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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13
김갑수 | 2017-11-09 12:09:2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참새 소탕전과 문화대혁명(1)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전 5권 한길사, 2016)는 ‘참새 소탕전의 추억’이라는 글로 시작된다. 이것은 원고지로 불과 10장 안팎의 짧은 글이며, 독자의 흥미를 사기 위한 일화(逸話) 성격의 글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일면 가벼워 보일 수도 있는 이 글을 방대한 저작물의 모두(冒頭)에 배치한 데에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12년 내에 전국의 쥐, 참새, 파리, 모기들을 소멸해야 한다. 이 네 가지 해(害)를 없앤 후에라야 인민의 위생을 강구할 수 있다. 역량을 총동원하라!”(마오쩌둥)

1958년 4월 19일 새벽 4시, ‘참새섬멸총지휘부’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온갖 구호와 표어가 적힌 깃발들이 솟아올랐다. 노동자, 농민, 학생, 군인, 당 간부 등 남녀노소 없이 붉은 깃발들 아래에 독극물이 든 과자를 쌓아놓았다.

그들은 장대, 빗자루, 몽둥이, 봉걸레, 회초리 들을 들었으며, 물통과 세숫대야들을 두들겨 댔고 꽹과리를 부서져라 울렸다. 얼마 되지 않아 참새는 거의 소멸되었다. 1958년 한 해에만 2억 1.000만 마리의 참새가 소탕되었다. 하루 6.412마리를 포살한 사람이 영웅으로 각광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났다. 이듬해 봄부터 전국의 논밭에 엄청난 해충이 출현했으며 도시에서도 골목과 가로수마다 잡충들이 들끓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중국 공산당은 더 이상 참새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대신 참새 자리에 바퀴벌레를 가져다 놓았다.

인간과 참새의 전쟁, 이름 하여 ‘인작대전(人雀大戰)’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층은 청소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10년 후 문화대혁명 때 대부분 완장을 차게 된다.

흔히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과 함께 마오쩌둥이 범한 ‘2대 과오’로 인식된다. 하지만 대약진운동은 마오의 실험정신이 빚어낸 정책적 착오였으므로 여기에 도덕적 비판까지 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과정은 한 마디로 말해 참혹했다. 문화대혁명에서는 무분별한 폭력성과 비인간성이 적나라하게 노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류 역사상 마오쩌둥만 한 걸출한 혁명·정치가를 알지 못한다. 인류 역사상 어느 누구도 ‘대장정 - 인민혁명 -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과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지도자는 없다.

“군주 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잊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마키아벨리, 『군주론』)

마키아벨리(1469~1527)가 ‘한오백년’을 더 살았더라면 그는 마오쩌둥을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꼽는 데 한시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키의 말대로 마오는 귀족을 탄압해야 인민의 지지를 얻어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 마오는 인민을 탄압한 적은 없다. 마오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어떤 참혹한 결과가 빚어질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한 혁명을 확신을 가지고 진행시켰다. 마치 참새 소탕전처럼 말이다.

“수천 년 간 우리 양식을 수탈한 (참새의) 죄악, 이제야 관계를 청산할 때가 왔다.”

영국,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 침략 덕분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강대국이 되었다는 점에서 미·영과는 크게 다르다. 그리고 이 중심에 마오쩌둥이 있었다. 마오는 제국주의 열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본주의와 모양주의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화대혁명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6.25 전쟁에서의 스탈린과 마오(2)

“김일성의 용감한 모험은 실패했다. 남한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고 군사력도 우세하다고 큰소리쳤다. 나는 그의 말만 믿고 남침에 동의했다. 미군의 상륙작전으로 현재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북한에서 병력을 철수한다고 이미 발표해 버렸다. 전쟁터에서 미군과 충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공군력을 동원해 엄호하겠다.”(스탈린)

“많은 동지들이 출병을 반대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인민과 당의 동지들은 우리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다. 조선은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들이대도 바뀔 수 없는 혈맹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대포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대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수류탄으로 맞서자. 우리가 모른 체하면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길로 미국이 들어온다.”(마오쩌둥)

『중국인 이야기·2』(455쪽)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중국군 파병과 관련되는 내용이다. 2008년 노무현은 10·4선언 기념식 연설에서, “6·25는 남침이었고 한국전쟁은 ‘내전’이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것은 6·25와 한국전쟁을 구별해서 파악한 것이다. 노무현이 말한 ‘한국전쟁 내전론’은 진보학계에서 취하고 있는 유력한 관점 중 하나이다. 그리고 ‘6·25 남침설’은 이제는 보수건 진보건 부정할 수 없는 정설로 굳어졌다.

많은 한국인들은 김일성의 남침을 ‘죄악시’한다. 그런 나머지 김일성을 ‘있는 그대로’ 말하기조차 꺼려한다. 꺼려하기 때문에 잘 알려 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에 대해 거의 모르는 채로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종종 김일성과 박정희의 동상 사진을 나란히 올리면서 두 사람을 거의 동질로 취급하는 포스팅을 대하게 된다. 정말 두 사람은 동질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관점이 제시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역사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6·25 남침’을 비난하려면 최소한도 왜 그런 일이 빚어졌는지 전후의 인과적 팩트는 알고서 해야 하지 않을까? 김일성이건 이승만이건 폭력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김일성은 강했고 이승만은 강한 척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38선에서 무수한 도발을 감행했다. 동시에 단지 반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대량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전쟁은 이럴 때에 일어나는 법이다. 약한 국가가 강한 국가를 향해 허세와 폭력만을 일삼을 때, 약한 국가는 어김없이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949년 4월, 마오의 인민해방군이 장제스의 국민연합군을 남으로 밀어내면서 양자강을 건너는 순간은 중국 인민혁명의 클라이맥스였다. 참고로 중국 인민해방군은 원래 홍군으로 불리다가 1937년 2차 국공합작(1차 국공합작은 1924년~1927년) 이후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분할, 개편된다. 이때 동북에서는 중국과 조선 연합군의 성격을 띤 동국항일연군이 주력군이었다. 지금 중국 군대의 정식 명칭인 인민해방군은 1947년에 채택된 것이다.

마오의 인민해방군이 양자강을 건너려 하자 뜻밖에도 스탈린이 제동을 걸어왔다. 스탈린은 미국과 국민군과 인민해방군 3자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미국 편을 들었다. 결국 스탈린은 중국을 분단시키려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이때 마오는 무서운 분노를 표출했다.

“아아. 스탈린, 이놈이 양자강을 조선의 38선인 줄 아는구나.”

마오의 인민해방군은 너비 500km의 도강전선을 형성하여 파죽지세로 양자강을 건넜고, 1949년 4월 23일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고, 5월 27일에는 대륙의 최대 도시 상하이까지 손에 넣었으며,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에서 하늘을 오성홍기로 물들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었다.

“중국 오성홍기의 별들에는 조선인의 피가 배어 있다.”

이것은 27년 동안 중국 총리직(외교부장 겸직)을 견지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남긴 말이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거나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조선인 군대는 중국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위기마다, 고비마다 중국군을 결정적으로 도왔다. 나는 만약 조선인의 가열 찬 지원이 없었더라면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좌절되었거나 상당 기간 늦추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김일성은 중국 국공내전의 연장선으로 ‘조국통일전쟁’을 수행한 것이었으며,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남침’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말대로 김일성은 실패했다. 김일성은 실패한 이유로 미군의 개입을 첫째로 들었다.

그러나 마오는 다른 이유를 들었다. 마오는 미군의 개입을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1950년 10월 펑더화이의 지휘로 압록강을 넘어온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국 폭격기의 위력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것은 일찍이 대장정에서도 항일전에도 국공내전에서도 본 적이 없는 위력이었다. 마오의 아들 마오안닝이 미군기 B-26의 네이팜탄에 희생된 것은 압록강을 건너온 지 불과 34일 만의 일이었다.

공군력은 공군력으로만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군의 파병을 부추기면서 했던 약속인 공군력 지원을 스스로 식언으로 만듦으로써 마오의 뒤통수를 쳤다.

“아, 스탈린... 이 자가 또...” 북의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6·25 사흘 만인 6월 28일이었다. 김일성이 ‘조국통일’의 무지개를 그리고 있을 때, 북경의 마오는 비서 스저에게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었다. 이때까지 ‘김일성은 대단히 용감한 지도자’라고 칭찬만 해오던 마오가,
“김일성은 전략과 책략이 틀려먹었다. 성질이 급하다 보니 출병 시기도 잘못 잡았다. 기반이 없는 남쪽으로 더 내려갈까 봐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인천 쪽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서쪽으로 상륙하면 조선군은 허리가 잘린다. 그러면 아주 위험해진다.”

쉬었다가 공격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마오의 뜻이 전달되었지만 김일성은 듣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휘와 관련된다고 본다. 스탈린이 노렸던 것은 중국을 미국과의 전쟁에 몰아넣는 일이었다. 이것을 가리켜 마오평전 『새로운 황제들』의 저자 미국인 솔즈베리는 ‘삼중의 속임수’였다고 분석했다.

소련이 붕괴되자 다수의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패배’로 규정하면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웃기는 일 아닌가?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여전히 제국주의 국가였을 뿐이다. 러일전쟁 때 겉으로는 전쟁하는 척하면서 이면에서 미국과 야합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독식하도록 협조한 것은 러시아였다.

6·25 직후 소련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함으로써 미국 참전에 명분을 실어 주었다. 역사를 모르는 교조 좌파는 소련을 과대평가한다. 나는 이것을 강자 선호의 모양주의와 관련된다고 본다.


“왕파단!” 마오는 왜 스탈린에게 개겼나(3)

“지금 내게 주어진 임무는 세 가지밖에 없다. 밥 먹고 잠자고 똥오줌 내보내는 일이다.”
마오쩌둥은 “왕파단!”이라고 내뱉으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왕파단(王八蛋)은 중국인들의 욕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것이다. 마오는 면전은 아니었지만 이 욕을 스탈린을 향해 날린 것이었다. 이것은 ‘자라 좆만 한 쉑히’라는 뜻이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마자 마오가 한 일은 소련 방문이었다. 마오가 소련 행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은 1949년 12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12월 16일이었다. 이로부터 닷새 후인 12월 21일은 스탈린의 70회 생일날이었다. 당시 마오의 나이는 56세였으니 스탈린보다 14세 연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야로슬라프역에서 내린 마오의 안색은 잠시 굳어버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스탈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1권) ‘마오쩌둥식 중·소외교’ 장(章)에는 마오와 스탈린의 갈등이 13쪽에 걸쳐 소개되고 있다. 미국인 헤리슨 솔즈베리가 쓴 『새로운 황제들』에는 이 두 지도자의 갈등이 훨씬 더 자세히 논의되고 있다.(48쪽 분량)

이 두 저작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지도자의 갈등이 대단히 첨예했었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두 지도자의 갈등 양상과 결과가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역사적 안목을 가지게 해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찌 보아 ‘약자 대 강자’의 갈등이었고 ‘민족주의 대 공산주의’의 갈등이었다.

1949년 마오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될 시점, 스탈린의 마음은 마오보다는 장제스에게 가 있었다. 스탈린은 미국을 두려워했다. 명색이 공산주의의 최고 지도자라는 스탈린이 미국을 중국보다 더 선호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나는 이것을 이데올로기 이전에 인간성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아무튼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장에 소련 대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스탈린이 이전의 얄타회담과 중소우호협정(장제스와 스탈린이 맺은)에 얽매였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두 협정문에 마오의 중국은 아예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저간의 사정에는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고 진단한다. 나는 여기에 마오에 대한 스탈린의 ‘견제’가 있었으며, 이 근원에는 마오에 대한 스탈린의 ‘콤플렉스’가 작동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견제란 약자가 강자에게 하는 법은 없다. 견제는 강자가 약자에게 행한다. 다음으로 콤플렉스 역시 진정한 강자는 갖지 않는다. 겉으로는 강자인데 속으로 무언가 약한 편이 콤플렉스를 품는 법이다. 분명히 1949년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마오보다 단연 강자였다.
마오와 스탈린은 둘 다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분노야말로 매력 있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마오는 개인의 분노를 조국과 인민이라는 공적인 단계로 승화시켜 이용했고, 스탈린은 개인의 분노를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는가 한다.

스탈린은 1926년 이래 세 번씩이나 마오를 모욕했으며, 세 번씩이나 마오를 위하는 척하다가 뒤통수를 쳤다. 스탈린은 마오를 공산당에서 출당시켰고, 시안사건 때에도 장학량에게 장제스를 빨리 풀어주라고 압력을 넣었다. 스탈린이 마오에게 결정적인 최후의 뒤통수를 친 것은 6.25전쟁 때였다. 그러나 앞질러 말하자면 최후의 승자는 마오였다.

다음은 『마지막 황제들』의 저자 솔즈베리의 말이다.

“이것은 삼중의 속임수였다... 분명하고도 명백한 것은 마오가 스탈린의 유혹적인 요구를 받았고, 그것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이다.”(178, 179쪽)

마오가 소련을 방문하여 머무른 기간은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마오가 귀국한 것이 1950년 2월 17일이었으니 그는 무려 두 달 정도나 소련에 머무른 것이었다. 국가원수가 타국을 방문하여 두 달씩이나 머무르다니?

이 기간의 대부분 마오가 한 것은 ‘그저 개기는 일’뿐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마오는 소련 방문 기간의 대부분을 그저 ‘밥 먹고 잠자고 똥오줌 내보내는 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소련 행의 뜻을 다 이루고 중국에 돌아갔다. 그 중 핵심은 새로운 중소우호조약의 체결이었다.


“제국주의자가 처음 중국 땅을 밟다”(4)

“나는 미 제국주의자 중에서 맨 처음 중국 땅을 밟았다."

이것은 1971년 여름, 미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베이징 난웬(南苑) 비행장에 내리면서 한 말이다. 키신저의 이 말은 참 여러 가지 것을 함의한다. 자기가 제국주의자라는 말 같기도 하고 제국주의자가 아니라는 반어처럼도 들린다. 중국에 미안함을 표시하는 말 같기도 하고 오만함을 드러내는 말 같기도 하다. 이 말이 퍽 괜찮아 보였는지 이듬해 봄 중국을 최초 방문한 미 대통령 리처드 닉슨도 북경 칭화대에서, “내가 바로 미 제국주의자 닉슨”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1년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진 이래 공산 중국을 단 한 번도 나라 대우는커녕 정권 취급도 하지 않았던 미국이 어째서 중국에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는지, 그리고 시종일관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저주해오던 중국은 왜 미국의 악수 제의를 선뜻 받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최소한 20세기와 21세기 두 세기에 걸친 동서 역사의 핵심을 간파하는 일과 직결된다.

미국과 중국의 화해는 미국 측으로서는 ‘대 베트남전쟁’, 중국 측으로서는 ‘소련과의 반목’ 이라는 현안 난제와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갖는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던 여론을 오히려 적극적인 평화지향정책으로 반전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고, 중국은 가까이 있는 소련으로부터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멀리 있는 미국을 끌어들여 이용한 것이었다.

중미정상화담, 즉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의 만남은 1972년 2월에 이루어졌다. 아래 글은 마오와 닉슨이 두 번째 만났을 때의 정황이다. 당시 마오의 건강은 최악의 상태였다고 한다.
- 평생 논쟁을 즐긴 마오쩌둥은 이날도 수십 년 간 적대시하던 미국의 전직 대통령과 논쟁을 벌였다. 헤어질 무렵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손에 힘이 없어 보였다. 건배 제의를 눈치 챈 닉슨도 찻잔을 높이 들었다. 마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다.

“우리는 수십 년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원수처럼 지냈다. 원수 진 집안이 아니면 머리 맞대고 의논할 일도 없다. 원래 싸우다 지치면 친구가 되는 법이다. 서로를 위해 건배하자. 이제 나는 술을 못 마신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술이 없지만 물은 있다. 물로 술을 대신하자.”

닉슨과 수행원들은 마오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 닉슨도 마오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며 화답했다.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 등산하듯이 한 발 한 발 기어오르면 된다.”
- 이상 『중국인 이야기』 지문 인용

참고로 1972년 중미정상회담의 대화록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2012년 발간된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On China)』를 보면 이때의 대화가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다. 아마 김명호 교수의 글은 헨리 키신저의 책을 참고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앞에 있듯이 헨리 키신저가 중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71년 7월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는 반전 여론이 고조되어 있었다. 이미 후보 시절 베트남 철수를 암시하는 발언을 한 바 있는 닉슨은 1969년 대아시아 외교노선인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놓은 상태였다.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나는 이토록 ‘뻥’과 미사여구로만 점철된 외교정책문서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만약 이 독트린대로만 실행되었다면 지금 북미관계나 남북관계는 대폭 개선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는 이미 통일을 성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닉슨 독트린 5개 중에서 실천된 항목은 단 하나도 없다. 이것은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것도 작은 이유가 되겠지만 우리는 여기에 보다 본질적인 원인이 개재해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방금 나는 닉슨독트린에서 실행된 항목은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을 수정하고자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닉슨독트린은 실행되었는데 단지 선별적으로 실행되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최소한 중국와 베트남에는 이 닉슨독트린이 적용되고 있다. 반면에 한국과 일본에는 이 독트린이 반대로 적용되고 있다. 한편 미국과 조선(북)은 이 독트린을 놓고 대립과 모색을 반복하고 있다.

헨리 키신저와 리처드 닉슨은 자기들 말대로 제국주의자였는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트럼프가 제국주의자라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자란 무엇인가? 제국주의자란 강하고 자주적인 상대와는 공존을 모색하고 그 반대인 상대에게는 제국으로 군림하는 ‘기회주의적인 강자’를 뜻하는 말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c_booking&uid=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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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민폐  2017년11월9일 20시35분    
우리 이니 마음대로 하소서

더이상 무슨 말이필요할까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법안통과로 완결 되어야할 시스템 손들어 국회 180석에 택도 미치지못하는
환경 이해해야하고 2년후 총선까지 기다려야한다

갑수님 경허해 마지않은 중국 기회주의 제국 미국에 우리 1년예산 무려 70%인 230조
일거에 미국제품 구매 , 자금성 통째로 비워 환대 중국의상징 천안문 사열을 시킨다
왜그럴까
분명한것은 중국이 미국상대 돈 많이버니 이런 정책 펴는것

결론은
사상,이념보다 앞서는것은
먹고사는것 나아가 어떻게 먹고사는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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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능대한 검사들
                                                 
누가 글로벌 인재인가?
                                                 
유권자, 즉 국민이 ‘단일화’를 ...
                                                 
홍강철( 북한 생활에 정통한 전문...
                                                 
“근혜를 보면 그 아부지를 생각한...
                                                 
[오영수 시] 임
120850 문재인 정부의 위기가 다가온다
51777 이명박, 당신이 갈 곳은 감옥이다
44240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 “퇴...
39762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들으시오!
38512 그때는 쐈고 이번에는 못 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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