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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1회
새로운 자료와 함께 다시 더듬어 보다
김종익 | 2019-08-23 21:27:1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구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 사회의 매매춘을 배경으로 삼아 탄생했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글은 위안부 제도와 일본 사회의 매매춘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전에 전전戰前과 전중戰中의 일본 사회의 매매춘과 단속의 실상을 자료에 의해 드러내고 있다. - 역자 주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1회
- 새로운 자료와 함께 다시 더듬어 보다 -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글은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의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옛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1990년대 이후의 논의는, 피해자들의 소송을 계기로, 199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연구자와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를 바탕으로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20년 이상 세월이 흘렀다. 일본 정부는 1993년의 「고노 담화」 발표를 계기로 조직을 동원한 실태 해명은 그만두었지만, 그 후에도 연구자들에 의한 자료 발굴은 계속하고 있다. 도서관이나 공문서보관소에서는 매년 새로운 자료가 공개되기도 하고, 역사적 자료를 찾거나 읽는 것은 인터넷 보급으로 두드러지게 쉬워졌다.

나는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의 일을 가능한 한 폭넓게 이해하고 싶어서, 2016년부터 2018년에 걸쳐서, 그때까지 정독하지 않았던 기존의 자료들을 꼼꼼히 읽으면서, 묻혀 있는 자료의 발굴을 시도했다. 그 결과를 알린다.

첫 회는 위안부와 위안소를 둘러싼 군과 정부 내부에서 당시 어떤 말들이 오고가고 있었는지를 살펴본다.

자료 인용과 관련하여, 한자를 상용한자 등의 자체로, 가타카나를 히라가나로 고치는 등 읽기 쉽게 수정했다. 원문 가운데 차별적인 표현이 있지만, 그대로 두었다. ■는 판독할 수 없는 문자를 나타낸다. 경칭은 모두 생략했다. ‘위안부’라는 말은 전시 중에도 공문서에서 사용되었지만, 반드시 공식 용어는 아니었다. 낫표([ ])를 붙이는 것이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 언어로 정착해 있고,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서도, 원칙적으로 낫표를 붙이지 않았다. 

□ 공창과 유사한 제도를 상하이上海에

육군이 만주 사변 시기에 처음 위안소를 만든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9월 18일, 중국 동북 지방에서 발생한 중일 군사 충돌이 화중華中(창장長江 중류, 즉 후베이湖北·후난湖南 일대)으로 비화하여, 1932년 1월에 제1차 상하이사변이 시작되었다. 육군은 여기에 해군을 모방해 위안소를 만들었다.주1) 신구 자료를 대조함으로써, 그 상세한 경위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제1차 상하이사변은 일본의 해군 해병대와 중국군과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일본 정부는 2월초에 육군 부대 파견을 결정하고, 육군은 제9사단, 혼성 24여단에 이어, 전체를 총괄하는 상하이 파견군을 편성하고, 제11, 14사단 투입을 결정했다.

육군은 만주 사변의 초기부터 과거 전쟁 경험을 근거로 병사들의 성욕 처리가 가까운 시일에 문제가 되어, 현지에서 매춘에 치우쳐 성병에 감염되는 자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주2) 

육군성省 의무국장 고다 히토시合田平는 2월 4일, 가나자와金沢에서 출발 준비 중인 9사단에 콜레라와 이질 등과 함께 성병 예방에 주의하도록 지시했다.주3)  9사단 제4 야전 병원은 14~15일 상하이 상륙 후, 보병 제7, 19, 35, 36 각 연대에 성병 예방약 二銀膏를 452개씩 배포했다.주4) 용의주도하다.

3월 3일 정전 성명을 발표하자마자, 파견 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군기·풍기를 엄숙하게 하라고 훈시했다. 상하이에는 미국과 유럽 열강의 조계가 있어 국제 사회가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국제연맹이 파견한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국제 연맹이 만주 사변과 만주국을 조사하라고 조직한 국제 연맹 중일 분쟁 조사 위원회의 통칭이다. 영국의 제2대 리턴 백작 빅터 불워리턴이 단장을 맡았다)의 상하이 방문도 임박해 있었다. 불상사를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두려워하고 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만주사변육군위생사滿洲事變陸軍衛生史 제6권』에 따르면, 3월 14일, ‘병원 탈출 환자’에 의한 중국인 소녀 강간 사건이 발생했다. 병원을 나온 환자가 중국인 소녀를 강간했다는 것이다. 사건의 상세한 내용은 불명이지만, 이 자료의 성격과 문맥에서, 사건을 일으킨 환자는, 일본군이 상하이에 개설한 병원을 나온 일본군 관계자라고 생각된다. 이미 같은 형태의 문제가 빈발할 조짐이 있었다고도 기재되어 있다.주5) 상하이 파견군 고급 참모 오카베 나오자부로岡部直三郞가 이날의 일기에 “이 무렵, 병사들이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방황하고, 저속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았다”고 쓴 것과 부합한다.주6)

이날 리튼 조사단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파견군 상층부에게 최악의 때맞춤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파견군 병사 사이에 성병에 감염된 자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군은 감염자의 대다수가 상하이에 상륙한 후 감염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주7)

군은 과감한 대책을 냈다. 오카베는,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드는 것이 가하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의 성 문제 해결책에 관해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그 실현에 착수했다”고 적었다. 참모 나가미 도시노리永見俊德에게 담당하게 했다.주8) “시설을 만든다”라는 표현에는, 건물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대책을 강구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9사단도 움직였다. 사단 군의실軍醫室의 진중 일기 가운데 3월 23일 일기에 이런 기술이 있다.

경비 상태에 들어가서 한층 병사 가운데 성적 패덕 행위 때문에 처벌되는 자가 왕왕 있으며(생략) 심기 전환 방안으로 공창과 비슷한 시설의 필요를 제창하는 자도 있다. 요즈음 점차 구체화됨으로써, 주로 이사카猪坂 군의로 하여금 이나가키稻垣 헌병 분대장과 절충하게 하여, 사단 차원에서 착착 그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주9)

‘패덕’은 도덕에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공창’은 메이지시대부터 일본 정부가 인정하고 있던 매춘 제도와 거기서 매춘을 하는 여성들인 ‘창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경찰에 신고를 한 창녀가, 경찰의 허가를 받은 업자의 시설에서 손님의 섹스 상대가 되고, 매상으로 업자에게 빌린 돈을 반환해 가는 제도였다.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인도에 반한다는 등으로 비판을 받아,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서 폐지를 요구하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었다. 9사단은 그런 제도를 모방해 군인이 매춘을 할 수 있는 장을 설치하려고 했다. 1등 군의軍醫 이사카 다케시猪坂威가 담당했다. 9사단의 ‘패덕 행위’가, 『만주사변육군위생사』에 기록된 중국인 소녀 강간 사건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공창 제도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9사단 군의실이 “착착 그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고 기록한 다음 날, 이사카는 파견군 참모부로부터 뜻밖의 일을 통고받았다.

“이것에 관한 모든 시설은 군에서 통제하고 계획하게 되어 있다.”주10)   

파견군 참모들이 9사단의 아이디어를 가로챈 것인지, 애당초 비슷한 것을 검토하고 있어, 전체를 통솔하는 입장에서 떠맡은 것인지 명백하지 않지만, 이후는 파견군이 주도한 듯하다.

파견군이 준비한 대책은 4월초 ‘군 오락장’으로 결론이 났다. 이것이 육군이 설치한 최초의 위안소라는 견해가 정착해 있다. 군의 비용으로 기존의 건물을 개수했다. 오락장은 4곳이며, 총 160명의 여성들은 ‘접객부接客婦’라고 불렸다. 바로 위안부이다. 허베이河北의 칭다오靑島, 일본의 나가사키, 조선의 평양 등에서 온 내지인, 조선인, 중국인 여성들이고, 이밖에 채용할 때 성병 검사에서 불합격한 여성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민간업자가 헌병 분대에 영업 허가를 신청하고, 고용한 접객부의 명부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용 가능한 대상은 군인·군무원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내지인 접객부와의 화대는 1시간에 1엔 50전, 조선인·중국인 접객부의 화대는 1엔이었다. 접객부가 성병에 걸렸는지 아닌지 군의가 매주 1회 검사했다.주11)

파견군은 정기적으로 「전시 순보」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3월 하순의 순보에, 병사들의 성병에 대해, “군의 예방책을 정하고, 적극적 예방 시설은■■■■부터 실시 예정”이라고 실려 있다. 순보 내용의 지도에는, 가장 많은 80명의 접객부가 있던 오락장 위치에 ‘O’ 표시가 되어 있고, 비고란에 “O은 오락장”이라는 설명이 있다.주12) 

오락장을 기획, 입안하는 일을 파견군에 넘겨준 9사단의 군의 이사카는, 개업 직전에 접객부 신체검사를 담당했다. 여성들이 성병에 감염되어 있는지 여부를 조사했다고 여겨진다.주13)

파견군 참모 부장副長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는 이때의 경위에 대해, “나가사키현 지사에 요청해 위안부들을 불러왔다”고 기록에 남겼다. 이때 나가사키현 지사는 스즈키 신타로鈴信太郞였다. 병사들의 섹스 상대를 하는 여성들을 스즈키에게 파견을 부탁해 받았다는 것이다. 나가사키에서 온 내지 여성들에 관한 일을 가리킨다고 판단된다. 오락장을 설치한 결과에 대해, 오카무라는 “그 후 강간죄가 완전히 멈추어 기쁘다”고 회고하며,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안案의 창설자”라고도 쓰고 있다. 군인으로 출세해 가는 오카무라는, 그 후에도 주로 중국 전선에서 장병들의 성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육군성은 나중에 제1차 상하이사변에서의 성병 문제에 대해, 상하이 파견 중 신규 입원 환자 257명 가운데, 4월 중순 이후는 53명에 그쳤다고 하며, 오락장을 중심으로 한 대책의 효과가 있었다고 총괄했다. 5월 5일, 제1차 상하이사변 정전이 성립하고, 일본군은 속속 상하이를 떠났다. 오락장 업자와 여성들은 28일까지 퇴거했다.주14)

위안부 문제에 관한 선구적 연구자인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1946년생. 역사학자. 일본 근현대사 전공.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는 위안소를 경영 형태에 따라 세 개 부류로 분류한다.

① 군 직영의 군인·군무원 전용
② 민간 경영으로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무원 전용
③ 군 지정으로 일반인도 이용

요시미는 이 세 부류는 큰 틀에서 분류이며,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고 한다.주15) 상하이 오락장은 ②에 해당한다. 민간 경영이라고는 하지만, 군 주도의 내력을 보면, 매우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군 내부의 찬반

군이 스스로 매춘 시설을 설치한다는 전대미문의 행위는 내부에서 파문을 몰고 왔다.
경리 담당 장교들로 이루어진 육군 주계단主計團이 발행한 잡지 『육군주계단기사陸軍主計團記事』1932년 6월호에, ‘상하이파견비행제1중대上海派遣飛行第一中隊’라고 밝힌 투고자의 「숙영급양상황宿營給養狀況」이라고 제목을 붙인 글이 게재되었다.주16) 상하이 파견군 직원 현황표에 따르면, 이 명칭의 부대는 실재했다. 글 가운데 “우리 청년”이라고 술회하고 있는 것에서, 이 중대에 속한 젊은 장교가 썼다고 여겨진다. 숙영 시설과 식사 상황을 설명하고, 이렇게 매듭짓고 있다.

외출 시의 오락 기관으로 특기해야 할 것이 있다. 오락장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활동사진이나 야외 운동 등 보건적, 수양적 오락 시설을 밀쳐 두고, 성 문제 해결만 서두르는 이 시설에 대해, 약간 기이한 느낌을 가졌다.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파견군이 오락장 설치를 서두르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라는 말에서, 생각을 공유하는 동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6월호는 1932년 5월 25일, 그러니까 매춘업자와 여성들이 아직 오락장에 머무는 동안에 인쇄되었다.

겉으로 들어난 글의 뜻만 보면, 건전한 오락 시설을 충실하게 하기 전에 매춘 시설을 군이 만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라는 단순히 순서를 문제 삼고 있을 뿐이어서 다루지 못할 것도 없다. “군 오락장은 생기고/ 일본과 중국의 미인이 대기하는 곳/ 홍등가의 봄날 저녁/ 원정의 무정함을 구원받으리라”라는 구절을 더하고 있는 바에서 보면, 접객부의 존재에서 구원을 추구하는 전우들의 심정에 이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군대라는 엄연한 계급 사회 안에서 상층부의 행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의 중대함은 예상할 수 있다. 행간에 배어 있는 강한 생각을 간파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 대해 같은 『육군주계단기사』1932년 9월호에, 오락장을 옹호하는 투고가 실렸다. ‘GM주계정主計正’이라고 밝힌 투고자가, 「상하이 부근에서의 시국時局 건축에 관해」라고 제목을 단 글 안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성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국가 시설의 군 오락장을 시설했다. (생략) 평시에서 보면 논의로 삼을 사람도 있겠지만, 예비역 병력이 많은 이번 같은 출병에서, 제반 삼가야 할 범죄와 성병 전염을 막는 것도, 실제로 매우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들은 장래에도 고려해야 할 진지한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주17) 

평시의 감각으로 보면, 군이 매춘 시설을 만드는 따위는 당치도 않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번 출병은, 일단 병역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가 다시 군대에 불려온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강간이나 매춘 여성으로부터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해 긴급하게 필요했던 것이며, 장래의 전쟁을 위해 고려해 두어야 할 절실한 문제라는 주장이다.

GM주계정의 투고는, 상하이파견비행제1중대의 투고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군에 의한 오락장 설치가 물의를 자아내는 행위였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비역 병력이 많아 강간과 성병 감염을 막을 필요가 있다는 사정이, 어떤 경위, 이유로 오락장 설치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9사단 사령부 참모인 우에무라 도시미치上村利道는 상하이에서 나날의 사건을 개인의 수첩에 기록했다. 「5월 어떤 날」의 항에, “장교 오락소가 있으면, 하사 이하의 오락소도 만든다■ 이것은 필요한 것이지-”라는 내용이 있다. 문맥으로, 4월 이후의 상황을 정리해 기술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장교 오락소’란 무엇인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하사 이하의 오락소’는 파견군이 만든 네 곳의 오락장이라고 여겨진다. 그 가운데 한 곳에 여성이 60명이 있고, 4월의 20일간 유흥 인원이 연인원으로 5,981명, 매상고 6,923엔, “참 멋진 것이 아닌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더욱이 여성 1인당 약 100명, 하루 5명의 병사를 상대했다는 계산이 된다고 하여, “상당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숫자의 통계적 관찰로 보면, 역시 필요한 시설로 봐야 하겠지-”라고 잇대고 있다.주18)

매매춘과 여성 인권의 문제 관해서는 다시 언급한다. 여기서는 우에무라의 말에 주목한다.

사단 사령부 참모인 우에무라는 파견군 전체 오락장 설치를 주도할 입장은 아니지만, 「5월 어떤 날」의 시점에서 오락장 설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어조로 쓰고 있다. 우에무라는 이 짧은 기술 안에 ‘필요’라는 말을 반복해 사용하고 있다. 우에무라의 흉중, 또는 사단과 파견군의 상층부 사이에, 당초는 갈등과 논의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필요’라는 결론에 이른 가능성이 있다. 또는 외부 사람들이 느낄지도 모르는 의문이나 비판에 대한 반론을, 자기 나름대로 준비해 두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외무성 내의 반발

일본군은 1937년 7월에 시작된 중일 전쟁 이후, 위안소를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위안소 제도 만들기와 여성 송출에 즈음하여, 외무성과 내무성이 가담한 사실이 알려져 있다.주19) 군국주의가 일본을 뒤덮었던 이 시대에, 군인의 섹스 상대 여성을 전지로 보내는 것에 이론을 제창한 외교관이 있었던 것을 드러내는 공문서가 발견되었다.

전 아카하타赤旗신문 기자인 이마다 마사토今田眞人는 외교사료관 소장 자료 속에서, 1938년에 외무성과 재중국 공관이 주고받은 문서를 발견하고, 『극비 공문서와 위안부 강제 연행』(2018년)에 소개했다. 1938년 5월,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베이징, 난징 등 10곳의 공관에 대해, 내지에서 위안부 송출 규칙을 정한 1938년 2월 23일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에 수반하여 각지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명하여, 총영사 등으로부터 도착한 회답이다. 중일 전쟁 초기의 위안소 실정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기재 내용에서, 이 문제를 담당하는 외무성 조약국 제3과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로 보인다.주20) 총영사 등의 보고에 관해서는 다시 다룬다. 여기서는 일련의 문서가 수록된 편철 장부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문서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 문서는 ‘외무성’이라고 인쇄된 용지 두 장에 손으로 직접 쓴 ‘의견’이라는 표제하에, ‘다바타田畑’라는 인장이 날인되어 있다. 6월 1일까지 장자커우張家口 등 세 곳의 영사관이 낸 회답을 읽고 쓴 것이다. 다바타는 이렇게 호소한다.

출정 병사의 위안을 위해, 부녀자의 필요는 일단 지당하고■せらるるも, 이들 시설은 일시적 주둔군인 병력의 수에 응해 증가시키는 것은, 꼭 타당한 조치라고 사료되지 않는다. 당장 군대가 철수한 후에는 영업 곤란에 빠지고, 나아가 일반■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取となり (생략) 많은 경우에는, 선량한 우리나라 사람의 체면을 더럽히는 데 이르는 것을■し難し. 종래의 이런 부류의 부인의 정리에 관한 ■■ 관헌의 노력 및 그 실적을 감안하더라도, 엄중한 제한을 해야 할 것이다.

다바타가 훑어본 세 영사관의 회답은, 단순히 위안부에 대한 수요 전망이나, 내무성의 규칙 운용 상황을 전하고 있을 뿐으로, 병사들의 섹스 상대가 되고 있는 여성을 전지로 보내는 것 자체에 대한 시비를 물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바타는, 위반부의 전면적인 금지까지는 주장하지 않고, “엄중한 제한”이라는 표현에 그치고 있지만, 힘써 줄여야 한다는 의도가 배어 있다.

다바타가 든 주된 이유는, 여성들은 군대 철수 후에 일반 중국인을 상대하게 되어, 일본인의 체면을 더럽힐 것이 예상되는 점, 해외에서 매춘을 하는 여성을 줄이려고 해 온 일본 정부의 종래 방침에 반하는 점, 이 두 가지이다.

메이지 이래, 가난한 농촌에서 많은 여성들이 동남아시아와 중국 동북부 등으로 팔려가서 매춘을 하게 되며, “가라유키상”(19세기 후반 해외로 돈을 벌러 나갔던 일본 여성. 대개는 매춘부로 일함) “해외 매춘부” 등으로 불렸다. 외무성의 대응은 충분했다 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국가의 체면상, 매춘 여성들의 도항을 단속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위안부의 중국 도항에 손을 돕는 것은, 이러한 방침과 모순되는 일이다. 다바타가 이의를 주창한 것은 외교관으로 당연했다고 할 수 있다. 군인 매춘 준비에 한몫 거드는 것에 외무성 내에서 불만이 맺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바타의 성명과 소속은 현 시점에서 좁혀지지 않는다. 일련의 문서 속의 다른 문서에는, 난외에 ‘아메리카국 제3과장’이라고 도장이 날인되고, 바로 옆에 ‘隈種’이라는 도장이 있고, 그 아래 다바타의 인장이 보인다. 아메리카국 제3과는 일본인의 해외 도항 전반을 담당하고, 당시의 과장은 구마베 다네타쓰隈部種樹였다. 위안부 송출을 담당하는 조약국 제3과가, 관련 업무를 맡아 아메리카국 제3과에 참고로 공람에 붙였다고 보인다. 구마베에게는 다바타라는 성을 가진 부하가 있었는데, 이 인물이 의견을 쓴 것인지는 판별할 수 없다.

다바타의 의견이 적힌 문서 첫머리 여백에, 본문과 다른 필체로 “의견을 구한 것은 아니다”라고 갈겨쓴 듯한 글자가 있다. 바로 옆에 ‘니시무라’의 도장. 조약국 제3과장 니시무라 구마오西村熊雄의 필적으로 보인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본건 미해결이므로 관계 서류 한 벌 보존”이라고 반듯한 글자로 부하에게 지시하는 메모와 역시 니시무라 도장이 있다. 예기하지 않은 개입이 있어, 외무성 안에서 뭔가 조정을 강요당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외무성 안에서 어떤 논의가 있고, 상층부가 어떻게 판단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외무성의 위안부 송출 협력은 계속되었다. 재중국 공관에서 보내온 회답을 정리하여, 1938년 6월부터 7월 중순에 걸쳐서, 내무성에 전달하고 있다. 연말에 외무성이 정리한 자료에는, “중국 및 만주국을 제외하고는, 남양 방면에 여전히 소수의 거류민이 있을 뿐으로, 그 밖의 해외 각지에서는 우리나라 사람 매춘부가 멸절에 가까워졌다”고 기술하며, 전쟁 중의 중국과,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이 주둔하는 중국 동북부에 관해서는, 매춘하는 여성의 도항을 없애 간다는 외무성 방침이 미치지 않는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주21)

니시무라는 전후, 조약국장을 역임하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미일 안보조약 체결에 종사했다. 전쟁 중에 위안부 송출에 관여한 과거를 가진 간부 외교관이, 전후 일본 외교의 틀 짜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군의 반성

여기까지 주로 육군 위안소를 둘러싼 육군과 외무성 자료를 보아 왔다. 육군이 모범으로 삼은 해군은 어떨까.

일본이 미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 1945년 9월 2일, 해군성은 내부에 대동아전쟁 전훈戰訓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전쟁의 교훈 검토를 시작하여, 10월 9일에 보고서를 마무리했다.주22) 그 안에 위안소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 국민이 생활의 핍박을 감내하고, 전쟁 하나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때, 내부 일부에서 공공연하게 특수 위안 시설을 설치하고, 활발하게 여기에 출입하기 때문에, 일반 주민으로 하여금 반감을 품게 하여, 군민 이간의 원인을 만들었던 사례가 다수 있으며, 이런 해군의 폐풍은 이것을 일소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위안소는 국내에도 있었는데, 일반 시민이 군인 위안소 이용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보고서가 쓰인 때는, 국가를 파멸로 이끈 군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냉엄함을 더해가고 있던 시기인 만큼, 솔직한 반성의 말이 잇대어지고 있다. 장병의 섹스 상대를 하게 만든 여성들의 인권, 식민지와 점령지 여성들의 인권을 짓밟았다는, 오늘로 이어지는 관점은 보이지 않고, 단순히 일본 시민의 반감을 사는 듯한 처리 방식이 좋지 않았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렇지만, 공공연하게 위안소에 출입하며 매춘을 하는 것을 ‘폐풍’으로 단정하고, 폐지를 호소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같은 보고서 다른 곳에서는, 위안부의 전지 파견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군의 장교의 부담이 증가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군의들의 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 다수의 위안부가 송출되어, 성병 검사나 치료에 몰렸다고 하는 의미일 것이다. 위안부에 얽힌 관계자의 감정 문제와 함선의 행동이 외부에 누설될 위험성도 언급하며, “전훈戰訓으로 별도 연구 가치가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는 반성이 아니라, 군인과 섹스의 문제는 미래에도 성가신 문제로 계속될 것이라는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제1차 상하이사변 때 육군의 GM주계정과 우에무라의 주장과 통한다.  그러나 전훈을 살리기는커녕, 일본군 자체가 폐지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약 50일 후의 일이었다.

지금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단순한 외교 과제의 하나인 것처럼 이야기되게 되었지만, 역사에 겸허하게 마주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계속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다음 회 이후, 신구 자료를 단서로,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의 실정을 좀 더 심층적으로 더듬어 가고자 한다.

주1)  『岡村寧次大將資料 상권』, 302쪽
주2)  『滿洲事變陸軍衛生史 제6권』, 821쪽
주3) 『十五年戰爭極秘資料集 補卷5 第一次上海事變における第九師團軍醫部 「陣中日誌」』, 25~29쪽
주4)  『滿洲事變陸軍衛生史 제4권』, 660쪽
주5)  『滿洲事變陸軍衛生史 제6권』, 829쪽
주6)  『岡部直三郞大將の日記』, 23쪽
주7)  『滿洲事變陸軍衛生史 제6권』, 829쪽
주8)  『岡部直三郞大將の日記』, 23쪽
주9) 
『陣中日誌』, 293~294쪽
주10) 『陣中日誌』, 300쪽
주11) 『滿洲事變陸軍衛生史 제6권』, 829~834쪽
주12) 『上海派遣軍戰時旬報 (其一) 1932년 3월』
주13) 『陣中日誌』, 338~339쪽
주14) 『滿洲事變陸軍衛生史 제6권』, 833~834쪽
주15) 『종군 위안부』, 吉見義明, 74쪽
주16) 『陸軍主計團記事』 1932년 6월호, 72쪽
주17) 『陸軍主計團記事』 1932년 9월호, 189쪽
주18) 『上海派遣 出動雜感』, 上村中佐
주19)
『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 ①』「時局利用婦女誘拐被害事件ニ関スル件」, 27쪽, 「支那渡航婦女ノ取扱ニ関スル件」, 69쪽
주20) 『社會問題諮問委員會關係一件 第二卷』
주21)
「執務報告 昭和十三年度亞米利加局 第三課」
주22) 『大東亞戰爭 戰訓調査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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