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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송신도宋神道의 인생담 ③
전장과 위안소라는 극한을 살아낸 재일 여성
김종익 | 2018-03-09 14:11:5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이 글은 『세카이』 2018년 3월호에 게재된 「宋神道の人生譚 - 戰場と‘慰安所’の極限を生き拔いた在日女性」을 옮긴 것이다.
본문의, ( )는 필자, [ ]는 역자의 주석이다. 중국의 지명은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 옮겼다. 본문에서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홑낫표(「 」)는, 작은따옴표(‘ ’)와 로 옮겼다. 또 대화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홑낫표(「 」)는, 큰따옴표(“ ”)로 옮겼다.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졸업. 30여 년간 ‘위안부’ 문제에 전념하며,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라 부린 전장의 소녀』 『할머니의 노래唄 - 재일 여성의 전중·전후』 등의 저서가 있다.

패전 직후, 도망병과 일본으로

전쟁은 점점 격화되고, 공습이 심해졌다. 송 씨는 방공호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이 운집한 곳은 위험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거나 했다.
셴닝으로 옮기고 1년가량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병사들이 오지 않았다. 위안소 마담이 이웃에 상황을 파악하러 갔다. 마담은 일본 패전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바로, 웨저우에 있을 때, 자주 위안소에 왔던 미네峯부대의 이다井田라는 군인이 송 씨를 찾아왔다. 결혼하자는 거였다. 송 씨는 당황했다. 이다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결혼’이라는 말에 송 씨는 흔들렸다. 중국인 상대의 유곽에서 일하기 시작한 ‘위안부’를 봤다. 자신도 유곽으로 가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일마저도 생각했다. 송 씨는 이다의 구혼에 응했다.

마담은 일본으로 끌려가서 버림을 받으면 큰일이니까, 꼭 결혼신고서를 내야 한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둘이서 노숙을 하면서 한커우로 갔다. 이다는 일자무식에 가까운 상태로, 송 씨의 돈에 의지했다. 한커우의 구일본 조계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귀환자가 대규모로 모여 있었다.

송 씨는 중국인 집을 돌아다니며, 세탁물의 주문을 받아서 돈을 벌었다. 이다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송 씨에 뒤에 숨어서 못된 짓을 했다. 두세 명의 동료와 짜고 유복한 중국인과 일본인 부부를 살해하고, 훔친 돈을 똑 같이 나누었다. 이다는 현지 만기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 자신이 위조한 증명서라고 안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다는 군보다 민간인 쪽이 빨리 귀국할 수 있다고 예상해, 군을 빠져나와 송 씨와 부부로 위장했던 것이다.

출산 후, 전염병에 걸려서 빈사 상태인 조선 여성이 있었다. 귀국단 반장이 생후 열흘이 된 갓난아기의 양육자를 모집했을 때, 이다는 송 씨에게 인수하도록 시켰다. 여성이 가지고 있던 버들고리에 가득한 저비권儲備券[중일전쟁 때, 대일 협력 중국 정권이 발행한 불환지폐不換紙幣의 일종]이 목표였다. 위안소에 있던 여성이라고 송 씨는 감지했다. 기모노도 많았기 때문에.
“내 애도 낳아서 다른 사람에게 준 아이가 다른 집에서 자라고 있는 데, 받아들이라는 말이냐.”
이다는 제멋대로 인수하고, 조선 여성은 숨을 거두었다. 귀국선에 올랐을 때, 아이는 두세 달이 되었을까. 우유 같은 것도 없고, 있다고 해도 돈은 없고, 먹여야 할 음식물이 궁해서 이다는 송 씨가 잠든 사이에 아이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나, 그게 가장 큰 죄야. 내가 받는 게 아니었던 거야.”
귀국선 안에서, 전시 중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인을 학대했던 옛 군인이 그 보복을 당하고 있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일본에서의 삶

이다는 하카타博多에 도착하자마자, 한커우 사무소에서 혼인신고서 대신 제출했던 「탄원(?)증명서」를 찢어 버렸다. 사이타마埼玉현의 본가에 동행했지만, 이다의 결혼 의사는 사리지고 없었다. 이다는 송 씨를 오사카의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인 쓰루하시鶴橋로 데리고 가서,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부라도 되라”며 버렸다.

모모다니桃谷 장화 공장에서 일하며 차비를 마련한 송 씨는 이다의 본가로 갔다. 이다는 볏짚을 쌓은 그늘에서 송 씨의 몸을 탐했지만, 모친과 형의 충고도 듣지 않고, 결혼에는 응하지 않았다. 송 씨는 쌀 한 되와 원피스 한 벌용 옷감을 모친에게서 받고, 이다의 본가를 나왔다.

우에노上野역에서 화장실을 찾는 데, 친절하게 알려주고 짐도 맡아준 남자가 있었다.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보니, 남자도 짐도 사라지고 없었다. 짐 안에는 귀환증명도 들어 있었다. 송 씨는 망연히 도호쿠 본선에 올랐다. 열차에서 뛰어내린 것은 이시코시石越 부근이었다. 생명은 구했지만, 유산했다. 이다의 아이였다.

근처의 농가 사람이 구조해 헛간에서 며칠인가 쉬게 해 주었다. 그때 암거래 쌀을 사러 온 남성이 오나가와女川에서 노무자 합숙소 감독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식모라도 하면 된다고 데리고 갔다.

송 씨는, 이후 열일곱 연상의 그 남성 하재은河再銀 씨와 살게 된다.
하 씨는 송 씨가 입고 있던 세터를 이로리圍爐裏[농가 등에서 마룻바닥을 사각형으로 도려 파고 난방용·취사용으로 불을 피우는 장치] 불에 쬐면서, 훌쩍이며 우는 송 씨에게 “가엾어라, 가엾어라”라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전선에 있었던 일은 말하지 않았다. 이가 그슬려 털실로 짠 틈새에서 기어 나와서 툭툭 불 속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이가 떨어지는 게 재미있는 거 있지.”
며칠 째 목욕을 하지 못해 때투성이였고, 버짐도 전염되어 있던 송 씨를 하 씨는 나루코鳴子 온천으로 데리고 가 주었다.

그 후 얼마 후, 하 씨의 노무자 합숙소의 일은 없어지고, 실업 대책 사업에 나가게 되었다. 전후 얼마 안 된 무렵 니코욘[공공 직업 안정소의 알선으로 일하는 일용 노동자]으로 불렸던, 그 많은 막노동이었다.

송 씨는 땔감으로 쓰는 나무를 산에서 모아서 팔기도 하고, 가공가게에서 생선을 팔기도 하고, 초봄에는 고사리나 고비를 채취해 소금에 절여 여관 같은 데 납품하기도 하고, 해초를 생선 장수에게 가지고 가기도 하며, 다양한 일을 찾아서 겨우 돈을 벌었다. 술집에서 일한 적도 있다. 술집이 영업을 끝내면 차츰 나이 어린 여성들을 데리고 여러 술집을 다니며 마시게 되었다. 하 씨가 다다미 밑에 숨겨 둔 돈을 가지고 나와서 술을 마시러 다녔다.

“나는 분해도 누구와도 부딪칠 수 없으니까 술만 마시고 있었던 거지.”
하 씨는 달필이며 지식도 풍부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일본인이라면 교사나 공무원이 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신체는 약해서 육십 대 중반에 막노동은 무리였다.
하 씨는 1982년 2월 세상을 떠났다.

도쿄지방법원의 본인 심문에서 송 씨는 말했다.
“나는 위안부로 일하고 온 인간이고, …중략…그런 마음은 전혀 없어요. …중략…육체관계는 파산하게 되어 있어요. 남자 같은 거 보면, 저놈 날 아는 거 아닐까, 라고 할 정도니까.”

송 씨가 가르쳐 준 것

송 씨의 재판에 대해서는 생략하자. (재판 내용은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편『내 마음은 지지 않았다』, 2007년, 참조. 송 씨와 지원 모임의 활동을 기록한 같은 제목의 DVD도 있다)

2111년 3월 11일의 동일본 대지진으로 송 씨는 집도 뭐도 다 떠내려갔다. 나는 그 날, 오사카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다음 날, 도쿄로 돌아오자마자, 지원 모임의 양징자梁澄子 씨가, 사방팔방으로 손을 써서 송 씨를 찾고 있었다.

일주일 후, 지원 모임의 멤버 셋이 센다이로 송 씨를 데리러 갔다. 일반 차량의 통행은 차단되어 있었다. 송 씨는 센다이의 여성들이 준비한 아파트에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센다이를 출발, 신칸센이 불통이기 때문에, 멀리 우회해 하네다羽田에 도착했을 때는 해질녘이 다 되었다. 다른 멤버가 식사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던 호텔에 도착한 것은 8시 무렵이었다. 송 씨는 약 3주간, 그 호텔에서 지낸 후, 도영道營 주택에서 살기 시작했다.

방은 7층, 송 씨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다. 이웃 주민에게서, 송 씨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들었다. 깨진 접시를 버리러 가는 중이었다. 나는 송 씨의 방으로 갈 때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버튼을 누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혼자 타는 것을 두려워하며, 버튼 누르는 방법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후, 공실이 나서, 1층으로 옮겼다. 1층에서도, 혼자서 방을 나오지 않았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서, 똑같은 방이 즐비한 단지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점점 낮에도 이불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일으켜 세워도 기어서 방 안을 이동했다. 이렇게 해서는 잠만 자게 되고 만다. 이번에는 갈 때마다, 송 씨를 두드려 깨워서, 이불에 달라붙어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 송 씨의 등을 떠밀어서 일으키고, 산보를 하러 데리고 나왔다.

밖에 나오면, 식용 식물을 찾아내서 조리법을 알려 주었다. 단지의 뜰에서 키우고 있던 머위는 물론, 달래, 쑥, 민들레도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은 막 돋아난 풀은 맛있다고 했다. “가에루바蛙葉”[죽은 개구리를 이 풀의 잎으로 덮어서 되살린다고 하여 붙인 식물 이름] 라고 불렀던 질경이가 틀림없는 식물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개망초 무리를 발견하고, 거기로 함께 가자, 송 씨는 ‘체’하는 얼굴을 했다. 개망초는 오나가와에서는 잡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송 씨는 재판을 하던 무렵,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다양한 극한 상황을 꿋꿋하게 살아냈고,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보아온 송 씨의, 때로는 과격한 유머가 튀어나오는 발언은 집회 같은 데서 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송 씨 스스로, 자신의 가혹한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에게 위무와 용기를 얻었다. 도쿄에 온 후도 “행복하다”고 같은 말을 했다.
“지원 모임의 아이들이 지원해 주니까”라고.

나는 송 씨에게 많을 것을 배웠다. 전쟁의 실태, 인간의 잔인함과 따듯함, 마음이라는 불가사의…, 처음 만남 후 26년간,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의 존재 양태, 인간의 존재 양태를 송 씨의 증언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고, 좀 과장되게 말하면 할 수 있다.

나의 내면에 많은 것을 남겨주셨는데, 아무 보답도 할 수 없었다고, 한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증언을 듣고 싶다는 일념으로 송 씨를 찾아가서, 결과적으로 송 씨와 함께 웃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낙담할 수 있는 여성들로 연결되었던 일은, 실은 내심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쓰나미에 휩쓸린 송 씨의 집터에서, 지원 모임의 멤버가 소중하게 가지고 돌아온 바닷물에 흠뻑 젖은 끔찍한 하 씨의 사진을, 거의 원상태에 가까운 사진으로 복사해서, 도쿄의 송 씨 방에 장식한 일도, 작은 보답으로 여겨주기를 소망한다.<끝>

(『세카이』, 2018년 3월.)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ji_kim&uid=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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