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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AP통신,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탐사 보도
복지원의 정치적 목적, 그리고 박인근 원장이 챙긴 부당이득 사례도 밝혀
뉴스프로 | 2016-04-24 13:14:1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미 AP통신,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탐사 보도
– 피해자 증언과 정부 자료 근거로 구타, 강간, 노예노동 등 인권침해 사례 적시
– 형제복지원의 정치적 목적, 그리고 박인근 원장이 챙긴 부당이득 사례도 밝혀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야말로 ‘최악’으로 기억될 인권침해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 정권 때 시작됐고, 뒤이은 전두환 정권이 거리 ‘정화’를 명분으로 부랑자, 고아 등을 수용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하사관 출신인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조직을 군대식으로 편성하고, 원생들에게 온갖 가혹 행위를 자행했다. 그 가혹 행위 수준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SBS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공중파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자주 다뤄졌다.

미 AP통신은 형제복지원 피해자 인터뷰와 단독으로 입수한 수백 건의 정부 자료를 근거로 약 11장 분량의 탐사보도를 내놓았고, 영국 데일리메일은 18일 이를 받아 보도했다.

AP통신의 보도 내용은 그동안 한국 언론에서 다뤄진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밝혀진 내용도 많다.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부랑자나 걸인, 고아는 물론 반정부 유인물을 소지한 대학생도 형제복지원 입소대상이라고 했다. 즉, 이 시설이 체제 반대자를 수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형제복지원이 대우 등과 같은 기업과 유착을 맺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으나 원생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AP통신은 밝혀냈다. 그동안 한국언론 보도는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인권침해에 중점을 뒀을 뿐, 박인근 원장이 챙긴 이익에 대해선 별반 주목을 하지 않아 왔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당대 권력이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은폐한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울산지검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는 이 사건을 처음 인지하고 수사를 펼쳤으나 상관이던 부장검사는 이를 축소했다. 그 사람이 바로 국회의장을 지낸 박희태였다. 사실 박희태는 정권의 뜻을 집행한 데 불과하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불거지던 당시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고, 그래서 정권의 치부가 될 또 다른 사건인 형제복지원 사건이 부각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AP통신 보도 역시 이 사건이 정권의 필요에 따라 은폐됐음을 폭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AP통신 보도는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파헤친 <보스턴글로브>지의 탐사보도에 견줄 만하다.

뉴스프로는 AP통신 보도가 높은 가치가 있다는 판단 아래, 기사 전문을 번역한다.
번역 감수 :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dailym.ai/1SWGahA

‘Hell within Hell’: Children raped daily for years, forced to pick maggots out of open wounds and watch inmates being tortured and stamped to death at ‘evil’ South Korean labour camp

‘지옥 속의 지옥’: 수년간 아동들이 매일 성폭행을 당하고, 상처에서 구더기를 골라내야 했고, 수용자들이 고문당하고 맞아 죽는 것을 봐야했던 ‘악마’같은 한국의 강제 노동수용소

• Brothers Home, in Busan, South Korea, had more than 20 factories at peak
• Ex inmates claim children were raped and many prisoners beaten to death
• Thousands ’rounded up off the streets ahead of the 1988 Seoul Olympics’
• Busan city officials said facts are difficult to confirm now because facility closed 30 years ago

• 한국 부산 형제복지원, 전성기 때 20개 넘는 공장 소유
• 전 원생들, 빈번한 아동 성폭행, 다수의 수용자들 맞아 죽었다 주장
•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앞두고 수천 명 거리에서 잡혀가
• 부산시 관계자, 형제복지원 30년 전 문 닫아 사실 확인 어렵다 전해

By Associated Press
Published: 12:06 GMT, 18 April 2016 | Updated: 12:50 GMT, 18 April 2016

The 14-year-old boy in the black school jacket stared at his shoes, his heart pounding, as the policeman accused him of stealing a piece of bread. Even now, more than 30 years later, Choi Seung-woo weeps when he describes all that happened next.

검정색 교복을 입은 14세 소년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경찰관이 추궁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려 신발만 쳐다보고 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최승우 씨는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The policeman yanked down the boy’s pants and sparked a cigarette lighter near Choi’s genitals until he confessed to a crime he didn’t commit.

경찰관은 소년의 바지를 잡아내리고 생식기 가까이에 라이터 불을 켜서 최 씨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하게 했다.

Then two men with clubs came and dragged Choi off to the Brothers Home, a mountainside institution where some of the worst human rights atrocities in modern South Korean history took place.

그런 다음 곤봉을 든 두 남자가 와서, 현대 한국사에서 최악의 인권 유린이 행해진 산비탈의 수용시설, 형제복지원으로 최 씨를 끌어갔다.

Nobody has been held accountable to date for the rapes and killings at the Brothers compound (pictured) in Busan, South Korea, an investigation has claimed. Children are pictured at the camp
한국 부산 형제복지원 시설 내(사진)에서 일어난 성폭행 및 살인에 대해, 수사가 요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아무도 책임을 진 적이 없다. 형제복지원에 있는 사진 속 어린이들.

A guard in Choi’s dormitory raped him that night in 1982 – and the next, and the next. So began five hellish years of slave labour and near-daily assaults, years in which Choi saw men and women beaten to death, their bodies carted away like garbage.

1982년 그날 밤, 최 씨는 기숙사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이후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렇게 당했다. 그렇게 해서 노예 노동과 거의 매일의 폭행에 시달렸던 지옥같은 5년의 세월이 시작됐고 최 씨는 폭행으로 사망하는 남녀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그들의 시체를 보았다.

Choi was one of thousands – the homeless, the drunk, but mostly children and the disabled – rounded up off the streets ahead of the 1988 Seoul Olympics, which the ruling dictators saw as international validation of South Korea’s arrival as a modern country.

최 씨는, 당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한국이 현대적 국가로서 국제적 검증을 받게 될 기회로 보고 그 개최에 앞서 거리에서 치워버린 수천 명의 노숙자, 취객, 그러나 대부분 어린이와 장애인들 중 한 명이었다.

An Associated Press investigation shows that the abuse of these so-called vagrants at Brothers, the largest of dozens of such facilities, was much more vicious and widespread than previously known, based on hundreds of exclusive documents and dozens of interviews with officials and former inmates.

단독으로 입수한 수백 건의 문서들, 그리고 수용시설 관계자 및 전 수감자들과의 수십 차례 인터뷰에 근거한 AP통신의 조사는, 이와 비슷한 수십 개의 수용시설 중 최대 규모인 형제복지원에서 소위 부랑자에 대한 학대는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잔학하고 광범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Yet nobody has been held accountable to date for the rapes and killings at the Brothers compound because of a cover-up orchestrated at the highest levels of government, the AP found.

그러나 정부 최고위급에서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아무도 형제복지원 수용시설 내의 성폭행과 살인에 대한 책임을 진 적이 없다.

Two early attempts to investigate were suppressed by senior officials who went on to thrive in high-profile jobs; one remains a senior adviser to the current ruling party. Products made using slave labour at Brothers were sent to Europe, Japan and possibly beyond, and the family that owned the institution continued to run welfare facilities and schools until just two years ago.

앞선 두 번의 수사 시도는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들 관료들은 그 후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했으며, 한 명은 현 집권당의 상임고문으로 있다. 형제복지원에서 노예노역으로 만든 제품은 유럽과 일본, 그리고 아마 그 외 다른 나라들로 수출됐고 수용시설을 소유한 가족은 불과 2년 전까지 복지시설과 학교를 계속 운영했다.

Even as South Korea prepares for its second Olympics, in 2018, thousands of traumatized former inmates have still received no compensation, let alone public recognition or an apology. The few who now speak out want a new investigation.

대한민국 정부가 2018년 개최될 한국의 두 번째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아직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수천 명의 전 원생들은 여전히 공개적 인정이나 사과는커녕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지금 목소리를 내는 몇몇 피해자들은 새로운 수사를 원한다.

Thousands of children and the disabled were rounded up off the streets (pictured) ahead of the 1988 Seoul Olympics and sent to camps such as the Brothers Home in Busan, South Korea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수천 명의 어린이와 장애인들이 거리에서 잡혀갔고(사진) 한국 부산 형제복지원과 같은 수용소로 보내졌다.

The current government, however, refuses to revisit the case, and is blocking a push by an opposition lawmaker to do so on the grounds that the evidence is too old.

그러나 현 정부는 사건의 재조사를 거부하며, 증거가 너무 오래됐다는 이유로 야당 의원의 재수사 요구를 막고 있다.

Ahn Jeong-tae, an official from Seoul’s Ministry of the Interior, said focusing on just one human rights incident would financially burden the government and set a bad precedent.

안정태 한국 행정자치부 과장은 하나의 인권유린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정부에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주고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고 말했다.

The Brothers’ victims, he said, should have submitted their case to a temporary truth-finding commission established in the mid-2000s to investigate past atrocities. ‘We can’t make separate laws for every incident and there have been so many incidents since the Korean War,’ Ahn said.

안 과장은 또한,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들은 2000년대 중반에 과거의 잔혹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한시적 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 사건을 제출했어야 했다며, ‘각 사건에 대해 별도의 법을 제정할 수는 없으며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Former inmates, however, cannot forget. One spent months standing quietly in front of the National Assembly with a signboard demanding justice. Choi has attempted suicide several times and now attends weekly therapy sessions.

그러나 피해 원생들은 잊지 못한다. 한 피해자는 몇 달 동안 국회 앞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침묵의 일인시위를 벌였다. 최 씨는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고 지금은 매주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The government has consistently tried to bury what happened. How do you fight that? If we spoke up, who would have heard us?’ he asked. ‘I am wailing, desperate to tell our story. Please listen to us.’

“정부는 당시 있었던 일을 지속적으로 은폐하려 시도해왔다. 어떻게 정부와 싸우겠는가? 만약 우리가 목소리를 내면 누가 들어줄까?”고 그는 묻는다. “나는 우리 이야기를 꼭 하고자 눈물로 호소한다. 제발 우리 말을 들어달라.”

Once an orphanage, Brothers Home at its peak had more than 20 factories churning out woodwork, metalwork, clothing, shoes and other goods made by mostly unpaid inmates.

한때 보육원이었던 형제복지원은 전성기에는 20개 이상의 공장을 운영하며 무급으로 원생들을 착취해 목재, 철재, 의류, 신발, 그리고 기타 제품을 제조했다.

The sprawling compound of concrete buildings rose above the southern port city of Busan, its inmates hidden from view by tall walls and kept there by guards who carried bats and patrolled with dogs.

남부 항구도시 부산에 여러 채의 콘크리트 건물로 세워진 형제복지원은 높은 담을 세워 외부의 시선을 차단했고 경비원들은 목봉과 경비견을 끌고 다니며 감시했다.

The horrors that happened behind those walls are inextricably linked to South Korea’s modern history.

담장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은 한국의 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The country at the time was still recovering from the near-total devastation of the 1950-53 Korean War, which followed nearly four decades of brutal Japanese colonization.

당시 한국은 40년에 가까운 일본의 식민지배에 이어 50-53년의 한국전쟁의 황폐함에서 아직 회복 중인 시기였다.

Once an orphanage, Brothers Home at its peak had more than 20 factories churning out woodwork, metalwork, clothing, shoes and other goods made by mostly unpaid inmates.
한때 보육원이었던 형제복지원은 전성기에는 20개 이상의 공장을 운영하며 무급으로 원생들을 착취해 목재, 철재, 의류, 신발, 그리고 기타 제품을 제조했다.

From the 1960s until the 1980s, before democracy, it was ruled by military dictators who focused overwhelmingly on improving the economy.

1960년대로부터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80년대까지 한국은 경제 발전에 지나칠 정도로 집중했던 군사독재자들이 지배했다.

In 1975, dictator President Park Chung-hee, father of current President Park Geun-hye, issued a directive to police and local officials to ‘purify’ city streets of vagrants.

1975년,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은 거리에서 부랑자들을 없애고 ‘정화’시킬 것을 경찰과 지역 관료들에게 지시했다.

Police officers, assisted by shop owners, rounded up panhandlers, small-time street merchants selling gum and trinkets, the disabled, lost or unattended children, and dissidents, including a college student who’d been holding anti-government leaflets.

경찰은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걸인, 껌이나 잡동사니를 파는 잡상인, 장애인, 길을 잃었거나 혼자 있는 아이들, 그리고 반정부 유인물을 갖고 있던 대학생을 포함한 반체제인사들을 잡아들였다.

They ended up as prisoners at 36 nationwide facilities. By 1986, the number of inmates had jumped over five years from 8,600 to more than 16,000, according to government documents obtained by AP.

그들은 전국의 36개 수용 시설에 감금됐다. AP가 입수한 정부문서에 따르면, 1986년에는 수용 인원이 오년 전 8,600명에서 16,000명으로 급증했다.

Nearly 4,000 were at Brothers. But about 90 percent of them didn’t even meet the government’s definition of ‘vagrant’ and therefore shouldn’t have been confined there, former prosecutor Kim Yong Won told the AP, based on Brothers’ records and interviews compiled before government officials ended his investigation.

거의 4,000명이 형제복지원에 있었다. 하지만 그중 90% 정도는 정부가 정의한 “부랑자” 범주에 들지 않는, 그래서 그곳에 수용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전 검사 김용원 씨가, 형제원 기록과 또한 정부 관계자들이 수사를 중단시킬 때까지 자신이 행한 심문을 토대로 AP통신에 말했다.

The inner workings of Brothers are laid bare by former inmate Lee Chae-sik, who had extraordinary access as personal assistant to the man in charge of enforcing the rules. The AP independently verified many of the details provided by Lee, now 46, through government documents.

형제복지원에서 규율을 집행하던 인물의 보조로 일하며 내부를 접할 특별한 기회를 가졌던 이전 원생, 이채식 씨에 의해 형제복지원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운영됐는지가 밝혀졌다. AP통신은 정부문서 열람을 통해 이제 46세가 된 이 씨가 밝힌 다수의 세부 사항이 사실인지 독립적으로 검증했다.

Lee was sent to Brothers at 13 after trouble at school. His first job was in a medical ward. Twice a day, Lee and four others, none of whom had medical training, would try to care for patients, often dousing their open wounds with disinfectant or removing maggots with tweezers.

이 씨는 13살 때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켜 형제원에 보내졌다.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은 의료반이었다. 의료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이 씨와 다른 네 명은 하루에 두 번씩, 살균제를 상처에 바르거나 족집게로 구더기를 집어내는 식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People screamed in pain, but we couldn’t do much,’ Lee said. ‘It was a hell within a hell. The patients had been left there to die.’

‘환자들은 아파서 비명을 질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며 이 씨는 “그건 지옥 안의 지옥이었다. 환자들은 그냥 죽게 방치됐다”고 말했다.

Stronger inmates raped and beat the weak and stole their food, he said. Lee attempted suicide after a guard at the medical ward raped him.

힘이 센 원생들은 힘이 약한 자들을 강간하고 때리고 음식을 빼앗았다고 그가 말했다. 의료실의 경비원에게 강간을 당한 후 이 씨는 자살을 시도했다.

A year later, he was made personal assistant to chief enforcer Kim Kwang-seok, who like other guards at Brothers was an inmate raised to power by the owner because of his loyalty. Many former inmates remember Kim as the facility’s most feared man. The AP tried repeatedly to track Kim down but could not find him.

1년 후 이 씨는 경비대장 김광석의 보조로 일하게 되는데, 김광석은 형제원의 다른 경비원들과 마찬가지로 원생으로 들어왔다가 원장에게 충성심을 보여 권력을 쥐게 된 사람이었다. 많은 원생은 그를 수용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기억한다. AP통신은 김 씨의 행방을 여러 차례 추적했으나 알아낼 수 없었다.

Adults worked on construction jobs, both at Brothers and off-site. Children sometimes hauled dirt and built walls, but mostly they assembled ballpoint pens and fishing hooks
성인들은 형제원 안팎에서 건설일을 했다. 아이들은 흙을 나르고 담을 쌓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볼펜이나 낚싯바늘을 조립하는 일을 했다.

Lee said he was present when Kim, a short, stocky man with sunburned skin, led near-daily, often fatal beatings at the compound’s ‘corrections room.’ Lee accompanied Kim as he compiled a twice-a-day tally of the sick and dead for the owner; four or five daily deaths were often on the list.

이 씨는 작고 다부진 체격에 햇볕에 그을은 김 씨가 거의 매일 수용소의 “교화실”에서 원생을 죽도록 두들겨 팰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씨는 김 씨가 하루에 두 번씩 원장에게 환자와 사망자 수를 보고하러 갈 때 그와 함께 갔다; 매일 4-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곤 했다.

A scene recounted by Lee provides a first hand account of the efficient, almost casually evil way the facility worked.

이 씨가 묘사하는 장면은 이 수용소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리고 거의 일상적으로 악랄하게 운영되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One morning, Kim approached owner Park In-keun on his daily jog to report that yet another inmate had been beaten to death the night before. The boy heard Park order Kim to bury the body in the hills behind the compound’s walls.

어느 날 아침, 김 씨는 전날 밤 또 한 명의 원생이 구타로 숨졌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 조깅을 하고 있던 원장 박인근에게 다가갔다. 이 씨는 박 원장이 시체를 담장 바깥쪽 언덕에 묻으라고 지시하는 것을 들었다.

The violence at Brothers happened in the shadow of a massive money-making operation partly based on slave labour.

형제복지원에서의 폭력은 일정 부분 노예노역에 의존한 대규모 돈벌이 작업의 비호하에 일어났다.

The factories were ostensibly meant to train inmates for future jobs. But by the end of 1986, Brothers saw a profit from 11 of them, according to Busan city government documents obtained exclusively by the AP.

공장들은 표면적으로는 원생들의 직업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AP통신이 부산시로부터 단독으로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1986년 말까지 형제복지원은 그들 중 11개의 공장으로부터 이윤을 남겼다.

The documents show that Brothers should have paid the current equivalent of $1.7million to more than 1,000 inmates for their dawn-to-dusk work over an unspecified period.

문건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확인되지 않은 기간 동안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노동을 한 데 대해 1,000명 이상의 원생에게 현 시세로 170만 달러를 지급했어야 했다.

However, facility records and interviews with inmates at the time suggest that, instead, most of the nearly 4,000 people at Brothers were subject to forced labour without pay, according to prosecutor Kim.

그러나 김 검사에 따르면 시설 기록과 당시 원생과의 인터뷰 결과 거의 4,000명에 이르는 원생들이 무임금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Another probe at the time, quickly scrapped by the government, showed that ‘nearly none’ of about 100 inmates interviewed received payment. None of 20 former inmates interviewed by the AP received money while at Brothers either, though three got small payments later.

당시의 또 다른 조사는 -정부에 의해 신속하게 폐지되긴 했지만- 인터뷰를 한 100명가량의 원생 중 ‘거의 아무도’ 돈을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AP통신이 인터뷰한 20명의 이전 원생들 중 누구도 형제복지원 수용기간 동안 돈을 받지 못했으나, 그중 세 명은 후에 약간의 돈을 지급받았다.

Adults worked on construction jobs, both at Brothers and off-site. Children sometimes hauled dirt and built walls, but mostly they assembled ballpoint pens and fishing hooks.

성인들은 형제복지원 안팎의 건설일에 투입됐다. 아동들은 때로 흙을 나르거나 담쌓는 일을 했으나 대부분은 볼펜과 낚싯바늘을 조립했다.

Choi Seung-woo (left) and Lee Chae-sik (right) talk as they examine what they say was a water tank left from the Brothers Home, a mountainside institution where some of the worst human rights atrocities in modern South Korean history took place, in Busan, South Korea
최승우(왼쪽) 씨와 이채식(오른쪽) 씨가 형제복지원 왼쪽 물탱크가 있던 자리를 살펴보고 있다. 한국 부산 산 중턱에 위치한 형제복지원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최악의 인권침해가 자행됐던 곳이다.

Some products were tied to other countries. For example, dress shirts made at Brothers’ sewing factory were sent to Europe and inmates were trained by employees at Daewoo, a major clothing exporter during the 1980s to the United States and other markets, according to the owner’s autobiography.

몇 가지 상품은 다른 나라와 연계돼 있었다. 예를 들어 박인근 소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내 재봉공장에서 만든 와이셔츠는 유럽으로 보내졌으며, 1980년대 미국이나 다른 주요 시장에 의류를 수출하던 주요 회사인 대우의 직원들이 원생들을 교육시켰다.

Park, the owner, said officials from Daewoo had toured the facility before offering a partnership. Daewoo International spokesman Kim Jin-ho said it was impossible to confirm such details because of a lack of records from the time.

소유주인 박 씨는 파트너쉽을 제안하기 전에 대우 간부들이 공장시설을 둘러봤다고 회고했다. 대우 인터내셔널의 김진호 대변인은 당시 기록이 없어 이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Inmates during the 1970s recounted spending long hours tying fishing lines to hooks for packages with Japanese writing on them, for export to Japan.

1970년대 수용됐던 원생들은 일본 수출용으로 포장에 일본어가 적힌 상품에서 낚싯줄을 후크에 매는 작업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Kim Hee-gon, an inmate at Brothers for eight years, said he and his colleagues were beaten severely in the early 1970s after thousands of such packages shipped to Japan were returned because they were faulty or missing hooks.

형제복지원에 8년 동안 수용돼 있었던 김희곤 씨는 1970년대 초 일본에 보낸 상품 중 하자가 발견됐거나 후크가 빠져 있어 수천 개가 반품되자 그와 동료들이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Park Gyeong-bo, who was confined at Brothers from 1975 to 1980, remembered sneaker bottoms produced with the logo of Kukje Sangsa, a now-defunct company that manufactured shoes for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in the 1970s and 80s.

1975년부터 1980년까지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박경호 씨는 19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 미국과 유럽에 신발을 제조 수출했던, 지금은 없어진 국제상사의 로고가 붙은 운동화 밑창을 기억했다.

The operation thrived because everybody benefited, except the inmates.

원생들은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익을 얻었기에 이 일은 번창했다.

Local officials needed somewhere to put the vagrants they were charged with corralling, so each year they renewed a contract with Brothers that required an inspection of how the inmates were treated and of how the facility was financially managed.

지방 관료들은 부랑자들을 수용할 수용시설이 필요했고, 따라서 이들은 매년 형제복지원과의 계약을 갱신했고, 이를 위해 원생들이 어떤 처우를 받는지, 복지원의 재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 복지원을 감사할 필요가 있었다.

Brothers got government subsidies based on its number of inmates, so it pushed police to round up more vagrants, the early probe found. And police officers were often promoted depending on how many vagrants they picked up.

형제복지원은 원생 숫자에 따라 정부 보조금을 지급받았으므로 더 많은 원생을 붙들어오도록 복지원이 경찰을 압박했음을 초기 조사는 밝혀냈다. 그리고 경찰관은 얼마나 많은 부랑인들을 잡아들였냐에 따라 승진을 하곤 했다.

Two Busan city officials would say only that the facts are difficult to confirm now because the facility closed three decades ago. Heo Gwi-yong, a spokesman for the Busan Metropolitan Police Agency, said he couldn’t confirm any details for the same reason.

두 명의 부산시 관계자는 형제복지원이 30년 전 폐쇄됐기에 이 같은 사실들을 확인해주기 어렵다는 말만 했다. 부산경찰청 허귀영 대변인도 같은 이유를 들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The owner of Brothers, Park, received two state medals for social welfare achievements and sat on a government advisory panel. His version of his story even inspired a 1985 television drama about a man’s heroic devotion to caring for what were called ‘bottom-life people.’

소유주 박 씨는 사회복지 공로를 인정받아 두 개의 국가훈장을 수여 받고 정부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스토리는 ‘밑바닥 인생’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영웅적인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1985년의 텔레비전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졌다.

Brothers Home owner Park In-keun (right) shakes hands with former South Korean dictator Chun Doo-hwan.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오른쪽)이 한국 전 독재자 전두환과 악수하고 있다.

Park eventually served a short prison stint for embezzlement and other relatively minor charges, but not for the abuse at Brothers. When the facility was at last raided in 1987, investigators found a vault in Park’s office filled with the current equivalent of about $5 million in U.S. and Japanese currencies and certificates of deposit.

박 씨는 횡령 혐의 및 비교적 가벼운 다른 혐의로 짧은 기간 옥살이를 했지만 형제복지원에서의 가혹 행위로 처벌받은 적은 없다. 마침내 1987년 수사관들이 형제복지원을 압수수색했을 때, 수사관들은 박 원장의 사무실에 있는 저장고에서 현시세로 500만 달러에 이르는 미화 및 일본 화폐, 그리고 예금증서들을 발견했다.

In his autobiography, in court hearings and in talks with close associates, Park has denied wrongdoing and maintained that he simply followed government orders. Repeated attempts to contact him through family, friends and activists were unsuccessful.

박 씨는 자서전과 법원 청문회,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잘못을 부인했고, 자신은 정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가족, 친구, 활동가들을 통해 그를 접촉하고자 계속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The AP, however, tracked down the former second-highest management official at Brothers, Lim Young-soon, who bristled in a telephone interview at descriptions of corruption, violence and slavery at the facility.

그러나 AP통신은 형제복지원에서 2인자로 불렸던 임용순을 찾아냈고,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형제복지원이 부패, 폭력, 노예노동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것에 분개했다.

Lim, a Protestant pastor now in Australia who is the brother of Park’s wife, said Park was a ‘devoted’ social worker who made Busan better by cleaning its streets of troublemakers. He said Brothers’ closure ‘damaged national interests.’

박 원장의 처남이며 호주에서 목사로 활동 중인 임 씨는 박 원장이 거리의 말썽꾼들을 없애 부산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 ‘헌신적인’ 사회사업가라고 주장했다. 임 씨는 또 형제복지원 폐쇄가 ‘국익을 해쳤다’고 주장했다.

Lim acknowledged beating deaths at Brothers, but said they were caused by clashes between inmates. He attributed the facility’s high death toll to the many inmates he said arrived there in poor physical and mental health.

임 씨는 형제복지원 내에서 구타사망 사건이 있었음은 인정했지만 이는 원생끼리의 싸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복지원의 높은 사망률은 원생들 다수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 상태가 나쁜 상태로 복지원에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These were people who would have died in the streets anyway,’ Lim said.

임 씨는 ‘그 사람들은 거리에서 죽었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On his second day at Brothers, still dazed from his brutal rape the night before, Choi waited with other children to be stripped and washed.

형제복지원 입소 둘째 날, 최 씨는 전날 잔혹한 강간으로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 다른 원생들과 함께 옷이 벗겨지고 씻겨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He said he watched a guard drag a woman by her hair and then beat her with a club until blood flowed from her head.

그는 경비원이 한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간 다음 머리에 피가 날 때까지 곤봉으로 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I just stood there, trembling like a leaf,’ Choi, 46, said. ‘I couldn’t even scream when the platoon leader later raped me again.’

46세인 최 씨는 “난 그저 거기에 서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소대장이 그날 오후 다시 날 강간할 때도 난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Ex-inmates Choi and Lee Chae-sik stood on a concrete-covered former water reservoir that they think is the only remaining physical trace of Brothers
형제복지원 원생이었던 최 씨와 이채식 씨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형제복지원 건물의 흔적이라고 여기는 콘크리트로 덮힌 옛 배수지 위에 서 있다.

Another time, Choi recalled, he saw seven guards knock down a screaming man, cover him with a blue blanket and stomp and beat him. Blood seeped through the blanket. When it fell away, the dead man’s eyes had rolled back into his head.

또 한 번은 7명의 경비원들이 소리를 지르는 한 남성을 쓰러뜨려 그에게 파란 담요를 씌우고 발로 짓밟고 때리는 것을 봤다고 최 씨는 회상했다. 피가 담요 밖으로 스며 나왔다. 담요가 벗겨지자 죽은 남성의 눈이 뒤집혀져 있었다.

Death tallies compiled by the facility claimed 513 people died between 1975 and 1986; the real toll was almost certainly higher. Prosecutor Kim interviewed multiple inmates who said facility officials refused to send people to hospitals until they were nearly dead for fear of escape.

형제복지원이 제공한 사망자합계에 따르면 1975년과 1986년 사이에 513명이 사망했다고 하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높았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김 검사는 형제복지원 간부들이 탈출에 대한 우려 때문에 거의 사망에 이르게 될 때까지 사람들을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고 말한 다수의 원생들을 인터뷰했다.

‘The facility was Park’s kingdom, and violence was how he ruled,’ Kim said of the owner. ‘When you are confined to a place where people are getting beaten to death every day, you aren’t likely to complain too much about forced labor, abuse or getting raped.’

‘형제복지원은 박인근의 왕국이었고 폭력은 그의 통치 방법이었다’고 김 검사는 형제원 소유주에 대해 말했다. ‘사람이 매일 맞아 죽어 나가는 곳에 갇혀 있다면, 강제노동, 학대 또는 강간에 대해 특별히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Most of the new arrivals at Brothers were in relatively good health, government documents show. Yet at least 15 inmates were dead within just a month of arrival in 1985, and 22 in 1986.

형제복지원에 들어오는 새 입소생들 대부분은 비교적 건강했다고 정부 문서는 말한다. 그러나 1985년에 최소 15명, 그리고 1986년에 22명이 입소한 지 겨우 한 달 내에 사망했다.

Of the more than 180 documented deaths at Brothers in 1985 and 1986, 55 of the death certificates were issued by a single doctor, Chung Myung-kuk, according to internal facility documents, interviews and records compiled by Kim. Chung, now dead, mostly listed the cause of death as ‘heart failure’ and ‘general weakness.’

김 검사가 제공한 형제복지원 내부 문서와 인터뷰,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1985년과 1986년 사이에 형제복지원의 180건의 사망기록 중 55건의 사망증명서가 정명국이라는 한 명의 의사로부터 발급됐다. 이미 사망한 정 씨는 사인을 대부분 ‘심부전’과 ‘쇠약’으로 적었다.

Life at Brothers began before dawn, as inmates washed and got ready for mandatory 5:30am prayers, transmitted by loudspeaker from the facility’s Presbyterian church. After a morning run, they ate breakfast and then headed to factories or construction sites.

형제복지원의 생활은 해뜨기 전에 시작되어 원생들은 세안 후 5시 30분 대형 확성기를 통해 전해지는 형제복지원 장로교회의 의무적인 예배에 참여했다. 아침 달리기 후, 원생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공장이나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When city officials, foreign missionaries or aid workers visited, a select group of healthy inmates worked for hours to prepare a sanitized version of Brothers for the guests. Guards locked everyone else in their dormitories. Choi said inmates watched hopelessly as these clueless do-gooders trooped through.

공무원이나 해외 선교사들 또는 구호자들의 방문이 있을 때에는 선택된 일련의 건강한 원생들이 손님들을 위해 형제복지원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경비원들은 나머지 원생들을 기숙사에 가뒀다. 최 씨는 원생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자선가들이 지나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봤다고 말했다.

On his second day at Brothers, still dazed from his brutal rape the night before, Choi waited with other children to be stripped and washed
형제복지원에서의 둘째 날, 전날 밤의 끔찍한 강간 때문에 여전히 멍한 상태였던 최 씨는 발가벗겨져 씻겨지기 위해 다른 아이들과 기다렸다.

On one occasion, Choi (left) recalled, he saw seven guards knock down a screaming man, cover him with a blue blanket and stomp and beat him
한번은 7명의 경비원들이 소리를 지르는 한 남성을 쓰러뜨려 그에게 파란 담요를 씌우고 발로 짓밟고 때리는 것을 봤다고 최 씨(왼쪽)는 회상했다.

‘We were trapped in a prison. But who could help us? No one,’ Choi said.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누가 우리를 도울 수 있었겠나? 아무도 할 수 없었다’고 최 씨는 말했다.

Once the doors were locked at 6pm, Choi said, the guards unleashed ‘uncontrolled violence’ upon the 60 to 100 kids in his dormitory, including frequent rapes.

최 씨는 일단 6시에 문이 일단 잠기면 경비원들이 자신의 기숙사에 있던 60명에서 100명에 이르는 아이들에게 잦은 강간을 포함하여 ‘통제 불능의 폭력’을 자행했다고 말했다.

A principal at a Busan school who once taught at Brothers acknowledged that inmates were held against their will, and even called the facility a massive concentration camp.

형제복지원에서 가르친 적이 있는 부산에 있는 한 학교의 교장은 원생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붙잡혀 있었다고 인정했으며 심지어 형제복지원을 대형 집단수용소라고도 불렀다.

However, the principal, who spoke on condition of anonymity because he was worried about his reputation, staunchly defended its practices.

그러나 자신의 평판에 대한 우려에서 익명의 조건으로 말한 그 교장은 형제복지원의 운영 방식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He said severe violence and military-style discipline were the only ways to run a place filled with thousands of unruly people who didn’t want to be there.

그는 무자비한 폭력과 군대식의 규율만이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 했던 수천 명의 제멋대로인 사람들로 가득한 형제복지원을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Park Sun-yi, who had been snatched by police at age nine from a Busan train station in 1980, was one of the few to escape.

1980년 부산 기차역에서 9살의 나이에 경찰에게 끌려온 박선이 씨는 몇몇 탈출자 중 한 명이었다.

She had watched as the guards reserved their most ruthless beatings, the kind where inmates sometimes didn’t recover, for those who tried to run. But after five years, she said, she became ‘consumed with the thought that my life might be like this forever and that I might die here.’

박 씨는 경비원들이 도망치려는 원생들에게 가하는 가장 무지막지한 폭력을(그것은 원생들이 때로는 회복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켜봤다. 그러나 5년이 지나자 박 씨는 ‘내 인생은 영원히 이런 식이다가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됐다고 말했다.

She and five other girls used a broken saw from the ironwork factory to file away bars on a second-floor window at night, little by little, reattaching them with gum each morning. At last, they squeezed themselves out, scaled a wall embedded with broken glass and fled into the hills.

박 씨와 다른 5명의 소녀들은 철 작업 공장에서 가져온 망가진 톱을 사용, 밤에 조금씩 2층 창문의 빗장을 잘랐고 매일 아침 껌으로 그 빗장을 다시 붙였다. 마침내, 그들은 좁은 창문으로 가까스로 나와 깨진 유리가 박힌 담장을 넘어 언덕으로 도망쳤다.

When she finally walked through the door of her family home in Munsan, she said, her father fainted.

박 씨가 마침내 문산에 있는 그녀의 집 문으로 들어서자 박 씨의 아버지는 까무러쳤다고 그녀는 말했다.

While pheasant hunting, Kim, then a newly appointed prosecutor in the city of Ulsan, heard from his guide about men with wooden bats and large dogs guarding bedraggled prisoners on a nearby mountain.

당시 울산에서 막 검사로 임명된 김 씨는 꿩을 사냥하던 중에 자신의 안내원으로부터 근처에 있는 산에서 나무 곤봉과 큰 개들을 데리고 후줄그레한 죄수들을 감시 중인 남자들에 대해 듣게 됐다.

When they drove there, the men said they were building a ranch for the owner of the Brothers Home in nearby Busan. Kim knew immediately, he said, that he’d stumbled onto ‘a very serious crime.’

김 검사와 안내원이 그곳으로 갔을 때 그 남성들은 자신들이 근처 부산에 있는 형제복지원의 소유주를 위해 목장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김 검사는 즉시 자신이 ‘매우 심각한 범죄’와 맞닥뜨렸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Former inmate Lee Chae-sik (pictured) walks up a hill behind a row of apartments at the former location of the Brothers Home – an area where he says bodies were buried
전 형제복지원 원생 이채식(사진속) 씨가 전 형제복지원 자리에 줄줄이 들어선 아파트 뒤 언덕에 오르고 있다- 이 씨는 이곳에 시신들이 묻혔다고 말한다.

Choi said that on one occasion, guards unleashed ‘uncontrolled violence’ upon the 60 to 100 kids in his dormitory. Residents exercise at a school near an apartment complex at the former location of the Brothers Home
최 씨는 한 번은 경비원들이 기숙사에 있는 60-100명에 달하는 아이들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 근처 학교에서 주민들이 운동하고 있다.

On a frigid January evening in 1987, Kim led 10 policemen in a surprise raid past the facility’s high walls, imposing steel gates and gape-mouthed guards. Inside, he found battered and malnourished inmates locked in overcrowded dormitories. The inmates gave the unexpected visitors crisp, military-style salutes.

1987년 1월의 몹시 추었던 어느 저녁 김 검사는 10명의 경찰을 이끌고 형제복지원의 높은 담장과 무시무시한 철문, 그리고 깜짝 놀라 입이 벌어진 경비원들을 통과해 기습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내부에서 그는 얻어맞고 영양실조에 걸린 수용자들이 초만원의 기숙사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원생들은 예상치 못한 방문자들에게 딱딱한 군대식 인사를 했다.

‘I remember thinking, “This isn’t a welfare facility; it’s a concentration camp,”‘ Kim, now 61 and a managing partner at a Seoul law firm, said. People lay coughing and moaning in a squalid sick ward, ‘just waiting to die.’

‘나는 “여기는 복지시설이 아니라 강제수용소다”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서울에 있는 한 법무법인의 경영 파트너인 전직 검사 김 씨(현재 61세)는 말했다. 사람들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면서’ 불결한 병동에서 기침하고 신음하며 누워 있었다.

After the owner was arrested, he demanded a meeting with Kim’s boss, the chief Busan prosecutor, who then supervised Ulsan.

체포되고 난 뒤 복지원 원장은 김 검사의 상사로서 당시 울산을 담당했던 부산지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A day later, Busan Mayor Kim Joo-ho, who died in 2014, called Kim to plead for Park’s release. Kim said he politely declined and hung up.

그 다음 날 2014년에 사망한 김주호 부산시장이 김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박 원장을 풀어주라고 간청했다. 김 검사는 공손하게 이를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At every turn, Kim said, high-ranking officials blocked his investigation, in part out of fear of an embarrassing international incident on the eve of the Olympics.

부분적으로는 88올림픽 직전에 수치스러운 국제적 사건이 터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고위 관리들이 그의 조사를 매번 막았다고 김 검사는 말했다.

President Chun Doo-hwan, who took power in a coup after Park Chung-hee was assassinated, didn’t need another scandal as he tried to fend off huge pro-democracy protests.

박정희가 암살당한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막아내기도 바빠 다른 추문을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Internal prosecution records reveal several instances where Kim noted intense pressure from Chun’s office to curb his probe and push for lighter punishment for the owner. Kim had to reassure presidential officials directly and regularly that his investigation wouldn’t expand.

검찰 내부 수사기록물은, 김 검사가 수차례에 걸쳐 수사를 축소하고 복지원 소유주에 가벼운 처벌을 내리라는 심한 압박을 청와대로부터 받았음을 보여준다. 김 검사는 수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것임을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알려 안심시켜야 했다.

Park Hee-tae, then Busan’s head prosecutor and later the nation’s justice minister, relentlessly pushed to reduce the scope of the investigation, Kim said, including forcing him to stop his efforts to interview every inmate at Brothers.

당시 부산지검 부장검사이자 후에 법무장관을 지낸 박희태는 김 검사가 형제복지원의 모든 원생들을 인터뷰하려는 것을 강제로 중단시킨 것을 포함해 수사범위를 축소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김 검사는 말했다.

Park, a senior adviser to the current ruling party, has repeatedly denied AP interview requests. His personal secretary said Park can’t remember details about the investigation.

현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인 박희태는 AP통신과의 인터뷰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그의 비서관은 박희태가 수사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A prosecutor collected bank records and financial transactions indicating that, in 1985 and 1986 alone, the owner of Brothers embezzled what would be the current equivalent of more than $3million. Choi Seung-woo examines a lock on what he says was a water tank left from the Brothers Home
한 검사는 형제복지원의 소유주가 1985년과 1986년에만 현재 가치로 3백만 달러 이상을 횡령한 은행거래 내역과 자금이체 내역을 밝혀냈다. 최승우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사용했던 수조라고 말하며 그 자물쇠를 살펴보고 있다.

Despite interference, Kim eventually collected bank records and financial transactions indicating that, in 1985 and 1986 alone, the owner of Brothers embezzled what would be the current equivalent of more than $3million.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 검사는 형제복지원의 소유주가 1985년과 1986년에만도 현시세 3백만 달러에 맞먹는 금액을 횡령했음을 보여주는 은행거래내역서와 금융이체내역서를 찾아냈다.

That came from about $10million of government subsidies meant to feed and clothe the inmates and maintain the facilities.

이 돈은 원생들을 먹이고 입히며 수용소를 관리하도록 정부가 제공한 1천만 달러의 정부보조금의 일부였다.

However, Kim said, the chief Busan prosecutor forced Kim to list the embezzlement as nearly half the amount he had actually found so that a life sentence couldn’t be pursued under the law at the time.

그러나 김 검사는 현행법에 따라 무기징역을 피하도록 자신이 실제 찾아낸 액수의 거의 절반만 횡령으로 기입하도록 부산 지검장이 자신에게 강요했다고 말했다.

Kim said his bosses also prevented him from charging the owner, Park, or anyone else for the suspected widespread abuse at the Brothers compound, and limited the prosecutor to pursuing much narrower abuse linked to the construction site Kim found while hunting.

김 검사는 소유주 박 씨나 그 누구도 형제복지원에 만연했던 인권유린의 혐의로 기소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상사들이 자신을 막았고, 이 혐의를 자신이 사냥 중 직접 목도한 건설 현장과 관련시켜 훨씬 축소하도록 제한했다고 말했다.

Kim demanded a 15-year prison term for Park. After a lengthy battle, the Supreme Court in 1989 gave Park 2 years in prison for embezzlement and violations of construction, grassland management and foreign currency laws.

김 검사는 박 씨에게 15년 징역형을 구형했다. 긴 법정 공방이 있은 후 1989년 대법원은 박 씨에게 횡령과 건축법, 초지 관리법과 외환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을 확정했다.

He was acquitted of charges linked to off-site abuse. Only two guards received prison terms, one for 1 years and another for eight months.

그는 수용소 밖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명의 경비원만이, 한 명은 1년, 다른 한 명은 8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After prison, Park continued to earn money from welfare facilities and land sales. The Brothers site was purchased in 2001 by a construction company for what would now be about $27million, according to a copy of the land sale shown to the AP.

출소 후에 박 씨는 복지시설과 부동산 부지 매매로 계속 돈을 벌었다. AP통신이 받은 토지거래 내역서를 보면 형제복지원 부지는 2001년 현시세 2천7백만 달러에 건설회사에 매각됐다.

One of Park’s daughters operated a school for troubled kids that closed in 2013. His family in 2014 sold a home for the severely disabled.

박 씨의 딸 중 한 명은 문제 아동을 위한 학교를 운영했다가 2013년에 문을 닫았다. 2014년에 그의 가족은 중증장애인 수용시설을 매각했다.

Kim Yong Won, the former prosecutor who was in charge of the Brothers Home case, speaks during an interview at his office in Seoul
형제복지원 사건을 담당했던 전 검사 김용원 씨가 서울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 말하고 있다.

It finally closed its gates in 1988. In the 1990s, construction labourers dug up about 100 human bones on the patch of mountain just outside where it stood, according to one of the workers who found the bones, Lee Jin-seob.

1988년 형제복지원은 마침내 문을 닫았다. 1990년대에 건설 노동자들이 땅을 파다가 시설이 있던 곳에서 머지않은 산 쪽에서 100구가량의 시신을 찾았다고 시신들을 발견한 노동자 중 한 명인 이진섭 씨가 말했다.

Blankets covering the bones and the lack of burial mounds made Lee think they’d been buried informally and quickly. It’s unclear what happened to the remains.

뼈가 담요에 싸여 있거나 봉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비공식적으로 재빨리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이 씨는 생각했다. 시신 잔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On a recent trip to the site, which is now covered with tall apartment buildings, ex-inmates Choi and Lee Chae-sik stood on a concrete-covered former water reservoir that they think is the only remaining physical trace of Brothers. Both recalled the sight of guards carrying corpses into the woods.

지금은 높은 아파트가 들어선 그 현장을 최근 방문한 전 원생 최 씨와 이채식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라고 말하며 콘크리트로 덮인 예전 수조 위에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경비원들이 시신을 숲으로 나르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There could be hundreds of bodies still out there,’ Lee said, pointing toward the steep slopes.

‘아직 저곳에 수백 구의 시신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파른 경사지를 가리키면서 이 씨는 말했다.

Inmates released from the facility ended up homeless and in shelters and mental institutions; many struggle with alcoholism, depression, rage, shame and poverty.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원생들은 결국에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보호소와 정신병원에서 들어갔고, 많은 이들이 알코올중독과 우울증, 분노, 수치 및 빈곤과 싸우고 있다.

Choi, whose back is covered by a large tattoo from his time in a gang after he left Brothers, was imprisoned for assaulting a policeman.

형제복지원을 떠난 후 범죄조직에서 지내던 시절, 등에 큰 문신을 새긴 최 씨는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The few former inmates who have begun speaking out want justice: an apology and an admission that officials encouraged police to kidnap and lock away people who shouldn’t have been confined.

목소리를 내어 말하기 시작한 몇 명의 제소자들은 정의를 원한다. 이들은 사과를 받고자 하며 정부 관료들이 경찰을 시켜 구금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납치하고 가두도록 부추긴 사실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How can we ever forget the pain from the beatings, the dead bodies, the backbreaking labor, the fear … all the bad memories,’ Lee, who now manages a lakeside motel, said. ‘It will haunt us until we die.’

현재는 호수가 근처에서 모텔을 관리하고 있는 이 씨는 ‘구타, 사체들, 뼈 빠지는 중노동, 공포…그 모든 나쁜 기억들로부터의 고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며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은 우리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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