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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에 나타난 명성교회, ‘나사렛 예수’는 없었다
[칼럼] 수백억 비자금 수천억 부동산 등 돈과 권세는 있어도 예수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임두만 | 2018-10-11 10:24:1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PD수첩에 나타난 명성교회, ‘나사렛 예수’는 없었다
[칼럼] 수백억 비자금 수천억 부동산 등 돈과 권세는 있어도 예수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MBC PD수첩은 9일 10만 교인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인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담임목사 김하나, 원로목사 김삼환)의 부자세습에 얽힌 비자금과 부동산 비밀을 파헤쳤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교회도 인정하고 있는 800억 원 대 비자금(교회는 적법한 이월금이라고 함)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1,600억 원 대 부동산이 전국에 산재해 있음도 알렸다.

▲MBC PD수첩 예고편 홍보화면 갈무리 ©임두만

물론 교회는 이 부동산도 교회 명의로 각종 사업에 쓰기 위해 사 둔 것이므로 개인이 착복한 것은 아니라는 해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PD수첩의 취재보도가 아니었다면 이런 현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세간은 충격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방송 후 하루가 지난 10일에도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명성교회는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고 반발했다. 이날 방송에서 명성교회와 김삼환 김하나 목사가 해명하기 어려운 여러 문제를 던졌으므로 이의 방어벽으로 일단은 사법당국 고소라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 김 목사 부자를 따르는 교인들에게 목사의 치부가 사실이 아니라는 각인을 위해서 법적 대응이 필요하며 사법적 대응이란 결국 시간과 돈 그리고 인맥 싸움이므로 그 부분에서 자신이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교회와 김 목사 부자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앞서 9일 MBC PD수첩은 1. 명성교회의 연간 헌금이 400억 원에 달한다. 2. 이 헌금 중 약 40억~60억 원의 이월금이 매년 생긴다. 3. 이 이월금의 존재를 알고 관리했으며 재정 전반을 담당하던 박 모 장로가 지난 2014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 그가 죽음으로 이 이월금의 존재가 드러났으며 액수는 800억 원대다. 라는 4가지 팩트를 시청자들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방송은 이 돈을 비자금이라 칭하고 있다.

이 외 이날 방송은 또 김삼환 목사의 생일과 명절 등에 김 목사에게 수천만 원의 현금이 전달됐다. 이 돈은 교회 기관으로 설치된 각 남녀선교회 회비로 생성된 돈으로서 남선교회만 해도 127개에 달하며 이들 선교회가 연간 각각 20~30만 원씩 거출 충당했다는 점을 의혹으로 제기했다.

더 나아가 김삼환 목사의 해외 선교여행 때 교인들을 동원한 외화 밀반출 의혹이 있다. 즉 함께 선교여행을 떠난 교인들에게 미리 봉투를 하나씩 주고 현지에 도착하면 그 봉투를 수거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1인 1만 달러 이상 반출시 신고해야 하는 의무를 피하기 위한 꼼수였다. 그리고 이렇게 반출된 돈의 총액은 김삼환 목사와 재정 장로만 알 수 있다는 점도 익명의 증언자들 입을 빌려 의혹으로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명성교회가 공시지가 1천600억 원 상당, 전국에 약 24만제곱미터의 부동산 보유하고 있음도 알렸으며, 이중 김삼환 목사 개인 명의의 시가 40억 원 대 별장이 있음도 고발했다.

그리고 방송은 이 모든 의혹의 정점은 부자세습이라고 꼬집었다. 즉 이 같은 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므로 아들이 아닌 다는 목회자에게 후임자리를 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남긴 것이다.

▲아버지 김삼환 목사와 아들 김하나 목사의 세습 장면..PD수첩 화면 갈무리 ©임두만

이에 명성교회는 즉각 반발했다. 800억 원대 의혹의 돈에 대해서는 “비자금이 아닌 정당한 이월 적립금”이며, 보유 부동산에 대해서는 “교회수양관, 교역자 자녀 장학관, 지교회 부지 등”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는 “특정 개인 소유가 아닌 교회 소유임에도 이를 마치 대물림하는 재산으로 규정해 비난한 것은 심히 유감”이라고 민·형사상 법적 대응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10일 밝혔다.

명성교회는 특히 “종교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허위사실과 단순 흑백논리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를 함으로써 교회와 교인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반발했다.

이에 나는 명성교회측의 해명이 일견 타당성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날 방송에서 보여 준 대로 전국 부동산의 소유자는 김삼환도 김하나도 아닌 ‘대한예수교장로회 명성교회’였으므로 특정 개인 소유가 아닌 교회 소유임은 분명하다. 또 방송이 비자금으로 지칭한 800억 대 자금도 교회 이월금이라고 총회가 인정한 점도 사실로 보인다. 결국 10만 교인들에게 공개하지 않은 자금이지만 김삼환 등이 착복으로 빼돌린 돈은 아니란 그들의 해명 또한 궁색하지만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엄청난 재산을 타인에게 물려줄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세습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다. 이날 방송도 이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교계도 국민들도 이점을 비판하고 있다. 이에 이 같은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은 명성교회가 세습을 철회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나는 이날 방송을 보면서 명성교회와 김삼환 목사의 문제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교회와 교인들에게서 교회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진 점이 더 문제라고 본 것이다.

이날 방송을 통해서 나타난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나 교인들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들의 관계는 하나님과 김삼환 그리고 교인 순으로 나타났다.

간증한 교인들은 모두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였다. 그 간증 안에 예수는 없었다.

더 나아가 김삼환 목사는 “하나님이 나에게 권세를 주셨다. 병원장도 유명한 의사도 못 고친 병을 내가 고치게 하고 그래서 대통령도 다 내 앞에 무릎을 끓렸다”고 자랑했다. 그의 자랑 안에도 예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직접 김삼환을 쓰고 있으므로 자신이 곧 하나님 대언자라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하반신 장애인에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사도행전 3:68 중략) 여기서 성경은 베드로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다. 베드로는 그 하반신 장애인을 고치고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셨다고 말하지 않았다.

명성교회, PD수첩의 방송만으로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어제 방송에서 나타난 교인들의 간증이나 김삼환 목사의 발언 등은 지금 교회가 갖고 있는 수백억 비자금이나 수천억 부동산보다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목사의 우상화는 곧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교회 곳곳에 있는 김삼환 등신대와 그 등신대를 목사로 알고 사진을 찍는 것이 즐거운 교회라면 이미 반 쯤 이단의 길로 들어섰다고 해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교인 10만 세계 최대 장로교회라는 명성교회가 선교 100년 한국 기독교의 최대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c_flower911&uid=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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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냉담자  2018년10월12일 03시26분    
두만이 삼춘...교회 안다녀 봤지? 삼위일체가 뭔지 모르지???

삼위일체는 간단히 말해 하느님, 예수님, 성령이 곧 하나라는거야

그러니까 명성교회 교인들이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한건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는 뜻과 동일하게 쓰이는 거지...

두만이 삼춘 말처럼 비자금, 교회목사 세습 등의 문제보다 더큰 문제가 있다는 것에 동감은 하는데 그게 예수님이 없는게 문제가 아니라, 예수팔아 부와 권력을 얻고 제멋대로 휘두르고 나아가 지가 예수인냥 행세함으로서 자신을 우상화 했다는게 더 큰 문제인거야..

이건 십계명의 제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를 정면으로 어긴거지.

그리고 종교인이 아닌이상 이단이됬던 삼단이 됬던...믿지않는 비종교인이 보기엔 뭐..거기서 거기지..이단드립은 좀..ㅎㅎ
(9) (-5)
 [2/2]   HAKSONG SIMON P  2018년10월13일 04시10분    
제 부친 박림산의 이야기입니다.
제부친은 항일전사였습니다. 보훈처에 1993년 독립유공자로 등록을 시도 하였으나 거절 당하였습니다 . 그 이유인 즉 부친 께서는 최석천 부하임이 서류내용에 기록되어 있어서 이 기록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라고 거절한 이유 였습니다. 이 때 접수를 시도한 사람은 그의 장자 박월림(생존, 1922년생)이 입니다. 그 서류는 1938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한 항일군을 취조한 조서입니다. 그 항일 전사가 저의 부친 박림산 입니다. 일본군들이 그를 열심히 치료하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였습니다. 사살하지않은 이유는 부친께서 아주 주요한 정보담당 책임자였습니다. 이 서류 이외의 인터네 정보(지금도 누구나 접근 가능)에서도 그 당시 전투 상황을 기술한 자료에서도 박림산을 생포한 것을 대단한 성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서류의 내요을 간략하게 기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전투는 호림현 위치 삼인반의 한 밀림속에서 몹씨 추운 겨울에 발생 하였습니다. 지금 까지 발굴한 두가지 자료 (중국 과 일본)가 성명, 위치, 날짜 정보가 모두 일치합니다. 그는 호림헌병대 본부에 끌려가서 헌병대장의 취조을 받게되었습니다. 헌병대장의 문초에 대답한 부친의 진술을 일본군이 기록한 취조 서류입니다. 물론 일본글로 되어있습니다. 이 서류는 기적적으로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 공산당 당사 연구실에 보관된 것을 찾았습니다. 그 서류의 앞장에 보면 극비서류로 일본외무성으로 보내는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장자 박월림은 1995년에 이 서류를 보훈처에 등록을 재차 요청하여 접수가 되었습니다. 접수한지 5년이 지난 뒤 2000년도 에 접수된 안건에 대한 회신을 받았습니다. 부결입니다. 부결의 이유는 당사자가 신흥군관학교에 다닐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믿을 수없다는 내용이 었습니다.
보훈처의 심사자는 내용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습니다. 학력에 관한 질의에 부친께서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현지 신흥학교를 졸업한 후에 동흥중학교 속성과를 졸업하였다 라고 진술하고 기록자는 그렇게 받아 적었습니다. 분명히 현지 신흥학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심사자는 자세히 읽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더 검토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왜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10여년이 지난후에 새로운 담당자가 그제서야 가족과의 관계 고향에관한 것을 새롭로이 접수된 서류처럼 신청자인 장자 박월림에게 질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실은 저의 조부님께서는 천도교을 이끄는 자도자였습니다. 조부님께서는 을사보호조약 으로 나라를 빼았긴 것을 올바른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개탄하고 인재들을 기르기 위하여 고향을 등지고 간도의 걸만골( 당시의 옛지명: 판개틀)에 학교를 세우고 젊은 독립투사를 양성하였습니다. 그때 조부님께서 세우신 학교의 이름이 신흥학교이 었고 천도교 종리원과 함께 운영하였습니다. 그래서 부친께서는 현지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라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런데 검토자가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유공자의 상황 진실여부를 놓고 검토해야하나 신청자와 유공자를 혼돈하여 바꾸어 검토 하였 습니다. 신청하여 접수된 서류가 5년이 지난 후에 신청자에게 보내 공문서가 이렇게 부실할 수가 있을까요? 보훈처는 심사를 권위 있는 전문가 교수들이 한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이렇한 실수는 전무가 가 한 실수라고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은 독립유공자 선별이 얼마나 가볍게 다루어지는 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신청서류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자 박월림은 강력히 항의 하고 심사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답도 없이 접견하던 직원은 어떠한 후속 조치나 인사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후 계속하여 그 당시 접수자와의 대화를 시도 하였으나 항상 접견하던 직원은 자리에 잠깐 비우고 없다, 담당자가 출장중이다 라고 하여 다시 접견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어느날 저와 맏 형님이신 박월림과 보훈처를 방문하였습니다. 한직원이 나온 그 분께 심사 부결 통지서를 보이면서 부결서류의 내용이 잘 못된 처사라고 항의하고 재심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훈처 그 직원(잘생긴 분)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오타요, 오타 ,오타다” 라고 외치고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접수하는 도중에 담당자들이 이름도 밝힌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훈처와의 접견이 어려워지자. 맏형께서는 보훈처에 이름을 알고 있는 분이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접수담당자가 아니고 제 조부님(애국장 868호1991~1993? )을 유공자 신청당시 알게된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의가 아닌것을 무릅쓰고, 이 사실을 전화로 알리면서 재심을 신청하려는데 조언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서류가 이미 보훈처에 등록이 되어 있으니 재심보다 소급처리가 되니 좀 기다리면 연락이 있을 겁니다.” 라고 조언을 주셨습니다. 장자 박월림은 신발이 닳도록 보훈처에 다녔으나 별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날 반갑게도 접수된 내용에 더 필요한 서류를 보완해달라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지대로 신청 대상인의 평생 이력서를 작성하여 회신하였습니다.
그 이력서 내용중에 사건 배경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부친께서 체포된 바로 후에 일본헌병들은 모친를 찾아 사실을 확인하고 온가족(아들3형제, 아내)을 인질로 삼았습니다. 모친께서는 그를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여 전가족이 인질이 되어 호림헌병대 감옥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에 두아들은 그당시 제일유명한 일본학교(광명중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풀려나고 모친과 작은 아들이 감옥에 남게 되었습니다. 부친의 전향을 위한 일본군의 잔악한 수단 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친께서는 부친이 6년간 감옥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친이 집을 떠난지 14년간 아무소식도 없어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다가 감옥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해방되기 직전에 일본헌병대에서 가석방이란 이름으로 풀려나 고향 걸만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이런 사실들을 평생 이력서에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후에 보훈처에서는 평 생이력서의 내용에서 해방후 생존하였다면 해방후의 활동을 상세히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해방후의 활동사실 기록이 없으면 부친의 항일군으로서 활동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연락 내용 이었습니다. 해방후의 부친이 캄챠카로 떠난 후에 아무소식도 없다고 평생이력서에 기록 하였으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해방직 후 간도 지역의 상황을 말씀 드리자면 완전한 난장판 이었습니다. 고향동네도 예외가 아니 었습니다. 쏘련군(해방군)이 점령하면서 그간 억눌려 살던 무식한 사람들이 실권을 잡고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살인이 동네마다 시작되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해방전에 잘살던 사람들, 토지를 가진 사람들, 교육을 많이 받은지식인들, 공산활동하다가 공산당을 배반한 사람들을 인민재판을 열어 동네 사람들을 모여 놓고 올소하면 장작개비로 두들겨 개잡듯이 사람을 죽이는 무법천지 난장판을 만들었습니다. 저희 집안도 인민재판에 걸려서 청산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인민재판 대상에 큰 걸림돌은 지식인 집안이고, 공산당을 배반하고 살아 돌아온 부친을 지목하였습니다. 현명한 모친은 가족을 살리려고 모여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광명중학교에 삼형제를 입학시켜 장한 어머니 상을 받은 것이 무슨 죄가 되는가! 이 마을에서 남편이 소식도 떠난후 14년간 혼자서 봄철이면 생선장사 여름에는 조밭에서 기음 매주고, 가을에는 조이 거두는 일을하며, 겨울에는 산에서 요디(소나무 뿌리 관솔) 를 찍어 팔면서 제일 가난하게 살아온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손바닥만한 밭쪼기도 없이 가난한 우리가 왜 청산을 맞아야 하는가를 역설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과거의 집안 사정을 일깨워 감동시켰습니다. 또한 그 때 실권을 잡고 판결하는 사람이 부친의 신흥학교 동문이 여서 박림산이 일본을 물리치고 우리의 주권을 다시 잦으려고 일생을 항일전사로 살았는데 생명이 붙은 게 무슨 잘못인가를 역설하여 죽음은 면해 주었으나, 우리가족들은 추방대상이 되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부친께서는 자신이 믿고 활동하던 공산당이 위험한 존재임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어쩔수 없이 추방명령를 받고 고향을 등지고 북조선으로 피신 하게 되었습니다. 부친은 북조선도 안전하지 못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본인의 활동이 알려지면 공산당들이 이 가족들에게 무슨짓을 할지 염려되어 당시 죽음의 섬이나 다름없는 캄챠카로 가기로 가족들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는 구실은 생사를 알수없는 동생(저의 숙부)을 찾아보겠다고 장자를 설득하였습니다. 숙부님은 저의 부친과 함께 강력한 항일 전사였습니다. 소식을 알수없는 지가 거의 20년이 넘는 지난 일을 부친께서는 너의 삼촌이 쏘련에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꼭 찾아보겠다고 장자를 설득하였던 것을 뒤늦게 장자는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캄챠카로 가는 어부의 모집에 합류하여 가족들과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평생이력서에 기록하였으나 보훈처에서는 사망한 기록이나 묘소에 대한 정보라도 첨부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저희들 자식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행방불명을 분명히 밝혔는 데도 부당한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 다시 해방전의 항일활동을 왜 인정하지 못하는 지를 항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훈처는 박림산이 어느조직을 위하여 활동하였는지 의문이라고 저의 부친은 항일 연군 7 군소속으로 활동한 사실을 들어 과연 대한민국을 위한 활동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였습니다. 그후에 또다시 조서의 내용에서 뒤늦게 고향명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면서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이 호적에는 되어 있는데 조서에는 함경북도 온성군 충영면으로 되어 있으니 의심스럽고 그래서 박림산의 후손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회신 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자료를 찾으니 온성군지 에서 그당시 행정구역에 관한 정보를 찾아 충영면이라는 행정구역은 없고 영충면의 잘못되 기록 이라고 주장하고 그 책의 기술을 복사하여 밝혀 주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어 밖에 모르는 기록자가 지명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이기에 실수한 잘못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후에 또 다시 조서의 기록과 호적과 다르다고 보훈처에서 해명을 요청 하였습니다. 지적한 사실이 체포당시 자식이 세명인데 지금호적에는 왜 5형제 로되어 있는가? 또한 세사람의 이름이 장자는 박일남이고 둘째는 박창송, 셋재는 박진송인데 호적에는 장자 박월림이고 둘째는 박소인이고 넷째는 박인송, 마지막 박학송으로 박림산의 자손이라고 보기어렵다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박월림과 박일남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줄 자료를 예전에 일본 유학시 다니던 군마대학 (그당시 교명은 기리후 공전) 학장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 학장은 과거기록을 검토하고 박일남의 생존하는 일본 동창생들의 진술로 사실임을 인정하고 주한일본영사관을 통하여 동일인임 확인서를 박월림에게 보냈습니다. 그 서류를 복사하여 보여주고 아래 두형제는 일본이름으로 개명된 졸업증명서복사본과 함께 첨부하였습니다. 이 졸업증명서들은 모친께서 얼마니 자식들의 교육을 중요시 하였는지를 알수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난리통에도 자식들의 학업증명서를 보물처럼 보관 하여 흥남철수의 난리에서도 이들이 손실 되지않고 거제도 까지 무사히 보관되어 모친사망(1953년 창경호여객선침몰)후에 형제들은 유품으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박창송은 625 사변 초 김일성대학에 재학중이 었으나, 졸업직후 그가 기계공학을 수학한 이유로 탱크 부대 수리 책무를 맏아 인민군에 참전하여 남한의 어느 산골(지명확인 불가) 개울창에 탱크를 처밖고 투항하였습니다. 그후 반공포로 석방 하여 이름을 박소인으로 호적에 등록하게 된 사실을 첨부하였습니다. 셋째는 625 직전에 함흥의과 대학에 재학중이었으나 해방군 환영모임에서 해방군은 쏘련군이 아니고 미국군이다고 발설하여 생사의 갈림길인 자아비판대상을 바로 앞두고 모친에게만 태극기 회날리는 날에 돌아오겠다고 서신을 남기고 연천을 통하여 탈출하여 박진송이름을 박훈으로 고치게 된 사실을 알렸습니다. 모든 정보는 생년월일이 모두 어렸을 때의 정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작은 형의 이름이 문제였습니다만 취조서류 조서에는 있지도 않은 자식이 호적에있는 것은 설명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조서속의 형제가 창송, 진송으로 부르고 뒤늦게 출생한 아들의 이름이 송자돌림이 된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부친께서는 주위의 배신자들이 일본의 압재비가 되는것을 개탄하면서 내 자식들은 변치않은 소나무 처럼 되라고 끝자를 송자 돌림으로 만들고 족보에 기록된 용자 돌림을 따르지 않았담니다. 넷째 박인송과 본인 박학송은 모친이 인질로 잡혀서 6년간 감옥에 속에 있던 시기와 출생년도 시기와 일치할 뿐만 아니라 셋째와의 출생년도가 14년 간 차이로 탄생한 것을 보면 알 수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본인 박학송은 모친의 나이가 42세 때에 출산하셨고 그때는 가장 어려운 시기었담니다. 모친께서는 일본군 마구깐에서 두병을 주어 먹으면서 저를 살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부친이 항일전사이고 독립투사임을 주장하는 귀한 자료들을 보훈처에서는 무참하고도 소홀하게 다루는 사실을 알립니다. 이 어려운과정을 격으면서 22년이나 지나도 아직 까지 아무런 조취도 없이 내버린 보훈처의 태도에 대한 독립항일전사 후손들의 헛된 노력을 적었습니다.
두번 째 자료에 대하여 아래에 간단히 기술하려고 합니다.
일본 인터넷에서 박림산과의 전투 기록을 자료를 찾게되어 다시 그 정보를 보훈처에 알렸습니다.이 정보는 흑룡강성 당사 연구실 자료와 위치, 날자, 부친의 이름 모두 일치합니다. 그 정보에는 전투 장소, 적군들의 이름(공비로 표현), 일본군 참가지 이름 지위, 인솔지휘자 이름 등 그리고 전투에서 취득한 것과 자신들의 손실을 기술 하고 있습니다. 그 중 큰 소득을 중요한 정보책임자 박림산을 생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주요 인물인 박림산 체포에 공을 새웠지만 군견 “요치”의 사망에 대하여 제국군들이 애도하며 장사지내고 화장하여 본국으로 이송하여고 묘지에 안장하고 그를 기리는 정보입니다. 지금도 누구나 다 볼 수 있습니다
보훈처에 확실하고도 명백한 정보를 재공하였으나 22년 동안 방치한 것은 후손들이 모두 죽기를 기다리는 보훈처의 태도라고 보고있습니다.
(장자박월림: 96세, 4자 박인송: 76세,. 5자 박학송:75세)
긴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학송 올림 (Haksong Simon Park) 10/11/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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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
                                                 
천안함 ‘좌초’에 대하여 ④
                                                 
대한항공의 성장, ‘관피아’의 전...
                                                 
국토부 항공정책실 공무원 34.5%, ...
                                                 
KBS의 민주당 돈봉투 오보
                                                 
천안함의 진실을 지킨 사람들과 박...
                                                 
“1970년 이전 독립유공자만 조사...
                                                 
전성기
                                                 
[이정랑의 고전소통] 형벌독려(刑...
                                                 
유권자, 즉 국민이 ‘단일화’를 ...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기자회견...
                                                 
“근혜를 보면 그 아부지를 생각한...
                                                 
[오영수 시] 3.1절, 제헌절, 광복...
5161 천안함 ‘좌초’에 대하여 ①
4060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을 찾습...
3157 천안함 ‘1번 어뢰’ 에 감긴 철사...
2790 손석희 앵커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
2696 기자들이 비웃었던 문재인 대통령...
2030 친문계, 김진표 대표-전해철 사무...
2014 천안함 ‘좌초’에 대하여 ②
1965 친위쿠데타 의심됐던 소름 돋는 그...
1798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시킬 수도 ...
1651 천안함 ‘좌초’에 대하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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