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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미화되는 소설이 아니다 ①
뉴스프로 | 2016-04-07 10:56:0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S. Macho CHO
rok-hid @ inbox . ru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은 영국에서 공산품을 수입한다. 그 후 자국의 기계공업도 발전해 공업화가 되며 직접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경제가 활성화되고 국력은 더욱 커졌다. 약육강식의 경쟁에서 침략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영국에서 시작된 기계공업은 프랑스, 독일, 등 전 유럽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공업화에 성공한 이들은 산업생산력이 향상하며 과잉 생산된 공산품을 소비할 새로운 시장, 제품생산에 필요한 원료공급과 값싼 노동력 확보가 필요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로 남하해 침략의 손길을 뻗어 나간다. 유럽과 미국은 함포로 무장한 전함을 앞세워 재래식 무기가 전부인 약소국가를 침략하는 폭력적 제국주의 식민지시대를 연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은 아직 산업화가 안 된 중국, 조선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다. 1854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일본은 그 후 메이지유신을 통해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한다. 그래서 20여 년간 외국 세력에게 전혀 침략당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해 수모를 겪는다. 외국과 왕성한 통상교역을 전개한 고려와는 달리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외국과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도 굳게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는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1866년 프랑스의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의 신미양요 등 서구열강들에 무수히 많은 침략을 당하고 결국엔 국토를 열강들의 놀이터로 전락시켰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을 끌어들여 한반도분단의 원인을 제공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수많은 섬을 점령해가며 최후의 1인까지 싸우겠다는 일본의 결사항전 옥쇄작전과 항복 대신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일본군에 미군은 병력손실도 컸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민주에서 일본군을 공격해달라 스탈린에게 요청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던 소련은 동과 서에서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거절한다. 그러나 1943년 11월 테헤란회담에서 루스벨트의 거듭된 요청에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참전은 독일이 패망한 90일 이후로 한다고 약속했다. 이때 스탈린은 러일전쟁 이전 제정러시아가 갖고 있었던 동북아의 기득권을 요구했고 루스벨트는 수용한다.
 
미국의 원자탄이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고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소련은 미국과의 약속대로 독일이 패망한 지 90일째 되던 1945년 8월 9일 대일본선전 포고를 한다. 그리고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 1백여만 명의 항복을 받아낸 후 탱크를 앞세워 전속력으로 진군해 8월 11일에는 북한땅에 들어와 남하를 계속한다.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급히 국무부 등 조정위원회를 소집해 서울과 인천을 포함한 분계선을 그으라고 지시한다.
 
국무부 러스크 대령은 당시 사무실 벽에 걸려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보고 30분 만에 파란색 잉크로 30도선을 그어 보고했다. 이렇게 졸속으로 만든 분단 선이 연합국 총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가 된다. 미국이 소련에 이 38 도선을 제안하자 스탈린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이며 38선 이남을 미국에 양보하는 대신 일본 역시 분할 점령안을 제안한다. 트루먼은 강하게 반대하며 유럽에 주둔 중인 패튼 장군의 탱크부대를 소련에 진주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당시 원자탄이 없어 군사적 열세인 소련은 미국의 한반도분할 점령안을 수용해 한반도 분할이 결정된다. 2013년 8월 자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사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 그리고 38도선(National Geographic, Korea, and the 38th Parallel)를 보면 그 당시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기사는 ‘2년 넘는 두 신생국가의 전쟁으로 약 이백오십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됐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분단되어 있다.’고 끝을 맺는다.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무장관회담인 모스크바 3상 회담 열렸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5년부터 최대 10년까지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소련은 반대로 즉각 독립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1945년 12월 27일 아침 조선일보엔 ‘외상회담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이라고 당시 합동통신 워싱턴발 25일 자 보도를 근거로 보도했다. 그러나 당일 석간 동아일보엔 같은 기사를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실었는데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란 제목을 덧붙여 대문짝만하게 1면에 보도했다. ‘미국은 우리의 독립을 위하고, 소련은 우리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고 반공 여론을 조성해 우익인 친일파가 살아남고 좌익을 증오의 대상으로 왜곡시켜 강하게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전개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한겨레 21 제796호 기사에 따르면 문제의 이 기사는 오보란다. 모스크바 3상 회담은 12월 16일~27일까지 열렸는데 기사가 나온 시점엔 회의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기도 전이었다. 따라서 기사도 추정일 뿐이지 사실 내용도 없었다. 그러나 이 왜곡된 기사 덕분에 노선이 달랐던 김구와 이승만이 한목소리로 반탁운동을 시작했고 좌익 인민당이 반탁을 선언했고 서울에서는 반탁 데모와 파업이 이어졌다. 3상 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이 합의되었으나 ‘동아’, ‘조선’의 보도와는 반대로 오래전부터 신탁통치를 주장해왔던 미국이 제안했던 것이었다. 미국은 최대 10년간 4개국이 통치권을 맡자고 주장했지만, 소련은 통치권은 임시정부에 귀속하고 최대 5년을 제안했다. 실제로 합의된 내용은 말이 신탁통치지 실질적으로는 후견제로 한국인의 주권은 침해되지 않는 것이 맞았다.
 
회담의 실제 합의 사항은 12월 30일 보도됐고 동아일보는 그 기사를 작게 단신 처리했다. 동아일보는 그 이후로 집요하게 소련과 좌익을 흠집 내고 반탁운동 정국을 왜곡 및 과장한 기사를 내보냈다. 일제강점기 36년간 갖은 고초를 겪은 국민은 신탁통치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또다시 타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스스로 자주독립 국가건설에 대한 희망만이 불타올랐다. 따라서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악의적 왜곡보도와 거짓선동에 크게 자극받은 백성들은 무조건 좌익을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부류로 매도했다.
 
한반도는 유혈충돌까지 일어나며 남한사회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한민당이 사주해서 동아일보가 왜곡 보도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친일파 청산이 시작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당시 최대 우파 정당 한민당의 핵심이자 친일파였던 김성수가 창간했고 송진우가 사장인 석간 일간지다. 원래 송진우는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되자 책임지고 사장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후 일제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며 말기에는 결국 학도병 권유 문을 뿌리는 등 대표적 친일지로 자리 잡게 만든다.
 
일본이 패망해 조선총독부건물에서 일장기가 내려오고 미국 성조기가 올라갔다.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일본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에게 정권을 인수하며 조선 친일파들의 처리를 묻자 아베 총독은 세 가지 예를 들며 조언한다. 첫째, 조선총독부에서 일했던 조선인 친일파들은 행정력이 뛰어난 인재들이다. 둘째,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유학 경험이 있어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 셋째, 그들은 과거에 일본에 충성했듯이 미국에 충성할 준비가 된 ‘반공주의자’들이라 말했다. 친일파들이 친미 반공주의자들로 변신한 것이다. 미국의 이익에 따라 남한과 북한 출신 친일파를 등용하며 미국이 남한을 통치하는 기본정책은 친일파숙청이 아니라 친미냐, 반미냐를 가장 큰 가치 기준으로 삼았다.
 
미 군정은 그들을 다시 등용해 요직에 앉힌다. 미군이 점령하며 남한은 다시 친일파들의 천국이 되었고 미국은 그들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아베는 ‘우리 일본은 패망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조선인들이 정신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백 년이란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우리는 조선인들에게 식민지 교육을 심어 놓았다. 조선인들은 앞으로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 아베 노부유키는 돌아온다’라고 저주를 퍼붓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안타깝게도 그의 저주는 적중해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기득권을 친일파가 장악한 현실이 되었다고 단채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이건흥 사무처장은 덧붙인다.
 
1946년 10월 1일 일어난 대구민중항쟁(대구 10·1 사건)은 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지만, 해방 후 최초로 시작된 일련의 시민운동이었다. 미 군정의 쌀 배급이 실패하자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의 굶주림은 유독 심했다. 미 군정은 전염을 막는다며 지역을 봉쇄해 쌀과 농산물 공급이 끊어져 시민들은 나무뿌리죽으로 연명했다. 다시 경찰로 채용된 과거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일제강점기 때처럼 강제로 쌀, 농산물 등을 공출해 갔고 시민들을 마구 고문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에 경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분노한 시민들의 항거는 점차 타 도시로 빠르게 뻗어 나간다. 미 군정은 경찰력만으론 진압이 힘들자 국방경비대와 우익청년단체 등을 투입한다.
 
우익테러집단과 경찰은 시위를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해 시민 등 140여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 악명 높은 백의사, 서북청년회, 민족청년단, 족청과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시위에 가담한 좌파를 잡는다는 핑계로 테러와 재산 피해를 주는 등 잔인한 진압에 앞장섰다. 이때 박상희가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때 존경받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그는 항일투쟁이 앞장섰었고 일제의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되자 그는 바로 주민들을 이끌고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설치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지휘했다. 오마이뉴스 2012년 6월 18일 자에 따르면 그는 대구민중항쟁 때 구미에서 ‘구미 좌익정권’을 세우고 면장, 이승만지지 인사들, 경찰관 등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지인들인 그들을 흥분한 폭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핑계였다.
 
그러나 진압경찰이 쳐들어와 몸을 숨기던 그를 좌익 폭도로 오인해 사살한다. 그가 김종필의 장인이자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다는 친형이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는 형을 죽인 경찰과 그 배후인 미국에 강한 분노와 증오심을 품고 반체제로 돌아선다. 그리고 만주군, 일본군 출신 좌익군인들과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1948년 11월 김창룡의 특무대에 체포돼 군사재판에서 중형을 받는다. 그러나 백선엽, 정일권 등 우익 만주군 출신들의 구명운동으로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조갑제닷컴은 ‘박정희가 진보적 성향, 독립운동의 전통, 반외세를 대표하던 남로당에 들어간 것은 현실불만, 반항, 외세에 대한 거부감, 사회개혁 등 그의 기질에 맞는 것 같다’고 평했다.
 
아이러니하게 당시 남한엔 친일파를 다시 등용하고 무능한 미 군정에 반대하는 좌익성향의 군인들과 단체들이 많았고 북한엔 좌익보다는 개신교인들과 우익들이 더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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