사람은 아버지에게 경의를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15), 따라간 거지요.” 
청년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갔던 곳은 요도가와淀川16) 제방이다. 중학교를 안 가고 땡땡이를 치며 시간을 허비하고, ‘거리의 불량소년’으로의 출발을 시작했던 장소였다.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서 강 쪽으로 내려가자, 청년은 박朴을 한 번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 이놈 바보 아니냐.17) 너의 아버지는 죽기 살기로 운동을 하고 있는 데 너는 뭐냐! 바보 같은 놈. 정신 차려!”
통감하고 있었던 만큼, 박朴도 진정할 수 없게 되었다.
“뭔데 나에게 지도하는 거야!18) 너에게 잘난 체하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나는 나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의 자식이 이래서는 봐 줄 수 없어.”
“그래서 뭐야?”19)
바로 서로 치고받았다. 박朴은 몇 번이나 대들었지만, 그때마다 흠씬 두들겨 맞고 땅바닥에 처박혔다.
“당했어요. 나도 거의 매일같이 툭하면 싸움질이나 하며 보냈어요. 두세 살 정도 많다면 지지 말아야 하는 데, 그놈은 셌어요. 끝까지 맞설 작정이었지만, 다시 무참하게 얻어맞게 되었어요.20)”
일어설 기운도 잃어버리고, 피투성이 얼굴로 하늘을 향해 헐떡거리며 누워있자, 청년은 박朴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등을 대고 누운 자세 그대로 비탈을 질질 끌고 올라가서, 곁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이 바보, 똑똑히 들어.”
청년은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을 정성껏 설명하고 ‘그런데 너는’ ‘정신 차려라’라고. 그 청년은, 아버지에 대한 경의를 깊이 담아서 말해 주었기 때문에 가슴으로 스며들었어요…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은 가슴으로 스며들었어요…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자세한 설명을 들으니 가슴에 사무쳤어요…이것을 계기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21) 생각했어요…”
그리고 청년은 이어서 말했다.
“너는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모를 것이다. 일본의 왜곡된 교육으로 조선인은 열등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청년은 히데요시秀吉 군대와 싸웠던 이순신 등 민족사와 관련한 인물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그 업적을 이야기했다.
“잠수함과 금속 활자도 조선인이 처음 만들었어. 천문 관측을 처음 한 것도 조선인인 거야.”
가타카나의 ‘쵸센チョーセン’이 아닌 ’조선‘과의 만남이었다.
“스스로 공부했다면 알 수 있었던 거였지만, 사실은 그때, 청년이 말하고 있었던 조선사 이야기, 그거 반 이상은 사실이 아니었어요, 잘도 그런 거짓말만 가르쳤지(하하). 그래도 반은 진실이었어요.”
박朴은 ‘진실’이라고 말했다. 청년이 전하고 싶었던 것은, 책을 펴서 읽으면 얻어지는 ‘사실’보다 오히려, ‘진실’이었으리라. 인간은 평등하며, 누구나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는 ‘진실’을.
“집에 돌아갔더니 아버지께서도 ‘이게 기회니까’라고 간곡히 타이르셨어요. 그래서 결심했던 거지요. 그래 나는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다시 하자고. 그래, 초등학교 때 그 정도 했으니까, 지금도 또한 하면 가능하다고. 그래서 공부했어요. 눈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분발했어요.”

어느 날의 인터뷰. 잊을 수 없는 장소로 박朴이 안내해 준 곳이 이 제방이었다. 초여름의 햇볕이 빛나는 초록의 비탈을 바라보며, 박朴은 말했다.
“여기는 나에게 ‘장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을 느꼈던 곳이자, ‘다시 사는’ 계기가 된 곳입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은 거닐어요.”


결심

당시는 중학교 4년을 마치면, 구제舊制 고등학교에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눈에서 피가 나올 만큼 공부했으니까, 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삼고三高(나중에 교토대학 교양부) 시험을 쳤더니 기적적으로 붙었어요. 비상하는 기분이었어요. 아직 나도 쓸 만하다고.”
아버지께서 간곡히 타이르셨던 “노력하면 언젠가는 (길이) 열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결의는 다른 방향으로 향해 간다.
“그 무렵은 젊은 동포의 연계가 만들어졌고, 연구회를 열거나 했어요. 민주주의라든가, 전전戰前의 일본 정치에 관한 문제점이라든가, 식민지 정책에 관한 일이라든가, 펼치면 지푸라기가 끼어 있는 듯한 질 나쁜 종이로 인쇄된 책을 왕창 읽고 있었으니까 잡다한 지식은 잔뜩 쌓여 있었어요. 참가자도 다섯 명, 열 명으로 늘어갔어요. 청년들이 모여서 논의해, 좀 더 큰 모임에 나가거나, 몹시 서툰 노래를 부르거나 하자, 판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청년 모임을 본격적으로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22) 그 무렵에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어서 이렇게 대답했는데, 괜찮았나요?’라든가, ‘이런 일을 청년에게 말하려고 하는 데 괜찮을까요?’라든가 하는 의견을 구하거나, 공통의 목적의식을 갖게 되었어요. 물론 아버지는 엄격한 존재지요.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아서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계셨으니까요. 그런데 거의 학교에 갈 수 없게 되고 말았어요. 말하자면 결심의 종류가 달라져 있었던 거지요.”
구제 고등학교 폐지에 따른 신제新制 교토대학으로 편입도 가능했지만, (고등학교에서 취득해야 할) 학점 취득이 전혀 안 되어 있었다. 선배를 따라서 좌파 조선인 운동에 공감을 가지고 있던 스에카와 히로시末川博23)(당시 리쓰메이칸 대학 학장) 씨와 상담하고,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리쓰메이칸 대학 시험에 응시해, 입학했지만 ‘출석 체크만 하고 오사카로 돌아와서 활동하는’ 나날이었다. 결국 간사이關西 대학으로 편입했다.
“그때까지 멍청한 짓만 했던 것은 동포 사이에도 유명한 일입니다.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아버지에게 창피를 당하게 해서는 안 되었어요.”
그런 생각이 활동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조선총련 산하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의 아사히旭․미야코지마都島 지부(오사카 시 아사히 구와 미야코지마 구를 관할)의 구심점으로, 조직과 집회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가장 성황을 이룬 시기는 멤버가 180명도 더 되었다.
“3월 1일(독립기념일)과 8월 15일은 오기마치扇町공원의 pool에서 대회를 열었어요. 당시 2만 명은 모였어요. 지금 젊은이에게 말해도 ‘선생님,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24)라고 말하지만(하하). 지역의 어른이 고민을 지니고 있다고 들으면, 주위의 누군가를 파견해서 해결하게 해요. 결혼식이 있으면 식장으로 가서 분위기 조성 역할을 해요. 장례식이 있으면 접수든 뭐든 심부름도 해요. 태풍이 와서 동포 집의 벽이 무너졌으면 바로 가요. 매일 할 일은 있었고, 동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분이 상당히 좋았어요.”
박朴의 나날은, 당시 민족운동의 고양과 시기가 겹친다.

그러나 동서 대립의 첨예화와 함께 자이니치 조선인은 통치의 불안 요소로 간주되어, 거점인 조선인 학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조치는 1948년 1월, 문부성 학교 교육국장 명의로 각 도都․도道․부府․현縣25) 등에 보내진 통달 문서 「조선인 설립 학교의 취급에 관해」였다. 조선인 자녀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본 학교’(一條校26))에 취학시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기존의 학교도 사립학교로서 인가를 받을 것 등이 지시의 골자이다. 외국인등록령 시행 이후의 ‘외국인이라고 간주하면서 일본 국적은 가진다’라는 특이한 지위가, 민족 교육을 부정하는 ‘무기’가 되었다. 일본 국적 보유자에게 조선인 교육은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이다. ‘국적’은 권리를 보장하는 버팀목인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에 관한 자유를 제한하는 ‘우리’도 될 수 있다.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박朴은 말했다.
“지금도 생각나면 이 부근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요. 조선인의 자주 교육 따위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조선인 학교라는 것은 존속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한편에서 미군의 명령이 있었어요. 조선학교는 과격하고 점령 정책에 반하기 때문에 폐쇄하라고.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점령군은 자이니치 조선인에 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었어요. 조선인 학교가 왜 만들어졌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을까요? 문부성, 일본 정부입니다. 그러니까 일본 정부가 미군에게 말한 게 확실해요.
‘조선학교를 일본에 존속시키면 소련 스파이를 양성하게 되는 거다’라고.
실태는, 일본국의 의사를 능숙하게 점령군에게 전달하고, 점령군이 그것을 자신의 의사인 양 일본 정부에 지시하는 거죠. 그것은 자신의 진심이니까 일본 정부는 기뻐 신바람이 나서 실행하는 거죠. 그런데 뭔가 말하면 ‘점령군의 명령’으로서, 실행한 자신들에게 책임은 없다고 해요. 책임 전가인 거죠. 지금의 원자력발전과 상황이 닮았지요.“

3월의 야마구치山口, 오카야마岡山를 시작으로, 무장 경찰을 동원한 강제 폐쇄가 계속되고 있었다. 반대 운동도 격화되었다. 오사카에서는 4월 하순, 부청府廳에서 데모가 반복되었다. 박朴도 지부 청년들을 이끌고 데모에 참가했다.
“청년들과 우에마치수지上町筋27)를 남하하여, 부청을 목표로 삼은 것입니다. 남쪽에서 온 데모대와 만나서 도로는 온통 동포로 꽉 찼어요. 수로 근처까지 가득 찼어요. 누군가가 구호Sprechchor를 외치면, ‘와!’하고 환성을 질렀어요.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포효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 명은 됐어요.”
박朴은 교섭단에 섞여서 지사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위원장이었던 지부의 상근자로 문태수 씨라는 사람이 교섭단의 일원인데 말이야, 땅딸막한 제주도 출신 아저씨였어요. ‘너는 아버지를 닮지 않은 바보다’라고 자주 야단을 맞았지만, 이 사람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28) 따라갔어요.”
지사는 도망치고 없었다.
“부지사가 있었지만 ‘권한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어요. 결말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항의도 격렬해졌어요.”
그러자 헌병이 들어왔다.
“점령자다운 티를 내는 것이 빤히 보였어요. 일부러 천천히 권총을 뽑아서, 조선총련 교섭단에게 총구를 겨냥했어요. 그 다음에는 천정을 향해 발포했어요. 물론 공포였지만 소리가 굉장했어요. 조금은 기를 질리게 했어요, 그건. 그런데 어머니 분들은 대단했어요. 저고리를 걷어 올리고 배를 내보이고 말이야, ‘요기, 쏴!’라며 다가서는 거예요. 헌병도 ‘감당이 안 되는 놈’29)인 양 쓴웃음을 지으며 나갔어요.”
곧바로 경찰이 데모대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점령군은 일본 관헌에게, 배제를 명했던 것이다.


1) 본문의 ‘有りき’는, ‘어떤 사물을 토대로 생각하고 있다 모양’을 뜻한다. ‘전제로 하여’, ‘가정하여’, ‘염두에 두고’ ‘염두로’, ‘전제로’, ‘가정하에’ 등으로 사용된다. 

2) 본문은 ‘ヨッツ’. ヨッツ의 본질적 의미는, 인간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한쪽이 각각 다섯 개씩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조선 부락민들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네 개의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모욕하는 의미가 있으며, 둘째, 짐승을 죽이는 일을 직업으로 하기 때문에 네 발로 걷는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는 천시하는 의미가 있다.

3) 본문 ‘いかん’은 ‘いけません’、‘いけない’의 오사카 사투리이다. 

4) 본문 ‘ちゃった’는 ‘~ちゃう’의 과거형으로 ‘~してしまった’ 또는 ‘~された’의 사투리이다. 

5) 본문 ‘ゴロマキ’는 ‘범죄자 패거리犯罪者仲間’ 또는 ‘싸움을 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범죄자 패거리’로 옮겼다.
   한편, ‘っていうんですけど’의 ‘~って’는 ‘~とは’의 사투리로 ‘~とは’의 의미로 옮겼으며, ‘ん’는 ‘ぬ’의 의미로 옮겼다. 

6) ‘鮮’은 ‘朝鮮人’에 대한 비하의 말이며, ‘公’은 사람과 동물의 이름에 붙여서 얼마쯤 업신여기는 기분을 나타내는 말이다.

7) 본문 ‘言いつけられる’의 원형인 동사 ‘言いつける’에는 ‘전언을 부탁하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옮겼다.

8) 본문 ‘買いだし’는, ‘소비자가 식량 생산지까지 가서 직접 사는 것’을 뜻한다.

9) 본문 ‘挽いてもらい’의 ‘挽いて’의 원형은 ‘挽く’로, ‘ひき臼うす, 즉 맷돌로 곡식이나 고기 등을 잘게 부수다’라는 의미이다. 한편 ‘もらい’는 ‘해 주다’의 의미로 옮겼다.

10) 본문 ‘香料を友人のとこで’에서, ‘のとこで’는 ‘のところで’의 오사카 사투리로 ‘누구네 집’을 뜻한다. 

11) 사물이 흘러(넘쳐) 떨어지는 상태를 나타내는 의성어onomatopoeia 

12) ‘めちゃくちゃ’는 교토 사투리로, ‘むちゃくちゃ無茶苦茶’를 뜻한다.

13) 1958년, 오사카. 아직 전쟁의 잔재가 농후하게 남아 있는 거리의 전 병기공장 근처에, 조선인들이 모여 이룬 마을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의 주민인 요도기 할머니가, 공장이 있던 자리에서 고철을 파내서 큰돈을 얻는다. 그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모두가 한탕을 노리며 들떠 있을 때, 예전에 그 마을에 살았던 김의부金義夫가 돌아온다. 의부의 식구들도 고철을 훔치기 시작하고, 머지않아 그들은 ‘아파치’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고철은 국유 재산이기에, 경찰의 단속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의부는 마을 주민 양 할머니의 조카딸 하쓰코와 서로에게 매혹되게 되지만… 

14) 본문 ‘何やしらんが’에서 ‘や’는 ‘だか’의 오사카 사투리이며, ‘ん’은 그 용례 가운데 ‘ぬ’로 해석했다.

15) 본문 ‘持ってくれてるんだ’에서 ‘てる’는 ‘ている’의 오사카 사투리이며,  ‘ん’은 그 용례 가운데 ‘の’로 해석했다.

16) 오사카 평야를 남서로 흘러서 오사카만으로 흘러드는 강

17) 본문 ‘このバカが’의 ‘が’는 ‘ではないか’의 오사카 사투리이다.

18) 본문 ‘んや’는 ‘のだ’의 오사카 사투리이다.

19) 본문 ‘やから何やねん’에서, ‘やから’는 ‘だから’의 오사카 사투리이며, ‘やねん’은 ‘なの’의 오사카 사투리이다.

20) 본문 ‘コテンパンにのされちゃった’의 ‘コテンパン’은 ‘こてんぱん(여지없이, 무참하게)’, ‘のされ’의 원형은 ‘のす’, ‘ちゃった’는 された‘의 사투리이다.

21)본문 ‘あかん’은 ‘いけない’의 오사카 사투리이다.

22) 본문 ‘ええんとちゃうかな’는 ‘いいのではないかな’로 옮겼다. ‘ええ’는 ‘いい’의 오사카 사투리이며, ‘ん’는 ‘の’로 옮겼다. ‘とちゃう’는 ‘ではない’의 오사카 사투리이다.

23) 1892~1977년. 민법학자. 교토제국 대학 교수. 리츠메이칸 대학 학장 역임.

24) 본문 ‘あきません’은 ‘だめです’의 방언이다.

25) 都道府縣현은 일본 광역보통지방공공단체인 ‘都’、‘道’、‘府’、‘県’의 총칭이다. 현재는, 都가 도쿄도都 하나, 道가 홋카이도道 하나, 府가 교토부府와 오사카부府 둘, 縣이 43개로, 1都1道2府43県이며 총수는 47都道府県이다.

26) 학교교육법 제1조에 정해진 학교의 총칭.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등교육학교, 대학, 고등전문학교, 맹아학교, 농아학교, 양호학교.

27) 오사카 시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달리는 도로의 통칭.

28) 본문 ‘金魚の糞’의 영어 표현은 ‘shadow’이다.

29) 본문 ‘やっちゃ’는 ‘やつだ’의 오사카 사투리이다.


<세카이> 9월호 연재물 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63 









      



19대 대통령 선거기간(~5월 8일까지)동안 공직선거법에 의거 댓글 쓰기를 보류하였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다시 오픈할 예정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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